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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동심초(同心草)

2017.01.09 19:19

정관호*63 Views:557

동심초(同心草)
 

作者 薛濤(작자 설도)
1hXyING7IkBT6p7m4rtQEGm5rtThMiReKNSLFC65한국외대 중국언어문화학부박재우(朴宰雨) 교수가 쓴 글을 최근에 읽고 동심초 가곡과 거기에 관련된 설도의 당시를 실으려한다. 이 동심초는 많이 알려진 노래다. 다음에 가사가 있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내가 또 알게 된 사실은 당조 여류시인 설도의 춘망사를 안서 기억이 번역했다는 사실이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그리하여 춘망사를 찾아보았다. 그녀의 생애가 파란만장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박교수는 한대의 유명여류시인 탁문군에 비하였는데, 나에게는 차라리 우리 이조 여류 황진이를 연상케하였다. 우선 춘망사로 시작하고 다시 이 시를 보이고 그리고 동심초 가락을 듣고자 한다.
 

 
春望詞 薛濤
春望詞 薛濤
춘망사 설도

花開不同賞,花落不同悲。
화개부동상이요, 화락부동비를.
欲問相思處,花開花落時。
욕문상사처하니, 화개화락시를.

攬草結同心,將以遺知音。
남초결동심하니, 장이유지음을.
春愁正斷絕,春鳥復哀吟。
춘수정단절이요, 춘조부애음을.

風花日將老,佳期猶渺渺。
풍화일장노하니, 가기유묘묘를.
不結同心人,空結同心草。
불결동심인이요, 공결동심초를.

那堪花滿枝,翻作兩相思。
나감화만지하야, 번작양상사오?
玉箸垂朝鏡,春風知不知。
옥저수조경하니, 춘풍지부지오?
봄날의 소망
송대 여류시인 설도

꽃이 피어도 함께 완상하지 못하고.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하지 못하네.
상사처를 묻고자 하니,
꽃 피고 꽃 지는 시절이로다.

풀 뜯어 한마음 묶어서,
장차 지음에게 보내려 하네.
봄 시름 바로 끊어지려 하는데,
봄새들이 다시 구슬피 우네.

바람 속의 꽃은 나날이 시들어 가고,
만날 기약 아직 아득하기만 하네.
마음을 함께 한 님과는 맺어지지 못한 채,
공연히 동심초만 맺고 있네요.

어찌 하리 꽃은 나뭇가지에 가득하건만,
서로 서로 그리움을 노래하네.
두 줄기 눈물은 아침 거울에 떨어지는데,
봄바람은 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春望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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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나라 시인 안서 김억은 일제시절부터 육이오 동란까지 활동하였고 김소월의 스승이었는데 그가 우리 정서에 맞게 번역을 하여 제목을 동심초라고 지었고, 또 인기있는 가곡이 작곡되어서 많은 가수들이 애창하였다. 아래에 권혜경의 노래를 YouTube로 올린다. 작곡자는 요석 김성태로 알려져 있다.

 
동심초(同心草) 안서 김억

1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2. 바-람에 꽃이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길은 뜬 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해설

이 시를 지은 설도(AD 768-832)는 자가 홍도(洪度)로 본래 지금의 서안(西安)에 해당하는 장안(長安) 사람이다. 아버지 설운(薛鄖)은 조정의 관료로 있었는데 학식이 연박(淵博·넓고 깊음)하여 어렸을 때부터 설도에게 글을 읽히고 시문을 짓게 하였다. .
설도의 미래 운명과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즉 부녀가 집 정원에 앉아 오동나무를 바라보고 있다가 아버지가 먼저 한 구 읊었다.
‘마당에 있는 오랜 오동나무 한 그루, 줄기가 구름 속까지 치솟았구나(庭除一古桐, 聳干入雲中).’
그러자 설도가 대구를 달았는데 이러하였다.
‘가지는 남과 북에서 오는 새를 맞고, 잎은 오가는 바람을 보내는구나(枝迎南北鳥, 葉送往來風).’
부친은 이 대구를 듣고 그 재주를 기뻐하면서도 이 시구가 딸의 ‘동서남북으로 오가는 손님들을 맞고 보내는’ 운명이 예견되는 것 같아서 걱정을 했다고 한다.
얼마 후 부친이 권력자의 비위를 거슬러 사천 성도(四川 成都)로 폄적(貶謫·벼슬을 떨어뜨리고 귀양 보냄)하게 되자 온 가족이 함께 이사를 왔는데 또 몇 년 되지 않아 설도 나이 14세에 아버지가 풍토병에 걸려 죽게 된다. 16세 되던 해 모친을 봉양하고 가사를 꾸리기 위해 음률을 잘 이해하고 언사(言辭)를 지혜롭게 풀며, 시부(詩賦)에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예견된 운명처럼 설도는 결국 악기(樂妓: 노래를 부르는 고급 기생, 수청은 들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로 적(籍)을 올리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의 뛰어난 시적 재능은 785년 사천절도사로 온 위고(韋臯)의 눈에 들어 공문을 작성하고 장서를 관장하는 교서(校書)라는 벼슬자리를 추천받게 되고 사람들로부터 많은 중시를 받게 된다. 설도는 평생 위고 이래 총 11명의 절도사로부터 불려 다니며 많은 시문을 짓게 된다. 설도는 곧 시단에 널리 이름이 나 백거이(白居易.772-846), 원진(元稹.779-831), 두목(杜牧.803-852) 등 당시 명망 있던 시인들과 많은 시적 교류를 했다. 현재도 원진 및 백거이와 주고받은 많은 창화시(唱和詩)가 남아 있다.
설도는 느낀 바 있어 나중에 돈을 내고 악기의 적에서 탈퇴하여 자유롭게 살게 된다. 설도 41세 때 시작된 10세 이상 아래인 원진과의 늦사랑이 천고에 전해지고 있다. 원진은 설도와 많은 연정의 시를 주고받는데, 그녀를 한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짝을 이룬 탁문군(卓文君)과 같이 거론하기도 했다.

주석

欲問(욕문); 묻고자 하다, 알고 싶다. 相思; 그리워하다. 그리운 님, to yearn, to pine
攬(람); 잡아매다, 손에 쥐다. 將以; 장차 그로써. 遺; 주다, 보내다.
春愁(춘수); 봄의 근심, 이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風花(풍화); 風中的花。指用華麗辭藻寫景狀物的詩文。바람속의 꽃.
佳期(가기); 좋은 기약, 만날 날.
渺(묘): 아득하다. 結同心人(결동심인); 마음을 함께한 님과 맺어지다.
堪(감); 할 만하다. 견디다, 감당하다.
翻作(번작); to compose, to write words to a tune. 작문 혹은 작곡하다.
玉箸(옥저), 옥으로 만든 젓가락처럼 흘러내리는 눈물. 두 줄기 눈물.
한갓되이; 헛되이



 
황성옛터 Youtube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서 잠 못 이루어,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님 계신 전선 Youtuve - 금사향


태극기 흔들며 님을 보낼 새벽 정거장
기적이 울었소
만세소리 하늘높이 들려오던 날
지금은 어느 전선 어느 곳에서
지금은 어느 전선 어느 곳에서
용감하게 싸우시나 님이여 건강하소서
두 손을 붙잡고 임의 축복 빌던 정거장
햇빛도 밝았소 파도치는 깃발 아래 헤어지던 날
지금은 어느 전선 어느 곳에서
지금은 어느 전선 어느 곳에서
용감하게 싸우시나 임이여 건강하소서.

울며헤진 부산항



울며헤진 부산항을 돌아다보니
연락선 난간머리 흘러온달빛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슬프더라
더구나 정들은 사람끼리 음 - - - -

달빛아래 허허바다 파도만치고
부산항 간곳없는 수평천리길
이별만은 무정터라 이별만은 야속터라
더구나 못잊을 사람끼리 음 - - - -

알뜰한 당신



울고왔다 울고가는 설은 사정을
당신이 몰라주면 누가 알아주나요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
무슨 까닭에 모른체 하십니까요

만나면 사정하자 먹은 마음을
울어서 당신 앞에 하소연 할까요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
무슨 까닭에 모른체 하십니까요

아주까리 선창



아주까리 선창 우에 해가 저물어
천리타향 부두마다 등불이 피면
칠석날 찾아가는 젊은 뱃사공
어서 가자 내 고향 ~ 아주까리 섬

(대사) 사공님 오시마는 날짜가 오늘이 아닙니까

아주까리 선창에 칠석달이 둥그렇게 올랐소
열두척 나룻배에 꽃초롱을 달고
오시마는 날짜가 정녕 오늘입니다
동해 바다에 섬도 많고 꽃도 많지만
이 아주까리 선창으로 어서 오세요 네

뱃머리에 흔들리는 피마자 초롱
동백기름 비린내가 고향을 안다
열두척 나룻배에 방어를 싣고
어서 가자 내 고향 ~ 아주까리 섬

목포의 눈물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쪼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는가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비내리는 고모령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 턱을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맨드래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물방아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내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눈물 어린 인생고개 몇 고개이더냐
장명등이 깜박이는 주막집에서
손바닥에 서린 하소 적어가면서
오늘밤도 불러본다 망향의 노래.

고향초 장세정



남쪽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나르면
뒷동산에 동백꽃이 곱게 피는데
뽕을 타는 아가씨들 서울로 가고
정든 고향 정든 사랑 잊었단 말인가

찔레꽃이 한잎 두잎 물위에 날으면
내 고향에 봄은 가고 서리도 찬데
이 바닥에 정든 사람 어디로 가나
전해오는 흙냄새를 잊었단 말인가?

가거라 삼팔선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건만/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리 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삼팔선을 헤맨다

아 어느 때나 터지려느냐/아 어느 때나 없어지려느냐/
삼팔선 세 글자는 누가 지어서/이다지 고개마다 눈물이더냐/
손 모아 비나이다 손 모아 비나이다/삼팔선아 가거라.
 
Kwan Ho Chung-January 10, 2017
가보비화(家寶祕話) : 알려지지 않은 가문의 보물 이야기

 

1. 서론

이 보물이 우리 집안으로 들어 온 건 어느 해인지 확실히는 모른다. 그러나 이 귀한 보물이 우리 가문으로 들어오게 된 내용은 어머니로부터 잘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 보물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에 아마 독자께서 믿기 힘들겠다고 생각한다.
이 믿기 힘들고 게다가 증거도 없는 이야기를 왜 쓰려고 하는가?
여기에는 보물이란 의미보다도 더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가 있기에 한 번 이곳에 올릴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시작을 하겠다..

2. 본론

이조 말경에 전라도 유지 오혁씨란 분이 조부님께 이 보물을 맡겨 놓고, 아주 큰 빚을 마지막으로 얻었고, 만일 언제까지 상환하지 못하면 조부님께 드린다는 각서를 썼다.
그런데 오혁씨는 그 후 그 돈을 모두 탕진하고 갚기는 고사하고 사망까지 하게 되어서 자연히 이 보물을 조부님의 소유로 되었다가 부친께 내려왔다.
도대체 무슨 보물이기에 이렇게 뜸을 드리는가?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 보물은 다름 아닌 중국의 원(元)나라의 옥새(玉璽)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어떻게 전라도 유지였던 오혁씨가 이걸 소유하게 되었는지 시초부터 설명을 하는 본문을 시작하고자 한다.

(1) 옥새(玉璽)란 무언가?

그 나라 군왕의 도장이라고 하면 된다. 다시 말하자면 군왕이 옥새 진품을 갖지 못하면 그만큼 정통성이 줄어든다. 우선 여기서 백도백화(百度百科)를 참조한다.
玉璽 (皇帝的印章) 編輯 討論
玉璽,專指皇帝的玉印,至高權力的像征,始於秦始皇。古代印、璽通稱,以金或玉為之。
璽始出於周,到了周朝才有璽和印之分,皇帝用的印叫璽,而臣民所用只能稱為印。
出處 : 《史記·秦始皇本紀》:“令子嬰齋,當廟見,受玉璽。”
李商隱《隋宮》詩:“玉璽不緣歸日角,錦帆應是到天涯。”

Foreign languages: Imperial Seal(英语)、御璽(日语)

해석:

옥새: 황제의 인장(印章) 즉 도장 흑은 인감을 말한다.
옥새란 오로지 황제의 옥도장을 가리키며, 가장 높은 권력의 상징이며, 진시황 때 시작하였다. 고대에는 “인(印)”과 “새(璽)”로 통칭하며 금 혹은 옥으로 만들었다.
“새”란 말은 주(周)나라 때 비로소 나왔고, “주나라 조정”에 이르러 비로소 “새”와 “인”을 나누어서 황제가 사용하는 도장을 “새”라고 부르고, 신하나 백성이 사용하는 것을 오로지 “인”이라고 불렀다.
사기 진시황본기: “자영”으로 하여금 목욕재계를 하고 묘당에 알현하려 옥새를 받았다.
아래에 옥새 사진 두 장을 백도백과에서 받아서 여기에 실었으며 그 모습은 우리 옥새와 비슷하였는데 우리 옥새에서는 손잡이에 쌍룡 둘이서 반대방향으로 향하며 나란히 배치되어 여의주를 다툰옥새의 손잡이다.

 
御璽圖冊(옥새도책) 漢語詞彙, 拓撲學名詞라고 하니 이는 위상배치학이란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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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隆玉璽(건륭옥새): 건륭황제 당시 옥새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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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나라 황제로부터 고려인 홍씨에게로 소유자가 바뀌다.

이 시작은 우리나라 고려 말로 소급한다.
물론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 되어 복종을 하였으며, 역사에 나오듯이 그들은 고려 처녀를 선호하여서 똑똑하고 인물이 좋은 고려처녀를 많이 데려가서 궁중으로 들어보냈고, 잘 발탁이 되면 황제의 총애까지 받게 되는 일이 있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고, 어머니는 그 내용을 국한문으로 적어서 옥새갑(玉璽匣)속에 넣어두었다.
그 당시 고려의 홍씨집 딸이 그런 행운을 얻어 황제의 총애를 받아서 홍귀인(洪貴人)이 되었고 또 세력도 대단하여서 자기의 부친과 오라버니를 불러서 그들도 원나라에서 벼슬까지 하였고 게다가 궁궐에 무상출입까지 하는 혜택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 고려도 말기였지만, 원나라 역시 패망하기 직전이었다. 어느 때 반도들이 한밤 중에 대궐을 침범하여 대궐에 불을 질러 그 타오르는 모습은 대낮 같았다.
이때 그 홍씨 부자(父子)는 홍귀인의 신변을 염려하여 대궐로 들어가서, 홍씨 처소에 이르니 그 때 황제는 마침 홍씨 처소에 있다가 난적들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그 몸에 지녔던 옥새를 홍씨가 들고 어쩔줄 몰라하다가, 자신의 부친과 오라버니를 보고서 이 옥새를 전해 주면서, “두분은 빨리 고려로 피신하고, 추후 난리가 진정될 때 이 옥새를 잊지 말고 황제께 바치세요.” 말한 후 신변에 비장했던 칼을 뽑아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었다. 아마 죽은 황제를 따라가는 열녀의 도리를 다 했다고 믿는다.
한편 놀란 홍씨 부자는 정신이 오락가락할 지경이었고, 이제와서 사실상 자기들이 할 일은 없었기에 부자가 밤을 도와 고국 고려로 들어왔다.
이 당시 고려조정에는 친원파와 반원파가 서로 싸우고 있었는데, 원래 친원파가 득세하고 반원파는 무력했다가 이제 원나라가 망할 지경이 되니 드디어 반원파의 세상이 와서 친원파를 처벌하고 귀양을 보내던 시절이기에, 두 부자는 물론 반원파의 미움을 샀던 터인지라, 그 부자를 전라도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니, 그 가족 모두 두 사람을 따라 그리로 귀양생활을 하였고, 또 그들의 죄가 크지 않으니, 멀지 않아서 면죄(免罪)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결국 고려조가 없어지고 이조가 들어서니, 이 중요치 않은 귀양인은 조정에서 아주 잊어버린 인물들이었다.
이러니 한때 딸의 덕에 원나라조정에서까지도 대우를 받았던 부자와 그 가족은 전라도 외지에서 살면서 별 도리없이 동네 사람들처럼 농부가 되어서 대대로 살게 되었고, 그 집 가장이 죽을 때에는 맏아들에게 옥새를 전하며 이 이야기를 하여 주어서 이렇게 대대로 내려와서 이조말까지 이르렀다.
이때쯤 세상에 큰 변화가 와서 이 멀고 먼 전라도 골짜기까지 개화의 바람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깊고 깊게 숨기고 파묻혔던 대비밀이 한 입 걸러, 두 입 걸러 결국 마을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다. “500년 전에 이곳으로 귀양온 홍씨네 큰 집에 중국 황제의 옥새가 있다고 하는구만!”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것이 모든 사람의 수닷거리가 되었다.
그러니 그곳 원님이 알게 되어서 수하 사람들과 상의한 후 결국 그 집 주인을 불러서 문의하였다. 원님, “내 들으니 네 집에 중국 옥새가 있다고 하니 사실이냐? 여기서 거짓말을 하면 중벌을 받으리라.” 하는 원님의 독촉에 주인은 아무래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 소인의 조상이 원나라에 갔을 때 이런 저런 일로 그 원나라 마지막 황제가 소지했던 옥새가 저희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원님, “아하, 그렇구나. 참 기이한 일이로다. 그 대원제국의 황제의 옥새가 여기서 발견되다니!” 하고 한참 생각에 빠졌다.
곧 정신을 가다듬은 원님은 다시 그 위엄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홍씨 백성은 들어라. 이 지극히 귀중한 보물은 너희같은 천민이 가질 수 없는 법이다. 당연히 나라에서 가지셔야 하니, 군졸이 너를 데리고 너희 집에 가면 당장 그 대장에게 양도하여서 내가 한양에 계신 전하께 올리겠다.” 이리하여 이 불쌍한 민초는 그 고을 원님의 횡포에 항의 한 마디도 못하고 옥새만 빼앗겼다. 그러니 동네사람들은 처음에는 홍씨네가 옥새를 가졌다고 시기까지 할 정도였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많은 동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이런 소문이 그 근방으로 심지어는 제법 먼 곳까지 퍼지게 되었다. 그곳에 오혁씨라는 유지 한분이 있었는데, 빠르게 변화하는 세성에 많은 지식과 상식이 있었던 분이었다. 오혁씨는 그 일을 듣고 생각해보니, 이렇게 부당하게 탈취한 정부처사에 불만도 가졌고, 또 재판을 하여서 찾을 도리를 강구하게 되었다. 결국 오혁씨가 홍씨 가장을 만나서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는 “대한제국의 헌법”이란게 있어서 백성의 재산을 나라의 왕도 빼앗을 수 없소이다. 내가 당신을 대변하여 고소하여서, 만일 승소하게 되면 우리가 이 옥새의 권리를 반반씩 가지면 어떻겠소?”이는 홍씨 가장에게 대단히 좋은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이리하여 오혁씨가 직접 다니면서 홍씨를 대변하여 정부를 상대로 고소하였더니, 재판 결과에 홍씨쪽에서 승소하였고, 이 옥새는 우선 오혁씨가 보관하고 홍씨와 담판을 하게 되었다. 오혁씨가 홍씨에게 “이 옥새의 가격이 대단히 큰데 그 금액의 반을 내게 주고 갖겠소? 아니면 내가 당신에게 그 반액을 주겠으니 그걸 받겠소? 결정하시오. “
이러니 당연히 무일푼인 홍씨는 돈 얼마를 받고 만족하게 옥새를 오혁씨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옥새의 주인은 오혁씨가 되었다 그러니 옥새가 홍씨 집안에 보관된 연도를 계산해 보니, 원나라 종말은 AD 1368이었고, 홍씨가 빼앗긴 해가 대한제국 헌법이 나온 1899년도 직후라고 보면 1900-1368=632 즉 600 여년간 이 보물을 보존하다가 결국 쌀 몇 가마 쯤 받고 양도하였다는 말이다. 이 어찌 불공평한 세태가 아니겠는가?.

(3) 전라도 유지 오혁씨가 잠시 보관하다.

그런데 오혁씨는 여러가지 사업을 해 보았는데 재운이 없었는지 할 때마다 실패를 하였고, 그때마다 조부님께 와서 돈을 빌려썼는데, 마지막에는 옥새를 갖고 와서 아주 거액을 차용하겠다고 하며 옥새 보증를 담보로 하고 각서에 언제까지 갚지 못하면 조부님 소유가 된다고 하는 동의서에 서로 함의하였다.
그후 그는 큰 사업을 마음껏 해 보았지만, 완전히 실패하고 결국 사망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 옥새는 명실공히 조부님의 소유물이 되었고 결국 아버지에게로 내려 왔다.

(4) 마지막 소유자, 진양정씨 가문으로 들어왔다.

나의 이야기는 시간, 장소, 인물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많이 부족하다. 구식 어머니로 부터 들은 옛날 이야기식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내 생각으로 오혁씨가 인용한 대한제국 헌법이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 그 법이 발효한 해가1899년(광무 2년) 8월 14일에 반포된 대한제국의 근대적 헌법이다. 아버지가 도미하신 해가 1903년으로 내가 추정하니, 아마 도미전후 1900연도초에 옥새가 우리 집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오혁씨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의 고모가 세 분인데 가장 큰 고모가 전라도 지역에 살던 오씨 가문에 시집을 가셨는데, 내 생각으로 고모 시집에 큰 어른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게다가 얼마전에 돌아가셨던 나의 당숙모께서, 그 전라도 큰 고모님이 항상 말하기를, 자신도 그 옥새의 일부를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내게 이야기하셨으니, 아마 틀림없이 오혁씨가 그 시집 어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귀국하신 후 어느 때부터인지 이 옥새를 팔려고 하셨다. 아버지와 친하셨던 분에게 위탁하여 그 분이 국내에서 중국까지 가서 당시 중국통치자인 원세개(袁世凱)를 만나서 옥새이야기를 하니까 원세개가 반색을 하면서 Counteroffer(대안)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원세개왈, “이 보물이 진품인걸 확인되면, 돈 보다 더 좋은 방법을 내가 알려주겠소. 그 옥새 주인에게 요동(遼東)땅 3000리를 분할하여 줄테니, 그곳으로 조선 백성을 데리고 와서 조선국왕이 되어 살면 우리가 도와줄테니 어떻겠소?” 하긴 역사에 나왔듯이 원세개는 중국 황제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기에, 이 옥새에 관하여 비상한 관심이 있었어 그의 구미에 대단히 맞았던 것이다. 혹시 조선국을 요동에 세워두면 일본의 침략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아버지는 그 분의 제안을 듣고,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해서 받아드리기 곤란하니, 역시 현금 거래를 계속 해보시오.” 하여서 그 분이 다시 중국으로 가다가 의주 지역에서 일경에게 체포를 당했다.
그 분도 역시 독립운동가였었는데, 그 당시 어떤 사건이 있어서 조사를 당했고, 결국 무혐의가 입증되어 뒤늦게 석방되었고, 또 천신만고로 중국에 도착했더니, 원세개가 방금 사망하여서 이 일이 무산되었다.
두번째 판매를 시도하셨다. 어떤 분을 통하여 영국에 가서 대영박물관에 담당자와 상의를 하였더니, 감정을 해 보려고 , 그 물품을 갖고 오라고 하였다. 그들은 만일 진품이라면 그 당시 미화 $100,000로 구입할 용의가 있다고 하였다. 그때가 아마 1910년 후반기 내지 1920년 전반기쯤 되지 않나 생각한다. 그러나 그 물품을 갖고 가고 오는게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매도를 시도하신 적이 있었단 이야기는 못 들었다.
나의 의견:

첫번 째 원세개의 제안 요동땅 3천리를 고려해보자: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는 중국 대륙으로 향한 넓고 큰 땅으로 우리 역사에 나오던 고구려 발해의 옛 땅의 일부가 아닌가? 이 얼마나 중요한 지점이며 한 번 시도해 볼만한 기회가 아니었던가? 여기에 요동지도 두 장을 역사적 관점에서 보고자한다.

 
公元前一世紀初東北亞局勢: BC 1세기초 동북아 국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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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東包括朝鮮半島北部: 요동을 포함한 조선반도 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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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두 지도에서 북한의 서북편 지역을 말한다.

두번째 대영박물관에서 제의한 미화 십만불의 가치를 현대 시가로 환산해 보려고 한다. 선친의 고등학교 Williston Seminary의 기록에서 1910년경 학교 Tuition은 $100 이었다. 현재 Williston Northampton School Tuition은 물경 $54,500 이다. 그러니 적어도 그 당시 미화가 현재 미화보다 가치가 500배 이상이었단 이야기다. 당시 미화 십만불은 현재 미화 $50,000.000 이상의 가치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우리는 옥새(玉璽)를 갖고 있다고 하신 말씀을 많이 들었다. 물론 내게 하신 얘기는 아니고 일가분들과 나눈 말씀이었다. 그래서 나도 옥새란 보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일가 분들께 이 옥새를 보이신 적도 있었다. 그런 큼직한 네모난 돌로 만든 도장으로서 윗부분은 손잡이였고, 아래는 정사각형의 도장이었는데 篆字(전자)로 된 글자가 있었는데 넉자인지 여덟자인지 기억이 확실치 않고, 受命於天(수명어천)이란 글자가 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도 오래전 일이기에 나의 기억은 확실치 않다. 그 색은 푸르스럼한 회색으로 기억한다. 윗 손잡이 부분은 두 용이 나란히 있는 모습으로 쌍룡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라고 들었다. 그러면 그 옥새가 어떻게 우리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가에 관하여 어머니는 상세하게 아셨고, 그 내용을 국한문으로 써서 옥새갑(玉璽匣)안에 넣으셨다. 크기는 10 X10 cm 내지 12X12 cm 정도였고 그 높이는 8 내지 10 cm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옥새를 넣은 나무상자는 옥새보다 약간 커서 어머니가 작은 국한문 글씨로 그 역사를 쓰셨던 종이로 몇 겹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상자의 좌우 판 중앙부에는 구멍을 뚫어 끈을 넣어서, 전쟁 폭격 시에 나의 목에 걸어주셨다. 특히 육이오 동란 중 미군 폭격이 심해졌을 때, 그보다고 구이팔 서울 탈환 전투에 대포가 시의 남부에서 북부로, 또 서부에서 동부로 장거리 포격이 있을 때, 땅이 뒤흔들렸을 때, 어머니는 틀림없이 옥새끈을 내 목에 걸어주셨고, “우리가 모두 폭격에 죽어도, 너는 살아서, 이걸 잘 갖고 있다가 나중에 이걸 팔아서 네 대학교육도 끝마치고, 그리고 편안히 잘 살거라.” 하신 유언같았던 말씀이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던 어머니 그 말씀을 어찌 잊으리!

다행히 우리 네 식구는 구이팔 수복이후까지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모두 잘 알다시피 그 후 북진을 신속히 하다가 중공군의 대량 공격을 받게 되어 후퇴하게 되니, 서울시민들은 기를 쓰고 남쪽으로 피란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혼자서 결론을 내리시기를, 미군이 서울까지 철수를 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삼선교 집에서 계시니, 서울시에서 점차 주민이 줄고 가게나 시장조차 한산해 지며 우선 식량과 돈이 떨어져 살기 곤란하게되었다.
그때가 12월 말이었는데 어머니는 혼자서 도보로 안성에 살고 있는 큰 매형에게 찾아가서 돈을 얼마 융통하려고 도보로 내려 가셨다. 어머니가 미쳐 돌아오시기 전 바로 운명의 1951년 1월 4일 이른 새벽에 동네 반장이 요란하게 종을 울리며 큰 소리로, “지금 서울 철수입니다. 빨리 서울을 떠나세요.” 가고 계속 집집 마다 문을 두드리며 알려주었다.

(5) 일사 후퇴 때 영구히 잃어버리다.

이 소식에 우리 세식구는 황급히 짐을 쌌다. 순이누나는 이불과 옷가지를 챙겨서 큰 보따리를 만들어 머리에 이었고, 아버지께서는 무슨 보따리를 만들어서 물건을 넣어 들으셨고, 나는 백팩에 이것저것을 넣어서 삼선교 길로 나가니 벌써 피란민행렬이 길을 메웠고, 사람, 마차, 우차가 길 한가운데를 점령하였으며, 모두 한 방향으로만 가니 길을 물어볼 필요도 없이 행렬에 끼어서 함께 가고 있었다.
대략 삼선교-돈암교-신설동- - - 아마 광나루라고 믿는 곳에서 빈” 도라무”통을 묶어서 만든 임시가교 위로 출렁거리며 건너서 남행을 하였는데, 가고 가다가 저녁에 도착한 곳이 집 몇 채 겨우 있는 말죽거리였고, 거기서 첫날 밤을 잤다 .방에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부엌에서 자다가 아궁이 불이 이불에 붙어서 난리를 쳤다,
다음날 계속 걷다가 겨우 방에 들어가서 새우잠을 잤고, 그 다음날은 어느 마굿간 같은 곳에서 잤다. 피란민 행렬이 느리게 움직였고, 또 우차와 마차등으로 걸음이 느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안성까지 가는 동안에 3박4일을 하였는데, 4일째 되던 날 아침에 안성에 도착하여 우리를 기다리시던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가 첫번째 물어보시기를, “옥새는 어디있니?”하니까 누나가 “여기요.”하고, 이불을 풀었는데, 옥새는 간곳이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옥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 무거운 돌덩어리를 보자기에 싸서 이불속에 넣고 누나는 큰 이불 짐을 머리에 이고 오는 동안에 무거운 옥새보자기는 제 중량때문에 이불 틈으로 빠져나와서 땅으로 떨어졌겠다고 믿었다. 어머니는 누나에게 야단을 쳤다. “왜 춘호 목에 걸어주지 않았니?” 누나, “내가 재를 어떻게 믿어요?”
그 지역은 용인과 안성사이 대로였다. 피란민으로 가득찬 길로 거슬러 올라간들 어떻게 찾는 단 말인가? 그러니 그게 1월 4일 후 3일만에 잃었으니 1월 7일이라고 해야 되겠다. 그러니 그 옥새가 우리 집에 들어온지 대략 50년 가량되었고, 잃어버린지 지금까지 만 68년이 넘었다. 그리고 실물지점(失物地點)은 용인과 안성사이 대로였다. 이리하여 옥새는 영구히 잃어버렸다.
그리고 여기서 원나라 황제의 옥새 이야기는 끝났다.

(6) Epilogue: 후기

한문, 조선 역사 그리고 중국 역사에 박식하셨던 어머니는 그 역사를 자세히 알고 또 그렇게 설명을 잘 써서 넣었지만, 아마 십중팔구는 그때 우마차 바퀴에 걸려 깨어졌든지, Truck 바퀴에 박살이 났던지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러나 혹시 어떤 사람이 주워서 읽어보고 그 연고를 알게 되고 그러고 그것을 감추었다가 그 관련자가 모두 없어진 다음에 이 옥새를 내어 놓고 팔겠다고 할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을 증명할 생존한 증인은 오로지 나 한 사람이다.
가끔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내가 소학교 시절에 밤중에 자다 부모님이 두런두런 이야기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아마 촛불을 켜고 긴 겨울밤에 잠이 안들어서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 내용인즉 만일 옥새를 팔게 된다면 좋은 일을 하실 계획이다. 아버지는 나의 헤화국민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을 좋아하셨다. 아버지는말씀하시기를, “만일 어느때 이게 팔리면 내가 김선생을 대학에 보내주겠는데.”하시기도 하였다. 큰 돈이 생기면 뜻있는 일을 하고 싶으셨던 분이다.
하긴 부산서 수주 변영로 선생께서 우리 셋방에 오셔서 아버지와 몇 마디 나누시다가 얼굴을 가까이 하고 음성을 낮춘 후, “옥새는 잘 갖고 왔겠지?” 하시니까 아버지가 지나가는 말투로, “벌써 잃어버렸네.”하니까, 하도 기가 막혀서 변선생님이, “어쩌자고 그것 하나도 제대로 보관을 못했단 말인가?”하고 통탄을 하셨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옥새를 잃은 후 나는 옥새에 관한 흥미를 완전히 잃었고, 물론 어머니께서도 다시는 옥새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내가 이 기록을 올리는데도 많은 애로가 있다. 내가 오로지 어렸을 적에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단편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내 기억에 남은 것들이다. 아쉬운 건 홍귀인 부친의 성명, 그 후손이 살았던 전라도 지역, 오혁씨는 누구인가? 언제 우리 집안으로 들어왔는가? 아버지의 사절로 가셨던 분의 이름 등등 많기도 많다. 하지만 소년시절의 나 또한 잃어버린 옥새에 관하여 알고 싶지도 않았고, 어머니와 이 이야기를 나누지조차 안했다. 다음 번 귀국할 때 큰고모님(정원희 1895년 2월 3일생) 제적등본이라도 떼어서 주소를 참조하볼까 하는 생각조차 든다.

이곳 Rochester, New York에서 개업하였을 때, 중국에서 왔던 Dr. Lin Min Ou-Yang과 친하게 지냈다. 나보다 훨씬 연상이며 물론 중국 본토에서 온 좋은 가정의 후손이다. 그가 어느날 아주 큰 책자를 우송받아서 열어보더니, 옆에 있던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중국 국립박물관에서 편찬된 완전한 책자로서 어마어마한 분량을 다루고 있었다. 나는 잠시 빌려서 보니 앞 편에 중국 각 왕조의 옥새로부터 시작하지 않는가!
나의 개인적 호기심으로 나는 각 왕조의 옥새를 보았는데, 고대의 옥새는 이상한 짐승 모습을 색였다. 나는 하나하나 보니, 가끔 분실된 옥새도 있었다. 나는 원나라 옥새를 찾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분실되어있었다.
옥새는 현대식 검증까지 받지 못한 옥새이지만, 나로서는 완전한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었던 원나라 마지막 황제가 소장했던 진품 옥새라고 굳게 믿는다. 이 보물을 잃었다는 사실은 우리 집안의 큰 손실이겠지만, 중국, 한국, 그리고 세계사적인 각도에서 대단히 큰 손실이다.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리오?
이건 전혀 불가능한 공상일 뿐이지만, 만일에 현재라도 나온다면, 또 나의 소유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국가 즉 대한민국 국립박물관에 기증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는 개인이 소장할 물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중국 오천년 역사에서 몇 개 안되는 옥새 중 하나가 우리 가문에 와서 반세기를 보존받았다가 전쟁 중에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의도에서였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옥새의 유실(遺失) 이후, 나 또한 옥새에 관해서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차라리 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오래된 기억을 가다듬어 대략 큰 줄기는 옮길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 자세한 내용까지는 기억에 없다. 어머니만이 자세히 알고 계셨지만 어머니께서도 그 후 다시는 옥새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이리하여 그 내용이 전혀 충분치 못하지만 내가 아는 한 성실히 쓰려고 노력하였다.
게다가 객관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하다못해 예전에 어머니께서 그 인장을 창호지같은 질긴 종이에 찍어서 따로 소장하셨지만, 일사후퇴후 귀가하였을 때 이 모두 전화(戰禍)와 더불어 바람과 함께 사라졌을 뿐이다.

(7) 역사적 관점: 元朝玉璽的來源,以及最後的下落. 出處: 百度百科

원조옥새(元朝玉璽)의 근원과 최후의 행방

BC 221년 진시황이 육국을 멸망시키고 통일한 후 유명한 화싸벽(和氏璧)을 획듣하여 전국옥새(傳國玉璽)를 만들었다. BC 221년 진시황이 육국을 멸망시키고 통일한 후 유명한 화시벽(和氏璧)을 획듣하여 전국옥새(傳國玉璽)를 만들었다.
진 2세 사후 손자 자영은 한고조 유방에서 헌납하고, 왕망과 동한말의 동탁의 난을 지난 후 제후 중 손견이 이 옥새를 가졌고 그 아들 손책이 원술에게 주었다가 결국 조조에게 돌아왔으니, 십팔제후의 연합군이 동탁을 공격할 지음 이 옥새가 손견, 손책, 원술 그리고 조조에게 돌아갔음은 우리가 애독하는 “삼국지 연의”에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그 후 옥새는 실종된 후 위-서진-전조-동진-송-남제-야-북제-주-수-당조 그리고 오대십국까지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전국옥새는 원 순제 손에서 거듭 실종되었다는 원조 황싱에서 일찍이 옥새의 기록이 있다. “명나라 군사가 원나라 서울을 입성할 때, “왕자 6인과 옥새 한 쌍과, 원성종 (元成宗) 옥새 하나를 획득하였으며, 원조에 11개 황제중 기타 황제는 옥새를 갖지 못하였다.”
AD 1370년 5월에 명나라 군이 막북漠北)을 휩쓸고 응창(應昌)을 들이칠 때, 순제가 달아나며 갖고 있던 막북의 한개의 주보(珠寶)를 빼앗았다. 그 때 원조의 여러 황제의 옥새도 이미 없어졌고 또 전국새도 없어졌다. 전국새의 행방은 불명하니, 명과 청 양조는 균등히 전국새를 갖지 못했다.
여기에 2 황제가 나오는 데 성종(成宗)은 제6대 황제로 1294년 즉위하고 재위 12년 간이었고, 순제(順帝)는 11대 황제로 1328년 즉위하고 재위 9년간이었고, 마지막 황제는 혜종(惠宗)이며 1333년에 즉위하고 재위 36년이었으며 1370년에 원이 멸망하였다.
여기 나온 전국옥새란 고대 진시황 시절에 만든 옥새로 여러 왕조에 걸쳐 사라졌다가 또 나타났다가 하기를 반복한 신비스런 옥새이며 원조에 사라진 후 아직까지 나타난 적이 없었다고 되어있다
나의 의견으로는 우리 옥새는 전국옥새였음은 생각할 수 전혀 없고, 원조 때 황제가 소유하였던 한개의 옥새일 뿐이라고 믿는다.
아래에 세계의 최대 제국 원조(元朝)의 초기, 중기, 그리고 전성기의 지도를 실었다.

 

元國初期: 원나라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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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대國: 대원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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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8年度元朝: AD 1358년도 원나라 지배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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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朝及 汗國: 원나라와 종속국 지배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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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 Ho Chung - February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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