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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일대기(高仙芝 一代記)

 

A. 서문:

나는 최근에, Dr. Ohn의 “고구려인 고선지의 와칸계곡의 혈투”에서 고선지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고, 또 1부, 2부, 3부의 방대한 재료를 보고서 여기에 전문적인 연구가 크게 이루어졌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고선지란 이름도 처음으로 들었고, 이곳에 올린 글과 재료에서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서 20세 젊은 나이에 당조에 장군이 되는 영예를 얻었고, 서역지역에서 대 공훈을 세웠으며 불행히도 간신의 모함으로 사형을 받았지만 명장의 칭호를 받았던 그의 일생이 끝막았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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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수행하였던 와킨주랑은 중국의 서역변방으로서 대단히 험악한 지역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나도 재료를 찾으려고 두 곳을 참조하였다. 첫째 중국문헌 百度百科(백도백과)는 Baidu라고 하는 중국대사전이다. 다음에는 여기에 나온 설명이다.

또 한가지 우리의 주의를 끄는 건 현재 미국이 20년간 지배하였던 Afganistan에서 철수하면서 그 인접국가인 중국의 신강(新疆)과 아프간 사이에 위치하였고, 또 고선지장군이 정벌했던 와칸지역이 다시 우리의 관심을 끌게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우선 중국 백도백과(百度百科)와 영문 Wikipedia를 참조하여 정리해 보았다.

 

B. 본문

고선지(?-Jan 24, 756)는 당조중기의 명장으로서 고구려유민이었다. 자태와 용모는 준미하고 말타고 활쏘기에 능하였고, 용맹이 과감하였으며 어렸을 때 부친을 따라 당조에 들어왓 20세때 징군이되었다. 직위는 안서부도호에 이르렀고, 4진에서 병마사등의 직위를 가졌다.

토번이 소발율을 점령하니 당왕조에서 3차출병해도 이기지 못하여서 천보6년(747년)에 고선지에게 행영절도사로 제수하여 군사를 이끌고 출격하여 소발율을 취하여 안서절도가가 되었다. 천보9년 석국(현재 오자별극사단탑십간 일대)에 진취하여 먼저 화해하고 후에 돌격하여 그 국왕과 부하를 생포하였다. 다음해 석국은 대식을 이끌어 침공하니 고선지는 출격하여 그들과 크게 싸웠으나 대패하였다. (Please read the Battle of Talas).

후에 입조하여 개부의동삼사를 받고 우우림대장군이 되었다. 천보14년 (756년) 안록산반란때 고선지가 부통수가 되어 출정하여 반역도와 싸웠는데 불리하여 후퇴하여 동관을 지키던 중 간신 변령성이 모함하여 살해를 당하였다. 아래에 고선지 일대록이 자세히 나온다.

 

少年戎馬(소년융마) : 소년이 군마를 타다.

고선지(高仙芝)는 소년시절에 부친 고사계(高舍雞)를 따라 인서(安西)에 이르러 부친은 공을 세워 유격장군(游擊將軍)에 임명되었다. 고선지는 소년시절에 부친 고사계(高舍雞)를 따라 안서(安西)에 이르렀고, 부친은 공을 세워 유격장군(游擊將軍)에 임명되었다.

고선지는 20여세에 장군이 되었고, 부친과 더불어 같은 지위에 있었고, 그는 안서사진절도사(安西四鎮節度使) 전인완(田仁琬)과 합가운(蓋嘉運) 수하에 관직을 갖였지만, 중용에 이르지 못하였다.

후에 부몽령찰(夫蒙靈察)이 절도사가 되었을때 고선지의 재간을 발견하고 중용하였다. 개원말년(開元末年)에 이르러 고선지는 관직이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와 사진도지벼암사(四鎮都知兵馬使)에 이르렀다.

 

帝國雙壁(제국쌍벽)

고선지가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를 맡았을 때 매차 출군할 때 신변에는 겨우 부하 30여인을 데렸고, 의복은 선명하였다. 부몽령찰(夫蒙靈詧) 문하에 봉상청(封常清)은 고선지가 재능이 많음을 알고, 고선지의 수종이 되기를 원하여서 , 문득 강개격앙하여 고선지를 향하여 투서 한통을 보내서 스스로 자기를 천거하얐다.

오로지 봉상청의 모습이 다르며 몸이 많이 여위고, 사지에, 다리는 짧고 절름거렸다. 고선지는 봉상청을 본 후 그의 모습이 추함을 싫어하여서 그를 접수하기를 원치않았다. 첫번에 실패후 봉상청은 실망하지않고 다시 재차 투서하였다.

고선지는 이미 그의 괴로워함을 이길 수없어, “나는 시종이 이미 많은데 이를 어디에 쓸까?” 하니, 봉상청은 노해서 말하기를, “나는 그대의 고의(高義)를 사모하여 그대에게 시봉하기를 원했지, 누구의 소개를 받고 오지 않았소, 왜 그대는 거절하는가?” 고선지는 거듭 받아드리지 않았고, 그는매일 이르러 기다렸기에 도리없이 봉상청을 시종으로 받아드렸다.

천보(天寶) 초년에 이르러 여러부락이 반란을 일으켜서 흑산(黑山이북을 따라 직접 쇄엽성(碎葉城)에 이르러서, 당현종은 부몽령찰에게 명하여 반란울 평정하도록 하였다. 부몽령찰은 고선지에게 2000정기를 부성으로부터 북으로 향하여 직접 능령하(綾嶺下)에 이르러 반군을 격퇴하였다. 달해부(達奚部)는 행군으로 피로햐고, 인마가 지쳐서 모두 당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봉상청은 기록에 보고서를 잘 써서 상세히 진술하였으니, 우물, 샘물, 군대의 주둔지점, 승리한 정황과 전술등 조리가 분명하게 기록했다.

고선지는 말하기를, “봉상청은 그에게 설명함이 주도하다.”히였고, 고선지가 이로써 크게 놀라서 마상에서 채용하였다. 회군후 부몽영찰이 영접하고, 그들를 위로하였고, 고선지는 노예의 버선을 풀고 칼을 차고 그에게 인사하니, 판관 유조와 독고준이 논쟁을 하며 묻기를, “전에 보낸 첩보를 누가 썼는가? 너는 어찌 장하에 저런 인재를 갖는가?” 고선지가 답하기를, “이는 나의 시종 봉상청입니다. “ 유조등 모두 많이 놀랐고, 봉상청에 대하여 예를 하고 자리를 주었고, 그와 더불어 대화하여서 그가 기재임을 인정하였다 .차후 고선지를 경유하여 계속 진급하였고, 봉상청은 전후로 진장(鎮將), 과의(果毅), 절충(折衝)을 받았다. .

 

III. 遠征小勃律(원장소발율): 小勃律国

개원(開元)연간 당조의 국력은 전에 없이 강성하여서 사기에 칭하기를, “개원성세”라고 하였고, 국력은 증강하고 당조의 군사실력은 함께 증강하여 당은 토번과 더불어 전쟁중에 점차 축출하고 점령하여 우세하였다.

그 시기에 당조는 서부지역 전략이 안서(安西), 북정(北庭: North Pochengzi, Jimsar, Xinjiang)에 의존하여서, 군사기지는 그의 지배하에 있어서 그 지역토착인을 호령하고 혹 공격, 혹 수비를 하며 부단히 그 구역을 공고히 하거나 확대하였다. 토번(吐蕃: Qinghai-Tibet Plateau)는 처음 일어나서 후에 동돌궐간국(東突厥汗國) 급 돌기시(突騎施)등과 연맹하였고, 동시에 당군과 여러차례 견주어 헤아리고 중점적으로 안서 4진(安西四鎮)과 북정 일대를 쟁탈하였다. 후에 동돌궐과 돌기시(突騎施)는 쇠락후 당과 번방족의 쟁탈의 중점은 점차 총령(蔥嶺: Pamirs)이남지구로 이동하였다.

총령위에 두 나라가 있었는데, 소발율(小勃律)과 대발율(大勃律)이었다. 소발율은 당에 속하였던 토번으로 안서 4진의 교통요도였다.

토번 찬보파공주(贊普把公主)를 소발율왕 소실리에게 처로 시집보내어서 소발율국은 토번에 귀속되고, 토번은 진출하여 서북 각국은 지배하여서 이로 인하여 서북 20여국이 토번의 신하가 되었고, 조공을 중단하였고, 당은 여러번 안서절도사 전인완, 합가운과 부몽영찰을 임명하여 수차례 파병토벌을 하였는데, 지세가 험하고 토번이 가입하고 그들을 원조하여 공을 못이루고 반환하였다.

천보6년 3월 당현종이 안서부도호와 도지병마사에게 조서를 내려 사진절도부사(四鎮節度副使) 고선지로 하여금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만들어 군사 만명을 이끌고 소발율을 토벌하였다. 이 행군에 웅위한 총령(蔥嶺)을 넘어야겠기에 고선지는 출정전에 충분히 준비를 하였다.

모든 준비가 되기를 기다려, 부대를 거느리고 안서로 출발하여, 서쪽으로 향한지 15일에 발환성(撥換城)에 이르렀고, 다시 10여일을 경과하여 악슬덕(握瑟德)에 이르고 거듭 10여일에 소륵(疏勒: Kashgar, Xinjiang)을 경과하여, 그후 군을 지휘하여 남하하고, 총령을 올라가 밟고, 비상한 고난의 행군을 개시하였다. 총령은 현재 박미이고원(Pamir Mountains)이고, 천산산맥으로부터 곤륜산맥, 약자곤륜산맥과 도고습산 등 모인다. [由天山山脈、昆侖山脈、喀喇昆侖山脈和興都庫什山等交彙而成]

고원해발이 4000-7700미터로서 허다한 높은 봉우리를 호위한다. 파미이(Pamir)고원(高原)을 동, 중, 서로 나누면 동파미이는 가운데 산을 주로 하고, 해발평균 6100 m이며, 산봉우리 상대고도는 1100-1800 m이며, 산체는 둥글고 산간 골짜기는 넓고 평탄하여 해발 3690-4200 m이다.

당군 행로 노선은 단지 동파미이를 통과할 뿐 아니라, 또한 해발 7564 m 고도의 청령(青嶺)모사탑격산(慕士塔格山 :Muztag Mountain)을 통과해야되니, 그 곤란정도는 가히 상상할만하다. 당시 당군병사는 모두 개인 말을 소유하여서 서로 따라갔고, 병참학상 특정시간내에 보장될수있었고, 게다가 당군은 평평하고 넓은 산골짜기로 행군을 선택하여서 행군의 곤란을 최저로 줄였다.

20여일의 힘든 행군을 경과후 당군은 총령보착(蔥嶺守捉:Taxkorgan Tajik Autonomous County, Xinjiang)에 이르렀다. 연후 재차 서향하여 흥도고십산 북록 (興都庫什山北麓)북쪽 산기슭으로 가서, 또한 20여일 경과하여 달특륵만천 (達特勒滿川: 今瓦罕河-Wakhan Afganistan)부근에 도달하였다. 여기에 이르러 당군은 100여일 경과하여 산과 강을 통과하여서, 같은 해 6월에 제1단계 행군을 완성하였다.

그후 고선지는 병사를 삼로(三路)로 나뉘어 중앙아시아의 연운보진지(連雲堡Lianyun Fort (now the source of Langar, Punchi River, northeastern Afghanistan)을 가진 토번을 공격하려하여서 1. 일로는 소륵수착사 조숭비(疏勒守捉使趙崇玼)가 3000기병을 통솔하여 소륵수비대를 잡고 북쪽 골짜기에서 소륵 연운보로 진발하고; 2 일로는 가흥관통령(撥換守捉使賈崇瓘統領)의 군을 막고 잡고서 적불당으로부터 남하하고: 3 일로는 고선지와 중사 변령성(中使邊令誠)이 거느린 주력이 호밀국(護密國)을 따라 남하한다. 이 삼로병마는 7월 13일 진시에 연운보아래에서 회합하기로 되었다.

삼로병사는 정시에 출발하여 예정대로 도착하였다. 연운보 남면은 산에 의거하고 북편은 파륵천(婆勒川)에 임하였고, 작은 성속엔 토번군 천명이 있었고, 성남에서 십오리에 산에 의지하여 울타리가 있어서 토번병사 팔구천명이 있어서 멀리서 서로 후원하였다. 성아래에 조파륵천이 있어 하수가 험하고 물이 불어서 강을 건널 수없었다. 고선지는 주의깊게 물상황을 분석한 후 당군은 신속히 파륵천을 건너야겠다고 결정하였고, 아니면 토번수군이 일단 당군을 발견하면 반듯이 준비를 잘 하였을것이라, 그러면 연운보를 점령하기가 대단히 힘들것이었다.

이에 고선지는 세 산짐승으로 하신(河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장군에게 정병을 뽑고, 병사에게 각자 3일분 마른 양식을 준비하고, 다음날 새벽에 도강을 준비하였다. 장사는 이런 명령을 믿을수 없어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새벽 파륵천수위가 낮고 흐름이 느릴때 당군은 신속하게 파륵천을 건넜으니 결과적으로 사람은 깃대를 적시지 않고 말은 안장이 젖지 않고 모두 건너서 열을 세웠다. 고선지는 이를 보고 흥분을 억제치못했고, 부하에게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반쯤 건넜을 때 적병이 왔으면, 우리는 실패하였겠는지, 이제 이미 강을 건넜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를 도와 적을 격파할 좋은 기회다. “

그 후 고선지는 당군을 지휘하여 산에 올라 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토번수군은 미처 당군이 돌연 이곳에 이를것을 생각지 못해서 크게 놀라 황란중 산에 의지해 저항하였고, 굴러 떨어지는 나무와 돌이 비같이 쏟아져 오를 수없었다.

고선지는 낭장이사업(郎將李嗣業)을 맥도장(陌刀將)에 임명하여 명을 내리기를, “오전중에 반드시 적을 파하라!”. 이사업은 손에 깃대를 하나들고 맥도수를 이끌어 위험지구부터 올라가 힘껏 공격하여 신시에서 사시까지 토번을 대패시켰고, 수급이 5000이고 포로가 천여인이고, 나머지는 산골짜기로 모두 달아났다. 당군은 전마 천여필을, 의복과 기갑이 만여개를 얻었다.

십만의 토번군은 사륵성(娑勒城: Salle City)에서 산과 물의 험지를 지켰는데, 절벽골짜기를 자르고 성을 쌓아서 방어하였다. 당군이 신도하(信圖河)를 건너 성아래에 도달하여, 고선지는 영을 내려 정오에 반드시 적을 패배시켜라. 이사업은 군을 거느리고 산위를 공격하여 적을 참패시켰다. 토번군은 크게 무너져서 달아나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십분지 팔구였다.

탄구령(坦駒嶺: The Derkot Pass in the north of present-day Kashmir, north of Baltit in the northwest of present-day Kashmir, and east of the Mir Peak of Hindu Kashmir) 길이 40리에 산입구는 해발 4688 m이로 이는유명하고 험한 흥도고십산(興都庫什山)입구의 하나이며, 아래고개는 아로월성(阿弩越城)이다. 산구에 오르자면 반드시 빙하를 올라가야하며 그외에 다른 길이없다.

그안에 두 갈래의 빙천이 있어서 동면은 설와소이빙천(雪瓦蘇爾冰川: Shevasul Glacier)이고, 서면은 달과특빙천(達科特冰川: Dakot Glacier)이라 부르며 빙하의 출처는 탄구령산구(坦駒嶺山口)다. 이 두갈래의 빙하길이는 10 km이상이고, 빙하위에 얼음언덕에 기복이있고, 얼음탑숲이 서있고, 얼음절벽은 담같고, 갈라진 틈은 그물같아서 조금이라도 주의하지않으면, 미끌어지면 끝없이 깊은 못으로 떨어지거나, 갈라진 속으로 떨어져 빙하속에서 죽게된다.

고선지는 병장이 험한 길에서 전진하기를 두려워할까 걱정하여 몰래 20인 기병을 보냈고, 아노월호(阿弩越胡: Anu Yuehu)의 복장을 하고 인사하니, 그는 부장에게 말하기를, “아노월호가 와서 영접하니, 나는 아무걱정이 없네.”

산기슭(山邊)에 이르러 병장이 내려오려고 하지않으며 말하기를, “당신은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가?” 처음에 보낸 20인이 나와서 주장하기를, “아노월호가 대군을 영접하니, 우리는 이미 사이교(娑夷橋)를 끊었습니다.”

고선지는 마상에서 기쁨을 가장하여 병장에게 명하여 하산시켰다. 사리수(娑夷水)는 오래된 흐름이 약한 물로서 물위에는 한개의 등제교(藤制橋)가 있었고, 소발율이 토번과의 유일한 통로였고, 다리를 끊으면 토번이 원조를 할수없었다. 고선지는 영접하는 말한 후 기쁨을 가장하여 병사들이 들은 후 두려움이 없어져서 당군이 신속히 고개에서 내려와 아로월성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하산한지 3일후 아로월성수군은 과연 사람을 보내어 항복하였고, 다음날 당군은 순리로 아로월성으로 들어갔고, 입성후 고선지는 장군 석원경(席元慶)과 가루여윤(賀婁余潤)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우선 교량과 도로를 고쳤다. 다음날 고선지는 석원경에게 영을 내려 1000기병을 이끌고 소발율수부 얼다성(孽多城)아래에 이르러 그 왕에게 말하기를, “네 성을 빼앗지 않고, 네 다리를 부수지않고 오로지 네 길이 통과하도록 빌려서 대발율로 가도록하겠다. “성중에 5, 6개 수령이 있는데 모두 토번으로 피하기를 원했다.

고선지는 미리 석원경과 계책을 세워; “대군이 이르면 수령과 백성이 산골짜기 속으로 도망갈테니, 너는 명령과 선물로 그들을 맞이하며, 수령이 이르기를 기다려서, 그들을 잡고 내가 오기를 기다리라.” 석원경은 계책대로 시행하였고, 과연 포로가 된 수령 몇명이오니, 소발율왕과 토번공주는 황급히 석실로 몸을 피했고, 당군은 한동안 그들을 찾을 수없었다. 고선지는 당군 주력을 이끌고 도착후 수령5, 6명을 죽이고, 그 후 급히 석원경에게 영을 내려 토번의 등교를 절단하였다. 등교는 설다성에서 60리 떨어져 있어서 석원경은 해질 무렵에 등교를 끊었다.

등교가 끊어질 때쯤 토번병마가 파리수 동안에 이르렀고, 다리가 이미 끊어져서 그들은 단지 물건너서 보기만 하고 속수무책이었다. 등교는 화살 한번 쏘는 거리에 있었는데, 이걸 복구하자면 1년의 시간이 걸리며, 소발율은 일찍이 토번으로부터 속아서 길을 빌렸고, 겨우 이 다리를 가졌다. 이에 이르러 고선지는 재차 서서히 항복을 권해서 소발율왕은 토번공주를 이끌고 투항하여서 소발율국을 평정하여서 3000군대로서 주둔하고 수비하게 되었다.

소발율국평정이후 당군의 권위가 크게 일어나서, 불름(拂菻: Whisk), 대식(大食)등 72국이 모두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IV. 得勝歸來(득승귀래)

천보6년(747년) 8월. 고선지는 소발율국왕과 토번공주를 호위하여 적불당로(赤佛堂路)를 통과하여 전승하고 돌아왔다. 9월에 파륵천 연운보婆勒川連雲堡)에 가서 변령성(邊令誠)과 더불어 함께 귀환하였다. 9월말에 고선지는 회군하여 파밀천에 이르고 유단(劉單)에 명하여 첩보의 초안을 잡고, 이을라 중사판관(中使判官) 왕정방(王廷芳)을 경도에 보내어 승전을 고하였다.

이전에 사진절도사 부몽영찰(夫蒙靈察)에게 보고하지 않았기에 그의 질투와 원한을 일으켰다. 고선지 일행인이 하서에 돌아왔을 때 부몽령찰은 한명도 보내서 영접과 위로를 하지 않았다.

만났을 때 고선지를 크게 꾸짖었다. “너 고구려인이 누구로부터 진사를 얻었겠는가?” 고선지는 두렵고 불안하여서 회답하기를, ‘어사중승은 당신의 큰 힘입니다.” 부몽령찰은 믿지도 좋아하지도 않았고, 또 묻기를, “언기진수사와 도지병마사는 모두 병사와 말을 아는데 누구로부터 얻었는가?”

고선지는 회답하기를, “시어사중승은 모두 당신의 힘입니다. “부몽열찰은 말하기를, “그걸 알면 찹보를 나를 경과하지 않고 상주하였으니 어찌 이런고? 너는 죽임을 받아야겠다. 하지만 네가 노력하여 공을 세웠으니 너를 용서한다.” 고선지는 어찌 할줄 몰랐다.

변령성(邊令誠)은 비밀리에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였고, 아울러 말하기를, “만일 고선지가 공을 세웠지만 근심으로 죽으면 이후에 누가 조정을 위해서 일하겠습니까?” 황제가 이에 고선지를 홍려경(鴻臚卿), 대리어서중승(代理御史中丞)으로 승진시켜서, 부몽령찰의 사진절도사(四鎮節度使)직위를 대체(代替)하고, 부몽령찰을 수도로 오도록 명하니, 그는 두려워하였다. 고선지는 그때 그에게 배견(拜見)하며, 전과 같이 예를 하니, 그는 부끄러워했다.

부도호정간리(副都護程千裡), 오장 필사침(衙將畢思琛), 행관왕도(行官王滔), 강회순(康懷順), 진봉충(陳奉忠)등은 부몽영찰 면전에서 고선지를 나쁘게 말했었다.

고선지가 윗자리에 오른 후 정간리(程千裡)를 불러 꾸짖었다: “네 모습은 남자지만 내심은 여지무리이니, 어찌 이러한가? 또 필사침(畢思琛)에게 밀하기를, “너는 성동에 있는 천석의 종자밭을 빼앗었음을 기억하는가? 그걸 내게 반환하라.” 필사침이 말하기를, “ 그건 당신이 내게 준거요.” 고선지가 말하기를, “그때 나는 네가 두려웠기 때문인데, 아찌하여 지금 가련한가?” 그는 또 왕도(王滔)를 불러서 “나는 지금 너희들을 때리고 싶다”. 얼마후 그들을 놓아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제 더 성내지 않겠다. “히야사 전군이 안심하였다.

고선지가 안서사진 절도사(安西四鎮節度使)로 임명된 후, 봉상청은 경왕부녹사참군(慶王府錄事參軍), 충절도판관(充節度判官), 자금어대(紫金魚袋)가 되었다. 오래지 않아서 또 조산대부(朝散大夫)를 더하여서 특별히 전문적으로 사진(四鎮)의 창고(倉庫), 둔전(屯田), 갑장(甲仗=무기), 지도(支度=계산, accounting), 영전(營田=농업)등 일을 담당하였다. 이후 고선지는 출정할 때 항상 봉상청으로 후사(後使)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V. 縱橫邊疆(종횡변강:변방에서 활약하다)

천보8년 (749년), 고선지는 입조(入朝)하여 특진(特進)을 추가하여 좌금오위대장군동정원(左金吾衛大將軍同正員)이 되고, 아들 한명은 제5품관(五品官)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토화라(吐火羅)[현재 아부한 북부(阿富汗北部): Northern Afghanistan]의 엽호실리가라(葉護失裡伽羅)가 당정에 표를 올려, 갈사국(朅師國:Current central and northern Pakistan)왕이 토번에 친근하고 의탁하여서, 소발율군이 곤란을 받아서, 식량수송이 막혀서, 갈사국을 격파하려고 군대를 동원하여 당조에 안서병(安西兵)을 일으킬것을 청구하여, 다음해 정월에 소발율(小勃律)에 이르고 유월에 대발율(大勃律)로 전진하였다.

제1차 원정경험을 갖었기에, 고선지는 이번에 충분히 준비를 추가하고, 상황이 당군에 유리함을 더하여, 당군의 행군에 비록 곤란이 있었어도, 유리하였다. 천보9년(750년) 2월, 고선지는 갈사국군대를 격파하고, 갈사왕 발특모(朅師王勃特沒)를 포로로 잡았다. 3월 12일 당조정에서는 발특몰(勃特沒)의 형 소가(素迦)를 발사왕으로 책립하였다.

양차 원정을 경과하여 당조정으로 하여금 토번에 대한 전쟁중 전면승리를 취득하였기에 당조의 발전은 그 정상에 이르렀다. 동시에 고선지 자신은 극대의 영예를 받았고, 토번(吐蕃: Qinghai-Tibet Plateau)과 대삭국(大食國:Saracen)은 그를 산의 왕이라고 칭하였다.

고선지는 비록 거대한 성취를 하였지만, 그의 유일한 단점을 貪婪(탐람: 貪心並且不滿足)이었으니 다시 말하자면 탐식이 끝이 없었음으로 이 단점은 민족관계를 처리함에 폭로되었다.

당시 대식국(阿拉伯帝國Arab Empire)은 서남 아시아지역에 발흥하였고, 더불어 계속하여 동편으로 확장하였으며, 중앙아시아의 안국(安國), 화심(火尋), 무지(戊地), 석국(石國), 토화라(吐火羅)등 국가가 대식에 굴복하였고, 대식은 각국에 시기에 맞도록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다.

당과 대식(Arabian Empire)은 서방지역의 지배를 위하여 싸와서, 대식의 동진정책억제에 효과가 있었다. 당시에 현종이 크게 기뻐했기에, 당조의 변방지휘자는 전반적인 상황을 자주 무시하고 무리하게 행동하였으며 서부지역전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고선지의 탐람때문에 두 항복한 국가를 무리하게 공격하여 멸망시켰던 행위가 당의 서역정책의 완전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 중아시아의 석국(石國 昭武九姓之一都城拓折城 在今烏孜別克斯坦塔什干: 소무9성중의 1로서 도성은 석절성으로 현재the capital of Tuzhecheng, in present-day Tashkent, Uzbekistan) 은 Silk Road에 위치하여 농업이 발달하고 주민이 상업을 발달하여서 부유한 서방으로 일컬었다.

고선지는 석국의 재산과 부를 탐내어, 그것은 자기를 위햐여 빼앗을 생각을 하였다.천보9년 고선지는 석국왕이 번신례(蕃臣禮)를 하지 않는다고 거짓 비난하면서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러 전진하였다.

사실상 석국과 당조의 관계는 좋았고, 책부원구권971기록 [《冊府元龜》卷971記載 ]에 의하면 석국은 당조에 조공을 그치지 아니하였고: 천보2년(743년), 사위 강국대(康國大)를 수반으로 보내어 태염면(泰染緬) 선물을 올렸고, 천보5년(746년) 준마(駿馬) 15필을 보냈고, 석국부왕니나토둔굴야(石國副王伊捺吐屯屈也)는 사신을 보내서 선물을 했고: 천보 6년에 사자를 보내서 말을 헌증했고, 천보8년(749년)에 왕태자원은(王太子遠恩)이 관(關)에 들어와서 조근(朝覲)을 하였다.

서역각국에 비하여 석국왕은 당조에 대힌 테도는 진실로 공손하고 성실하였다. 석국국왕은 왕위를 계승한 이후 일찍이 당현종이 회화왕(懷化王)으로 책봉함을 입어 아울러 우대(優待)와 면죄의 철권(免罪的證明鐵券)을 받았다. 이리하여 당군이 도착한 후, 나구거비(那俱車鼻)는 고선지와의 화친약속에 동의하였다.

고선지는 거짓으로 사람을 보내어 석국과 화친을 약속하고, 연후에 그 준비가 없음을 편승하여 군으로 엄습하여서 석국국왕과 부하를 포로로 잡았다. 그후 고선지는 병사를 시켜 살육을 하고 심지어 노약자와 병자도 보내지 않았다.

이런 행위이후 고선지는 거문고 십여휘(瑟瑟十餘斛), 황금 낙타 5, 6개(黃金五六橐駝), 기타 말과 여러가지 상품(其餘口馬雜貨)이 모두 그 집으로 들어갔다.

석국과 똑같이 돌기(突騎)도 공격을 당했으니 그 지역 민중의 반란을 일으켜 서 당군은 이로인하여 크게 진압하였고, 피해자는 석국의 노약자외에 많은 무역하던 소무구성적 호상(昭武九姓的胡商) 들이었다. 게다가 고선지는 조정에 자신의 공적과 아홉나라오랑캐(九國胡)를 격파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천보10년(752) 정월 24일 고선지는 입조하여서, 포로가 된 돌기시가한(突騎施可汗), 토번(今青藏高原: Qinghai-Tibet Plateau), 추장, (吐蕃酋長), 석국왕(石國王), 갈사왕(朅師王)등을 받혔다. 나구거비(那俱車鼻)는 장안서북 개원문에서 당현종으로부터 죽음을 당했고 이발가한(移撥可汗) 또한 참형을 댱했다.

현종은 고선지에게 공훈을 높이 주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수여하였다. 오래지 않아서 당현종은 고선지의 서정의 자세한 내용을 알게되었지만, 그를 비호하고, 그의 죄상을 다스리지 아니하였고, 그때문에 고선지와 부하는 비록 멸국의 공은 있었지만, 오로지 중상은 못받았다.

멀지 않아서 당현종이 고선지를 무위태수(武威太守)에 임명하고 아울러 안사순(安思順)을 대신하여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임명하였고, 서역으로부터 이동시켰다. 왜냐하면 안사순은 풍자적으로 부하를 시켜 귀와 얼굴을 잘라서 고통을 주었다. 이때 감찰어사 배주(監察御史裴周南)는 상표하여 명령이 이르지못하니, 그는 마침내 우우림대장군(右羽林大將軍)을 임명시켰다.

해설: 昭武(소무): 隋 唐 時的政權名。在今 中亞 阿姆 、 錫爾 兩河流域,有 康 、 安 、 曹 、 石 、 米 、 何 、 火尋 、戊地 、 史 ,均為康居之後。其先 康王 舊居祁連山北昭武城,被匈奴所破,西逾蔥嶺至兩河流域,子孫繁衍,分王九國,總稱昭武九姓。參閱《隋書·西域傳·康國》。

 

VI. 怛羅斯之戰(달라사지전: Battle of Talas)

고선지의 연속적인 올바르지못한 악행때문에, 당조의 서역적 위세가 대단히 크게 하강하여서, 이로써 서역이 복종하지 아니하였다.

석국왕자는 많은 호인의 부락으로 도망가서 고선지의 탐폭한 행위를 호국소무(諸胡昭武)에게 고하였다. 모든 호인은 대노하고 대식국과 연합하여서 함께 안서4진을 공격하려고 했다. 대식국은 드디어 구실을 만들어 그의 확장계획을 실시하였다.

고선지는 이 일을 알게 된이후 불안하여, 드디어 선제공격을 결정하였다. 4월 고선지는 친히 번병과 한병 3만을 이끌고 대식국을 공격하였다. 당군은 깊이 대식국 700여리까지 들어가서 대식군과 맏닦드리고 달라사성에 이르렀다 (Also known as Zuluosi, which is now the city of Jiangbul in the southeast of the Republic of Kazakhstan),

당군인 수는 일설에 20,000-30,000인, 일설에는 60,000-70,000인이었고, 아라백(Arab)의 군고사중에 명확한 숫자가 없었다. (전쟁사전)

그 숫자가 어떻던지 가능한한 모든 군사를 동원시켰다고 믿으며, 90,000이상이라고는 믿을 수없다.

쌍방이 5일간 격전을 하였지만 승부를 볼 수없었다. 당군중에 갈라녹부대(葛羅祿部眾)가 돌연 반란을 일으켜서, 대식군과 더불어 당군을 협격하여 고선지는 대패하고, 야간에 도주하였다.

도로는 험하고 좁고 발한나부중(拔汗那部眾)은 전면에 막고 있었고, 인마는 도로에 꽊찼고, 다행히 우위위장군이사업(右威衛將軍李嗣業)이 크게 싸워서 한줄기 혈로를 열어 겨우 달아날 수있었다. 사졸은 비교적 약간 죽어서 천여명 정도였다.

달라사전후 고선지는 안서사진절도사(安西四鎮節度使)의 직을 잃었고, 입경하여 우금오대장군(右金吾大將軍)에 임명되고, , 절도사(節度使)직은 왕정견(王正見)이 담임하였다.

천보11년(752년) 왕정견이 사망하고, 봉상청이 절도사직을 가졌다. 천보 14년 (755년), 고선지는 봉밀운군공(封密雲郡公)으로 봉함을 받았다.

 

VII. 出兵勤王(출병근왕: 임금을 위하여 나랏일에 힘씀.)

천보연간 가무에 파묻히고, 당현종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이림보(李林甫)와 양국충(楊國忠)등 간신에게 밑기고 향락만하니 정치는 날이 갈수록 부패하여졌다.

천보 14년(755년) 십일월 구일에 안록산(安祿山)이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범양(從範陽: 今北京城西南)에서 15만군을 동원하여 당조를 반역하여 남하하여 낙양과 장안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중원에는 오래동안 전쟁이 없었기에, 많은 군현에 병사를 쓰지 않아서, 전혀 변고에 대한 준비가 없었다. 지방관리는 반군이 장차 이른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나거나, 성문을 열고 맞이하였다.

반군은 멀리 남하하여서 거의 저항이라곤 만나지 않고, 아주 쉽게 황하이북 대부분지역을 점령했다.

당현종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황급히 사람을 경성(Beijing)에 보내어 안서절도사 봉상청(安西節度使封常清)을 낙양으로 보내어 적과 싸울 병사를 모집하였다.

또 급히 안록산에 대한 전면적인 방어를 획책하여서; 곽자의(郭子儀)를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로 임명하고 우우림대장군왕승업 (右羽林大將軍王承業)을 태원윤(太原尹)으로 위위경장개연 (衛尉卿張介然)을 하남절도사(河南節度使)로, 정간리(程千裡)를 노주장사(潞州長史)로 임명하였으며; 영왕이완(榮王李琬)을 원수(元帥)로, 고선지(高仙芝)를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하여서, 비기(飛騎), 장기(彍騎)와, 삭방(朔方), 하서(河西), 농우등지병사(隴右等兵)를 거느리고, 또 출금(出禁) 중인 돈을 풀어서 관중과 삼보지구(指 关中 及三辅地区)의 신병을 모집하니, 오만명이 되었다.

고선지는 장안에서 출발하여 현종은 친히 근정루(勤政樓)에서 영왕과 고선지를 위하여 연회를 거행하고 또 망춘정(望春亭)에 이르러 떠나도록 하고 아울러 변령(邊令)을 명하여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고, 섬군(陝郡: 今河南三門峽市西)에 이르러 주둔하게 하였다.

12월 안록산은 부대를 거느리고 영창(靈昌: 현재 하남활현동)으로부터 황하를 건넜다. 반군은 모두 정예부대이기에,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 아닌곳이 없었다.

봉상청은 비록 용병을 잘 하지만 모집한 병사는 겨우 모두 시정지역의 장사치들이었으니, 반군의 급한 칼날에 어찌할 줄 몰랐으니, 11일에 봉상청군은 사수(汜水)에서 패하고, 13일에 안록산은 동경낙양(東京洛陽)을 공격 함락시켰고, 봉상청은 패잔병을 이끌고 섬군(陝郡)으로 퇴각하여 지켰고, 섬군태수 두정지(竇廷芝)는 이미 하동(河東)으로 달아났고, 성중 관리와 백성 모두 이미 흩어져 달아난 상태였다.

봉상청은 이지역에서 지키고 있던 고선지에게 말하기를, “내가 매일 혈전을 해도 적의 기세를 당할 수없으니, 하물며 동관에 군사는 없고, 만일 반군이 동관을 공격하여 격파하면, 장안이 위험하겠고, 섬서지구(關陝之地) 즉 관중(關中)이 위험하여, 관섬지구를 방어할 수없으니, 군사를 이끌고 전에 갔던 동관(潼關)으로 가서 반군과 대항하십시오. 이는 당시 병력의 불균형상태에서 현명한 행위였다.

고선지는 봉상청의 상세한 보고를 듣고 그의 말이 절대로 틀림없었기에 그의 의견을 받아드렸다. 고선지는 급히 태원창(太原倉)을 열고 창고속의 옷 전부를 장사에게 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고, 군사를 거느리고 동관방면으로 후퇴하고, 중도에 반군에게 추격을 받으니 관군은 한번에 무너지고, 갑옷, 병기, 식량은 모두 땅에 버리고 이것들이 백리에 걸쳤다.

당군은 동관에 퇴각한 후, 고선지는 마상에서 군진과 대오를 정돈하고 수비를 보강하고, 위험을 딛고 싸웠고, 사기는 점차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안록산부장 최건우(崔乾佑)가 군을 이끌고 쫓아와서 공격을 해도 성공치 못하고 겨우 섬군으로 퇴각하였다.

안록산 부장 최건우는 군사를 거느리고 섬군, 임녀, 홍농, 제음, 복양, 운중등 [陝郡,臨汝、弘農、濟陰、濮陽、雲中等]군과 도시가 안록산에게 모두 항복하였다.

당시 당왕조의 삭방, 하서, 농우등지[朔方、河西、隴右諸道]의 군사는 아직 장안에 이르지못했고 관중은 진동하였다. 다행히 안록산이 낙양에 머물어 황제가 될 준비를 하였고, 전력으로 진격을 하지 않아서 고선지와 봉상청에게 도움이 되어, 때에 밎추어 동관으로 퇴각 수비하고 방어준비가 진행되었고, 반군의 공세를 막았고, 관중국민의 황급한 상황을 점차 인심시켰다.

 

VIII. 枉死刀下(왕사도하; 칼 아래 억울한 죽음)

당현종은 봉상청이 병패하였음을 듣고, 그의 관작을 없애고 그로하여금 백의로 고선지군중에서 일하도록 하였고, 고선지는 봉상청에 명하여 군의 좌우로 순찰하도록 함으로써 자기를 돕도록하였다.

고선지가 군을 거느리고 동정(東征)할 때 감군변령성(監軍邊令誠)은 일찍이 고선지를 향하여 몇가지 건의하였으나 고선지는 듣지 않아서 변령성으로 하여금 미음숙으로 한을 품게 하였다. 고선지가 물러가 동관을 지키고 있을 후 변령성은 조정에 들어와 임금께 아뢰고, 고선지와 봉상청의 패배를 반영하여 말하기를, “봉상청은 반군이 강대하다고 하여 군심을 크게 동요시키고, 고선지는 섬군수백리를 버렸고, 남몰래 병사의 양식과 상을 주지 않습니다. “ 당현종은 변령성의 일방적인 보고를 들은후 대노하여 변령성을 보내서 군중에서 고선지와 봉상청을 참하도록 명하였다.

천보 14년 12월 28일 (공원 756/01/24), 변령성이 동관에 이르러 먼저 봉상청을 불러오게 하고, 그를 향하여 칙서를 알리며, 그를 참수하여 시체를 갈대에 폭로하도록하였다.

고선지는 관서에 돌아온 후 변령성은 200명 도부수를 데리고 고선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어사대부는 사형을 받아라.” 고선지는 급히 말에서 내려 말하기를, “내가 퇴병하였음은 유죄이니, 죽을 죄는 감히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몰래 상과 군량을 없앴다고 함은 중상이다. “ 그는 변령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땅이 있으며, 장수는 그 사이에 있스니, 그대는 모르는가?”

그는 머리를 돌려 부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을 모집한 후 당연히 반군을 쳐서 모두 중상을 받을 걸 생각하였으니, 오로지 반군의 힘이 강하여 후퇴하여 이에 이르렀고, 이는 동관의 수비를 강화함이었다. 내가 유죄라면 너희는 어찌 말하겠는가? 만약 유죄라면 너희도 억울하다고 부르짖을 것이다. “ 전군은 이에 부르짖었다. “억울하다.” 함성은 땅을 흔들었다.

고선지는 봉상청의 시체를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내가 뽑아서 또한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 나는 너와 함께 죽겠으니 이게 명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말이 끝나고 죽음으로 갔다.

고선지는 봉상청과 함께 당시의 명장이었고, 그들의 죽음은 군대의 기세를 죽음으로까지 흔들었고, 이에 당조정은 두 사람의 작전경험이 많은 대장을 잃었고,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데 엄중하게 불리한 영향을 주었다.

고선지는 당현종시기의 명장이었다. 그는 안서를 수비하여, 당의 서쪽 변방의 안전을 지켰고, 서역과의 연계를 강화한 공헌이 있다. 그가 물러서 동관을 지킨 건 반군이 장안으로 향안 서진(西進)을 저지하기에 유리하였다. 오로지 간신의 모함과 당현종의 편향된 들음과 믿음으로 그는 죽었으니 사람으로하여금 애석게 한다.

 

1, 高仙芝(고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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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少年戎馬(소년융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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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帝國雙壁(제국쌍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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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得勝歸來 1(득승귀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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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得勝歸來(득승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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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縱橫邊疆(종행변강:변방에서 활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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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Battle of Ta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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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安史之亂(안사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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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安西都护府(안서도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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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怛逻斯之战(달란사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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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阿拉伯骑兵(아랍백기병: Arab Cavalry)

 

11. 阿拉伯骑兵.jpg

 

 

12. 唐帝国最强盛时期(당제국최강성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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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高仙芝征服小勃律之战行军路(고선지정복소발율지전행군로)

 

 

13. 小勃律之战行军路.jpg

 

 

Kwan Ho Chung - September1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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