2010.03.13 04:59
소유의 비좁은 골방 - 법정 스님 서울의 명동 성당에서 법정 스님을 초청해 카톨릭 신도들과 수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법문을 들었다. 명동 성당이 세워진 지 백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강연회였다. 불교 수행자가 그 설교단에 올라 법문을 한 것은 그때가 최초의 일이었다.그 자리에서 스님은 이렇게 말문을 여셨다. "방금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제 자신도 더러 수녀원에 가서 강론한 적은 있지만 이런 큰 성당에서 말하게 된 기회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저를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신 명동 성당측에 감사 말씀드리고, 성당이 축성된 지 올해가 백 돌 되는 해에 저와 같은 사람을 이런 자리에 서게 해주신 천주님의 뜻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 그러자 청중들 사이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자리에 있던 나 역시 잔잔한 감동이 느껴졌다. 두 종교의 만남이라는 거죽의 일이 아니더라도, 십자가 앞에 서 계신 스님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내가 알기로 스님은 그동안 어떤 거국적인 종교계의 기도회나 합동모임에도 참석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분은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런 형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내미실 분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스님은 기독교의 몇몇 분들과 친분이 두터우시다. 오랜 세월을 장익 주교님과 만나오면서 두 분 사이에 복장의 차이뿐 다른 차이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장안의 언론이 떠들썩했지만, 서울의 길상사 개원식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해 불상 앞에서 축사를 읽으신 것도 따라서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에 대한 회답으로 스님은 그 해 크리스마스에 성탄절 축하 메세지를 보내셨다. 스님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살아간 모습을 좋아하셔서 자주 언급하신다. 사막 교부의 일화들도 곧잘 인용하신다. 그런가 하면 랍비와 힌두교 시인들도 좋아하신다. 나를 만날 때마다 매번 크리슈나무티르의 '마지막 일기'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감동을 말씀하신다. 연륜 있는 한 수도자의 이러한 태도는 나 자신 뿐 아니라 수행하는 사람들,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큰 깨우침이라고 나는 믿는다. 네덜란드 출신의 명상화가 프레데릭 프랑크는 말한다. '진정한 예술은 예술이라는 것 너머에 있고, 진리는 종교라는 울타리 밖에 있으며, 사랑은 껴안는 행위 너머에 있다.' 불교 전통에 따라 누군가 삼배를 올리면 스님은 그렇게 불편해 하실수가 없다. 그 불편해 하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순수함이 드러난다. 그 순수함과 진실을 직시하는 눈빛은 종교에 오래 몸담은 사람일수록 가장 먼저 잃어버리기 쉬운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옛 선승들도 '배는 강을 건너라고 있는 것이고, 종교는 그것을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임을 가르쳤지 않은가. 명동 성당의 설교단에 서서 약간은 수줍어하는 말투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화를 예로 드는 스님을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한 사람의 참인간이 서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ㅡ 류시화
성 프란치스코의 말을 빌리자면 가난은 우리 자신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들어올리는 길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이웃과 나눠 가질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을 높이 들어올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마주친 삶의 경제적인 위기는 우리 자신을 떨어뜨리지 않고 우리 자신을 높이 들어올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가난과 겸손을 보다 온전하게 지키기 위해 형제들의 모든 집과 움막은 반드시 흙과 나무로 지어야 한다는 내용을 유언에 넣도록 당부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동서고금을 물을 것 없이 그 시대와 후세에까지 모범이 된 신앙인들은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믿음의 꽃을 피우고 그 열매를 맺었다. 불교 경전에도 보면 수도자는 먼저 가난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보리심이나 어떤 진리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이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그러나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주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 온갖 욕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온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욕망과 아집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외부에 가득 차 있는 우주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소유물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스스로 우주적인 생명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맑은 가난, 곧 청빈이다.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기본적인 조건이다. 예로부터 깨어있는 정신들은 늘 자신의 삶을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가꾸어 나갔다. 청빈의 덕을 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따뜻한 가슴을 지녀야 한다. 우리 둘레에 편리한 물건의 더미는 한없이 쌓여 있지만 그것들을 사용하면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일상적인 물건들을 사용하면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단추 하나만 눌러도 밥이 되고 냉장이 되고 세탁이 된다. 이렇게 편리한 연장을 쓰면서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행복을 느끼고 있는가. 그런 사실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가. 사람은 머리만 갖고는 제대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머리의 회전만을 중시하는 세상은 더없이 냉혹하고 차갑다. 이 사회는 머리만이 존재할 뿐 따뜻한 가슴이 끼어들 틈이 없다. 보라. 온갖 종류의 부정과 비리, 사기와 속임수, 그 밑바탕에는 간교와 머리가 작용하고 있다. 심장은 그런 데 관여하지 않는다. 가슴은 그런 일에 관계하지 않는다. 사람을 뽑는 대학에서 머리만 중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머리의 회전만을 중요시하는 사회는 문제를 안을 수밖에 없다. 믿음은 머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가슴에서 온다. 머리에서 오는 것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머리는 늘 따지고 의심한다. 그러나 가슴은 받아들인다. 열린 가슴으로 믿을 때 그 믿음은 진실한 것이고 또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의 신뢰와 성실성도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온다. 삶의 질이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따뜻한 가슴에 있다. 진정한 삶의 질을 누리려면 가슴이 따뜻해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마음써야 할 것은 만나는 이웃에게 좀더 친절해지는 것이다. 내가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났다면 그 사람을 통해서 내 안의 따뜻한 가슴이 전해져야 한다. 그래야 만나는 것이다. 따뜻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이야말로 모든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보다 더 친절하고 사랑한다면 우주는 그만큼 선한 기운으로 채워질 것이다. 우주는 한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고 옹졸하게 산다면 그만큼 비좁아지고 옹색해진다. 마음을 활짝 열고 누군가에게 친절하고 사랑한다면 그만큼자기 자신이 선한 기운으로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면 내 자신이 기뻐지고, 누군가를 언짢게 하거나 괴롭히면 내 자신이 괴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메아리이다. 마음의 뿌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청빈의 덕을 쌓이려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 환경학자들은 21세기까지 이 지구가 이대로 존속할 수 있을까 없을까를 염려하고 있다. 한정된 자원을 우리 시대에 와서 너무도 탐욕스럽게 고갈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전에 비해 얼마나 풍요롭게 살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안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궁핍한가. 이삼십 년 전 우리는 연탄 몇 장만 들여놓아도, 쌀 몇 되만 가지고도 행복할 수 있었다. 삶에 대해 고마워할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차지하고 살면서도 그러한 행복을 누릴 수가 없다. 그것은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가릴 줄 모르기 때문이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옛말에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우쳐 주고 있다.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은 밖으로 부자가 되는 일 못지 않게 인생의 중요한 몫이다. 인간은 안으로 충만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 잡념 없이 기도를 올릴 때 자연히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때는 삶의 고민 같은 것이 끼어 들지 않는다. 내 마음이 넉넉하고 충만하기 때문이다. 21세기남쪽 인도에 살았던 대승불교학자인 용수가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문맥으로 볼 때 아마도 그 친구가 부자였는데 도둑을 맞았던 것 같다. '그대가 항상 만족해 있다면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도둑 맞는다 할지라도 그대는 스스로 부자로 여기리라.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른다면 아무리 부자일지라도 그대는 그 돈과 재산의 노예일 뿐이다.' 만족할 줄 안다면 내면으로 풍성하기 때문에 설령 내 재산을 도둑 맞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부자로 여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만족할 줄 모르면 그 돈과 재산의 노예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모른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공통된 병이다. 그래서 늘 목이 마른 상태이다. 겉으로는 번쩍거리고 잘 사는 것 같아도 정신적으로는 초라하고 궁핍하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기 때문에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을 잃어 버렸다.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에 있다. 나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을 통해서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내 삶의 고마움을 느낄 때가 많다. 산길을 지나다가 무심히 피어 있는 한 송이 제비꽃 앞에서도 얼마든지 나는 행복할 수 있다. 그 꽃을 통해서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다. 또 다정한 친구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전화 한 통화를 통해서도 나는 행복해진다. 행복은 이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 데 있는 것이지 크고 많은 데 있지 않다.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욕망은 분수 밖의 바람이고, 필요는 생활의 기본 조건이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내가 흔히 드는 비유가 있다. 한때 나는 괴팍해서 글을 쓸 때 꼭 만년필을 고집한 적이 있었다. 만년필도 보통 만년필이 아니고 촉이 아주 가는 것만을 썼다. 그래야 내가 가진 투명한 감성을 그대로 표현할 것 같아서였다. 한번은 동경대학에 유학 중인 스님이 문구점에 가서 내가 좋아한다고 촉이 가는 만년필을 사준 적이 있다. 나는 아주 고맙게 여기고 그걸로 글을 많이 썼다. 그런데 파리에 갔더니 그곳에 똑같은 만년필이 잔뜩 있었다. 그래서 촉이 가는 만년필을 하나 더 사왔다. 그랬더니 그 날부터 내가 처음 가졌던 그 필기구에 대한 살뜰함과 고마움이 사라졌다. 나는 결국 나중에 산 것을 아는 스님에게 줘 버렸다. 그러자 비로소 처음의 그 소중한 감정이 회복되는 것이었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그 하나만을 가져야 한다. 물건에 집착하면 그 물건이 인간 존재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된다. 그것은 흔히 경험하는 일이다. 비싼 물건을 사다 놓고 좋아하다가 그것이 깨지거나 사라졌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면 큰일이 난 것처럼 소란을 피운다. 물건은 도구이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생활 도구이다. 생활 도구로 쓰지 않고 물건을 반닫이 위나 어디에 모셔 놓으면 그건 도구가 아니다.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서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청빈의 덕이다. 청빈의 덕을 쌓으려면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아야 한다. 내가 가끔 인터뷰할 때 '스님 소원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내 개인적인 소원은 보다 단순하고 보다 간소하게 사는 것이다. 나는 내가 사는 집의 부엌 벽에다 '보다 단순하고 보다 간소하게'라는 낙서를 해놓았다. 단순함과 간소함이 곧 본질적인 세계이다. 불필요한 것들을 다 덜어내고 꼭 있어야 할 것과 있어야 되는 것으로만 이루어진다면 어떤 결정체 같은 것, 그것이 단순과 간소이다. 꼭 있어야 되는 것으로만 이루어진, 복잡한 것을 다 소화하고 난 다음의 어떤 궁극적인 경지이다. 단순과 간소는 다른 말로 하면 침묵의 세계이다. 또한 텅 빈 공의 세계이다. 텅 빈 충만의 경지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이 이 단순과 간소에 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텅 비우려고는 하지 않는다. 텅 비워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텅 비어야 거기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 우리는 비울 줄을 모르고 가진 것에 집착한다. 텅 비어야 새것이 들어찬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거기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다 텅 비었을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이다. 텅 비어있을 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극락이다. 마음이 충만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남보다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생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청빈의 화신이다. 또 진정으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다. 그 단순함과 간소함 속에서 생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삶을 살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모자람이 아니고 충만이다. 욕심은 부릴 게 아니라 버릴 것이다. 버림으로써 영혼이 빛을 발한다. 내가 이렇게 가난을 강조하는 것은 궁상떨면서 살자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너무 넘치는 것만 바라기 때문에 제정신을 차리고 차분하게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 옛 거울에 다시금 비춰 보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청빈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일시적인 생활 방편이 아니다. 그것은 두고두고 배우며 익혀 가야 할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우리의 생활 규범이 되어야 한다. 이 지구촌에 나눠 가져야 할 이웃들이 너무도 많다. 절제된 미덕인 청빈은 그 뜻이 나눠 갖는다는 뜻이다. 청빈은 그저 맑은 가난이 아니라, 그 원뜻은 나눠 가진다는 뜻이다. 청빈의 상대개념은 부가 아니라 탐욕이다. 한자로 '탐貪'자는 조개 '패' 위에 이제 '금'자이다. 탐욕은 화폐를 거머쥐고 있는 것이고, 가난함은 그것을 나눈다는 뜻이다. 따라서 청빈이란 뜻은 나눠 갖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만일 가난이 없었다면 나눠 가질 줄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가난해봄으로써 우리 이웃의 가난, 어려움에 눈을 돌리게 된다. 성 프란치스코는 수도자가 사는 집은 흙과 나무로만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흙과 나무는 기본 소재이다. 흙과 나무로만 짓게 되면 자연히 검소한 집이 된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런 수도원을 그들이 소유하지 말고 그 속에서 순례자나 여행자처럼 살자고 역설했다. 진정으로 우리가 삶을 살 줄 안다면 순례자나 여행자처럼 살 수 있어야 한다. 순례자나 여행자는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날그날 감사하면서, 나눠 가지면서 삶을 산다. 집이든 물건이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순례자처럼 살아야 한다. 내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 앞에 섰을 때는 결코 아니다. 나보다 훨씬 적게 가졌어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 앞에 섰을 때이다. 그때 내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가난하게 되돌아 보인다. 다시 말하거니와,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 앞에 섰을 때 나는 기가 죽지 않는다. 내가 기가 죽을 때는, 내 자신이 부끄럽고 가난함을 느낄 때는, 나보다 훨씬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여전히 삶의 기쁨과 순수함을 잃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이다. 옛사람들은 어렵고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길 줄 알았다.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았다. '안빈낙도安貧樂道'란 그래서 생긴 말이다. 가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기며 산다는 뜻이다. 그 지혜를 우리가 배워야 한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관적인 생활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명상서적을 읽어보면, 우주의 기운은 자력과 같아서 우리가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고 적혀 있다. 우리가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온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삶의 고민이 있다. 그것이 삶의 무게이다. 그것이 삶의 빛깔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한 물건도 갖고 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들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내가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갖고 오지 않았는데 가난한들 손해될 게 무엇인가. 또 살만큼 살다 이 세상을 하직할 때 아무 것도 가져 갈 수 없다. 죽을 때 부유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내 것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이 우주의 선물을, 신이 주신 선물을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것일 뿐이다. 그 기간이 끝나거나 관리를 잘못하면 곧바로 회수 당한다. 이것이 우주의 리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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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3 05:02
2010.03.13 08:22
'텅빈 충만의 경지'라!
인생의 좋은 교훈이 되는 법문입니다.
2월이면 나오는 집필하신 인세를 법정스님 같지 않게
독촉하시는것을 보고 오해들도 했었다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돈으로 자기 이름도 밝히지 않고 필요한곳에
장학금을 보내기 위해서였다니 법정스님 다운 일이었읍니다.
그분에 관한 일화들은 한이 없네요.
귀한 법문을 읽을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규정
2010.03.13 09:21
글 줄 줄 마다 명언들입니다. 그냥 명언이 아니고 가슴에 와 닿는 말씀들이죠.
읽으면서 느낀 많은 생각중에 한두가지...
"...겉으로는 번쩍거리고 잘 사는 것 같아도 정신적으로는 초라하고 궁핍하다..."
본인을 포함해서, 우리 주위에 이런 사람들 많이 보죠? Typical 엽전 근성들...
이렇게 않할려고 또 않될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죠.
"...소유물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아야 한다... 문명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그렇지만 자연은 사람을 소생시켜 준다...."
본인이 등산을 좋아하기에, 我田引水식으로, 이 말씀을 "등산/Hiking"의 metaphor로 해석해 봅니다.
배낭에 정말 꼭 필요한것만 지니고, 간신히 충족한 식량이나 Sandwich한쪽으로 떠나서 산을 오를때,
우리는 바로 이 경지에 이르지 않는가 합니다. 그때 우리는 등에진 것 밖에는 소유한게 없지요.
물론 인공적으로 계획해서 만들어진것이며, 끝나면 곧바로 문명의 편리로 뛰어들어가지만,
적어도 산을 오르는 순간만은 "무소유"의 상태로 살아본것이지요.
즉 원래의 의도였건 아니였건, 무소유의 행적을 잠간이나마 실천했다는것이며,
바로 그것이, 등산이 왜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지를 이제 알겠다는것이죠.
일생을 내내 산을 오른 사람으로, 법정스님이 이렇게 얘기해준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2010.03.13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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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문학가 류시화는 법정스님과 각별한 관계를 가졌던것 같습니다.
한국을 일찍 떠난 우리들은 잘 모르는 이름이기에 여기에 위키백과의 내용을 추려서 전재합니다.
류시화는 시인, 명상가,[[출판기획자[[. 번역가로 1959년 출생인 류시화의 본명은 안재찬이다. 경희대 국어국문학과를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하고 2학년 때 <아침>이라는 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하고 1980-1982년까지 박덕규, 이문재, 하재봉, 등과 함께[ <시운동>동인으로 활동했다. 류시화씨는 시운동 동인지에서 50여편의 시를 발표하고 '시인은 전쟁이 나도 다락방에서 사랑의 시를 쓸 수 있어야 한다' 는 말과 함께 1983년에 활동을 중단한다. 이 후 그는 안재찬을 버리고 류시화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명상서적 번역 작업을 시작한다. 또한 1988년부터 미국과 인도 등지의 명상센터에서 생활하고 인도여행을 통해 진정한 명상가로 변신하고 인도 대표 명상가인 라즈니쉬의 주요서적들을 번역한다. 그는 1년에 약 100권의 명상서적을 원로로 읽는 독서광이며, 16년 동안 겨울이 오면 인도를 방문하는 여행가이다.1991년 그는 첫 시집 <그대가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에 이어 1996년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펴냈고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다.
안재찬으로 활동했을 당시, 류시화씨는 민중적이고 저항적 작품을 지향했던 당대의 문단과는 달리 신비주의적 세계관의 작품세계로 인해 문단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외계인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평론가 남진우는 평론집 <바벨탑의 언어> 를 통해 류시화시인의 시세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안재찬(류시화)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상상력의 움직임은 외부로 확산하려는 힘과 내부로 수렴하려는 두 힘의 갈등이며, 그 중 항상 후자가 전자보다 우위에 있다. 그는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주장하고 있는 민중주의자들에게 현실 도피라는 비난을 받을 수지를 안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앞만 바라보며 바빠 나아가는 이때, '온 곳으로 되돌아가며'라고 노래하는 그의 낮은 음성 속엔 우리가 경청할 만한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라고 기술하기도 했다. 독자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그이지만 문단과 언론에는 인정받지 못한 시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