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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이야기⑧ - 1983년 도쿄선언…

반도체 신화를 쓰다

[뉴시스] 입력 2013.06.30 06:03


【서울=뉴시스】정리/우은식 기자 = 삼성전자의 이코노빅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던 1982년 3월. 이병철 회장은 보스턴대학교를 찾았다.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서였다.

“국토가 좁고 자원도 부족한 한국에서 수십 개의 회사를 세워 한국의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끈 성과는 그 어떤 말로 칭찬해도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 대학의 모든 교수가 엄격하고 공정한 과정을 거쳐 뽑은 세계 여러 나라 후보들 중에서 귀하가 가장 적임자라고 결정했으니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보스턴대학교 측의 정중한 요청에 이병철 회장도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었다. 이병철 회장은 사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중퇴만 네 번을 해서 졸업장은 한 장도 없었다. 그런데 박사 학위를 받는다니 어쩐지 민망하기도 하고 감회가 새로웠다.

150년 전통을 가진 학교에 들어서니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이 되어 가장 먼저 미국을 찾았던 때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그는 한국이 투자처로서 유망하다는 걸 증명하려고 백방으로 애를 썼다. 당시엔 국력이 약해 수모도 많이 당했는데, 이제는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학교 관계자들은 정중한 태도로 이병철 회장을 맞아주었다.

명예 학위식이 열린 4월 2일을 ‘이병철의 날’로 정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200여 명의 유력 인사들이 오찬에 참가했고, 그 자리에서 존 실버 총장은 레이건 미국 대통령, 케네디 상원의원 등의 축전을 소개했다.

워싱턴포스트지는 “한국의 록펠러(미국의 전설적인 사업가)가 미국을 방문하다”라는 제목으로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이병철 회장은 한국의 경제 발전과 삼성의 성장이 갖는 위력을 체감하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병철 회장은 비행기 멀미가 심했다. 그래서 미국에는 18년 만에 처음으로 왔다. 어렵게 온 만큼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고 싶었다. 아메리카은행, 시티은행, GE 등 손꼽히는 회사의 최고경영자들을 만나 폭넓은 대화를 나누었다. 또 캘리포니아주의 실리콘밸리, IBM과 휴렛팩커드의 컴퓨터 반도체 공장 등을 돌아보았다.

5년 전, 위암 수술을 받으면서 그는 생각했다. ‘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사업은 거의 모두 도전했고, 또 성공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과용이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싱싱한 에너지가 넘치는 실리콘밸리를 둘러보니 어느새 일흔을 훌쩍 넘어선 이병철 회장의 가슴에 다시 열정이 샘솟았다. 이병철 회장이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휴렛팩커드의 사무실이었다.

“이곳이 사무실이란 말입니까?”

사무실 문을 연 순간 이병철 회장은 할 말을 잃었다. 회사 직원들이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 하나로 계산, 기획, 보고까지 거의 모든 일을 해내고 있었다.

“저희는 처음에 작은 지하실에서 단 1000달러 자본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회사가 됐군요. 관리자들이 책상 위에 놓은 조그마한 컴퓨터 하나로 모든 일을 해내니 그 능률이 대단하겠습니다.”
“다 반도체 덕분이죠.”
안내를 맡은 중역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반도체라….”

반도체에 관해서는 늘 신문 기사를 놓치지 않았고 많은 자료를 보았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앞선다는 나라, 미국에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정신이 확 들었다.

이병철 회장은 셋째 아들 이건희를 떠올렸다. 이전에 반도체 사업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병철 회장은 “아직은 시기상조다. 앞으로 눈여겨보자”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병철 회장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반도체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핵심 산업으로 부상하리라고 직감했다.

‘손톱만한 반도체가 대체 뭐길래!’

숙소에 돌아와서도 휴렛팩커드의 사무실 풍경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며칠 뒤 이병철 회장은 아이비엠(IBM)의 반도체 공장을 방문했다. 반도체 공장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들은 병원 수술실에 있는 사람처럼 흰 가운을 입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병철 회장의 눈에는 모든 것이 이채로워 보였다.

“세계 여러 지역에 아이비엠 공장이 있었지만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반도체와 부품을 이곳에서 만들어 세계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흰 가운은 왜 입는 거지요?”
“반도체 생산이 방진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이비엠은 모든 공정이 자동으로 이루어져서 눈치 빠르고 손재주가 좋은 일본 사람들도 이 반도체 기술을 흉내내지는 못한다고 자랑했다. 이병철 회장은 그들의 자신감이 부러웠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사업 기획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7개월 만에 16절지 100매에 이르는 기획안을 손에 받을 수 있었다. 기획안에는 아이비엠이 자랑했던 것과 달리, 반도체 중 메모리 분야는 오히려 일본이 미국보다 앞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병철 회장은 눈이 번쩍 뜨였다.

“일본이 미국보다 앞선다면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는 정교한 손기술이 필요해. 젓가락을 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손재주와 일본인의 손재주는 다를 게 없지.”

1983년 2월, 일본 도쿄의 오쿠라호텔.

이병철 회장은 이곳에서 하얗게 쌓인 눈을 보며 조용히 새해를 맞곤 했다. 또 무언가 깊이 생각할 때에도 이곳을 찾았다. 이번에 그를 생각에 잠기게 한 주제는 ‘반도체’였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 임원들과 참모진은 모두 이병철의 선택을 만류했다. 이병철 회장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돈벌이만 하려면 반도체 말고도 많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고생하고 애를 쓰냐고요? 반도체는 국가적 사업이고 미래 산업의 총아이기 때문입니다.”

“그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투자 금액이 엄청난 데 비해 상품의 수명은 너무 짧습니다. 아시다시피 한발 아니 반걸음만 늦게 개발해도 그 제품은 시장에서 곧바로 도태하고 맙니다.”

결국 문제는 돈이었다. 한 개 라인을 건설하는 데 무려 1조 원이나 들었다.

‘내 나이 일흔넷. 내가 책임질 수 있을까?’

이병철 회장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나이에 새로운 사업을 한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고, 지금까지 수많은 위기를 넘겨온 삼성이었지만 이번에 잘못되면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질 수 있었다. 그런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병철 회장은 시기적으로는 ‘반도체’를 선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확신했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일본은 경제 발전 단계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교과서였다. 일본은 이전 해보다 100억 달러 이상의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불과 20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던 일본이 이런 성장을 한 것은 반도체 덕분이었다.

한때 제철, 조선, 석유 화학, 시멘트, 섬유 등 일본의 기간산업은 치열한 경쟁으로 품질을 향상시키고 수익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곧 과다한 경쟁과 소비량보다 많은 생산량으로 경쟁력을 잃고 말았다. 기업이 도산하고 수출 시장에서는 덤핑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부존자원(경제적 목적에 이용할 수 있는 천연 자원)이 없는 일본은 원료 수입을 하고 제품을 만들어 수출을 해야 하는데 각국과 무역 마찰을 빚으니 더욱더 설 자리가 없었다.

이런 일본 경제에 전환점을 마련해준 것은 ‘오일쇼크’였다. 오일쇼크를 견뎌내기 위해 일본 정부는 기간산업의 생산 규모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대신 반도체, 컴퓨터, 신소재, 광통신, 유전 공학, 우주, 해양 공학 등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기술분야로 전환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 결과 수출이 획기적으로 늘고 외화 수입은 급증하였던 것이다.

‘한국도 일본처럼 부존자원이 적다. 수출이 생명인데 이미 경공업은 개발도상국에게 추격당하고 있고, 중화학 제품은 조선이나 제철 같은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는 선진국의 제품들과 경쟁이 되지 않아. 우리는 반도체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이병철 회장이 새로운 사업을 할 때 고려하는 기준은 명확했다. 첫째, 국가적으로 필요한 것인가? 둘째, 국민에게 오는 이익과 손해는 무엇인가? 셋째,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가? 이런 기준에 비추어 보아도 반도체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그는 전화기 쪽으로 향했다.

“홍진기(당시 중앙일보 사장) 회장을 연결해주게.”
같은 시간 홍진기 사장은 서울에서 삼성전자 사장인 강진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철강 1톤을 생산하면 그 부가가치가 20원밖에 되지 않지만 1톤짜리 자동차를 생산하면 500만 원의 부가가치가 발생합니다. 컴퓨터를 1톤 분량만큼 생산하면 3억 원의 부가가치가 발생하는데 반도체를 1톤 생산하면 무려 13억 원의 부가가치가 발생하지요. 그야말로 ‘마법의 돌’이 아닙니까?”

홍진기 사장의 말에 강진구 사장은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거야 다 알지요. 문제는 계속해서 투자해야 하는 개발비입니다. 회장님은 남들보다 빨리 개발해 시장에 내놓으면 천문학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우기시니 미치겠습니다.”

언제나 사전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내린 실무진의 의사를 존중해온 이병철 회장이 처음으로 고집을 부리고 나서니 실무진의 걱정은 하루하루 쌓여만 갔다. 강진구 사장이 하소연을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홍 회장, 나입니다.”
이병철 회장이었다.
“아! 예, 회장님! 그곳은 새벽 6시 아닙니까? 이 시간에 어쩐 일로….”
“누가 뭐라고 해도 삼성은 반도체 사업을 할 것입니다. 중앙일보에 이 소식을 실어주시겠습니까? 중앙일보를 통해서 세상에 가장 먼저 알리고 싶습니다.”

중앙일보는 삼성이 만든 신문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자신이 반도체 사업을 하려는 뜻을 가감 없이 그대로 실어줄 수 있는 중앙일보를 통해서 이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1983년 3월 15일자 중앙일보에는 삼성의 새로운 도전을 밝힌 기사가 실렸다. 이른바 삼성의 ‘도쿄 선언’이었다.

삼성의 도쿄선언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냉담했다. ‘인텔’은 이병철 회장을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꼬았다. 그렇지만 이병철 회장은 담담하게 반도체 사업을 추진했다.

“삼성이 이번에 반도체에 대규모 투자를 한 것은 충분한 투자 여력이 있어서만은 아닙니다. 오로지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을 성공시켜야만 첨단 산업을 꽃피울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삼성의 모든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이 사업의 추진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수많은 조건을 고려하고 계산했지만 결정을 하고 나면 단박에 밀어붙였다. 우선 미국의 반도체 벤처 기업인 ‘마이크론’, 일본의 ‘샤프’와도 기술 제휴를 맺었다. 또 우수한 반도체 전문가를 영입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렇게 해서 진대제, 권오현, 황창규 등을 삼성에 영입했다.

“반도체 첫 생산 품목으로 ‘64KD램’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64KD램은 미국에서만 생산하고, 일본에서는 생산하지 않는 품목입니다.”

반도체 전문가들이 의견을 냈다. 64KD램은 새끼손가락 손톱 4분의 1 크기에 15만 개의 트랜지스터를 심어 8만 개의 선으로 연결하는 초정밀 기술 제품이었다. 여기에는 8000개의 글자를 저장할 수 있었다.

곧바로 기술팀은 64KD램 개발에 들어갔고 다른 한편에선 공장을 지을 터를 선택하고 공장을 짓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공장터는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기흥구로 최종 결정했다. 터를 결정하자 이병철 회장이 말했다.
“6개월 만에 공장을 지어야 합니다.”
“회장님, 이건 제일제당이나 제일모직과는 다릅니다. 선진국에서도 18개월이나 걸리는 공사를 어떻게 6개월 만에 마치겠습니까?”
“반도체는 제때를 놓치면 공사장의 돌보다 못합니다. 제 값을 받으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어요. 공장이 완공되면 6개월 안에 64KD램을 생산해야 합니다.”

1년 안에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그의 목표에 따라 전 직원이 힘을 모았다. 공장 건설은 밤낮없이 진행됐다.

64KD램을 개발하려면 4K, 16K, 32K의 세 단계를 거쳐야 했다.

“머리카락 굵기의 50분의 1 정도의 선을 자유롭게 다루어야 하는 초정밀 기술을 그렇게 간단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반도체에 뛰어든 일본은 삼성이 64KD램을 개발하려면 적어도 20년은 걸릴 것이라며 비웃었다. 그런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기적이 일어났다.

이병철과 삼성 직원들은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바로 그해 64KD램 개발을 완료한 것이다.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 개발!

12월 12일 삼성은 64KD램을 처음으로 수출했다. 공장도 지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우리는 미국, 일본보다 10년 이상 뒤졌던 반도체 기술 수준을 4년 정도로 좁히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여러분이 열심히 일해준 덕분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의 나이 74세 때였다. 동서양을 통틀어 70대의 나이에 자신의 재산과 기업의 운명을 걸고 새로운 사업에 뛰어든 기업인은 드물었다.

이병철 회장은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반도체는 바로 수익을 볼 수 있는 산업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투자를 선택했고, 마침내 그 선택은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삼성과 금성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의 우위를 갈라놓은 것도 반도체였다.


삼성이 반도체 신화를 써 나가자 금성도 곧 이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며 삼성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1999년 엘지전자(‘금성’의 오늘날 이름)는 반도체를 포기했다. 두 기업은 많은 분야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며 경쟁하고 있지만, 현재 두 그룹의 매출 규모는 삼성(314조원)이 LG전자(142조원)를 두 배 이상 앞서고 있다.

 

Copied from 중앙일보 경제란 2013년- by SNUMA W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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