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8 12:31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83446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 물리학자를 조명한 ‘오펜하이머’가 15일 광복절 개봉한다. ‘인터스텔라’(2014)로 천만 흥행을 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이다. 북미에선 지난달 21일 ‘바비’와 나란히 개봉했다. 할리우드 영화를 전 세계 최초로 종종 틀어주는 한국에서 왜 이 영화만 광복절에 맞춰 뒤늦게 왔을까. 유니버설 픽쳐스 코리아 측은 “한국 대작들의 개봉 일정을 고려한 결정”이라 했지만, 광복절 특수를 노린 것이라는 해석이다. ‘오펜하이머’의 실제 모델인 줄리어스 오펜하이머(1904~1967)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패전을 앞당긴 원폭 개발 프로젝트를 주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https://foreignpolicy.com/2013/05/30/the-bomb-didnt-beat-japan-stalin-did/
The U.S. use of nuclear weapons against Japan during World War II has long been a subject of emotional debate. Initially, few questioned President Truman’s decision to drop two atomic bombs, on Hiroshima and Nagasaki. But, in 1965, historian Gar Alperovitz argued that, although the bombs did force an immediate end to the war, Japan’s leaders had wanted to surrender anyway and likely would have done so before the American invasion planned for Nov. 1. Their use was, therefore, unnecessary. Obviously, if the bombings weren’t necessary to win the war, then bombing Hiroshima and Nagasaki was wrong. In the 48 years since, many others have joined the fray: some echoing Alperovitz and denouncing the bombings, others rejoining hotly that the bombings were moral, necessary, and life-saving.
https://cafe.daum.net/snumd/JzL/443
온기철: 과연 원폭은 일본의 항복을 앞당겼을 까?
일본이 미군 지상군이 일본 영토에 들어와 일본군과 전투를 벌리기
전에 항복한 이유는 소련군이 만주와 사할린으로 진공 했기 때문
이었다. 원자폭탄의 위력에 복종 하여 본토에 들어오는 미군과
접전 하기 전에 무조건 항복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 소련은 1941년4월, 5년동안 서로 중립을 지키기로 중립조약을
맺었다. 1946년에 이조약이 만기가 된다. 소련은 독일의 침략을 받아
유롭 전선에 집중해야 했다. 만약 일본이 시베리아 등지를 침략하면
병력을 동부로 분산할 수가 없었다. 한편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하는
중이고 미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워 지고 있기 때문에 소련이 동쪽에
관심을 두는 것을 원치 않았다.
1945년 일본의 사정은 대단히 나빴다. 미국은 하루가 멀다하고 일본
전역에 폭격을 감행하여 삼십만 이상의 도시는 거의 대부분이 파괴
되었다. 일본의 고위 지도자들은 히로시마 원폭 피해에 대해서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본토를 방위하기 위한 병력은 건재 했고
도시의 파괴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전쟁에서 지는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조건부
항복을 추진 했다. 미국은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목표였다.
천황을 보호하고, 현재의 정부체제를 유지하고, 전범 재판을 피하고,
가능하면, 정복한 영토를 다만 얼마라도 건질려고 했다.
포츠담 선언에 중립이라는 이유로 사인을 하지 않은 스탈린과 일본
당국은 접촉했다. 그에게 전쟁종식을 중개 해달라고 요청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확답을 하지않고 차일피일 중재를 연기했다.
독일이 패전한 다음 부터 한편으로 스탈린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쪽으로 이동 했다. 일본이 그에게 속은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그렇지만 일본으로서는 그가 마지막 희망이었다.
소련은 1945년8월6일 부터 8월9일 사이에 만주와 사할린으로
진공 했다. 그리고 소련도 포츠담선언에 사인 했다. 미국은 8월6일
히로시마에 8월9일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 했다.
8월9일 오전 10시반에 열린 일본 최고회의에는 일본천황 히로히또가 참석하고
있었다. 당시에 중요한 사안은 일본최고의 권력자 6명으로 구성된
최고회의에서 결정 했다.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는 회의중 11시2분에
이루어 졌다. 이들이 원폭투하에 대해서 보고를 받은 것은 회의가 끝난
그날 오후였다. 포츠담선언 수락 문제를 논의 하고 표결에 붙였더니 3:3이 었다.
이때 천황이 나서서 수락을 결정 했다. 그리고 그다음날 일본은 천황의 지위를
인정해 주면 포츠단선언을 수락하겠다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포츠담선언
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있었다.
소련의 만주와 사할린 진공은 일본이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나라도 중과부적인 데 두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한다는 것
은 말이 안되었다. 더구나 일본의 조건부 항복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스탈린의
배신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택하게 했다.
미국은 천황 보호 조건도 받아주지 않고 8월14일 까지도 400여대의 B-29가 출격하
여 폭격을 퍼부었다. 결국 일본천황은 8월15일 무조건 항복을 만천하에 공표 하였다.
아무리 폭격을 가해도 지상군이 점령하지 않으면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가 없다. 일본
장군들은 미군이 본토에 들어 오면 미군에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하여
미국이 일본의 조건을 들어주고 전쟁을 종식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소련이 침공 하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인류 최초로 발명한 원자폭탄이 일본에서 그 위력을 인류에게 보여주지 않았
다면 언젠가는 실전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원폭이 실전에 쓰여졌을 가장 가능한
전쟁은 한국전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