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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아침에는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넓은 방에 좀 늦게 도착했다. 오늘은 무엇에 대하여 토론을 하겠냐고 급하게 물었더니 모두들 묵묵무언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서너 명은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다. 그들은 아침부터 무료하고 지쳐 보인다. 나는 권태(boredom)에 대하여 말하기로 작정한다.

'bore'는 고대영어로 송곳을 뜻했다. 중세기에는 송곳으로 구멍을 뚫는다는 의미였다가 18세기 중반에 따분하고 지루한 일이나 사람이라는 말로 변했다. 송곳으로 물체에 구멍을 뚫는 일이 아주 시시하고 재미없던 체험에서 생긴 뜻이다.

17세기에는 권태라는 뜻으로 '앙위'라 발음하는 불어 'ennui'가 있었는데 현대영어의 'annoyance(짜증)'와 같은 말뿌리다. 권태에는 짜증과 어둠이 숨어있다. 그래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일찍이 권태는 모든 악의 근원이라 했다.

존재론의 거장 하이데거(1889~1976)는 권태가 우리의 존재 자체에서 야기되는 괴로움이라 선포했다. 그리고 정신과에서는 자아가 본능과 현실을 억제하는 집행유예 과정(suspension), 그 답답함이 권태를 부추긴다고 분석한다.

나는 졸고 있는 환자들에게 큰 소리로 떠들면서 우리가 권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며 열띤 토론을 일방적으로 벌인다.

그들은 권태에 빠지면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고 대답한다. 어떤 환자는 섹스가 최고라고 우긴다. 정신과의사를 괴롭힌다는 아이디어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어쩔 수 없이 외부적(external) 조건에 의존하는,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방법이라고 나는 활발하게 지적한다.

내부적(internal) 여건은 어떤가. 공상, 환상, 그리고 백일몽이나 꿈의 치유효과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다못해 악몽이라도 꾸는 동안만큼은 누구도 심심하다고 투덜대지 않는 법. 따라서 많은 사건들이 줄줄이 터질 때 양키들은 "It's never boring! (절대로 심심하지 않아!)"하며 웃는다.

그날 저녁 나는 이상(1910~1937)의 수필 '권태'를 생각했다. 동네 아이들이 대낮에 길가에서 함께 대변을 보는 장면이 떠올랐다.

-- 이 권태의 왜소 인간들은, 또 무슨 기상천외의 유희를 발명했나? 5분 후에 그들은 비키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선다. 제각각 대변을 한 무더기씩 누어 놓았다. 아아, 이것도 역시 그들의 유희였다. 속수무책의 그들 최후의 창작 유희였다. 그런 그 중 한 아이가 영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는 대변이 나오지 않는다. --

다음날 밤 김승옥(1941~ )의 단편 소설 '무진기행(1964)'을 각색한 영화 '안개'(1967)를 근 50년 만에 인터넷에서 다시 보았다. 안개 짙은 무진의 권태를 주제로 한 그 소설 전문도 다시 읽었다. 끝 문장 좀 전에 이런 독백이 나온다.

--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 버렸다.--

30년의 간격을 두고 두 작가가 권태에 대응하는 방법이 서로 달랐다. 이상은 아이들이 대변을 보는 내부(internal) 상황의 배설을 묘사했고 김승옥의 주인공은 음악선생이라는 외부(external) 대상과의 사랑을 통하여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권태를 탈출했다. 당신이 스마트폰으로 열렬히 죽이는 바로 그 똑같은 권태를.

© 서 량 2014.08.24

-- 뉴욕중앙일보 2014년 8월 27일 서 량 컬럼 <잠망경>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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