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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소녀 시절과 그 이후
 

서문

지난 번 ‘어머니 사진 몇 장’ 게재(揭載)이후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하고 싶어서 여기에 추가 설명을 하려고 한다. 나의 외가에 관한 이야기, 어머니 소녀 시절에 이루지 못한 꿈, 결혼 후 닥친 풍파, 무엇보다도 너무나 뛰어난 두 아들을 어린 나이에 잃은 고뇌, 그후 우리 가문의 몰락 등이었고, 재산을 모두 잃은 후에 나를 갖게 되셨으니, 나는 어머니의 기쁨이라기 보다 근심거리였다. 이러한 일들을 생각나는대로 썼다.

제1부: 외가의 이야기

어머니 친정은 경주이씨( 慶州 李氏) 가문이고, 대대로 서울서 사셨던 가난한 양반이라고 하셨다. 아마 별로 벼슬다운 벼슬을 못 하셨던 모양이다. 혹시 남산골 샌님같은 분들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수백년을 한양에서 살아오셨다. 어머니께서 외조부님을 칭 하실때 항상 “우리 받 어르신네” 라고 하셨는데, 나는 지금까지 그런 표현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마 예전부터 내려오던 한양 말씨 였을것이다.
그런데 이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는 어머니의 친정조모님, 즉 나의 외증조모님에서 시작이 된다. 내 생각에 이 할머니께서 아마 이십대 후반 아니면 삼십대 초반 때 쯤 갑자기 과부가 되셨다. 무슨 병환인지 모르지만, 젊은 외증조부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집안에 어린 아드님 두 분, 따님 두세 분을 남기고서, 이렇게 난데없이 과부가 되셨으니, 그 애통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곡을 하셨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나들이 하실 일이 있었다. 그래서 혼자 외출을 하셨는데, 그 당시 양반집 부인은 외출 때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놓고 다녔다고 한다. 요즘 글에서 읽은 바와 같이,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을 한 후 외래 문물이 들어왔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여성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던 풍습이었고, 그 풍습이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다. 회교도가 오늘날 사용하는 “BURKA”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리하여 우리나라 의류에 적응하여 외출 때, ‘장옷’이나, ‘쓰개치마’를 뒤집어 써서 얼굴을 가렸다고 한다.
어느 날 외증조모(外曾祖母)께서 쓰개치마를 입고 혼자서 외출하셔서 일보고 집에 오시던 중 갑자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누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듯한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할머니가 걷기를 멈추시면, 그 발자국 소리도 멈추고, 또 할머니가 가시면, 그 발자국 소리가 따라왔다. 그 당시 서울 장안에는 대낮에도 사람이 많지 않았고, 점포가 모인 곳이나 시장이 아니면, 인적이 없다시피 하여서 부인이 홀로 걷는 것이 위험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 보쌈군이라고 생각하고 급히 사람이 다니던 큰 길로 나오니까 그 뒤쫓던 발자국 소리가 없어졌다. 그 후부터는 할머니가 아예 곡을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보쌈군들이 과부가 된 젊은 부인을 밤에 집에 들어와 업고가서 자신의 아내로 삼던 폐단이 있었고, 젊은 부인이 곡을 하면, 보쌈군의 표적이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외출도 대단히 조심하셨다.
그때가 대략 1870년 전후로 생각한다. 어느날 방물장수가 찾아와서 이얘기 저얘기를 하다가, 할머니가 젊은 연세에 외롭고, 또 아무 낙(樂)이 없이 과부로 살고계신 걸 보고서, 다음과 같은 말로 설득하여 드렸다. 방물장수, “아씨, 서양에서 들어 온 아주 좋은 가르침이 있는데, 제가 알려드릴까요? 이 세상에 둘도 없이 좋은 것입니다.” 할머니, “그게 무어란 말이요? 말해 보오.” 이리하여 이 방물장수가 능란한 구변으로 천주교를 전도하였다. 그 당시 여러 열강 중에서 특히 불란서에서 천주교 신부(神父)를 선교사로 보냈는데, 북쪽에서는 진취적인 경향이 강해서 그들의 선교(宣敎)가 잘 되었지만, 남쪽에서는 유교가 강해서 선교에 진행이 잘 안되었고, 이리하여 남쪽에 거주 했던 대관, 선비를 선교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가급적으로 조선의 상류계급에 전도하고 싶어하였다.
이리하여 양반 가문의 할머니가 천주교로 귀화하면서 자기의 자녀들도 자연히 독실한 천주교도가 되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할머니는 2남, 2녀 혹은 2남 3녀를 가지셨고 우리 외조부가 아마 막내 아드님이있다고 믿는다. 외조부님은 워낙 총명하셨고, 의기가 높은 분이었다.
불란서 신부가 외조부에게 교리는 물론이고, 불란서어, 일반 문학, 역사, 과학 등 자신이 갖고 있었던 지식을 전수(傳受)하였다. 그 당시 대다수 신부는 종교 의식 이외에 많은 시간이 남아서 모든 학문을 탐구하였다. 그 후 그 신부님의 도움으로 불란서 시민권을 받으셨다. 그 옛날에 불란서 땅을 밟지도 않고 시민권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놀라운 일이었다. 또 한가지 일화가 있었다. 조부님 소년시절에 동네 훈장에게서 한문을 배우실 때 이야기다. 어느날 깜빡 잊으시고 숙제를 안 하였다. 그 당시에 일상 대로 종아리를 맞게 되니, 조부님은 불복하고, 이런 치욕을 받고서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책을 거두어 들고서 떠나서 글 가르치는 곳을 찾아 다니다가, 어느 집안에서 소년이 글 읽은 소리가 들려서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을 찾으니, 상복을 입은 어른이 나오기에, 그분이 훈장인줄 알고, 책을 내려놓고 땅에 엎드려서 절하였는데, 그것은 스승에 대한 예(禮)였다. 그 상복인이 조부님을 데리고 들어가보니, 사랑에 서너명 소년이 책을 읽고 있었고, 그 선생님이 설명하기를, “나는 원래 훈장이 아니며, 오로지 친상을 당하여, 삼년간 거상(居喪)을 하여야겠기에 그동안 나의 아이와 조카를 가르치고 있으니, 네가 배우고 싶으면, 너도 나한테 오너라.” 하여서 이 고마운 스승으로부터 잘 배우셨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어린 생도가 훈장선생으로부터 매 맞는 것을 거부하고, 책을 들고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도시 그 당시 드문 일이었다. 혹시 외조부님이 성격이 괄괄해서인가? 아니면 혹시 외국 신부님으로부터 배운 서양학문 특히 인권사상에 젖으셨기 때문인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주해: 보쌈(군): 가난하여 혼기를 놓친 총각이 과부를 밤에 몰래 보에 싸서 데려와 부인으로 삼던 일을 말하며,보쌈군이란 그런 짓을 한 사람을 지칭한다. 주해: 방물장수(방물장사): 방물을 파는 여인. 방물: 여자가 쓰는 화장품, 바느질 기구, 패물 따위의 물건. 주해: 거상(居喪); 상중(喪中)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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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부님

외조부님의 함자는 인영(寅榮), 자는 춘정(春汀)있었고, 생평연도는 AD 1865-1938이다. 할아버지는 한미(寒微)한 가정의 출신이셨고, 또 일찍이 부친을 여의셨기에 배경이 전혀 없어서 벼슬길로 들어 가실때 소위 미관말직(微官末職)으로 시작하셨다. 항상 책상앞에 앉으셔서 글을 베끼고, 글을 쓰는 서기직을 가지셨던 듯하였다. 항상 활동을 하셨던 분이 갑자기 앉은 채 하루종일 일만 하시게 되니, 만성 소화불량 때문에 고생하셨다. 여러해 후에 지방 시찰관으로 승진하셔서 경기도와 강원도로 시찰을 가시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말을 타고 하인이 따라오고 있었다. 이 시원한 경관을 보면서 먼 길을 가시다보니, 여러해 동안 고생하셨던 소화불량이 스스로 치유가 되었다. 낮에는 관청에서 행정감사를 하고, 밤에는 그 동네 부가(富家) 사랑에서 주무시는데, 저녁식사 후에 대청에 동네사람들이 몰려와서, 서울서 오신 분을 뵙는다고 많이 모여서 자신들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그 얘기의 제목만 간단히 쓰겠다.
한 노인은 장정이 된 자기의 손자를 데리고 와서 옷을 벗겨 심한 흉터를 가진 등을 보이며 갓났을 때 호랑이에게 물려 간 손자를 찾았던 이야기, 어떤 노인은 자기의 뒤통수를 보이며 적지 않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호랑이 발톱에 꿰여 생긴 일종의 누관 즉 Fistula이며, 또 하나는 따뜻한 봄날 동네 여인들이 산나물을 캐러 뒷산에 올라가서 나물을 캐던 중, 한 여인이, “여기 이쁜 고양이 새끼가 있다.”하여, 그들이 가 보니, 몇 마리의 점박이 고양이 새끼들이 놀고 있어서, 모두 와서 새끼를 쓰다듬으며 예쁘다고 하던 중 갑자기 그들 뒤에서 ‘허흠’ 하는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큼직한 어미 호랑이가 만족스럽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 여인들은 너무 놀라서 ‘으악’소리를지르며, 갖고 온 바구니는 다 팽개치고 죽을 힘을 다하여 집으로 뛰어왔고 그날 하루종일 집에서 숨어있다가 그 다음날 정신을 수습하여 집밖으로 나가보니 지난 밤에 그 만족했던 어미 호랑이가 그 바구니를 하나씩 각 집 문밖에 갖다 놓았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그 당시 시골사람들의 대화의 최대 Topic은 호랑이 이야기였다.
각설[却說]하고, 당시의 국내상황으로 가겠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이후 열강으로부터 문호개방의 압력을 받게된 후 조미통상조약(1882), 조불통상조약(1886)을 위시하여 만국통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외국과 통상하는데 의사소통할 인재가 전혀 없다시피한 상황이었다. 이 어려운 상황에 외조부님은 유창한 고급 불어를 구사하셨으니, 그때부터 관직이 크게 높이 올라갔다. 다음 외조부님에 관한 이야기를 어머니가 내게 들려주셨다.
외조부님은 흥선대원군을 받들었고, 그 후에는 고종황제를 받들었다. 당연히 민비의 반대파였고, 민비를 대단히 증오하였다. 대원군이 나라를 현대화시키려고 노력을 하던 중에 민비가 실각시켰고, 제멋대로 일본, 청국, 노서아(Russia)등을 차례로 이용하려다가 일본에 참살당하였다. 그동안에 나라는 일본에게 빼앗겼고, 외조부께서는 종이품 참판에 오르셨는데 그 당시에 더 승진은 친일파이어야 되었다고한다.
당연히 외조부는 대원군편이며, 대원군을 변호하셨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쓴 이유는 조선의 국력이 너무 빈약해서 외침에 대한 방어력이 없었고, 또한 구미 열강의 무력이 어느정도인지도 몰랐고, 게다가 그 나라들의 문화, 제도 등 모든 것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고 없으니, 어떻/ㅔ>게든 빨리 배워야겠고, 그래서 우선 쇄국을 아니 할 수없었다. 쇄국을 하지 않다가는 먼저 들어 온 자에게 정복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우선 쇄국하고 그 동안에 시간을 다투어 배워야하니, 국비로 유망한 젊은 이들을 구미 각국으로 보내서 교육을 받도록 계획과 시행하였지만, 그동안에 민비란 망국녀와 그녀의 일파에게 실각을 당하였고, 이 여자가 나라의 문호를 열겠다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불러 들이다가, 일본에게 죽임을 당하고 나라는 일본에게 빼앗겼다. 그러한 연고로, 민비는 나라의 최대 죄인이었다고 본다. 그때 해외에 보낸 사람들은 후원이 막혀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을뿐 아니라,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고 하였다. 대원군의 뜻이 장하긴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 배로 말하자면 거의 다 기울어진 상태였고, 집으로 말하자면, 쓰러지고 있는데 어찌 기둥하나로 버틸건가?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김동인 작 “젊은 그들”에서 비록 Fiction이지만, 이 당시 상황이 잘 묘사되어 나온다.
외조부는 이조말에 충신이었다. 그당시 외교문서를 통하여, 프랑스 정부에게 일본의 불법적인 조선 침략을 여러번, 상세하게 전달하였고, 프랑스 정부로 부터 많은 동정과 도움까지도 받았다고 한다. 상해에 열강의 조계지가 있는데 독립투사가 일본경찰이나 일본군에게 쫓기다가 프랑스 조계지에 들어가서 조선인임을 알리면 일본 당국이 내달라고 요청할 때에, 그들을 쫓아 버렸다고한다. 그건 조부님의 외교통신의 덕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독립투사들이 미국, 영국, 독일같은 나라의 조계지에 들어가면 일본당국이 이들을 범죄자니까 내달라고 할 때, 두말없이 일경 혹은 일본군에게 넘겨 주었다고 한다.
얼마 전 한국에 있을 때 French patient에게 혹시 외조부님의 외교기록을 찾을 수 있는지 문의하였더니, 그런 기록은 정부의 Archives에 저장되어 있어서 직접 가서 조화를 신청할 수 있다고 하는데, 너무 힘든 과정을 통과하여야겠기에 포기하였다.
다음에 외조부님의 마지막 거사(擧事)를 소개하겠다. 대원군의 실각 후 비교적 자주 외조부를 불러서 필요한 일을 지시하였고, 외조부께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끝내 시행하셨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대원군은 명하기를, 친일파 하나가 자신을 많이 괴롭히는데, 그 자를 이리이리 하여 처형하라고 상세한 지시를 하였다. 그 내용은 외조부의 관직을 몇 단계 낮추어 현재로 검사와 같은 위치에 임명하는데, 그 당시에는 검사가 행정과 집행을 모두 할 수 있었기에, 그 친일파에게 상의할 일이 있으니, 검사의 관할장소에서 만나자고 하여, 아무 의심없이 도착한 친일파를 세워놓고, 갑자기 미리 준비한 죄상과 판결을 낭독시킨 후 그 자리에서 사형집행을 하고, 외조부는 즉시 사직하고 피신하셨다.
그것으로 외조부의 관운은 끝났다. 그후 일본경찰이 와서 가택 수색할 때 그들이 찾던 서류를 압수하여 외조부를 수사하게 되었다. 일가 한분이 이를 알고 프랑스 영사관에 가서 황급히 손짓발짓을 하며 거기 직원을 끌고 가려고 하니, 이를 수상히 생각하여서 프랑스 영사가 직접 동행하여보니, 일본 경찰서였고, 거기서 취조받던 외조부를 보게 되어서 일경 담당자로부터 내용을 들은 후, 영사가 엄격하게 통고하기를, “이 분은 우리 프랑스 시민이니, 너희가 취조할 권리가 없다”고 하여서 위험을 넘기셨다. 그후 재산도 다 없어지고 셋방에서 가난하게 사시다가 73세에 돌아가셨다. 그 분은 이조말에 충신이고, 의기남아셨기에 나는 항상 자랑스럽다..
주해: 거사(擧事): 큰일을 일으킴. [비슷한 말] 사거(事擧). 주해: 조계지[租界地]; 주로 개항장(開港場)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불평등조약이 체결된 결과로 빚어진 것으로서 중국 ·한국에서는 조계, 일본에서는 거류지라는 이름으로 일컬어 졌다.

제2부: 어머니 소녀시절

어머니는 1899년에 출생하셨고, 1994년에 돌아가셨으니, 만 95년의 긴 생애를 가지셨다. 소녀 시절에 많은 호강을 하셨고, 출가하신 후, 길고 긴 파란만장의 생애를 가지셨다. 어머니가 태어 나셨을 때는 외가가 크게 번영할 때 였고, 어머니가 출가하실 때에는 가산(家産)이 기울기 시작할 때였다.
위에서 얘기하였듯이 외가는 철저한 천주교 가정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교리를 배웠고, 성모 마리아가 항상 어머니와 함께, 계시다고 믿어서 무서움이란 전혀 없었다고 하셨다. 동기간은 2남3녀이었고, 어머니는 셋째 따님이며, 오라버니 한 분, 남동생 한 분이계셨다. 어머니 일곱살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 사랑을 모르고 자라셨던 모양이다.
자신이 자라던 집을 얘기하셨다. 외갓집은 서대문에 위치하였는데, 그 대지는 수천평이었고, 집은 불란서식 2층집이었고 풍차가 달려있었는데, 아마 지붕위에 설치되었다고 믿는다. 어마어마하게 큰 집이었으며, 나중에 그 집이 팔리고 헐렸을 때 그 대지가 수 천평이었기에 천여호의 집들이 들어갔다. 얼마전에 나의 외사촌형으로부터 외조부님 호적등본복사를 받아서 주소를 찾아보니, 경기도(京畿道) 경성부(京城府) 서대문정(町) 이정목(貳丁目) 칠(七)의 일번지(壹番地)로 나와 있었다.
외조부는 자녀중에 어머니를 가장 사랑하셨는데 그건 어머니가 자녀중 가장 월등히 총명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보다 세살이 위인 오라버니, 어머니, 그리고 조카딸 이렇게, 셋을 위하여 장안에서 가장 유명한 한학자, 정다산의 후예인 정(丁)선생님을 훈장으로 모셔와서 세 생도가 함께 배우는데, 그 둘은 공부를 못해서 밤낮 혼이 나고, 어머니만 칭찬을 받아서 아무도 없을 때에는 오라버니가 어머니를 시기하여 못살게 굴었다.
사서삼경, 한시 한문등등 모든 걸 배웠고, 한문 글 짓지도 배웠는데, 또한 둘은 혼이 나고 어머니가 지은 시나 문장은 훈장님의 감탄을 일으킬 정도라 가끔 “이런 글이면 고문진보에도 실릴만 하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좀 자랄 때 외조부님은 어머니를 위하여 연못옆에 예쁜 별당을 지어서 어머니와 한 살 아래인 조카딸(맏 언니의 맏 딸)과 함께 있도록 하였다. 그곳과 본채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별당 앞 연못에서는 오색의 잉어가 연꽃사이로 꼬리를 흔들며 다니고, 두 소녀는 배운 한시를 읊으면서 완상도 하고, 또는 고목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거닐면서 봄 꽃 사이에서, 가을 달 아래에서, 손에 손을 잡고, 인생의 가장 좋은 때를 보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개화의 바람이 불어와서 여러가지 책자와 잡지까지도 나왔다. 지금도 기억하시는 게 있다. ‘안남(安南)망국사’는 프랑스가 월남을 점령을 한 후 그 고장 사람들로부터 햇볕의 세금을 받는다고 그 고장 주민을 굴속에 거두었던 사실을 기록하였스니, 그 악랄하기가 일본과 비슷할 정도였다고 믿는다. 주해: 주시경 선생이 일으킨 한글 발전의 사상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 그 여파로 고종황제가 양위하고 한일신협약이 맺어지면서, 일본의 차관정치가 시작되고 나서, 한층 더 가열되어 실천으로 옮겨졌다. 이해에 중국 양계초의 '안남 망국사'를 번역하여 간행한 것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그 다음 ‘톨스토이의 부활’과 ‘해왕성’(The Count of Monte Cristo by Alexandre Dumas)등을 탐독하셨다. 이 때쯤 어머니는 신학문을 배우고 싶으셨고, 동경이 가서 학교에 다니고 싶으셨다. 그러나 그 당시에 어린 여성이 유학 갈 수는 없었고, 물론 외조부께서 허락하실 이도 없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 학교가 시작되었는데(1911), 어머니는 신병이 생겨서 가실 수 없었다. 한동안 각혈을 하셨다는데, 무슨 질환인지 모르겠다. 이리하여 어머니는 신교육을 받지 못하셨다. 그후 어머니 신병도 차츰 완쾌하게 되었다. 1915년 가문간에 합의가 되어서 결혼하시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가문에는 어머니보다 몇 년 연상의 시누이 세 분이 계셨는데 모두 관립한성고등여학교(경기고녀의 전신)의 1회 출신인데, 첫째 시누이는 극성스러워서 학교에서 성적이 1, 2 등을 다투었지만, 둘 째, 셋 째 시누이는 하위권에 속하였다고 들었다.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었으니, 외조부께서는 이미 관직에서 나오셨고, 소유한 재산으로 사업을 하셨는데 불행하게도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여 가세가 많이 기울고 있었다. 그럼에도 외조부는 어머니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리할 정도로 비싼 패물을 중국북경에서 구입하시기 까지 하셨다. 이렇게 어머니는 결혼하셔서 우리 가문에 종부로 오셨다.
설명: 여기에 당시 학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인용하여 보겠다. 1. 구제중학교(舊制中學校)는 2차대전 패망전까지 일본 본토와 조선등의 국외 통치지역에 설치됐던 정규 인문계 중등교육기관이다. 여자 학교는 고등여학교라 불렀다 (줄여서 고녀). 수업연한은 5년이다 (여학교는 4년). 조선에서 일본인용 학교는 중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조선인용 학교는 차별적으로 고등보통학교라고 불렀다. 1911년 <조선교육령>이 반포되고 그 해에 인가된 최초의 고등보통학교가 관립 경성고등보통학교다. 당시에 여러 민족지도자들이나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기존에 설립되어 운영되던 보성, 휘문, 배재등의 사립 중등학교들은 고등보통학교로 인가받는데 경제적, 종교적 사정 등에 따라 훨씬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 초기 여학교를 찾아보자. 초기의 고등보통학교 및 중학교: 2.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 1906년 5월 22일 엄귀비(嚴貴妃)가 사립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를 설립하였으며, 1909년 5월 숙명고등여학교로 개칭되었다. 1911년 4월 사립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대한제국에서 황족이 세운 근대식 학교는 고종황제의 후궁이었던 순헌황귀비 엄씨가 소유한 재산을 기반으로 설립된 학교인 양정중학교·양정고등학교, 진명여자중학교·진명여자고등학교, 숙명여자중학교·숙명여자고등학교 뿐이다. 3. 경기여자고등학교(京畿女子高等學校): 1908년 4월 1일 관립한성고등여학교(官立漢城高等女學校)로 창설되었다. 1911년 2월 1일 관립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였고, 1938년 4월 1일에는 경기공립고등여학교로 개명하였다. 그러니 그 당시 여학교는 1908-1911연도에 설립되었다. 어머니는 9세에서 12세 경이었다.

제3부: 어머니의 중년

우리 가문은 경상도 진주에 거주하였으며, 진양 정씨 은열공파이며, 아버지는 12대 종손이었다. 대대로 한 500석의 재산이 내려왔는데 증조부께서 큰 재산을 만드셨다. 조부님은 진사급제하시고, 경북 예안 원님이 되셨고, 한일합방때 사직하고, 가솔을 모두 대동하여 서울로 이사오셨다.
집은 서울 적선정에, 온양 온천(지금의 아산시)에, 천안에, 그리고 현재 민속촌인 외암리에 각각 소유하셨다. 어머니는 비교적 현대 가정에서 생장하셨기에, 이런 경상도 가문의 의식에 대단히 서툴었다. 그래서 대단히 힘든 며느리 노릇을 하셨다. 친정이 천주교였지만, 시집오신 후 자신의 종교를 가질 수도 없었다.
자녀 이야기를 하자면 어머니는 막내인 나까지 포함하여 모두 3남 5녀를 가지셨다. 그중에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 때문에 어머니는 대단히 심각한 상처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조부님 등본에 두 형의 이름 즉 영호와 민호가 나오며 그들의 생년은 1925년, 1927년이었고, 자녀 순서로는 다섯째와 여섯째였다. 어머니는 평생동안 그들 생각을 하셨다. 둘 다 얼마나 인물이 잘 생겼는지, 천안 마을에서 애보기가 업고 나가면 길가던 멋쟁이 일본 부인이 데리고 근방 화원에 가서 탐스런 꽃다발을 한 아름씩 선사한 적이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들었다. 또 기억력과 판단력이 어른 같았다고 한다. 이 두 형제가 갑자기 급성 소아질환에 걸려 이삼일 혹은 삼사일 정도 앓고 사망하였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어머니의 상심은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 치료했던 의사선생님은 유명희극배우 ‘양훈’의 부친인 세브란스 출신의 양박사였다. 아마 Erysipelas나 Scarlet fever같은 Streptoccal infection이었던 모양이지만, 지금같은 항생제가 없었던 세상이니 어찌 할 수 있었겠는가? 상심에 빠진 어머니는 그 두 아들이 간 곳이라면 어디라도 따라가고 싶으셨다. 항상 그 생각만 하셨다. 도대체 그 둘은 어디로 갔는가? 오랜 세월 후에 신문 문화면에서 어떤 스님이 쓴 글을 읽으신 후 어머니는 갑자기 깨달으셨다. 그리고 불자가 되셨다. 그 글은 다음과 같이 짤막하다: “지금 너 자신은 과거에 네가 지은 행위의 결과요, 미래의 너는 지금 네가 하고 있는 행위의 결과다.” 그러니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탓 할건가? 그 때 부터 사찰에 가서 스님의 법문을 듣기 시작하셨다.
십여년후에 내가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45세이셨고, 어머니는 거의 사십이 다 되셨다. 내가 방금 낳았을 때, 애보기 아이가 나를 안고 어머니에게 보였더니, 그 두 형의 모습을 기대하셨던 어머니는 나를 보신 후 기대에 못 미쳐서 실망하셨지만, 이번 만큼은 이 아이까지 잃을 수 없다는 일념에 온갖 노력을 다하여 나를 키우셨다. “아무리 잘났으면 무엇 하나? 결국 잃었는데… 그만 못한 막내 하나라도 다시는 잃지 않겠다” 는 결심으로 어머니는 나를 키우셨고, 나 역시 쉽지 않은 성장기를 결국 무사히 넘겼다.
내가 그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두 형의 이야기를 실은 건 어머니의 일생의 가장 큰 한을, 그리고 일생동안 잊지 못할 비애를 설명하고자 함이었다. 선친 돌아가신 후 나의 고교 시절 어느 날 친척 아저씨 한 분, 어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삼인이 서대문 전찻길에서 동네 골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걸어 가면서도 어머니는 그 분께 영호와 민호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 두 아이가 지금 있으면, 이미 중년이 다 되었을테니,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소?” 하셨던 그 얘기를 들으면, 나 역시 “그런 형들이 있으면, 얼마나 나도 좋았을까?”하는 생각도 여러번 하게 되었다.

제4부: 어머니 노년

내가 출생할 때쯤 우리 가산은 완전히 바닥이 났다. 그래도 내 호적등본에 출생지는 ‘경성부 적선정 132번지의 1’ 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께 물어봤다. “내가 태어난 집이 큰 집이었나요?” 이에 어머니는 시무룩하게 대답하셨다. “그러면 뭐하니? 너 낳은 직후에 우리는 셋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니 그때부터 내가 30이 넘어 도미할 때까지 그 가난은 어머니와 나를 떠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내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 심한 고난의 삶이었다
내가 1967년에 출국한 후 어머니는 계속 정릉집에서 혼자 사셨다. 몇년 후 이곳에서 교육이 끝나서 개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있을 때, 처음으로 귀국해 보니, 어머니는 이미 팔십이셨지만 아직도 그 정릉집에서 혼자 살고 계셨고, 셋째 누이에게 남은 여생을 의탁하시겠다고 내게 알려 주셨다. 나는 당연히 내가 어머니를 모신다고 생각하였지만, 두 분의 이 결정은 이미 오래전에 합의하셨으므로 그렇게 이해하였다. 결국 나중에 어머니는 누이와 조카가 봉양(奉養)하였고 96세까지 장수하셨다. 그러니 어머니 결혼하시고 아버지와 해로하시기를 39년간이었고, 홀로 되셔서 사시기를 40년이나 되었다.
하긴, 평생을 살아 오신 서울에서 끝까지 계셨던 게, 나를 따라 이 멀고 먼 타국으로 오신 것보다 훨씬 낳았다고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옛 한양사진 몇 장: 본 내용과 관계는 없지만 정겨워보이고, 또한 친숙해 보인다. 어머니 자라실 때 서울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나하고 생각해 본다.
 

한양도성
File:한양도성.jpg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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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변천백년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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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서울의 전찻길, 서대문-충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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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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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사진 다섯장:

천지연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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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오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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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사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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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제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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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제입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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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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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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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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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祀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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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어머니 이야기는 다 끝났다. 1945년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 남은 우리 모자가 십여년 외롭게 정릉집에서 살다가 내가 미국에 온 후 셋째 누이와 그 가족이 그 정릉집으로 들어왔다.
그후 어머니는 여생을 누이에게 맡겼고, 집과 기타 남은 토지까지 모두 누이에게 주었다. 그 후 1994년 여름에 돌아가셨고, 나는 삼일장에 맞추어 귀가하여서 정례에 참여하였다. 마지막에 올린 사진 몇장은 어머니가 절에 다니면서 혹은 신도들과 함께 남해로 여행하면서 찍으신 사진 몇장을 내가 갖고 와서 여기에 실었다. 이곳 Canandaigua Lake home,에 살면서 국산 소반도 없어서 Table에 올려 놓으니 불편하고 또 이제 집사람이 제삿상 마련하기도 힘이 든다. 앞으로 얼마나 될런지 모르지만 그져 내 생전에 올릴 뿐이다.


  그 옛날 고교 시절 회기동 후생주택에서 어머니가 한시 유자음을 가르쳐 주실 때, 말씀하시기를, “나 떠난 후에 내 생각 날 때 이 시를 보아라.” 하셨다. “어머니, 오늘 어머니 이야기를 끝내면서, 제게 말씀하신대로, 이 시를 올립니다.”
 
遊子吟 孟郊 유자음 맹교

慈母手中線, 자모수중선하니,
遊子身上衣, 유자신상의를.

臨行密密縫, 임행밀밀봉하니,
意恐遲遲歸. 의공지지귀를.

誰言寸草心, 수언촌초심으로,
報得三春輝. 보득삼춘휘오?
떠나가는 자식의 노래. 맹교

자애로운 어머님 손속에 침선이 있으니,
떠나가는 자식 몸에 입힐 옷이로다.

떠남에 임하야 한뜸 한뜸 뜨시니,
생각하니 두럽건대, 늦게 늦게 돌아올 것을.

누가 말했던가? "마디만한 풀의 마음으로,
봄날의 찬란한 광명을 보답한다." 고...
 
Kwan Ho Chung-November 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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