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번성한 자본주의의 전형인 미국 아마츄어 스포츠(professional sports 는 물론)에서 NCAA 같은 대학스포츠를 침범한 자본주의의 횡포앞에 스포츠의 아마츄어리즘 은 이미 물건너 가버리게 한듯 하고, 대학이라는 상아탑도 중계료, 광고 등등을 통해 학교의 재원을 느리는데 급급, 심심치 않게 보고되는 유명대학교 스포츠프로그람에 대한 sanction, 추문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학교 스포츠에 있어서 학생들의 참여는 교육이란 목적의 한 부분이어야 하며 기타 어떤 명예, 금전적, 사회적 이득의 목적을 배재하여야 하고, 한 학교 스포츠에 있어서 추후 프로 스포츠진출, 사회적 명예 등을 추구하는 program을 추구하려면,따로 이들 학교만의 다른 리그 시스템을 만들어야한다는 sports 학자들의 글을 읽은적이있다.
1980년 Lake Placid Winter Olympic 에서 500M, 1,000M, 1,500M, 3,000M, 5,000M 전종목 에서 금메달을 딴 Eric Heiden이 38 년만에 처음으로 Lake Placid 를 재 방문한 기사를 며칠전 Washington Post Internet 판에서 읽었다.
올림픽 직후 그는 학교로 돌아갔고, skating 에서 은퇴, cycle선수로 활약하며 대학을 졸업, Stanford 의대를 졸업하고 orthopedic surgeon이 되는 초인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늘 쓰고 있었던 Crest 치약, Schwinn Bicycle 외에는 광고제의를 거절했던 쉽지않은 결정을 하며 한 말 “I enjoy school. Sure the life of an athlete can be great but soon or later you’ve got to realize there’s more to life.”
많은 재정지원 속에 자기 잇속을 챙기고 있을 오늘날 학교 스포츠-아마츄어 선수, 스포츠 관계자들은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나 자신 어떤 organized 스포츠에서도 의미있는 시간을 소요하지 못했으나, 1960-70 년대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나의 주위에도, 젊은 시절 뛰어난 또 순수한 아마츄어 스포츠맨의 자질을 보여주고, 다른 분야에서 큰 업적을 이루신 분들이 몇 분 기억된다. 아마도 운영자 윌리암 님도 그런 분 들 중 하나일 듯 하다.
전 노동부 장관, 노동법 교수 이영희 이야기(1943-2016)
1958 년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때 나는 방송반, 신문 반 일로 학교에 나와, 선배들이 시키는 음반 녹음, 가을 교지 발간 관련 시키는 일들 하고 있었다. 시간이 나면 체육관에서 유도 연습을 하던 친구와 만나 잡담을 하며 고교 야구부의 batting practice 를 보고 있었다. 동쪽 강당 아래 홈플레이트에서 한 왼손잡이 타자가 치는 공마다 서쪽 담장을 넘기거나 담장 옆 체육관 지붕을 때리고 있었다.
당시 K고교야구부는 늘 꼴찌수준으로 늘 바닥이었다. 나는 놀래서 “저게 누구야?” 친구에게 물었다. 경남 중학을 졸업하고 나의 class 보다 2년 위 高1 에 입학한 왼손잡이 야구 선수 “이영희”란 분이었다.
팀의 수준이 늘 바닥이니, 청룡기나 황금사자기 tournament에 전에 출전하면 팀은 1회전이나 예선에 7회 콜드겜임 으로 떨어져 나가니, 그는 실력을 제대로 나타내 보지도 못 했다. 그러나 서울 고교 야구 춘계, 또는 추계 리그 시즌이 되면 팀은 늘 지더라도 그는 타율, 장타율에서 당시 야구 명문고 였던 경동, 휘문, 배재등의 일류 타자들과 견주어 하나도 밑돌지 않았다. 졸업하기 전 高3때의 추계 리그에서 그는 같은 학년 경동고 “백인천”(한국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 진출)등을 누르고 타격상을 받았다.
61년 서울 법대에 진학,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제적, 몇 년 낭인 생활을 하다 대학원에서 노동법을 전공하며, 70년대에는 전태일 사후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결국은 노동법 전문가로써 인하대에서 노동법교수로 지냈다. 김영삼 대통령시절 Think Tank 여의도 연구소장직을 거쳐, 이명박 정부의 노동부장관을 지냈다.
몇 년전 서울 방문 시, 법조계 친구들과의 저녁자리에서 우연히 이 선배를 만나 인사--한 몇 분간 중학 시절에 내가 본 그분의 호쾌한 타격 폼을 추억할 기회가 있었다.
아깝게도 1년전 돌아가셨다. 낭인시절 학원 강사로 일할 때 만나 결혼한 몇 년 아래의 부인, 서울대 이 모 교수를 남기고----가깝게 같이 활동하다 몇 년 먼저 떠난 보수 선진화의 담론가 그의 후배 박세일과 함께, 한국의 보수 진영은 또 한명의 보수 인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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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roughly enjoyed it.
Thank you, Dr. 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