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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Essay] 나는 심부름 왕

2012.09.21 05:12

석동율#Guest Views:3872
















나는 심부름 왕


           석동율 동아일보 기자

어린 시절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심부름 왕’이었다.
형도, 동생도 여럿 있었지만 어머니건 할아버지건 우리 가족은 궂은일만 있으면 주로 내게 맡겼다. 구시렁대지 않고 고분고분 심부름을 하니 모두들 나를 시키는 게 편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하면 “형들은 다 컸고 동생들은 아직 어리니까 너를 시킨다”며 나를 어르셨지만 난 심부름을 독차지하는 게 기쁨이었다.

심부름은 참으로 다양했다.
그 중 하나는 닭을 잡는 일이었다. 주말에 할아버지 댁에 가면 끼니때마다 닭을 고아 주셨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닭 잡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꼬꼬댁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닭을 잡아 목을 비틀고 털을 뽑은 뒤 내장을 훑어 소금으로 버무린 뒤 모이주머니까지 삶아 식탁에 올리는 초등학생으로는 쉽지 않았지만, 할아버지 댁에서는 나의 일과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도 은행 심부름을 언제나 내게만 맡겼고, 그 일은 학년이 바뀌어도 계속됐다.

낚시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를 위해 미끼용 지렁이를 잡는 것도 내 몫이었다.
어머니의 심부름은 더 많았다. 당시에는 계원 10명을 모으면 계주는 공짜로 계를 타는 이른바 ‘물품계’가 인기였는데, 어머니는 살림에 보태려고 자주 계원들을 모았다. 우리 집의 법랑 냄비세트, 은수저, 교자상은 그렇게 모은 것이다.
계주는 곗날이면 물건을 계원들 집에 일일이 보내주어야 했는데 그게 내 일이었다.

초등학생인 내가 내 키만 한 교자상 2개를 줄로 묶어 등에 둘러메고 낑낑대며 버스에 올라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나는 이렇게 열 집씩이나 물어물어 골목골목 찾아가 배달했다. 어렵사리 찾아간 집이 비어있어 다시 상을 메고 되돌아오기도 했고, 개가 무서워 들어가지도 못한 채 문밖에서 발만 동동 굴렀던 기억도 난다.

이런 심부름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달랐다. 남씨 아주머니는 어린나이에 기특하다며 과일과 음료수를 주셨고, 주씨 아주머니는 “동율이는 이렇게 심부름도 잘하는데 너는 개구쟁이 짓만 하느냐”며 아이들를 혼냈다.
어머니께 드리라며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주시던 아주머니가 있는가 하면, 온 김에 약 좀 사다 달라며 또 다른 심부름을 시키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지금도 가족 심부름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피아니스트인 아내가 공연을 할 때면 기획사에 맡기지 않고 내가 직접공연장 대관부터 포스터 촬영, 티켓 배부는 물론 대학과 공연장에 일일이 포스터를 직접 붙이고 다녔다.

이젠 닭을 잡으라 하셨던 할아버지도, 지렁이 미끼 심부름을 시키셨던 아버지도, 교자상을 들고 찾아갔을 때 반가이 맞아주시던 아주머니 몇 분도 세상을 뜨셨다. 내가 심부름을 잘해서인지 어머니는 “나이 들면 꼭 동율이와 함께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소원대로 20여 년째 나와 함께 지내며 내 아이들을 돌봐 주신다.

나도 어느덧 50대. 지금까지의 심부름이 단순한 기쁨을 주는 것들이었다면, 이제는 사람들의 공허함을 채워주는, 진짜 기쁨을 나누어 주는 일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 햇살에 말라버리는 이슬 같은 기쁨보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오래오래 남아서 깊은 마음속 갈증까지 채워줄 수 있는 심부름꾼이 되고 싶다. 그건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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