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10 02:16
김동길 교수 Laguna Woods 에서 강연, Prof. Dong-Gil Kim's Lecture
2017 년 1월 29일 at Laguna Woods Clubhouse 5 Video by Tae-Won Kang |
2017.02.10 02:44
2017.02.10 02:52
아래에 Wikipedia에서 가져온 김동길 교수의 생애-행로를 올립니다.
생애
김동길은 1928년 10월 2일에 평안남도 맹산에서 1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1년에 연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이후 1954년에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유학을 마친 후 강단에 올라 1960년부터 연세대학교 전임강사가 되었다. 신랄한 풍자와 해학으로 학생들로부터 인기있는 교수였다.
이후 연세대학교 철학과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 교수로 승진한다. 연세대의 교수로 재임하며 사회 풍자와 부패를 비판하였다가 조사를 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62년에 연세대학교 교무처장을 지냈다.
유신시대에는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에 '내가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이라는 수필을 발표, 대통령이 된다면 부모도 섬기지도 않던 놈들이 청와대에 가서 아부하며 각하 각하 하는 것들을 모두 잡아다가 서해의 무인도에 보내 아첨도라 하겠다고 비판했다. 이 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 고문을 받기도 했다. 출감 후 소학교 접장하던 사람도 18년째 대통령을 하는데 대학교수가 대통령을 한다는 것도 아니고 하고싶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 죄냐며 항변하였다.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 혐의는 제자인 김영준·김학민 두 학생에게 "긴급조치 1호로써 박정희씨는 스스로 묘혈을 판 것이다."라고 말하여 긴급조치를 비방하고, "학생시위를 치밀하고 대담하게 전개하여 박 정권을 타도하라."고 격려하여, 내란을 선동하였다는 것이었다.변호사 한승헌을 선임했으나 최종 심문에서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 지학순(池學淳) 가톨릭주교, 박형규(朴炯圭) 목사, 김찬국(金燦國) 박사 등과 함께 배후지원 혐의로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고, 윤보선을 제외하고는 전부 구속되었으며 일본인 관련자 2명 등은 20년의 중형에 처해졌으나 1975년 2월 15일 형집행정지로 모두 석방되었다.
법원운 김동길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하였다. 김동길 교수는 1심 선고 당일에 항소를 포기하며 "법이 법 같아야지..."라는 말을 하였다. 75년 3월1일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김동길·김찬국 교수의 석방을 환영하는 모임이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열렸다.
1975년 9월에는 양일동, 백기완과 함께 장준하 장례식을 주관하고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그 뒤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소위 ‘정치교수’로 불리며 학원 자유화에 앞장섰다.
또한, 각종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신랄한 정치·사회 비판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비평을 할 때마다 외치던 ‘이게 뭡니까?’라는 말은 개그맨 최병서 등에 의해 패러디가 되면서 당시 유행어가 되기도 하였다. 그 뒤 연세대학교 교무처장, 부총장을 역임하고 조선일보사 논설고문으로도 언론활동을 하기도 했다.
1987년 학생운동권이 동료와 후배들의 분신 자살을 강조하며 정권 타도 운동을 벌이자 그는 학생운동가들이 동료를 이용한다며 비판하였다. 또한 민족 해방 계열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학생운동가들을 비판, 이후 학생운동가들로부터 맹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편 언론과 방송에 강사로 초빙되어 강연 활동을 하기도 했다.
정치 참여와 시련
현실 정치를 비판하던 그는, 1991년 정치 참여를 선언하고 새한당을 창당한 뒤 정주영이 대선에 참여하기 위해 만든 보수 성향의 야당인 통일국민당에 합류했고 1992년에는 총재에 선출되었다.
본인도 제14대 총선에서 원내진입에 성공하나, 14대 대선에서 정주영이 패배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통일국민당의 총재직을 승계했으며, 이 과정에서 당사 자금 마련을 놓고 정주영과 심한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1993년 통일국민당 총재에 재선출되고 이후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과의 합당으로 신민당의 최고위원을 지냈고 1995년에 신민당이 자유민주연합에 흡수되면서 자유민주연합 소속이 되었다.
1990년대 초반에는 그를 패러디한 개그맨 최병서의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의 이게 뭡니까 코너가 인기를 끌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치 활동과 동시에 방송, 언론 활동을 하였고 보수 성향의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94년 신민당 총재 자리를 놓고 벌어진 각목 전당대회 파동과 이어진 각서 파동을 계기로 정치 인생에 최대 위기를 겪었다. 자유민주연합 상임고문에 위촉되지만 자민련 전국구 공천헌금설으로 인해 박찬종, 김종필과 잇달아 갈라지며 그해 5월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1990년대 후반 국민행동본부, 반핵반김국민협의회 등의 보수주의 단체에서 반공 시민단체 원로로 활동하면서 반 김대중 활동과 강연에 활발하게 참여하였으며 김정일의 북한 정권과 조선로동당, 조선인민군, 김대중과 노무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햇볕정책》을 비판하는 강연과 활동을 하였다.
2001년 2월 10일 서울YMCA 신관 대강당에서 조만식을 추모하는 고당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는 고당기념회 창립 25주년 기념 대강연회에 참석하였고, 인도의 간디와 한국의 고당의 민족 운동 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노무현 前 대통령 자살 전후
2009년 4월 검찰 수사에서 뇌물 수수설을 부인하는 노무현을 비판, 대국민 사과 차원에서 자살하거나 재판받고 복역하라고 주장했다. '노무현 씨가 남의 돈을 한 푼도 먹지 않았다고 끝까지 우기기는 어렵게 되어 가는 듯하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기의 과오를 시인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을 지냈다는 자가 그토록 비겁하게 굴어서야 되겠느냐'며 노무현의 부도덕성을 질타, '인류의 역사의 어느 때에나 인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진실인데 진실이 없으면 사람이 사람구실 못하게 마련이며 그런 자가 공직의 높은 자리에 앉으면 많은 백성이 고생을 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씨는 정말 딜레마에 빠졌다'고 했다. 이어 '그가 5년 동안 저지른 일들은 다음의 정권들이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인 과오는 바로잡을 길이 없으니 국민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자살을 하거나 아니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서 복역하는 수밖에는 없겠다'는 것이라며 노무현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하여 5월 노무현이 경남 김해 사저 뒷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 자살하자, 그의 노무현 비판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친노 성향의 네티즌은 그의 비판을 막말이라 하며 역비판을 하였다. 6월초 김동길은 노무현의 국민장에 대해 가족장을 권했어야 했다며 국민장을 한 이명박 정부를 질타하였다. 방송 3사가 노무현을 순교자로 만들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7월 조갑제와 함께 대구에서 공동강연회를 열었는데 2천명의 인파가 몰렸다.
2000년대 후반 이후
2009년 8월 김영삼이 김대중을 찾아가 화해를 하자 그는 "이번에 벌어졌다는 '화해'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며 "김영삼 대통령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데, 김대중 씨를 찾아가서 그가 죽기 전에 사과할 일이 과연 있느냐"며 김영삼을 비판하였다. 이어 사과를 하기 전에는, 사과를 받기 전에는 '화해'가 성립될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거듭 반문한 뒤, "나라의 큰일을 맡았던 사람들이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 버리면 도대체 국민은 무슨 꼴이 되냐"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논란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 후, 김동길이 4월 15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 《먹었으면 먹었다고 말을 해야죠》라는 글과, 월간조선 2009년 5월호에 기고한 〈링컨을 존경한다더니, 이게 뭡니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실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부각되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노무현 씨는 정말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그가 5년 동안 저지른 일들은 다음의 정권들이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인 과오는 바로잡을 길이 없으니 국민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자살을 하거나 아니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서 복역하는 수밖에는 없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노무현은 정말 설 자리가 없다. 그에게는 “나는 간다. 맘대로들 해라”는 내용의 遺書(유서)나 한 장 남기고 장자연처럼 목을 매거나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배를 가를 용기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이에 관해 김동길 측에서는 오해라면서 당당하게 하라는 의미였다면서 하루 이틀 일이라 생각하고 크게 생각하지는 않고 있으며 김동길은 상황을 모르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5월 25일 다시 자신의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요약한 것임).
“이전 고종 황제나 박정희 장군이 붕어하셨거나 피살되었을 때도 오늘처럼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론매체들이 왜 이렇게도 야단법석인가. 내가 전에 쓴 글을 갖고 노사모들이 나를 노 씨 자살의 방조자처럼 만들고 싶어한다. 주변인들이 테러 당할 위험이 있으니 외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지만, 테러 맞아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며 경찰에 신변보호 요청하지 않겠다. 이 나라에는 법은 없고, 감정과 동정뿐인가. 노무현 씨는 검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 뿐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민장은 가히 '세기의 장례식;이라고 할 만큼 역사에 남을 거창한 장례식이었다"며 "인도의 성자 간디가 암살되어 화장으로 국장이 치르어졌을 때에도 우리나라의 이번 국민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국의 모택동 주석이나 북의 김일성 주석의 장례식도 2009년 5월 29일의 대한민국 국민장을 능가하지는 못하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기타
그는 노무현정신 계승 주장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했다. 2009년 6월 그는 "우리 국민은 눈을 의심하고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국민이란 잘 잊어버리고 어리석기만 한 존재로 오해하지 말라"고 질타했다. 이어 지난 2006년 당시 상황을 언급하며, 당내에서 극명하게 갈리었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곱씹었다. "2006년 지방선거에 참패하고 민주당과 그 전신인 열린 우리당은 노 씨의 국정 운영에 대한 지지율이 급락하자 되도록 노 씨와 인연을 멀리하고자 노력한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그런 민주당에서 정세균 대표가 돌연 태도를 바꿔 '노무현 정신 계승'을 부르짖고 나온다면 이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고인에 대한 당의 태도에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의 소리가 당내 일각에서도 일어났다고 들었다."는 것이다.
2017.02.10 07:30
Thank you for your effort, WM.
I listened through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and thoroughly enjoyed the whole program.
His convincing words of reassurance, I believe, meant a lot to all of us.
본인은 Laguna Woods의 주민으로서 김동길 교수를 직접 대면하면서 그위 강의를 듣는
기회를 가졌읍니다. 전형적 평안도 사투리에 오랬동안 한국의 정치계에서 싸워온 향년 89세의
칠전팔기 노장의 목소리를 들었지요. 물론 여기 Video에 그대로 나옵니다.
우리같은 미국시민 앞에서 였는지, 한국에서 처럼 그렇게 강력한 반(反) 종북파 발언은 하지 않더군요.
그러나 그는 변함없는 보수파 애국자였읍니다. Video가 좀 길지만 시간나면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 video는 같은동네에서 잘아는 videographer가 찍은것을 본인이 편집해서 Youtube에 올린것입니다.
물론 Laguna Woods website에도 올렸지요.
아래에 김동길 교수의 시청앞에서 한 강력한 "反촛불"의 태국기를 위한 그의 발언을 부칩니다.
김동길교수의 시청앞 태극기집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