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07 03:36
https://www.youtube.com/watch?v=xcoMHXrqSmA
(선구자 서재필; KBS)
작년 11월 한달 동안 한국에 있었다. 가기 전에 구한말 역사에 대한 자료를 인터냍에서
찾는 동안 서재필을 접하게 되었고 그의 삶에 대해서 많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에 간 김에 서재필에 관한 서적등 그의 흔적을 찿아 보기로 했다.
서재필은 1864년 고종이 왕이되고 대원군이 집권 할 무렵에 태어 났다. 성장 하여
개화파의 총수 김옥균의 총애를 받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일본 하사관 학교에서 단기
교육을 받은 후 귀국 하여 병조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때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등 과 함께, 쿠테타 혁명군을 직접 지휘하는 중요한 역활을 담당 하여
적극적으로 참여 했다.
그러나 이 어마 어마한 쿠테타는 3일 만에 완전히 실패로 돌아 갔다. 아직도 임금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어느 사교의 맹 신도 보다 더 굳게 믿고, 유교 적인 윤리외의 것들은
악으로 치부 해버리는 백성들 앞에 개화는 어불성설이 었다. 구테타에 실패한 이들은
분명히 역적이었고 3 족을 멸 한다는 반역죄를 지은 것이다.
20대들의 섯부릇 불장난으로 끝난 3일 천하는 그들의 가족 들에게 커다란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서재필의 아내는 남의 종이 되기 싫어서 자기 친정 아버지가 준 극약을 먹고
자결 했고 두살난 아들 또한 굶어 죽 었다.
이와 같이 자기 내 친척들이 도륙을 당하고 있는 사이에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박영효
네 사람은 일본으로 탈출 하는 데 성공 했다. 원래 일본의 도움으로 일으킨 정변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일본 당국의 보호를 기대 했었다. 고종은 역적들을
암살 하려고 집요하게 자객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 당국은 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 하지
않았다.
서재필, 서광범, 박영효 세 사람은 자객들이 미치지 못할 미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1885년
쌘프란 시스코에 도착 했다. 서광범은 아는 사람이 있는 뉴욕으로 가고 객지 생활을
견디지 못한 박영효는 일본으로 다시 돌아 갔다.
혼자 남은 서재필의 미국 이민 생활이 시작 된 것이다. 난생 처음 접하는 생활 방식, 언어
사람들을 극복 해야 했다. 샌프란시스코 교회에서 만난 독지가의 도움으로 필라 델피아
있는 사립고등하교에 입학 하여 졸업 할 때는 졸업 연설을 했다. 언어 장벽을 완전히
극복 했을 뿐만 아니라 졸업생 중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다.
향후 자신의 뼈를 깍는 노력과 적시에 따라온 운으로 미국 명문가의 딸과 결혼하고,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 미국 의사가 된다.
1895년 12월26일, 개화파의 천적 민비가 죽은 후에 서재필은 조국으로 돌아 온다. 10년 만에
개화파가 득세 하게 되자 박영효등의 권유로 개혁에 참여 하기 위해서 였다.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발행 하고 만민 공동회를 개최 하는 등 국민 계몽에 몰두 했다.
배제 학당에서 새로운 미국 식 민주주의 사상을 젊은 이들에게 가르 쳤다. 이승만도 그중에
하나 였다.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을 국민이 무지 했기 때문이라고 판단 한 그는 위에서 아래로
하는 개혁를 하기 전에 국민이 깨여 있여야 한다고 주장 했다.
귀국 후에 그는 조선 사람이기를 거부했다. 고종이 주는 조선 정부의 모든 관직을 거부 했다.
알랜과 똑 같이 미국인 자격으로 고종의 고문(advisor)으로 활동 했다. 그는 절대로 한국 말로
연설 하지 않고 영어로 했으며 통역관을 대동 했다. 그는 고종에게 읍소 하지 않고 악수 했다.
미국인 친구와 같이 길을 걸을 때 미천한 백성들이 구걸 하려고 치근 덕 거리자, 그 친구가
발로 걷어 차는 등 폭력을 가해도 전혀 관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미국인 행세는 많은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는 고종에게 입헌군주제로 바꿀 것을
요구 했다. 고종의 실권이 크게 위축 되는 제도 였다. 그는 또한 알랜이 추구 하는 미국 측의
이권에 관계되는 사업을 반대 했다. 이러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 하여 2년 동안의 짧은
조선 체류는 끝난다.
귀국한 서재필은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고등 학교 동창과 같이 시작한 문방구 점
사업이 번창 했다. 그러던 중 1919년 한국에서 3.1 운동이 일어 났다. 그동안 한국은 국민이
몽매 해서 독립할 가망이 없다고 생각 하고 있다가 3.1운동에 관한 소식을 듣고 크게 고무
되었다. 파리 평화회의에서 돌아 오던 중 미국을 방문 한 김규식등을 만나며 독립운동에
몰입 했다. 그리고 사업으로 들어 오는 돈을 무리하게 독립 자금으로 써서 파산 하게 되었다.
그때 나이 60세에 다시 의사 생활을 할려니, 세월이 흘러서 발달 된 의술을 다시 배워야 했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노력 하여 한국인으로 써는 최초로 미국 병리 학 전문의 가 되었다.
2차 대전 때에는 군의관으로 종사 했다.
1945년 미군정관 하지 중장은 이승만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 서재필을 불러 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에 출마 할 것을 원 했으나 거절 하고 국민들이 분열 하지 말 것을 당부
하면 서 미국으로 돌아 갔다.
1951년1월5일, 85세의 나이로 사망 했다. 한국 전쟁 중이었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애증과 증오가 되 섞인 그의 삶에 대해서 많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더구나 나의 직업도 의사이고 한국에서 태어 나서 미국 시민으로
살고 있는 것도 그와 흡사 하다. 나는 문화적으로 뒤 떨어 진 한국인 들의 태도,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미국과 비교해서 비판 하고 때로는 증오 하기 도 한다. 그러나
조국에 대한 사랑 또한 나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우러 나온다. 한국이 잘 살면
그냥 좋다. 운동 경기에서 이기면 가슴이 뭉클 하다.
처음에 찾아 간 곳이 전라남도 보성에 있는 서재필 기념관이 었다. 대 실망이었다.
유교 적인 사고 방식을 그렇게 싫어 했던 그를 재래식 사당 처럼 만들어 놓고
모 셨다. 가장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 했으나 별다른 중요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청계천 가의 헌 책방을 뒤졌다. 거기서 서재필 기념회가 발행 한 "선구자
서재필"이라는 책을 찾았다. 4장으로 되어 있는 데, 제4장 "모든 것을 조국 독립에 바친
의사 서재필"은 서울의대 동문(1992년 졸업) 이왕준이 집필 했다. 그는 일반외과 의사
이며 명지 의료 재단 이사장 이다. 주간 신문 청년의사 발행인 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권
의 소설이 있었다. 고승철의 소설 서재필과 고유의 서재필 광야에 서다 였다. 두권 모두
너무나 피상 적인 묘사 였다. 내가 찾는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에 대해서 감동을 주기에는
미흡 했다.
하루는 남산 산책길을 동국대학 입구에서 부터 걸어 들어 갔다. 도중에 남산 도서관이
눈에 띄었다. 옛날에 할일 없을 때 가끔 들려서 책을 뒤적 거리던 추억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서재필에 관한 전기 또는 자서전을 찾았더니 1948년에 김도태 라는 사람이
지은 전기를 발견 할 수 있었다. 대출이 않되니 여기서 관람 하라고 했다. 반나절 걸려서
다 읽어 보 았다. 만족 할 만한 수확은 없었으나 위의 다른 책들이 이책에서 많은 정보를
얻엇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재필은 어려운 시기에 자기 삶을 최선을 다해서 값어치 있게 살려고 노력 했다고
생각 된다. 타고난 재능, 신체적인 조건과 어려운 도전에 굴 하지 않는 의지를 바탕으로
한 노력 그리고 따라온 운이 그의 일생의 총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직 그의 일생을 제대로 묘사한 전기나 소설이 없다. 아주 좋은 소재라고 생각 한다.
연속극이나 영화도 잘 만들면 아주 재미 있을 것 같고, 국민 교양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 된다.
2018.01.07 21:59
2018.01.08 02:25
1960 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사이에 우연히 누군가가 의대 동창회에서 서재필씨에 대한
책한권을 나에게 주었다. 무슨 서재필 재단 기금 모집의 일부로서 이책을 우리에게 돌렸었는데
그당시 재정적 여유가 없었던 우리들이라 그냥 지나쳐버린 일이 생각난다.
이 서재필 재단이 Philadepphia나 그부근에 있었던 기억인데 아직있을지?
두꺼운 책이였는데 읽어보고 감명이 깊었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책은 몇번 이사통에 사라졌지만 아직도 기억에는 남아있다.
I hope Dr. Ohn can find this book or his foundation if it still exists this day.
I am glad Dr. Ohn brought the story up and I wish that his legend should live with us.
I just wonder if one of us could have been such a pioneer
if we had been in America during those early years in Korean history.
We might have arrived in America too late to be of any legendary figure.
Well, this may be a stupid excuse. However, to produce a hero, the timing is critical.
2018.01.08 06:56
서재필 기념재단은 지금도 필라델피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재단은 처음엔 현봉학씨(흠남철수작전때의 통역관)와 연대출신 이봉식씨가 이끌었고,
그후 서울의대출신 이만택선생님이 이끌은 것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미군정의 하지장군이 재미한인 의사 두명을 (서재필씨와 최재창씨) 초대하였는 데
이슴만밑의 한국사람들이 서재필씨를 배척하여 미국으로 도로 보내고,
최재창씨는 힘도 없는 보사부차관일을 보게하였다가 그 분도 다시 돌아와,
후일 재미한인의사회를 창건하셨습니다. 1995년인가?
최재창선생님은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건국공로자 표창?) 한국에 잠간 오셨으나
한국의 아무도 그 분을 알아 보지 못하여 매우 섭섭해 하시는 것을 제가 목격했습니다.
초기 한인의사들의 발자취를 찾으면 좋겠습니다만 약 30년전 이러한 일을 하겠다고 했으나
일하시던 분들이 싸움박질만 하던 바람에 무산되었죠.
아마 이젠 조금 늦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제가 생각해도 우리 한국사람들은 좀?? 신백효
2018.01.08 08:40
http://jaisohn.org/korean/mission/
(서재필 기념 재단)
1975년에 필라델피아 의사 8인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 졌네요.
초대 이사장은 현봉학 1977-1985 이고 이만택 동문은 1988-1892
에 이사장을 맏아 하셨고, 1994-1997에는 회장으로 봉사 하셨습니다.
지금도 이사 이십니다.
1952년에 서재필의 비서였던 임창영(Channing Liem)이 영문으로 쓴
America’s Finest Gift to Korea; the life of Philip Jaisohn 이라는 책
이 쌘프란시코 public library 에 있다고 하네요. 89 쪽으로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닌 모양입니다.
1970년에 출판된 송건호 지음 송재 서재필, 태극 출판사 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2018.01.08 09:23
일본 하사관 학교에서 신식 군대 교육을 받은 서재필은 요지음으로 말 하면
사관 학교 출신 엘리트 군인 이었고 갑신 정변 때 쿠테타 군을 지휘 했던
장교 였다. 그의 교육은 과거 공부의 필수과목인 유교의 윤리 도덕에
관 한 것들에 불과 했다. 미국에서 의사가 되기에는 핸디 캡 투성이인
백 그라운드이다. 얼마 되지도 않은 일본 생활 동안 그는 일본어에 능숙하게
되고, 미국에 간지 얼마 않되어 사립고등 학교에서 우수 한 성적을 내면서
공부 할 정도로 영어에 숙달 하게 되었 슴은 언어 습득에 남 다른 재능을
타고 났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워싱톤 에 있는 군 의학 도서관에서 일본,
중국의 의학 서적을 영어로 번역 하는 직장을 얻은 행운도 그의 능숙한
영어, 일본어 실력과 한문 실력이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월 150불이라는
고액의 봉급으로 채용 되었다. 한 가족이 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만족 하지 않고 그 직장을 기반으로 의학 공부를
하여 의사가 된 것이다.
의사가 된 후에도 군에 대한 애착을 잊지 않았던지, 미국과 스페인과의
전쟁 떄에 군의관으로 종군 했고 2차 대전 때도 군의관으로 일 했다.
178 cm의 키에 어려서 부터 싸움을 잘 했다는 그는 문무를 겸비한
의사 였다.
인종 차별이 극심한 당시의 미국 에서 상류 층 백인 여자와 교제 하여
결혼 했다는 것은 그의 용모와 언어 구사, 학식 등이 이것을 극복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 된다.
용모, 타고난 재능, 노력과 의지 뒤에는 운 이 따랐다. 그는 하면 된 다고 믿었고
해보지도 않고 포기 하는 조선 사람들을 꾸 짖었다. "Good luck is the result of
hard work."라는 말이 생각 난다.
FYI;
Dr. Soh Jaipil on the Wikipedia
http://en.wikipedia.org/wiki/Soh_Jaipil
PS;
Is it A Time to Look at Us, Korean-Americans,
- Who We Are? -
http://en.wikipedia.org/wiki/Korean_Americ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