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옛 학교 그리고 옛 이야기
A. 아버님 인적사항
성명: 정재원(鄭載謜), 영문 Jaone Chung
출생지: 경남 진주시
생년(生年): 1893년 9월 18일. 졸년(卒年); 1954년 2월 20일
B. 아버님 미국행
이번에 출품할 사진은 나의 선친의 옛 학교 정문 앞에서 찍은 학급사진이다.
아버님은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 말에 대구에서 숙환으로 돌아가셨다. 그때가 1954년 2월이었는데, 우리가족은 피란시절에 부산에서 살다가 그 전해 1953년 여름에 휴전이 되어서 피란민들이 거의 모두 상경하였지만, 아버님 병환이 악화되어서 대구에 살던 누나에게 갔더니 그 당시 서부시립병원에 입원하셨고, 결국 그곳에서 돌아가시고 고향 경남 진주시 반성면 산소에 묻히셨다. 나는 막내 겸 외아들로 노부모 슬하에서 외롭게 자랐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님은 45세셨고, 내가 고1되었을 때 아버님은 62세로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나를 어리게 보셨고 내게 자상하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별로 없었으며, 돌아가시기 직전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만 하셨다.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는 어머니를 통하여 옛날이야기같이 들었다. 어머니 또한 연로하셨으며, 좋은 집안에서 한학(漢學)을 많이 배우셨으나 신학문은 배우실 기회가 없었다.
내가 들은 바 아버님은 십 여세 때 조부님께서 당시의 지식인 두 분에게 부탁하여 한분은 부친을 서울에서 일본 동경까지 대동한 후 그곳의 청산외국어학원(靑山外國語學院)에 입학하여 1년간 영어교습을 받으셨고, 또 그 곳 미국인 가정에 하숙을 하시면서 그 집 애들과 사귀어서 영어를 배우셨다.
일 년 후 아마 1903년경 다른 분께서 부친을 태평양횡단정기선에 태우고 일본에서 미국에 도착하시고 대륙횡단기차를 타시고 동부에 도착하셔서 그 분이 미리 알 아놓았던 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치셨는데 실패를 하셨다. 그 원인이 영어시험의 실패였다. 그 학교에서 6개월 기한을 주고 재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그동안에 부친은 많은 노력을 하여서 결국 합격하셔서 공부를 하시게 되었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난 후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상과대학 즉 Wharton School에 입학하셔서 공부를 하시다가 그 동안 학비 송금이 대단히 힘들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시겠다고 1914년에 귀국하신 후 다시 미국으로 귀환하시려는 시점에 그 유명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전 세계 해상 봉쇄령(Global naval blockade)이 내려서 미국으로 오셔서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서 한국에서 결혼하시고 가사를 돌보셨다.
그 후 1925년경에 두 번째로 도미하셔서 학업을 재차 계속하실까 알아보았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해서 자신의 짐의 일부를 찾아서 돌아오셨다.
당시 미국여행은 모두 Trans-Pacific Liners(태평양 항해 정기선)을 사용하였으며, 일본에서 미국까지 편도 30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것이 내가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다음 부친으로부터 어머니를 통하여 들은 그 곳 일화 몇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1화. 부친이 미국에 도착하신 직후 Wright brothers의 최초비행이 성공하였다고 들었다. How sensational news that could be!
제2화. 더운 여름날 저녁 때쯤 노인들이 의자를 들고 길가에 나와서 서로 지난 간 날의 이야기를 할 때 그 주제는 거의 다 남북전쟁이었고, 그들이 비교적 어린 나이에 소집되어 전투에 참가하였을 때 얼마나 무서웠던가하는 얘기들이었다.
제3화. 아마 Williston Seminary (all-boy boarding school)에서 일어났던 얘기일 듯 싶다.
Massachusetts서북부 작은 시골에 동양학생 하나가 왔으니, 그들은 매일 놀렸고 부친은 매일 그들과 몸싸움을 하셔서 얼굴이 성할 날이 없었다. 1년을 거의 매일 싸우다시피 하니까 나중에는 그들이 “That’;s enough. No more fights or hassles."한 후 그들과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 당시 아버지의 싸움소식이 이 작은 학교에 큰 소문거리였다. 매일 아침 조회 때 담임선생님이 훈시 후 아버지를 보면 얼굴이 멍들거나 부었으면 정상으로 간주하는데, 어떤 때 얼굴이 말짱하면 짐짓, “Jaone, what happened to you?"하고 놀렸다.
제4화. 부친은 목 뒤에 종기(furuncle)가 자주 나니까 선생님이 말씀하기를, “Jaone, watch your nape." 그러면 반 친구들이 부친께, ”You better look at the back of your neck."하고 놀렸다. 당연히 선생님은 “To care for your neck." 의미하였지만, 장난꾸러기 학생들이 ”Show me how you can look at the back of your neck." 하며 놀렸다.
제5화. 값비싼 기숙사에는 더운 물이 나오고 값싼 기숙사에는 찬 물만 나오는데 부친은 값싼 기숙사에 계셨고, 겨울이 대단히 추워서 1층에서 찬물로 세수하고 머리도 감고 3층까지 뛰어올라가는 동안 어떤 때에는 얼굴과 머리를 감은 물이 얼어서 방안에 활활 불타는 난로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면 얼마 후 얼음이 녹아서 수건으로 닦을 수 있었다.
제6화. 동네의 어떤 중년여인이 아버지와 친해져서 수양아들로 삼았다. 그는 어렸을 때 어떤 독신 목사집에서 일했던 하녀였는데, 목사가 죽을 때 전 재산을 그에게 남겨서 그것만 갖고서 독신으로 풍족하게 편안히 살았다.
또 어떤 부인이 부친의 나라가 Korea임을 알고 찾아와서 말하기를, “I am so glad to see you. Your country is near China. My parents were from Hungary. Our ancestors, Huns, lived north of China. So we are neighbors."
제7화. 부친이 청년기로 들어설 때 뉴욕에 한국동포가 얼마 있으면서 두 파가 있었는데 하나는 남조선파, 또 하나는 북조선파이며 서로 알력이 심했다. 어떤 인연으로 이희경씨와 의형제를 맺었다. 그 분은 평안남도 순천인으로 독립유공자로 추모되었다. 그런데 두 분이 함께 행동을 하였기에 두 분은 이 두 당파에 들어갈 수 없었다. 파벌이 심한 우리 민족의 이야기다.
그런데 내가 후에 더욱 생각해 본 결과 이희경 선생님과의 우정은 아마 학창시절이 아니고, 그 후 1925년에 두번째 방문시에 생겼던 일이 아닌가한다. 왜냐하면 학창시절에 그럴 여유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님 일화는 여기에서 끝내고 부친 학업을 찾는 나의 노력을 설명하겠다.
C. 부친의 학업기록 찾기
내가 항상 들었던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 가서 아버님 기록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때가 아마 1969년이었을 것이다. 내가 편리하게도 Residency training을 Philadelphia에 위치한 Pennsylvania Hospital에서 하고 있었다. 같은 도시에 있는 대학교 동창회에 가서 설명을 하였더니, 아버님이 졸업생이 아니기에 동창회명부에는 찾을 수 없어서, 직원 두 사람이 나를 데리고 대학 Archives에 가서 그들이 한 시간이상 노력 끝에 아버님 Freshman record를 찾았다. 1913년~1914년간의 기록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님이 1914년에 귀국하신 후 다시 교육을 계속하지 못하셨으니, 대학교육은 아마 Freshman으로 끝나신 모양이다. 여기서 Former School Williston Seminary가 나왔다.
문의 끝에 현재는 Easthampton, Massachusetts에 위치한 Williston Academy임을 알게 되었다. 곧 가서 찾아보고 싶었지만 교육받는 기간이라 자유롭지 못했고, 그 후 Rochester, New York에 가서 개업하느라고 시간을 낼 수 없다가 1979년 여름 California에서 찾아온 처조카가 방금 Smith College에 입학하여 날보고 학교기숙사까지 데려달라고 하여서 지도에서 찾아보니 그 대학이 위치한 Northampton과 Williston Academy의 Easthampton은 5 마일정도 떨어져 있었고, 그 방문일이 바로 일요일이었다.
하여간 나는 그를 대학기숙사에 내려놓고 Williston Academy를 찾아가서 동창회장을 찾았더니 마침 중대한 논의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어 나를 만나서 아버지에 관한 사진을 두 장 복사해서 내게 주었고, 내가 갖고 온 학급사진을 자신이 복사하여서 갖고 떠났다. 그 때 그가 내게 설명하기를 현 학교건물은 옛 학교를 허물고 그 위에 새로 건축하였으나. 사진에 나온 정문은 현재 Town Library의 정문이니 내가 여기 Park St을 따라 북으로 300ft정도 가면 왼쪽에 있는 Library입구가 바로 이 사진의 입구라고 하여서 그곳을 통과하면서 그 입구를 보았다.
이것이 나의 첫 번 Williston방문이었다. 그때가 1979년 8월말 대학 개학 전날이었다. 그 후 다시 기회가 오면 그 도서관 정문 앞에서 우리가 사진을 찍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 1985년 여름방학시절 맏아들 Henry가 11th grade를 마치고 College interview하느라고 Dartmouth College에서 Brown University로 데려다 주다가 Williston Academy에 다시 들러 아버님의 1909년부터 1913년까지 4년 성적증명서도 발급받고 여기서 곧 그 도서관에 들어갔다. 시골 도서관답게 창문을 열어놓고 노인 서너명이 신문잡지를 보는 듯했다.
나는 Henry를 데리고 곧장 좌측에 있는 한 50대 여성 Librarian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우선 내가 들고 온 아버님 Class Photo를 보이면서 “Ma'am, can you recognize this photo?" 하니까 그 분이 이 고색이 창연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며, ”Ah! This is the old Williston School photo. It was taken in the year of 1913, before I was born. The door in this photo is the same door both of you just entered." 이때 내가 아버님을 지적하면서, “This is my father, and this boy is my son. We decided to visit this place with this door seen in the old photo." 그 분은 많이 감동하였다. ”I have been living in this town all my life, and once in a while some Willistonian children like you visited the school to commemorate their parents or grandparents. It's so nice to have you. If you have some time, may I bring some old Williston Seminary photos?" 그러고는 지하실에 내려가서 큼직한 box에 넣은 많은 사진을 갖고 와서 우리에게 보였다. 참으로 오래된 사진들이었다.
나로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지만, 아버님이 보시면 얼마나 감개무량하셨을까! 사진들을 모두 보고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I want to have photos taken in front of this memorable door with my son. Could you take the photos for us?" 그는 선선히 응낙하고 우리 둘은 문 앞에 섰고 그분은 앞길 Park Street으로 내려가서 양 손을 들고 양 방향으로 오는 Traffic를 정지시킨 다음 천천히 전진 후진하면서 사진을 몇 장 찍었고 좌우에 많은 차량이 섰어도 그분은 태연자약하게 자기 할 일만 다하였다. 나는 그 고마운 분께 많이 사례하고, 떠났다. 그 후 나는 퇴직한 후 이곳 Canandaigua Lake가에서 살고 있다, 가끔 내가 만일 Boston지역에 갈일이 있으면 이제는 여유롭게 들르려고 생각도 하였다.
그런데 지난 해 2013년 여름 나의 큰 며느리 Lillian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저희 집에 있는 Williston Class Photo 찍은 지 100주년이 되니 가족이 기념방문을 할 것을 내게 상기시켰다. 나는 100주년이란 사실을 잊고 있다가 이 좋은 생각에 찬성하고 맏아들 Henry, 맏손자 Connor, 둘째 아들 James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학교개학직전 8월 31일 토요일에 가기로 계획하였고, 모두 James의 Manhattan 아파트에서 만나서 출발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토요일이라 학교와 도서관이 닫혀있겠기에 우리끼리 건물 밖에서 사진 몇 장만 찍고 오는 것이 너무 섭섭하여서 내가 학교동창회에 전화를 하니까 마침 Director of Alumni Relations인 Mr. Jeffrey Pilgrim과 통화하고 그날 12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전화연락으로 Campus내에서 만났고 그가 우리를 데리고 교정과 Gymnasium을 포함한 건물내 campus tour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 걸어서 Emily Williston Memorial Library를 방문하고 그가 우리 넷의 사진을 찍어주었고, 나 역시 많이 감동하여서 금일봉을 학교기금에 기증하였다.
이것이 나의 세 번째 방문이었다. 떠날 때 좀 섭섭하였다. 또 다시 올 일은 없을 듯싶었다.
그런데 금년 6월 초에 아주 오래간만에 New England tour를 하였다. 처음에는 Concord, MA에 있는 Walden Pond에 가서 Henry David Thoreau의 그의 복구된 Cabin을 찾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Bar Harbor, ME에 가서 이틀간 놀다가 귀가할 계획이었는데, 그 직행거리가 650마일에 주행시간이 10시간이 넘는다. 아무래도 중간에 하룻밤 자고 오는 게 무리가 없겠는데, 특별히 선호할 도시가 보이지 않아서 Easthampton을 생각했지만 그 작은 동네에는 잘 곳이 없어서, 바로 부근에 있는 Northampton 호텔에서 자고 그 다음 날 목요일에 다시 학교를 찾았더니, Mr. Pilgrim이 휴가 중이라 이번에는 다른 용건을 내어 놓았다.
그건 부친의 삼촌 즉 조부님의 셋째 동생이 어렸던 부친을 돌보려고 함께 미국에 오셨다가 결국 Colorado School of Mines 즉 콜로라도 광산대학을 졸업하셨다고 들었는데, 조회하여보니 그분은 Williston Seminary에 1906년부터 1910년까지 다니셨다는 게 발견되었다. 이리하여 그 분 함자는 정지환(鄭芝煥) 영문명은 Je Whan Chung이었다. 그 분은 귀국하셨으나 병환으로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고, 또 자손도 없었다. 그래서 그 분의 학교기록을 요청하여 곧 받을 것으로 안다. 그러니 아마 그분께서 먼저 1906년에 Williston에 입학하신 후 자기 조카님인 나의 부친을 1909년에 입학시키고 삼촌과 조카 두 분이 함께 Williston에 1909년-1910년 학기를 함께 다니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Williston Northampton School은 나의 부친과 넷째 할아버지가 수학하셨던 나에게 유서 깊은 학교임을 알 게 되었다. 이번에도 다시 도서관에 가서 그 문 앞에서 집사람과 나의 둘 사진을 찍었다.
D. 결론
아버님께서는 1904년 경 대략 12 혹은 13세에 동경에서 미국행 정기선을 타고 유학길을 떠나셨다. 처음 5년은 틀림없이 요즘말로 Elementary ESchool에 다니셨을 텐데 그 정보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 내가 Williston School 동창회와 학적부에 여러 번 문의해보아도 전학교(former school)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대답뿐이다. 그러나 마지막 5년은 1909년~1913년까지 Williston Seminary에서 수학하셨고, 또 1913년~1914년까지는 Wharton School of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Freshman course를 마치셨다.
E. 아버님의 유산(Legacy)
내가 처음 Williston Academy를 방문했을 때 Henry는 11세, James는 8세로Elementary School에 다닐 때였다. 그 날 그곳 동창회장에게 내가 듣기만 했던 Boarding School인가 하고 문의하였더니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차 속에 있던 애들을 보며 몇 살이냐고 묻고 만일 이 아이들이 자라서 고등학교 갈 때에 Boarding School(College Preparatory School과 동의어)을 고려하고 또 Williston Academy에 Apply할 경우에는 아버님의 재학사실과 동창회장 자신과 이날 만났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학교에 제출하라고 대단히 친절하게 설명하였다. 그 때부터 나는 우리 두 아들을 Boarding School에 보낼 계획을 세우고 또 그 다음에는 Ivy League College에 보낼 계획을 세우고 또 그렇게 하였다. 그들의 고등교육계획은 아버님의 재학사실을 알게 된 후에 만든 결정이다.
다음은 아버님의 일화 한편이다. 내가 소학교 아래학년시절 일이다. 나는 그다지 우수한 생도가 못되었다. 그래도 노력하여 가끔 100점짜리 시험답안지를 들고 집에 와서 아버님께 보일 때 아버님은 내게, “춘호야, 백점보다 팔십점이 더 좋은 것이다. “ 하셨던 말씀을 여러 번 들었다. 다른 과목보다 수학(예전에는 산술이라고 불렀다.)을 잘 하였다. 그런데 왜 하필 80점이 100점보다 더 낳았다고 하셨는지 그 뜻을 몰랐지만 아버님께 그 이유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 후 지인들에게 잡담할 때 이 이야기를 하면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내가 이 지역에서 개업하고 병원에 Attending Physician으로 일할 때 그 때가 좋았던 세상이었다. 내 환자를 회진한 후 환자 Charts를 들고 Nursing Station에 가서 Progress notes & Orders를 쓴 후 옆에 있는 담당 Nurse에게 Charts를 주면 간호원들은 내게 의례 ”Want some hot coffee?" "Yes, please." 하고 주는 Coffee를 마시며 잡담을 한다. 어느 날 한가할 때 우연히 아버님의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아직도 왜 Grade A보다 Grade B를 더 선호하셨는지 모른다고 말했더니, Mary라고 하는 중년 Nurse가 대뜸, “Don't you know, Dr. Chung? Your father wanted you to be an all-American boy with a well-rounded personality. He didn't want you just to be a so-called bookworm."
아무도 대답을 못했던 나의 반생의 의문을 Mary가 풀어주었다. 아버지는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고 무슨 대단한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는 걸 대단하게 생각지 않으셨던 분이었다. 이게 나의 아버님의 유산이다.
끝
Kwan Ho Chung - August 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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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 1회
독자 제위께 양해를 구합니다.
여러분 중에 본인처럼 Photobucket.com에서 이미 올렸던 images 삭제를 경험한 분이 적지 않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옛 웹페이지는 대다수 그대로 두어도 글이 있기에 별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본인에게는 “선친의 옛 발자취를 찾아서”와 그 영문판 “My Father’s Footsteps in America”만은
제대로 복구하여 현 홈페이지 SNUMA에 재차 올리고 싶기에, 그 제거된 이미지를 최근 Flickr.com을
사용하여 복구하여서우선 한글 웹페이지 5편을 연도순으로 함께 올리니, 본인 생각으로는 읽기에
편리한 점이 있겠는데, 혹시 불편하다고 생각하시면 알려주십시오.
여기서 5편까지 쓴 이유는 본인이 갖고 있거나 알고 있는 재료가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재료는 아버지 학급사진 한 장과 두 번째 도미하셨을 때 찍으신 사진 넉 장 뿐이었습니다.
또 알고 있었던 정보는 미국 교육을 십년 남짓하게 받으셨고, 마지막 연도에는 펜실베이니아
상과대학을 다니셨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었고 또 귀국 후 귀교를 못한 이유는 의외로
일어난 세계제일차대전 때문이었다는 내용 뿐이었지요.
그래서 미국에 온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조금씩 정보를 모았지요. 그런데 본교에서 사진전에
응모하려고 하여 우선 가졌던 재료를 복사하여서 운영자께 송부하여서 운영자께서 직접
홈페이지에 올렸던 것이2014년 8월중이었습니다. 그 당시 본인은 모교 홈페이지에 글을
올릴 줄 몰랐지요. 그 후 운영자의 많은 도움으로 조금씩 발전을 하여서 차츰 본인 스스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작업을 하였습니다. 계속 문의하고 자료를 수집하였고 정리하고, 또
문의하고 직접 방문도 하였지요. 이렇게 다섯 번에 걸친 웹페이지를 순새대로 다시 올립니다.
우선 “선친의 옛 발자취를 찾아서 제1편”에서는 학교 사진 한 장, 그 후 아들을 데리고 학교에
다시 가서 도서관 앞에서 찍은 사진, 게다가 2013년이 첫 번 사진의 백주년이 된 해이기에
우리 가족 중 네 명이 가서 가족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다행히 동창회장이 토요일인데도 시간을
내어서 캠퍼스 투어까지 한 걸 실었고, 1925년 제이차 도미 시에 뉴욕에서 찍으셨던 사진 넉 장도
추가하였습니다. 부족한 점을 후일에 추가하기로 기약하였습니다. 장황한 설명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관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