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English
                 

    https://www.youtube.com/watch?v=xcoMHXrqSmA

     (선구자 서재필; KBS)

 

   작년 11월 한달 동안 한국에 있었다. 가기 전에 구한말 역사에 대한 자료를 인터냍에서

   찾는 동안 서재필을 접하게 되었고 그의 삶에 대해서 많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에 간 김에 서재필에 관한 서적등 그의 흔적을 찿아 보기로 했다.

 

   서재필은 1864년 고종이 왕이되고 대원군이 집권 할 무렵에 태어 났다.  성장 하여

   개화파의 총수 김옥균의 총애를 받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일본 하사관 학교에서 단기

   교육을 받은 후 귀국 하여 병조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때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등 과 함께, 쿠테타 혁명군을 직접 지휘하는 중요한 역활을 담당 하여

   적극적으로 참여 했다.

  

   그러나 이 어마 어마한 쿠테타는 3일 만에 완전히 실패로 돌아 갔다. 아직도 임금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어느 사교의 맹 신도 보다 더 굳게 믿고, 유교 적인 윤리외의 것들은

   악으로 치부 해버리는 백성들 앞에 개화는 어불성설이 었다. 구테타에 실패한 이들은

   분명히 역적이었고 3 족을 멸 한다는 반역죄를 지은 것이다.

 

    20대들의 섯부릇 불장난으로 끝난 3일 천하는 그들의 가족 들에게 커다란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서재필의 아내는 남의 종이 되기 싫어서 자기 친정 아버지가 준 극약을 먹고

    자결 했고 두살난 아들 또한 굶어 죽 었다.

 

    이와 같이 자기 내 친척들이 도륙을 당하고 있는 사이에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박영효

    네 사람은 일본으로 탈출 하는 데 성공 했다. 원래 일본의 도움으로 일으킨 정변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일본 당국의 보호를 기대 했었다. 고종은 역적들을

    암살 하려고 집요하게 자객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 당국은 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 하지

    않았다.

 

    서재필, 서광범, 박영효 세 사람은 자객들이 미치지 못할 미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1885년

    쌘프란 시스코에 도착 했다. 서광범은 아는 사람이 있는 뉴욕으로 가고 객지 생활을

    견디지 못한 박영효는 일본으로 다시 돌아 갔다.

 

    혼자 남은 서재필의 미국 이민 생활이 시작 된 것이다. 난생 처음 접하는 생활 방식, 언어

    사람들을 극복 해야 했다. 샌프란시스코 교회에서 만난 독지가의 도움으로 필라 델피아

    있는 사립고등하교에 입학 하여 졸업 할 때는 졸업 연설을 했다. 언어 장벽을 완전히

    극복 했을 뿐만 아니라 졸업생 중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다.

 

    향후 자신의 뼈를 깍는 노력과 적시에 따라온 운으로 미국 명문가의 딸과 결혼하고,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 미국 의사가 된다. 

 

    1895년 12월26일, 개화파의 천적 민비가 죽은 후에 서재필은 조국으로 돌아 온다.  10년 만에

    개화파가 득세 하게 되자 박영효등의 권유로 개혁에 참여 하기 위해서 였다.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발행 하고 만민 공동회를 개최 하는 등 국민 계몽에 몰두 했다.

    배제 학당에서 새로운 미국 식 민주주의 사상을 젊은 이들에게 가르 쳤다. 이승만도 그중에

    하나 였다.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을 국민이 무지 했기 때문이라고 판단 한 그는 위에서 아래로

    하는 개혁를 하기 전에 국민이 깨여 있여야 한다고 주장 했다.

 

    귀국 후에 그는 조선 사람이기를 거부했다. 고종이 주는 조선 정부의 모든 관직을 거부 했다.

    알랜과 똑 같이 미국인 자격으로 고종의 고문(advisor)으로 활동 했다. 그는 절대로 한국 말로

    연설 하지 않고 영어로 했으며 통역관을 대동 했다. 그는 고종에게 읍소 하지 않고 악수 했다.

 

    미국인 친구와 같이 길을 걸을 때 미천한 백성들이 구걸 하려고 치근 덕 거리자, 그 친구가

    발로 걷어 차는 등 폭력을 가해도 전혀 관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미국인 행세는 많은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는 고종에게 입헌군주제로 바꿀 것을

    요구 했다. 고종의 실권이 크게 위축 되는 제도 였다. 그는 또한 알랜이 추구 하는 미국 측의

    이권에 관계되는 사업을 반대 했다. 이러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 하여 2년 동안의 짧은

    조선 체류는 끝난다.

 

    귀국한 서재필은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고등 학교 동창과 같이 시작한 문방구 점

    사업이 번창 했다. 그러던 중 1919년 한국에서 3.1 운동이 일어 났다. 그동안 한국은 국민이

    몽매 해서 독립할 가망이 없다고 생각 하고 있다가 3.1운동에 관한 소식을 듣고 크게 고무

    되었다. 파리 평화회의에서 돌아 오던 중 미국을 방문 한 김규식등을 만나며 독립운동에

    몰입 했다. 그리고 사업으로 들어 오는 돈을 무리하게 독립 자금으로 써서 파산 하게 되었다.

 

    그때 나이 60세에 다시 의사 생활을 할려니, 세월이 흘러서 발달 된 의술을 다시 배워야 했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노력 하여 한국인으로 써는 최초미국 병리 학 전문의 가 되었다.

    2차 대전 때에는 군의관으로 종사 했다.

 

    1945년 미군정관 하지 중장은 이승만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 서재필을 불러 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에 출마 할 것을 원 했으나 거절 하고 국민들이 분열 하지 말 것을 당부

    하면 서 미국으로 돌아 갔다.

 

    1951년1월5일, 85세의 나이로 사망 했다. 한국 전쟁 중이었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애증과 증오가 되 섞인 그의 삶에 대해서 많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더구나 나의 직업도 의사이고 한국에서 태어 나서 미국 시민으로

    살고 있는 것도 그와 흡사 하다. 나는 문화적으로 뒤 떨어 진 한국인 들의 태도,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미국과 비교해서 비판 하고 때로는 증오 하기 도 한다. 그러나

    조국에 대한 사랑 또한 나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우러 나온다. 한국이 잘 살면

    그냥 좋다. 운동 경기에서 이기면 가슴이 뭉클 하다.

 

    처음에 찾아 간 곳이 전라남도 보성에 있는 서재필 기념관이 었다. 대 실망이었다.

    유교 적인 사고 방식을 그렇게 싫어 했던 그를 재래식 사당 처럼 만들어 놓고

    모 셨다. 가장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 했으나 별다른 중요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청계천 가의 헌 책방을 뒤졌다. 거기서 서재필 기념회가 발행 한 "선구자

    서재필"이라는 책을 찾았다. 4장으로 되어 있는 데, 제4장 "모든 것을 조국 독립에 바친

    의사 서재필"은 서울의대 동문(1992년 졸업) 이왕준이 집필 했다. 그는 일반외과 의사

    이며 명지 의료 재단 이사장 이다. 주간 신문 청년의사 발행인 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권

    의 소설이 있었다. 고승철의 소설 서재필과 고유의 서재필 광야에 서다 였다. 두권 모두

    너무나 피상 적인 묘사 였다. 내가 찾는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에 대해서 감동을 주기에는

    미흡 했다.

 

    하루는 남산 산책길을 동국대학 입구에서 부터 걸어 들어 갔다. 도중에 남산 도서관이

    눈에 띄었다. 옛날에 할일  없을 때 가끔 들려서 책을 뒤적 거리던 추억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서재필에 관한 전기 또는 자서전을 찾았더니 1948년에 김도태 라는 사람이

    지은  전기를 발견 할 수 있었다. 대출이 않되니 여기서 관람 하라고 했다. 반나절 걸려서

    다 읽어 보 았다. 만족 할 만한 수확은 없었으나 위의 다른 책들이 이책에서 많은 정보를

    얻엇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재필은 어려운 시기에 자기 삶을 최선을 다해서 값어치 있게 살려고 노력 했다고

    생각 된다. 타고난 재능, 신체적인 조건과 어려운 도전에 굴 하지 않는 의지를 바탕으로

    한 노력 그리고 따라온 운이 그의 일생의 총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직 그의 일생을 제대로 묘사한 전기나 소설이 없다. 아주 좋은 소재라고 생각 한다.

    연속극이나 영화도  잘 만들면 아주 재미 있을 것 같고,  국민 교양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 된다.

No. Subject Date Author Last Update Views
Notice How to write your comments onto a webpage [2] 2016.07.06 운영자 2016.11.20 17771
Notice How to Upload Pictures in webpages 2016.07.06 운영자 2018.10.19 31855
Notice How to use Rich Text Editor [3] 2016.06.28 운영자 2018.10.19 5498
Notice How to Write a Webpage 2016.06.28 운영자 2020.12.23 43428
8832 돌아오는 기러기 [1] 2024.03.27 정관호*63 2024.03.28 16
8831 이강인-손흥민 ‘골 합작’ 한국, 태국 3-0 완승…월드컵 최종 예선 진출 성큼 [2] 2024.03.26 황규정*65 2024.03.27 10
8830 1945년 8월 15일 오후 강릉 홍제정 안마을에서 [2] 2024.03.19 정관호*63 2024.03.24 57
8829 이승만은 왜 김구를 제거 했을까? [1] 2024.03.17 온기철*71 2024.03.18 35
8828 My Grandson [1] 2024.03.15 노영일*68 2024.03.18 77
8827 蜀相(촉상): 촉한 승상 제갈량 [1] 2024.03.15 정관호*63 2024.03.15 34
8826 1945년 8월15일에는 서울에 아무일도 없었다. [1] 2024.03.13 온기철*71 2024.03.14 34
8825 왕소군 고향에서 [1] 2024.03.08 정관호*63 2024.03.20 37
8824 정약용; 늙어가면 친구가 점점 없어진다. [5] 2024.03.06 온기철*71 2024.03.08 65
8823 Trump is OK to be a candidate. 2024.03.04 온기철*71 2024.03.17 46
8822 AMAZING GRACE [1] 2024.03.01 정관호*63 2024.03.08 50
8821 한국에의 복수국적 - 이중국적이 더 불리한 경우를 알려 드립니다 [1] 2024.02.24 운영자 2024.02.24 67
8820 신진서, 농심배 16연승... 중국 기사 올킬로 한국 4연속 우승 [1] 2024.02.23 황규정*65 2024.02.23 39
8819 古朝鮮:고조선 [1] 2024.02.23 정관호*63 2024.02.26 41
8818 한국진공작전; Eagle Project and Napko Project [2] 2024.02.22 온기철*71 2024.02.28 87
8817 일제의 김구 암살 공작과 밀정 [2] 2024.02.19 온기철*71 2024.02.22 73
8816 장개석은 한국에 친중정부가 수립 되게 하려고 임정을 도왔다. [1] 2024.02.17 온기철*71 2024.02.24 80
8815 봄날의 원망 [1] 2024.02.16 정관호*63 2024.02.16 36
8814 내 마음은 가을 달 [1] 2024.02.08 정관호*63 2024.02.14 470
8813 1945년8월15일은 과연 해방이었을까? [2] 2024.02.06 온기철*71 2024.02.07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