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2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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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iangle of U" diagram, showing the genetic relationships among six species of the genus Brassica. Chromosomes from each of the genomes A, B, and C are represented by different colors.
The triangle of U is a theory about the evolution and relationships among members of the plant genus Brassica. The theory states that the genomes of three ancestral diploid species of Brassica combined to create three common tetraploid vegetables and oilseed crop species.[1] It has since been confirmed by studies of DNA and proteins.
The theory is summarized by a triangular diagram that shows the three ancestral genomes, denoted by AA, BB, and CC, at the corners of the triangle, and the three derived ones, denoted by AABB, AACC, and BBCC, along its sides.
The theory was first published in 1935 by Woo Jang-Choon,[2] a Korean-Japanese botanist (writing under the Japanized name "Nagaharu U").[3] Woo made synthetic hybrids between the diploid and tetraploid species and examined how the chromosomes paired in the resulting triploids.
*Triangle of U의 U는 우장춘의 성, 우를 뜻한다. 우장춘은 이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계적인 업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그에게 업적에 적합한 지위를 주지 않았다. 1936년 일제 강점기였다. 그는 양배추와 브로콜리의 잡종이 유채라는 것을 증명 했다고 한다. 그의 논문은 지금도 인용되고 있다고 한다. 씨없는 수박은 해방후 한국에 와서 이런 종자도 만들 수 있다고 시범을 보여 준 것에 불과 한 것이지 그가 최초로 만든 종자가 아니라고 한다.
2020.05.26 09:58
2020.05.26 10:00
우범선은 우장춘의 아버지이다. 우범선은 임오군란직전에 신식군대 훈련대장이었다. 신식군대는 민비가
일본의 도움을 받아 신설 한 부대였다. 구식군대는 대원군 섭정시절에 개혁을 단행해서 대우도 좋았고
훈련도 잘해서 제법 정비된 부대였다.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고종 친정이 시작되자 신식군대가
만들어 지면서 구식군대는 찬밥이었다.
대우 좋은 신식군대는 양반 자제들로 채워졌다. 훈련대장 우범선은 중인 출신이었다. 생도들은 양반,
교관은 중인. 생도들이 교관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참다 못한 우범선은 어느날 생도들을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한다음 일본으로 망명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 개화파가 득세하고 다시
일본 식 훈련대대가 창설되었다. 우범선이 훈련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삼국간섭으로 민비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서 친일세력을 제거 해 가고 있었다. 우범선의 훈련대도 해체될 운명이었다. 일본은
민비시해에 반민비 세력을 찾던 중 우범선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 영사는 우범선을 포섭했다. 우범선은
훈련대를 이끌고 일본낭인들과 협조하여 민비시해에 가담 했다. 일본의 예상을 뒤집고 민비 시해 이후
친일파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자 일본으로 다시 망명 했다. 처와 자식들은 조선에 두고. 그리고 일본에서
일본여자와 결혼하여 나은 첫아들이 우장춘이었다.
2020.05.26 10:32
Dr. Lee, you surprised me again. Would you tell us some more about 우장춘?
2020.05.27 10:19
우범선의 일본인 부인은 사카이 나카이다. 우장춘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은 우장춘이 6세 때 고영근에의해서 암살되었다. 고영근은
무과 출신의 개화파 인사이다. 종2품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를 지낸 고위 관료였다.
윤치호의 친구였다. 개화파들은 민비시해 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방유지나 일본정부
의 지원을 받아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우범선과도 만나면서 지냈다. 하루는
고영근이 히로시마현 구레에 있는 숙소로 우범선을 초대 했다. 서로 마주 보는 자리에서
칼로 이범선을 살해 했다.
우범선의 처 사카이는 하녀 출신이 었지만 아주 생활력이 강하여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식교육을 게을리 하지않았다.
우범선의 묘는 도치기현 사노시의 스나가 집안 묘에 있다. 조선 개화파 인사들은
스나가 하지메라는 인물의 보호를 받아 왔다. 그는 사노시의 부농이었다. 그는
게이오의숙 츨신이다. 탈아시아로 유명한 후쿠자와 유키치가 창설한 학교이다.
후쿠자와는 조선개화파를 교화 시킨 인물이며 갑신정변의 배후이다. 개화파들
대부분이 이학교에서 공부 했다. 스나가는 김옥균과 절친했고 그를 끝까지 보호
해주었다. 스나가의 집에는 박영효등 개화파 인사들이 자주드나들었다. 그러면서
많은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과 기록이 스나가 문고로 남아 있다고 한다.
우장춘은 도꾜 제국대학 농학 실과에 입학했다. 학부 과정이 아닌 전문학교 였다.
1916년 도꾜대학을 방문한 조선도지사가 연설하는 도중 김철수라는유학생이 그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것을 보고 그와 친해졌다. 그 후 우장춘은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19년 졸업한 후 농림성 산하 연구소에서 일했다. 전문학교 출신인 그에게는
진급기회가 없었다. 장교가 되지 못하고 만년 선임하사 격이었다. 박사학위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나팔꼿 연구로 졸업논문을 완성 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소
에 화재가 발생하여 연구자료가 모두 소실 되었다. 그리고 다시 연구 한 것이 잡종
의 원리에 대한 것이었다. "Triangle of U"는 그의 박사 논문이었다.
1924년 와타나베 코하루와 사랑에 빠져 결혼 하려고 했으나 여자 쪽에서
조선인이라고 반대 했다. 이때 스나가가 도와 주었다. 스나가는 와타나베를
양녀로 들이고 우장춘을 대릴사위로 맞이했다. 우장춘도 스나가 나가하루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우(U)를 버리지 않고 우 나가하루를 계속해서 사용 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도 진급이 되지 않았다. 할수없이 농업연구소를 그만두고
사기업인 타카이 종묘 회사에 들어 갔다. 아마 우라는 한국이름이 탈이었을 것이다.
1945년에 그 회사를 그만두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던 중 우장춘 모셔오기
운동에 부웅하여 1948년부터 부산 농업 시험장에서 일했다. 배추,무우, 벼 품종
개량에 크게 기여 했다고 한다. 가족은 전부 일본에 남겨 두었다. 한국에서 현지 처와
같이 살았다. 1959년8월10일 위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 했다. 향년 61세였다.
2020.05.28 01:33
Just got back home from the Bay- we simply call the Chesapeake Bay to 'the Bay'!-, Dr. Ohn, where I spent a full week till yesterday through Memorial Day Holidays. But had a chance to check the internet once in a while though tried not to so that I could stay away from this m-fucker's face/saga. So I was so delighted to read 우장춘 you wrote as a total surprise. Indeed, sadly, not many people seem to know about him so that I often brought up his story quoting my mentor, 홍승면, who gave me such eye-opening opportunity, whenever I have a chance to talk about Korean patriot.
Anyhow, you already shared most of the stories about 우장춘 I know of. Indeed, as said, I was fascinated to learn about him for the first time in one summer soon after I got to premed school through the visit to SuWon 농업 시험장 with my mentor, then, 홍승면, Editor of Hankook IlBo, I literally worshiped.
I felt so sad and moved to learn how he/우장춘 struggled to survive as a half Korean half Japanese and suffered more than he deserved as the son of the assassin so many peoples openly attacked he didn't deserve, only because he was the son!; I had a chance to read some of his records written in Korean- mostly in Japanese!! - 홍승면 collected/kept at his office ( I believe he wrote twice if not more on HanGook Ilbo!). I shared 홍승면's view on him/우장춘 as one and only Korean who deserved for Nobel prize as a genuine humanitarian with such critical helps to improve the rice plants to save starving Koreans.
Indeed, I wonder who else did more contribution than 우장춘 ever among so-called 'Korean' to poor starving Koreans then with such contribution!!!! With this story about 우장춘, I vaguely remember what 홍승면 told/joked about his unique personality, presumably originated from his 'half Japanese' gene(?), using some of the Japanese terms like '앗싸리', no Korean could have!!!
BB Lee
P.S. I don't know how many of you heard about 홍승면, such shy (?) journalist- he claims his specialty rather as humanist than a journalist- but soon after he got back from Stanford U ( he graduated Kyunggi HS and SNU ), he became the youngest editor and soon 편집국장 of 한국일보, and happened to start dating with Julliard educated pianist, 이기원, a niece of President 윤보선 and my KG high school buddy, 윤응구's cousin so that we chased him around to interfere his dating but he loved young high school kids like us to tag along and I began to worship him and every word he spoke embedded in my young brain. After I got in the SNU Premed School, I spent so much time with him/홍승면, day and night, and enjoyed his unique talent as a born connoisseur in particular - he wrote 백미백상 later !-; I maintained his mentorship through years till I left for Richmond in 1968, missing him as one of the few back in Korea.
2020.05.28 06:10
우장춘은 와타나베 고하루와의 사이에 2남4녀를 두었다. 이들은 모두 스나가로 행세
했을 것이다. 스나가는 우익 계열의 든든 한 집안 이었다. 위로 줄줄이 딸 넷, 아래로
아들 둘이었다. 딸 둘은 농학자와 결혼 했는 데 우장춘이 혼담에 관여 했다고 한다.
사위나 외손자들 모두 전문직이었고 아들도 모두 대학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넷째 딸은 이나모리 가즈오와 결혼 했는 데, 결혼 일년 후 교세라라는 일본 굴지의 기업을
창업 했다. 일본항공 회장을 지냈다. 그가 아주 젊은 나이에 성공 한 것을 보면 스나가
가문의 도움을 받지 않았나 의심하기도 한다.
우장춘의 장남 스나가 모토하루는 매형회사 교세라에 취직했다. 매형의 동생은 유명한
만두체인 교자노 오쇼의 사장이었다. 차남이 만두 체인점을 운영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inabago&logNo=10102664516&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2020.05.28 06:49
Dr. Lee, I am amazed by your personal experience that very few could have had. Now,
I understand that how you got to know 우장춘. It was very interesting. Thank you.
2020.05.28 07:42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은 친일파 매국노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전에
갑신정변을 이르켰던 개화파 인사들은 친일파 매국노 인가? 에 대한 답 부터 생각해 보자.
민비는 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고나서 대원군의 쇄국에서 개항으로 정책전환을 했다.
친일개화파를 등용했다. 임오군란 중 대원군에게 죽을 뻔한 고비를 청나라의 도움으로 넘기고
개화파들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 나갔다. 민비는 청나라를 등에 없고 청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일본세력을 밀어 내는 수 밖에 없었다. 자연히 권력의 중심에 친청세력이 들어서고 개화
파는 찬밥신세가 되어 갔다. 개화파의 스승 유키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쿠테타를 주문 했다.
1884년3일천하 갑신정변의 간략한 정황이다. 개화파들은 반역죄로 삼족이 멸살 되었다. 친일
매국노 였다. 그러나 그들은 조국의 근대화의 기수로 요지음 세상에서는 국수주의 애국자이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갑신정변은 한국사람들이 자랑할 만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다. 한국근대화에
미친 영향은 없다고 생각한다. 개화파들이 조선을 일본에게 바칠려고 저지른 사건 또한 아니다.
20대의 혁명 주체세력은 노련한 유키치의 노리개에 불과 했다.
1882년 임오군란 때부터 시작된 일본과 청의 조선 먹기 시합은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이겼다. 개화파
가 다시 득세 했다. 일본에 망명했던 정객들이 귀국해서 요직을 차지 했다. 전쟁중에 일본이 밀어 넣
어 준 것이다. 대원군을 바지 사장으로 앉치고 친일내각을 만들어 갑오경장이라는 개혁을 단행 했다.
개화파들은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자 조선도 일본처럼 근대국가가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갑오경장은
일본의 이익을 취하기 위한 개혁이었지 조선을 일본처럼 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 주려는 개혁이 아니었다.
그러나 청을 물리치고 조선이라는 요리가 식탁에 올라간지 단 6일 만에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와
작당하여 일본에 넘어간 요동반도를 토해 내라고 요구 했다. 일본이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민비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친일 세력을 밀어 내었다. 급기야는 민비가 개화파 인사들을 살해
할려고 했다. 민비의 정적 대원군과 개화파는 공동의 적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은 민비만 제거하면
조선을 삼킬 수 있을 것으로 착각 했다. 민비는 대원군, 개화파 그리고 일본이라는 연합전선과 싸워야
했다.
을미사변 민비시해는 대원군, 개화파와 일본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이범선은 일본이 포섭한 개화파
인사중에 한 사람이었다. 개화파는 애국자이고 이범선은 매국노라는 논리는 사리에 맏지 않는 결론이다.
다른 점은 전자는 민비의 죽음(death)에 관련이 돼있고 후자는 죽임(killing)에 참여 했다는 사실이다.
2020.05.29 01:31
Forgot to mention on my memory/witness on 'hydroponic' plantation with no soils I have never seen until I went to SuWon with my mentor 홍승면, which 우장춘 brought from Japan. There was one small section for this experiment at SuWon Agricultural Research Institute, owing to his contribution on the development, without full understanding/acknowledgment of its unlimited potentials, then but later, it gave momentum to Koreans to lead this hydroponic agriculture throughout the world, which I heard from a former dean of College of Agriculture, Hyun KC.
Most of all, he/우장춘 apparently made quite a few discoveries to improve the seeds especially on their natural resistance to the insects, later confirmed as critical discovery, but flatly refused to claim the patents but giving them away 'free' to feed the starving human beings; interestingly, learned that Indians were the major benefactor of 우장춘's such humanitarian action, later when I was visiting Chennai, India.
Indeed, over the dinner given by Prof. Solomon Victor of Chennai Heart Institute, I visited to learn Budd-Chiari Syndrome, one agriculture professor and vice-chancellor of Chennai Univ/old Univ of Madras, told me that they, Indians, owe to 우장춘 for newly developed rice plant which doesn't need the 'expensive' insecticide to allow poor Indians to produce enough rice to feed themselves. But, sadly vicious politicians took the bribes from Monsanto to replace it to Monsanto rice which needs expensive insecticides Monsanto produces!!!
So I feel proud that I share the same Korean gene with 우장춘 but feel humiliated on the Korean gene I share with evil-minded bastard 김대중.
BB Lee
I am so glad you shared not a well-known story about Woo JangChoon, Dr. Ohn.
Indeed I would not hesitate even one minute to select Woo Jangchoon as the one I respect most among Koreans, not General Lee SoonShin. I collected many articles about him through years with such utmost sympathy and admiration!
BB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