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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선친 유학기

2018.11.01 20:16

정관호*63 Views:392

 
선친유학기
 

내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로부터 옛날 이야기처럼 듣기만 했던 아버지의 미국이야기를 실제로 가서 확인할 때가 왔다.
첫번째로 펜실베이니아 상과대학이다. 그럼 시작하기 전에 어려서부터 무얼 들었나하는 걸 밝히려고 한다.
아버지의 성함은 정재원이시고 호는 담재였다. 다음에 한문글자로 썼다. 淡齋鄭載謜을 Naver 혹은 Daum 검색에 넣고 클릭하면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실은 게 아니고 어떤 분이 올린것이라고 믿는다.

 

1 어머니의 아버지 유학 이야기
 

내가 강릉중앙소학교2학년 여름방학때 우리나라는 해방되었다. 얼마 후에 그곳 청년들이 홍제정에 있는 조그만 안방, 건넌방 그리고 툇마루를 가진 우리집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버지께 절을 하면서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간청하였고, 아버지는 흔쾌히 승락하신후 안방과 건넛방의 문을 터 놓은후 그들이 들어와서 공부를 시작하고 나는 어머니 따라 옆집에 가서 있었다. 그들의 영어공부가 끝날때까지.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많이 찾아오기 때문에 그들을 이 조그만 집에 수용할 수가 없어서, 결국 방학중인 학교교실을 열고 그곳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때쯤 되어서 어머니는 이웃 사람들에게 아버지 미국유학이야기를 하셨고, 나는 항상 어머니 곁에 있었기에 눈을 반짝거리며 함께 듣고 있었으니, 내 기억에 남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조부님이 아버지를 십여세때 미국유학을 보내셨다. 가시기 1년전에 일본 동경에 있는 청산외국어학원에서 외래학생으로1년간 영어를 배우셨고, 동경에 살고 있던 미국인 목사가족 집에 하숙을 하며 그 집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영어도 배우셨다.
처음 조선에서 일본으로 떠나실 적에 어떤 인사가 아버지를 동반하였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다음해 일본에서 미국으로 가실때에는 후견인으로 아버지의 삼촌, 그리고 미국 물정을 잘 아시던 김규식박사와 함께 동경항구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한달간 걸린 항해끝에 미국에 도칙하셨다. 김규식박사가 뉴욕시에서 두분 거주할 곳과 아버지 학교를 선택하셨다고 믿는다. 김규식박사는 전부터 우리집에 자주 방문하시며 할머니와는 의남매를 맺으섰다고 들었다. 지금에 와서 어찌 그게 가능한가하고 혼자 의문을 일으켰다 할머니는 이름높은 서흥김씨의 가문에서 오셨는데, 혹시 두 분이 김씨 일가가 아니셨는지 모르겠다.
도착 직후 아버지는 그곳 어떤 Elementary School 즉 초등학교에 가서 입학시험, 주로 영어시험을 치셨는데, 그만 낙방을 하셨다. 그런데 그곳 시험관이 친절하게도, 아버지에게 그 근방에 있었던 동네도서관에 가서 누구를 만나서 도움을 청하라고 하여 그 분을 만나서 필요한 책을 빌려서 열심히 공부하신결과 재입학시험준비를 하셨는데. 그 책들로부터 많은 지식을 배웠고, 또너무 재미있어서 밤낮으로 공부를 하셨고, 다음 재시험에는 무난히 햡격하셔서 거기서 공부를 하셨다. 그러고 나서 학업을 계속하셨는데, 문제는 송금건이었다. 조부님께서 조선에 파견나온 미국인 선교사를 통하여 송금을 하여서 그에게 돈을 주면 그가 받아서, 본국 교회에게 얼마 받았으니 미화를 얼마를 지불하라는 통지를 보내서, 아버지와 숙부님이 생활하고 아버지 교육비로 쓰도록 계획하셨는데, 그 송금이 항상 잘 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교육비조차 떨어질 때가 적지 않았다. 말할것도 없이 그 당시에 국제간 송금이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국제은행이란 게 없었고, 국제전화도 없고, 비행기란 것도 없고 오로지 선편을 이용한 편지가 있을 뿐이고 왕래는 환태평양 여객선이었을 뿐이었다.
이런 곤란속에서 10년간 교육을 받으시다가 조부님과 송금건을 상의하시려고 일시 귀국을 하셨는데, 부자간에 새로운 송금방법을 채택하기로 하여서 아버지가 귀교하시려고 하는 시기에,. 뜻밖에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당장 전세계에 걸친 해군봉쇄(Naval blockade)가 시작되어 모든 민간 여객선의 항해가 금지되어서 할 수없이 아버지는 국내에 정착하시게 되었고, 또 어머니와 결혼하시고 가내재정을 관장(管掌)하시게 되었다.
그 후 전쟁이 끝난 후, 두번째 도미하셔서 교육을 재개할 걸 알아보셨으나, 그때는 이미 재정상황이 여의치 못하여 포기하시고, 다시 귀국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 교육에 관하여 결론적인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의 십년유학중 마지막교육은 펜실베이니아 상과대학 4년 과정중 3년을 마치셨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오로지 일년을 남겨놓고 학비조달 때문에 그 먼 귀국을 하셨다? 이런 설명은 현재의 나로서 납득할 수없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였기에 그런가보다하고 생각하였을 뿐이다.
또 10여세된 아버지가 그 머나먼 미국에 가서 도저히 혼자서 공부와 생활을 하실 수없기에, 삼촌을 보호자나 후견인으로 동반한 건 이해가 간다. 그분은 그때 연세가 아버지보다 14세 위였으니, 아마 미국도착 당시 이십사세였겠다. 어머니는 말씀하시기를, 도착한지 얼마후에 그분도 또한 자기의 공부를 하여서 결국 콜로라도 광산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셨지만 지병으로 곧 돌아가셨다고 하셨다. 이것이 어머니가 내가 들려주신 이야기의 전부이다.
집에 아버지 학창시절에 찍으신 독사진 한장, 졸업사진으로 알려진 학교사진 한장, 그리고 두번째 도미하셔서 친구분과 함께 찍으신 사진 넉장이 았었고, 또 학교교정에서 군사훈련한다고 학생들을 운동장에 배열시키고 대포도 몇개가 배치되어있었 사진던 사진을 나는 어려서 보았지만, 그건 1.4후퇴 후에 집에 와보니 없어졌다. 내 생각으로는 그게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찍은 사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어머니께서 하신 이야기로서 연도로 따지자면, 1945년부터 내가 어머니 슬하를 떠날 때 까지이니 1967년까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사진들을 좀 더 설명하고 싶어서 그 후일 즉 2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 간 재료를 싣는다.


유학기 2 : 아버지의 제2차 미국방문과 사진넉장
나는 1978년에 첫번째 귀국방문을 하였고, 그때 아버지의 나머지 사진 넉장을 갖고 왔다. 이 사진은 아버지 귀국하신지 9년 후에 재차 도미하셔서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일을 정리하실 겸 가셨다. 우선 Penn대학에 가셔서 귀교하지 못했던 사정을 설명하고 또 계속 공부하실 수 있을지 탐문하셨지만, 학교 문제가 아니라 이때에는 아버지는 이미 네 딸의 아버지이며 또 가정 재정을 담당하셨기에 공부를 계속하는 건 불가능하였다. 그외에 적지 않은 소유물을 미국인 친구에게 일시적으로 맡겨놓아서 찾으려고 하시니까 그 친구는 불행히 전쟁중에 징집되어 유럽 전선에 배치되었다가 전사하여서 주인없고 관리자없는 소유물은 이리저리 흩어졌고, 겨우 조금 남은 걸 수습할 지경이었다.
다행히 그 당시 아버지가 어머니네게 붙인 엽서가 남아있어서 확고한 여행일정을 찾았고, 그외에 사진촬영장소는 그 후 오랜시간이 지난 후 내가 찾아내었다. 찾아낸 시기는 2015년 1월부터 한 2년에 걸처 두 장소를 완전히 찾았내었으니, 추후에 자세히 올리려고 한다.
사진 넉장중 2장은 돌담앞에서 찍으신 사진이고, 다른 2장은 친구분과 나란히 앉아 찍으셨는데, 그러니 친구 두 분이 교대로 아버지와 함께 찍으셨다. 돌담앞에서 그리고 보행로가의 벤치자리에서의 사진이었다. 이 사진들은 어버지가 두번째 미국방문동안 찍으셨는데 그해가 1923년 여름에 도착하셨고, 사진은 틀림없이 그해 겨울사진이었으며, 아마 그 겨울을 지내시고 귀국하셨다고 생각한다. 이 사진 장소를 찾으려고 본격적으로 노력한 것은 미국생활을 오래 하고 퇴직한 후였다. 결국 The Historical Society of New York에 두 번 방문한 후 그곳을 알아내었다.
그날이 바로 2015년 1월 6일이었는데, 폭설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아버지가 바로 돌담 앞에서 사진찍으신게 1924년 초로 보이니, 91년만에 내가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고, 아버지가 내려다보시는 듯한 감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두장의 사진에 관해서는 묻지도 않았고, 추후에 내가 혼자서 찾을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뉴욕시에서 살지는 않았고, 아들 아파트가 맨해튼 한복판에 있고, 주말이나 휴일때는 가족을 데리고 Long Island의 Southampton이란 곳에서 지낸다. 그래서 나는 다음번 날씨가 좋은 계절에 오기로 계획을 새워서 여름철에 다시 와서 보행로가에 있는 벤치를 찾아보니 모든게 여의치 않아서 몇 차례 방문에도 결국 찾기에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였다.
그 첫째 이유는 겨울 후빈기를 뺀 시절에는 무성한 고목들의 나뭇잎에 시야가 막히기 때문에 Castle의 Tower를 제대로 못 보아서 그 당시 벤치 자리를 추정키 힘들었다. 둘째는 보행로에서 타워를 향했을 때 벤치는 보행로 우측 즉 동편에 있었고, 그 동편은 아주 높은 언덕이었으며 그리로 타워건물에서부터 길고 긴 돌담이 동북편에서 남북편으로 가고 있었고, 그뿐 아니라 그 벤치바로 뒤에 큰 원주(圓柱)가 서있었는데, 아마 그 위에 전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보행로 우측지역은 완전히 변해서 언덕도, 긴 장성(長城)같은 돌담도, 원주도, 벤치도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대단히 큰 Pond가 그장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주위로는 나무만 자라고 있었으여, 보행로 우측 편에 있었던 벤치 지역에는 Cordon 즉 저지선으로 진입을 막고 있었다.
그 다음해 2016년경에 나는 다시 Visitor’s Center에 방문하여 여직원에게 옛날 벤치사진을 보이며 그 벤치가 놓였던 위치를 찾는다고 문의하니, 그는 내게 설명하기를, 몇십년전에 이곳에 그 지역을 모두 허물고 땅을 파서 현재 우리가 보는 Turtle Pond를 만들었다고 설명하여서, 내게 직접 그곳을 보여주기를 청하니 그는 선선히 나와 함께 그곳에 내려가서 적당한 지점을 표시해 주며 바로 여기라고 하여 내가 또 그곳에 서 있고, 그는 내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후 몇 차례 혼자 가서 보행자에게 옛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진을 여러장 찍었다. 벤치도 없고 예전에 길에서 약간 들어간 위치였지만 이제는 들어갈 수 없어서 길가에서 찍었다.
그런데 그 맞은편에는 벤치들이 있어서 내가 맞은 편 벤치에 앉아서 찍기도 했고, 또 빈 벤치를 찍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보행로에서의 나의 임무를 완성하였다.
그런데 나는 이곳을 자세히 밝히기를 후일로 연장하겠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1971년 이야기를 하는 중인데, 이 발견은 물경 2015년 1월 이후에 생긴 일이였기 때문이다. 다시 아버지 사진과 90여년 후에 내가 그 자리에서 찍은 사진을 비교하여 보시기 바란다.


3. 본인 정관호의 도미 이후 선친의 발자취를 찾아서

3-1 University of Pennsylvania 방문 1969년 여름
아버지 유학이야기를 끝나고 다음 어머니 이야기를 하느라고 유학기가 좀 지체되서. 그래서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1967년 6월 말에 첫항공기를 타고 동경공항에 내려서 다른 항공기로 바꾸어 타고 Vancouver, Canada에 내려서 또 세번째 항공기를 타고 뉴욕 케네디공항에 내렸다. 이리하여 미국생활이 시작되었다. Luggage속에 필수품, 책, 그리고 아버지학교사진을 갖고 왔다. 그후 첫병원 Jersey City Medical Center에서 1967년부터 1968년까지 1년간 Intern을 하였고, 1968년부터 1970년까지 Pennsylvania Hospital, Philadelphia, PA에서 Medical Resident를 하였다.
이 Philadelphia에 University of Pennsylvania가 있었고, `1979년 여름에 대학교교정에 가서 대학동창회를 찾아갔다. 내가 가진 건 아버지학교사진 한장이었고, 아무 서류도 없었다. 참고될만한 유일한 연도는 제1차세계 대전 발발한 해였으니, 그 시작일이 July 28, 1914이었기에 , 아버지가 이곳에서 1914년까지 수업하셨다고 말하니, 그들이 한동안 찾은 후 The Yearbook of 1913-1914에서 아버지를 찾았다. Chung, Jaone. Seoul, Korea. 3911 Pine Street이 아버지기록의 전부였다,
그러고 성적증명서를 찾으려면 아버지는 졸업생이 아니기에 동창회에는 없고, Archive 즉 기록보관소에 가서 찾으라고 두 사람을 배당해 주어서 우리 셋이서 그곳에 가서 그들이 거의 한시간쯤 찾은 후 발견하였다고 소리를 질맀고, 성적증명서 한장을 찾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가 4년제 Pennsylvania 상과대학에서 3년을 마치셨다고 하였는데, 동창회기록에는 오로지 1913년에서 1914년까지 1년간 Freshman 을 끝마쳤다고 되어있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미국에서 한국에 오신 연도는 1914가 틀림없으니, 아버지가 이 대학에서 3년을 다니셨다는 근거는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나는 판단하였다.
어머니는 자랄 때 한문학을 여러해 배우셔서 남과 다르게 대단히 유식하신데 어찌 이러한 착오가 생겼을까하고 나는 큰 의문이 있었지만, 사실은 사실대로 받아드려야했다. 그러니 아버지는 Wharton School,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오로지 1913에서 1914년까자 1학년 즉 Freshman 을 끝마치시고 귀국하셨다. 이 기록에 전학교가 Williston Seminary라고 나와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갖고 있었던 학교사진을 자세히 보면 앞줄 가운데 학생이 쥐고 있는 깃대에 Williston이란 글자가 있고 그 아래에 아주 흐미하기 짝이 없는 숫자가 1913이라고 나왔다. 그런데 Williston Seminary를 찾을 수 없었고, 나중에 그 이름이 Williston Academy로 변경되었음을 알게 되어서 거기서 아버지 4년기록 즉 1909에서 1913년까지 학교기록을 받았으며, 또 거기서 온 아버지 주소가 있는데 633 West 115th St., N.Y. City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Williston Seminary 주소는 19 Payson Avenue, Easthampton, MA이며 내가 있는 곳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있어서 쉽게 방문하지 못하였다.

3-2 뉴욕한인교회 방문
1970년에서 1971년말까지 Bronx, New York에서 마지막 교육을 받을 때 뉴욕시에 있는 아버지주소에 흥미가 생겨서 어느 일요일에 혼자서 차를 끌고 어렵지 않게 찾아갔다. 아버지가 사셨을 때 가끔 일화를 이야기하셨다. 아버지 숙소에 아버지와 아버지 삼촌 두분이 큰 방을 쓰셨는데 어느날 이승만목사님이 작은방(房)에 들어왔는데, 프린스턴대학에 박사학위를 제출했다가 통과하지 못해서, 이곳에서 몇달간 박사학위논문을 쓸 준비를 하였다. 3개월인지 6개월인지 하는 기간을 같은 건물에서 지냈는데 아버지는 미쳐 20세가 안되셨고, 이목사님은 중년쯤 되었다.
그 두분이 아주 가까워서 농담도 주고 받았는게, 유명한 농담애기를 아버지가 가끔 이야기하셨다,. 그는 아버지를 아무개야하고 불렀다.
이목사, “이무개야,” 아버지, “왜 그러시오?”
이목사, “내가 어제 밤새도록 잠을 못잤다.” 아버지, “왜 못잤소?”
이목사, “어젯밤, 달은 밝고 내가 꼭 한잔 하고 싶었다.” 아버지, “한 잔 하고싶으면 하면 되지 무어가 문제요?”
이목사, “야, 너는 내가 목사인걸 모르고 하는말이냐?” 아버지, “그거 별것도 아니네, 술을 못 끊겠으면, 그 목사옷을 벗어버리고 소원대로 싫컷 술마시면 되지, 무어가 문제요?”
이목사, “저런 고이한것! 썩 물러 가렸다!.”

언젠가 이목사께서 아버지를 세례하여 주셨다고 얘기하셨다. 어디서 어떻게 세례를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또 다른 한가지 얘기는 어느날 아버지 삼촌께서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함병되었다는 슬픈 소식을 갖고 와서, 삼촌과 조카 두 분이 얼싸안고 빈방에서 하루 종일 우셨다고 한다. 얼마나 참담하였을까? 만리 타국에서 들은 고국소식이 겨우 나라를 빼앗겼다는 소식이었으니!
내가 어렸을 때 그 이야기를 들으면 아버지, 삼촌, 이박사 이분들이 살았던 곳이 우리나라의 어떤 여관집을 상상했다.
그런데 내가 막상 가보니 그건 오래된 4층 건물이었고, 작으마한 문에는 "뉴욕한인교회" 라고 쓴 간판이 붙어있었고, 어떤 한인노인이 빗자루로 입구를 쓸고 있었다.
내가 목사님을 보고 싶다고 하니 방금 외출하셨다고 하여서 그냥 돌아왔다. 그때가 아마 1971년 여름이었다고 기억한다. 이 교회에 관하여 추후에 다시 글을 올린다.
나는 시간을 내서 Williston School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아직도 교육기간이었가에 지연하지 않을 수없었다. ..


3-3 : Williston Academy (Former Williston Seminary
1979년. 8월 마지막 일요일
우리가족은 1971년 12월에 서부뉴욕(Upstate New York)에 속한 Rochester, NY으로 이사오고 거기서 임시 근무처를 마련하였는데, 결국 다음 해 여름철에 개업을 시작하고 영주하게 되었다. 바다같이 큰 Lake Ontario의 남부연안에 위치한 도시였으며, 겨울이 아주 길로 봄은 짧고 여름과 가을이 좋다.
처음 1972년 후반에 나의 평생 새 집을 샀다. 이층이고 새 집이고, 4 bedrooms이 이츰에, 아래층에는 Family room, dining room, living room이 있고 또 Kitchen옆에는 Breakfast room이 있고, Fireplace가 있었다. 크기는 2500 Sq ft로 미국 중간크기의 집이었고, 마당은 ½ Acre였고, Two car garage가 있었다.
우리부부는 황홀하였다. 여기에 온갖 좋은 것을 모두 추가하였다. 우선 Family room에 Wood paneling를 하였고, 그것을 확대하여 지하실 전체에 Wood paneling을 하였고, Wall to wall carpeting을 지하실, 1층, 그리고 2충에 모두 깔았다. 집 뒤편에 Sliding door가 있고 거기에 Concrete로 만든 Patio가 있어서 뒷 마당에서 놀았는데, 바로 그 앞에 Inground Swimming pool을 만들었다. 우리 두 아들이 하나는 5, 6세와 2, 3세였다.
맏아들 Henry는 나서부터 나처럼 고생하였다고 우리가 많이 잘 해주고 싶었다. 나의 교육기간에 그 적은 보수로 살기가 너무 힘들었다. 이 세상에 좋은 것은 모두 두 아이에게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 이때부터 그들에게 모든 좋은 것을 해주려고 그리고 사실 해 주었다.
이곳에서 처음에는 병원에 House Physician에 취직하여 입원 환자를 돌보는 일을 하였고, 온지 얼마 안되어서 의사면허를 얻이 나도 개업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한가하였지만, 세월이 가니 차차 환자가 늘어서 바쁜 생활을 하였다. 개업을 하면 환자를 볼 Doctor’s office를 차려야하고, Secretary를 Receptionist라고 부르는데, 환자를 안내하고 환자기록을 관리하고 또 치료비를 받고 또 보험회사에서 받을 돈도 받는다. 그러고 간호사가 한 명은 있어야한다.
기타 청소부도 있어야하지만 일주일에 두, 세번만 오면 된다. 그러고 심하게 앓는 환자는 입원치료를 하여야 하니, 대형병원에 자기환자를 입원시키는 의사를 Attending Physician이라고 한다. 그리고 근무 시간외에는 Answering Service란게 있어서 의사의 행방을 꼭 알아야한다. 환자나 가족이나 혹은 급히 치료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찾을 때에는 나에게 곧 연락해서 Message를 전해야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개업의란게 봉급받는 의사보다 수입은 났다고 해도 상당히 고된 직업이다.
이렇게 시작해서 오래동안 이 작업을 가졌다. 여러해 동안 아버지의 학교 Williston Academy를 찾아 갈 생각을 못하였다. 1979년 여름에 처질녀 즉 Wife’s niece가 방금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그 가족은 LA, California에 살고 있으며, 대학은 Smith College라고하는 이름있는 여자대학이였다. 나에게 부탁해서 우리집에서부터 그 학교까지 8월 마지막 일요일에 기숙사에 들어가도록 해달라고 해서 내가 지도를 찾아보니, 거리가 309 miles, 운전시간은 4시간 41분으로 나와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대학은 Northampton, Massachusetts에 있고, 내가 찾았던 아버지 학교는 Easthampton, Massachusetts에 있어서 서로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참고삼아 찾아보면 그 거리는 겨우 4.5 miles이며 시간은 차로 11분거리였디.
그래서 일요일 아침 일찍이 집을 떠나 Northampton에 도착할 때에는 12시쯤 되어서 우리 모두 점삼먹으러 Restaurant에 들어갔고, 나는 그곳 전화로 Williston School에 전화를 하였다. 일요일에도 Answering service는 쉬지않는다. Operator, “Williston School.” Chung, “Hi, I am Dr. Chung calling. Is there any way to contact the Alumni President of the Williston School?” Operator, “OK. Wait a minute.” 놀랍게도 바로 다음순간에 받는 사람이 바로 동창회회장이었다,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 간단히 아버지의 수업과 좋업을 설명하고 지금 방문하고 싶다고 말하니, 그가 나를 만나주겠다고 하며 Auditorium에서 중요한 회의중인데, 그곳 수위에게 알렸으니 그에게 얘기하면 본인이 나오겠다고 하여 그 학교에 가서 그와 만나서 아버지 사진을 보였더니 그가 자기는 이 사진이 없는데 복사하겠다고 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 학교사진 몇 장을 주었다.
그와 조금 이야기하고 나올 때 그가 주차장까지 나오면서 차속에 있는 두 아이를 보고 그들의 연령도 묻고 만일 그들이 고등학교에 갈 때 이곳을 고려한다면 아버지의 학력과 오늘 자기와 이야기했다는 사실도 기재하여 제출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때 내가 처음으로 그에게 이 Williston Academy가 Boarding School이냐고 하니 그는 바로 그렇다고 말하고, 또 아버지 사진에 나온 학교 전체가 모두 현재 새 건물로 대치되었는데, 이 사진 가운데 있는 정문은 보존되어 현재 Town of Easthampton의 도서관이 되었으니 가는 길에서 좌측에 있는 도서관이 바로 옛날 정문이니까 잘 보고 가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위하여 Boarding School에 보내고 그 다음에는 미국의 명문 Ivy League Schools중의 하나에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아버지는 그 먼 나라에서 오셔서 그 고생을 하시면서 공부를 하셨는데, 내가 여기 살면서 왜 아이들을 이렇게 좋은 학교에 보내지 않을건가? 하고 굳게 결삼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미국교육제도는 Elementary School에서 1학년부터 12학년까지 간다. 고등학교는 9학년부터 12학년까지 4년간의 수업과정인데, Boarding School은 그곳에서 살면서 교육을 받는 특수학교이며 대략 사립대학 Tuition의 2/3 혹은 3/4정도가 되니 상당히 많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맏아들 Henry와 둘째James 모두 이름높은 Choate Rosemary Hall School을 졸업하였고, 또 Henry는 Ivy League이며 아버지가 다니셨던 University of Pennsylvania를 졸업하였고, James는 Harvard University의 졸업생이다. 이들이 우리부부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
그건 내가 아버지학교를 방문함으로써 지식을 쌓게 되어 성취한 사실이니 이는 아버지가 예전에 이곳에서 교육을 받으셨기에 내가 분발하여 아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주게 되었다. 참고로 Ivy League Schools이란 동부에 있는 유서깊은 학교로 Harvard, Yale, Princeton, Penn, Columbia, Cornell, Dartmouth and Brown 이렇게 여덟 학교이다.
어느날 나의 동기동창 Dr. Yang이 Buffalo, New York에 사는데 우리집에 왔었다. 그때 아버지 사진을 보이며 설명을 했더니, 날보고, “왜, 그 도서관앞에서 너와 네 아들의 사진을 찍지 않았지?”하는 소리를 듣고 내가 ‘아차’했다. 아! 그걸 내가 그때 생각을 못했구나. 그곳이 이만저만 멀지 않으니 내가 다시 쉽게 갈 수도 없는데 참 어리석은 나 자신이었다하고 통탄까지 하였고, 어느 때나 기회가 오면 그걸 놓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3-4 Town Library of Easthampton 방문하다.
1985년 여름에 Henry와 내가 1913년 사진에 나온 건물정문앞에서 사진을 찍다.
우선 두 아들의 교육부터 시작한다. 이 첫집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Henry가 초등학교에 갔고, 3년후 James 역시 초등학교에 갔는데, 우리는 뜻한 바가 있어서 그들을 Rochester에 있는 Private school에 보냈는데, 그곳이 정평이 있는 Harley School이었다. 중학교까지 마치고 고등학교에 보낼 때 둘 다 Boarding school인 Choate Rosemary School에 보내서 그곳에서 4년과정을 끝냈는데 둘의 나이차이가 3년이기에 중간 1년간은 둘이 함께 있었고, 그들을 보낸 연도가 만 7년이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Choate School에 관하여 조금 설명하겠다.이는 4년제 고등학교로서 기숙학교이다. 전국에서 세번째로 좋은 Boarding school이며 John F Kennedy, Adlai Stevenson, Mike Douglas같은 유명인물들이 졸업한 곳이다. Henry는 이곳을 졸업하고 University of Pennsylvania로, James 는 Harvard로 각각 떠났다. 둘째 졸업식날 나는 너무도 섭섭했다. 이제는 다시 이곳에 올 기회가 없겠으니!
나는 아들에게 손주를 보내기를 바랐지만 그들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 회에 나의 1979년 Williston School 방문시 그 옛날 학교정문앞에서 사진을 찍을 것이 잊었다고 하였고, 그곳이 이만저만 원거리가 아니기에 쉽게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걸 나는 잊지 않고 호시탐탐하게 때를 기다렸다. 드디어 1985년 여름에 맏아들 Henry를 데리고 우리 부자 둘이서 College tour을 할 기회가 왔다. 거의 일주일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었는데, 우리의 행로는 다음과 같았다.
제1일: 집 Pittsford, New York – Cornell University at Ithaca, New York – Dartmouth College at Hanover, New Hampshire 숙박 제2일 Dartmouth College - Williston School, Easthampton, Massachusetts.
그러니 오전 일찍이 Dartmouth에서 Campus tour와 Interview 끝내고 다음차례는 Brown University, Providence, Rhode Island로 향하는데, Williston에 들르려고 길을 조금 변경시켜서 중간에 Williston에 들렸다. 여러분 그 당시에는 내가 사십대였고, 말할것도 없이 나의 전성시기였기에 운전도 대단히 잘했다.(???)
Easthampton City에 들어가자마지 직행하여 Town Library로 가서 주차를 시키고 우리 부자는 활보로 그 유서깊은 문을 열고 도서관에 들어가보니, 이 한가로운 시골 도서관에 남자노인이 서너명이 의자에 앉아있는데 신문이나 잡지를 보고 있으며, 날씨가 더워서 창문은 활짝 열렸고, 들어가보니 좌측에 여자 도서관원이 Lectern뒤에 높은 의자에 앉아있었다.
우리부자는 직접 그 도서관원에게 걸어가서 인사를 하며 내가 왼손으로 들고 온 아버지 학교사진을 보이며 그분에게, ‘Do you recognize this door?”하니까 그가 사진을 보더니 눈을 크게 뜨며, ‘아, 이건 옛 Williston학교 건물로서 정문이었고, 그게 학교의 재건 때 이리로 옮겨져서 방금 당신 둘이 들어온 문입니다.”하였다. 그래서 다음 순간에 사진안에 아버지를 지적하며, “이분이 나의 아버지이고, 이 소년은 나의 아들입니다.”하니 그는 대단히 감동하였다.
내게 다시 말하기를, “여기 나온 연도를 보니, 내가 태어나기 전이었군요. 나는 이곳에서 나의 일생을 살고 있어요. 가끔 당신같은 Williston children이 찾아오지요. 대단히 반가워요. 시간이 좀 있으면, 내가 지하실에 내려가서 옛 사진을 찾아가지고 와서 당신들에게 보일게요.” 그러고 내려갔다가 조금 후에 묵직한 통에 옛 사진을 잔뜩 넣어서 갖고와서, 내게 하나 하나 열심히 설명하여 주었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얼마나 감개무량하셨을까! 사실 나는 보아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조금 이야기를 하였고, 다 끝나서 감사하다고 내가 인사를 하며 그 분에게 한가지 청을 부탁하였다. “밖에 나가서 이 기념할만한 문앞에서 우리 둘이 서 있을테니, 당신께서 우리 사진을 찍어주실수 있겠습니까?”
그는 대번에, “물론이지요.” 하고 우리 셋이 문밖으로 나갈 때 그분은 이 Double door를 조심히 닫고 나의 Cannon camera를 들고 이차선 앞길로 나가더니 두 팔을 벌려 양방향에서 오는 차들을 모두 세워놓고, 침착하게 전진 후진하여 사진 여러장을 찍어주었다. 그 다음 나는 그분에게 깊이 감사하고 떠났다 .
그 다음 계획은 다시 동창회실로 가서 아버지의 전학교 이름과 주소를 찾는것이었다. 거기에 젊은 여성직원이 아버지 기록을 찾아본 후 여기에는 옛 학교에 관한 정보가 하나도 없다고 하여 나는 이것 저것 질문을 하였더니, 그 직원 역시 여기저기에 찾아보다가 내게 혹시 이게 나의 아버지와 관계가 있는게 아니냐고 하며 내게 오래된 편지 한장을 보여주었다.
그건 친필로 쓴 두 페이지 편지인데 언뜻 보니 내용에 어떤 사람이 Jewhan Chung에 관하여 묻는 편지였다. 아버지 영문명은 Jaone Chung였다. 그런데 번개같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버지 삼촌께서 후견인으로 오셨고 또 여기서 공부도 하셨다니, 혹시 그 분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그 직원에게 Jewhan Chung이 아버지의 Uncle일거라고 하고 그 편지를 복사해달라고 하여 복사해 갖고 그곳을 떠났다. 그 다음은 며칠에 걸친 대학방문이었고, 모두 잘 끝내고 귀가하였다.
집에 와서 시간을 내어 내용을 천천히 읽어보니, 지환씨가 한국에 있는 미국선교사를 통하여 할아버지로부터 송금을 받았는데 그 선교사가 횡령을 하여 많은 곤란을 겪었고,발신자는 Charles Edey Fay란 분인데 지환씨와 친분을 가져서 자기가 많이 도왔다는 내용이었다. 그떼 나는 도저히 이런 문제를 다룰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이 문제를 일단 보류하였다 .
그러니 나는 Williston School에 두 번 방문하였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결국 나는 퇴직하고 Rochester, New York 근방에 있는 호수, Canandaigua Lake.연안에 집을 지어 거기서 오랫동안 살다가 작년 9월에 그 집을 이 이상 간수하기 힘들어서 팔고 다시 Rochester 시로 와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호숫가에 옛 오두막같은 집을 없애고 2004년에 새로 2층짜리 집을 짓고 지금까지 15년간 살아왔다. 가끔 Williston 학교 생각도 하고 또 한번쯤 들를 생각도 하였지만, 그럴만한 동기나 특별한 목표가 없었기에 다시는 가지 않았다.


3-5 아버지 학급사진 백주년 기념.
2013년에 6월 한달간 귀국하여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귀가하였는데, Lillian 맏며느리로부터 연락이 왔다 .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 학교사진 연도부터 그 해가 100년이 되니 이는 특별한 Anniversary이기에 가족이 한번 방문함이 옳겠다고 하였다. 나 역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다. 그래서 Manhattan에 살고 있는 둘째 아들과 상의하고 결국 우리 네 식구, 즉 맏손자, Connor, Henry, James 그리고 나 이렇게 남자만 넷이서 차로 가기로 했다.
거리는 대략 160 miles, 3시간 거리였다. 내가 그곳에 동창회장에게 연락을 하여 날자를 정하였는데, 그는 토요일이 좋겠다고 해서 우리가 토요일 12시에 학교 campus에 가서그에게 전화를 하기로 하였다. 그날이 Saturday August 30, 2013 at 12:00 Noon이었다. 그래서 우리 넷이 차로 일찌감치 집을 떠가 그곳에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여셔, 동창회장 Mr. Jeffrey Pilgrim과 만나서 그가 우리 넷을 데리고 빈 Campus Tour를 한 시간이상소모하면서 잘 보고 들었고, 다 끝나니까 우리와 함께 5분 가량 걸어서 그 도서관에 도착하여 또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다음에 내가 그의 Office에 가서 할 일이 있다고 하여 우리 둘이서 안에 들어가서 내가 준비된 Check을 끄내고 $1,000.00을 학교에 기증하며, 그 Check안에 “To the memory of Jaone Chung”을 기입하여서 그날일이 모두 끝났다. 여기에 그날 찍은 사진을 싣는다. 그런데 Campus Tour도중에 Mr. Pilgrim이 내게 작은 소리로, “당신 아버지가 이 학교에 4년을 다녔는데, 졸업은 못했지요. “ 이건 너무 의외의 일 아닌가? 하여간 추후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처음 대학기록에서도 큰 오류를 발견했는데, 이번에는 고등학교 졸업문제가 있다니!
그 후 내가 Williston School 동창회에 연락을 했더니 Mr. Richard Teller, Archivist & Assistant Librarian에게 나를 연결시켜주어서 그와 오랫동안 교환을 하였다. 우선 아버지의 기록 전부를 복사해서 보내달라고 하여 받았다. 그리고 지난 회 유학기 2-2에서 아버지의 삼촌으로 추정되는 Jewhan Chung에 관련된 편지를 갖고 왔는데, 그 내용에는 Mr. Fay가 학교에 Jewhan Chung의 거주지에 관한 문의였고, 이 편지는 January 8, 1956에 썼다. 그래서 나는 소지하고 있었던 족보를 열고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조부님의 넷째 동생이름이 지환(芝煥)씨였으니, 그는 나의 종조부(從祖父)가 된다. 게다가 그의 편지에 “…then a student at Williston Seminary.”라고 나와있었다.
그래서 Mr. Teller에게 Jewhan Chung의 모든 기록을 보내달라고 하니, 100여년 된 그 분의 기록 전체를 받았다. 그래서 따져보니, 아버지의 Williston days는 1909-1913년이었고, Jewhan씨의 연도는 1906-1910년이었다. 그래서 내가 두 분 기록을 편성해 보았다. 두 분이 뉴욕에 도착하였을 때는 1903년으로 생각했는데 근거는 아버지께서 부산피란시절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Wright brothers”의 최조 비행이 내가 미국에 있을 때였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Wikipedia에서 찾아보면 그 비행일은 December 17, 1903이었다. 아버지의 10년 유학을 대략 1904-1914로 추정했지만, 사실은 1903년 후반기 아마 가을쯤 뉴욕시에 오셨고, 우선 주거지부터 마련하였고, 기타 삼촌과 조카의 살림살이도 준비하셨고 그 후에 아버지의 학교를 찾아가서 시험을 치셨다가 낙방을 한 후 다시 몇달 동안 재시험을 준비하셨으니, 해가 넘어서 1914년 상반기에 입학하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돌볼 지환씨가 추후 자신의 공부를 시작한 모양이다. 그런데 나로서 또 의문이 생겼다.
분명히 지환씨는 1906년에 Williston Seminary에 1학년으로 입학하고 그곳에서 숙식하며 공부를 했을 것이다. 그럼 아버지는 어찌 되셨는가? 1906년에 아버지는 만 13세소년이셨는데, 어떻게 혼자서 숙식, 살림, 또 교육등을 감당하셨는지 알 수 없다. 지환씨는 조부님이 막내동생을 보내서 가장 중요한 조카 12대 종손을 교육시키라고 하셨는데, 13세 조카는 내버리고 자기만 Williston에 가서 4년공부를 끝내고 다시 Colorado School of Mines 칼로라도 광산대학에 가서 1910-1014년까지 수학을 하셨다. 맏형님 조부남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고는 할수 없었다. 결국 자기의 어린 조카를 이용하여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했다고 생각한다.
혹시 지나가는 생각으로 아버지가 Williston에 가신 건 지환씨가 이미 알아놓은 정보를 이용하여서 가능하였을것이라고 긍정적인 면도 생각하였디. 그리고 추후에 Mr. Fay의 편지를 자세히 분석해보려고 한다. 내가 Mr. Teller로부터 받은 내용에 의하면 아버지 수학연도 1909-1913년간 기록에서 Spring of 1912에 대단히 많은 결석이 있었는데,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이리하여 다음해에 11th grade를 반복하게 되어서 1913년에 11th grade만 끝마쳤지, 12th Grade는 비어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아버지는 4년제에서 3학년을 두번 하셨고, 4학년은 하지 못하셨다는 결론이다.
여기에 내가 생각한 기록을 나의 Webpage에서 발췌하여 올리겠다. 그 옛날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가끔 아버지가 한잔 하시면 옛날 학교이야기를 하셨는데, 그것을 내가 다시 정리하여 싣는다. 조부님은 서울에 거주하던 미국인선교사를 통하여 송금하셨다. 나의 추측으로 조부님이 선교사에게 정해진 금액을 한화로 지급하면, 그는 미국선교회본부에 얼마 받았다고 연락하겠고, 선교회에서는 경비와 수고료를 제하고 남은 돈 즉 Balance를 지환씨에게 지불하였겠다.
그런데 문제는 연락방식이다. 그때에는 미대륙에서 조선까지 오는 국제전화가 있을리가 만무하니, 손으로 쓴 편지를 환태평양정기선으로 왕복전달하였으니, 편도만 30일 걸렸고, 또 그 항구까지 가는 시간등을 고려하면 처리기간을 한달잡는다고 생각하면 조부님에 지불한 후에 돈이 지환씨에게 도달하는 시간은 적어도 2달은 걸렸다고 추정한다. 게다가 서류상의 오류 혹은 기티 문제도 발생할 수있었겠다. 사정이야 어떻든 조부님이 정확히 보낸 돈이 지환씨에게 도착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 어버지이야기는 학교에 계실 때 송금이 되지 않아서 돈이 완전히 떨어졌고, 식사를 사 드실 돈이 없어서 근방에 있는 가개, 소위 General store에서 마음씨 좋은 주인이 외상으로 식사 대신 Ice cream만 드셨고 그러는 동안에 아버지는 많이 수척해지셨다고 한다. 그 수양어머니는 이름이 무어라고 어머니가 하셨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고 혹시 Miss Ellie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하여간 그 곤란을 듣고서 아버지보고,“Jaone아, 집에 와서 나와 함께 식사하자.”고 권고도 하셨는데, 아버지는 공짜로 먹는게 염치가 없어서 별로 그러지 않았다. 나는 두 아들을 모두 Boarding School에 보냈기에 그들은 Tuition에 하루 셋끼 먹는 것이 포함되어있었는데, 아마 그당시에는 제도가 이렇게 철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1년을 쉬셨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시면서, 남같으면 고학이라도 했을텐데, 왜 그렇게 주변이 없으셨는지!” 하셨다. 하긴 Miss Ellie (Please forgive me if I used a wrong name.)는 아버지를 시켜서 자기집 눈을 치우게 하고 돈은 몇 푼 주었고, 또 옆집 눈도 아버지에게 치우게 하여 또 몇푼씩 빋기는 하셨다. 그러나 그건 어머니가 몰라서 하신 이야기다. 미국에서 무슨 고학이란게 있는가?
그러고 나서 나는 갑자기 깨닫고 아버지 학력의 혼란을 해결하였다. 어머니가 펜실베이니아 상과대학 4년제중 3년을 끝냈다는건 펜실베이니아상과대학이 아니고, 당연히 Williston Seminary이야기였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도 Language barrier이 있다니!
그래서 나는 모든 걸 알게 되었다. Williston Seminary에서 3학년 올라간 봄에 돈이 영 오지 않아서 아버지는 굶고, 소규모 노동도 하시고, 학교는 쉬셨다. 그런 후 그 다음해에 다시 3학년을 다니셨고, 4학년은 하지않고 펜실베이니아 상과대학에 시험쳐서 입학하시고 일학년 즉 Freshman course를 끝마치고 그 진절이 나는 선교사를 통한 송금을 다른 방법으로 바꾸려고 일시 귀국하셨다가 영구히 귀교를 못하셨다.
내가 그때 Mr. Teller에게 어떻게 Williston 고교를 졸업하지 않고 펜대학에 입학하실 수 있었는가? 문의했더니, 그는 학교의 Headmaster의 추천서를 받고 대학입학시험에 합격되면 입학할 수있다고 하였다. 내가 말한 펜실베이니아 상과대학이란 이름높은 Wharton School을 말한다. 거기서 Freshman을 마치셨다. 아깝다. 그 좋은 대학에서 졸업을 하셨으면 아마 아버지 인생도 달라졌겠지.!!! 나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내가 도대체 그런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었겠는가? 이리하여 나는 가끔 철학도 해본다.


4 : 학창시절의 일화 몇가지. 연도 1967년 이전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

4-1 초기여행
처음에는 모두가 서먹서먹하였지만 나중에는 한가족같이 되었다. 그 중에는 제정 Russia의 왕자 혹은 왕족도 있었고, 중국의 장군도 있었다. 처음에 가실 때 1903년 여름에는 아버지는 만 10세 소년으로써 이 어머어마한 항해에 정신이 없었겠지만, 1914년에 귀국하실 때엔 한창 청년이었기에, 그리고 아버지 영어야말로 일류였고 또한 고등영어를 썼기에 함께 있던 승객들은 아버지가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오인하였다고 한다. 부친이 미국에 계실 때 Wright brothers의 최초 비행이 성공하였다고 들었다.
How sensational news that could be! Please read the following report from Wikipedia: Airplane inventors Wilbur and Orville Wright are famed for making the first controlled, powered, heavier-than-air flights on 17 December 1903 at Kitty Hawk, North Carolina.

4-2 Williston Seminary 시절이었다.
그곳에서 더운 여름날 저녁먹은 후 노인들이 의자 하나씩 들고 나와 길거리에 앉아서 이야기할 때면 주제는 남북전쟁 (1861-1865)이었다. 그 이야기를 할 때 그들은 비교적 어린 나이에 소집되어 전투에, 참가하였을 때 얼마나 무서웠던가하는 얘기들이었다. 한번 연도로 고찰해보자.
아버지 Williston days를 1911년으로 잡고 그 노인들이 징집당한 해를 1863년으로 정한다면 그들 징집 연령을 20세로 정할 때 의자에 앉았던 노인들이 몇 살이 되었겠는가? 1911-1863=48년 전이었으니, 20+48=68세 쯤 되었겠다. 68세 좋은 나이에 좋은 시절에 이 옛날 전쟁용사들은 길고 긴 여름날 저녁에 folding chair를 하나씩 들고 나와서 길가에 앉아서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걸 아버지는 소년시절에 들으셨다.


4-3 Williston Seminary (all-boy boarding school)에서 일어났던 얘기일 듯 싶다.
Massachusetts서북부 작은 시골에 동양학생 하나가 왔으니, 그들은 매일 놀렸고, 부친은 매일 그들과 몸싸움을 하셔서 얼굴이 성할 날이 없었다. 1년을 거의 매일 싸우다시피 하니까 나중에는 그들이 “That’s enough. No more fights or hassles."한 후 그들과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 당시 아버지의 싸움소식이 이 작은 학교에 큰 소문거리였다. 매일 아침 조회 때 담임선생님이 훈시 후 아버지를 보면 얼굴이 멍들거나 부었으면 정상으로 간주하는데,어떤 때 얼굴이 말짱하면 짐짓, “Jaone, what happened to you?"하고 놀렸다.

4-4 부친은 목 뒤에 종기(furuncles)
그걸 보고 선생님이 말씀하기를, “Jaone, watch your nape." 그러면 반 친구들이 부친께, ”You better look at the back of your neck." 하고 놀렸다. 당연히 선생님은 “To care for your neck." 의미하였지만, 장난꾸러기 학생들이 ”Show me how you can look at the back of your neck." 하며 놀렸다는 이야기다.

4-5 값싼 3층 기숙사
값비싼 기숙사에는 더운 물이 나오고 값싼 기숙사에는 찬 물만 나오는데 부친은 값싼 기숙사에 계셨고, 겨울이 대단히 추워서 1층에서 찬물로 세수하고 머리도 감고 3층까지 뛰어올라가는 동안 가끔 얼굴과 머리를 감은 물이 얼어서 방안에 활활 불타는 난로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면 얼마 후 얼음이 녹아서 수건으로 닦을 수 있었다.

4-6 수양모와 A Hungarian American lady
동네의 어떤 중년 여인이 아버지와 친해져서 수양아들로 삼았다. 그는 어렸을 때 어떤 독신 목사집에서 일했던 하녀였는데, 목사가 죽을 때 전 재산을 그에게 남겨서 그것만 갖고서 독신으로 풍족하게 편안히 살았다. 또 한번은 어떤 부인이 부친의 나라가 Korea임을 알고 찾아와서 말하기를, “I am so glad to see you. Your country is near China. My parents were from Hungary. Our ancestors, Huns, lived north of China. So we were neighbors."

4-7 제2차 도미 시 뉴욕시에서
부친이 청년기로 들어설 때 뉴욕에 한국 동포가 얼마 있으면서 두 파가 있었는데 하나는 남조선파, 또 하나는 북조선파이며 서로 알력이 심했다. 어떤 인연으로 이희경씨와 의형제를 맺었다. 그 분은 평안남도 순천인으로 독립유공자로 추모되었다. 그런데 두 분이 함께 행동을 하였기에 두 분은 이 두 당파에 들어갈 수 없었다. 파벌이 심한 우리 민족의 이야기다. 남조선파에서는 평안도 출신인 이희경선생님때문에, 북조선파에서는 경상도 출신인 아버지때문에, 두 분을 함께 받아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후에 더욱 생각해 본 결과 이희경 선생님과의 우정은 학창시절이 아니고, 그 후 1923년에 두번째 방문시에 생겼던 일이 아닌가한다. 왜냐하면 학창시절에 그럴 여유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아래에 다시 나온다.

4-8 이희경씨를 만나다.
어느 더운 여름날 밤에 한인청년 한떼가 뉴욕시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미국인 한 떼와 마주쳤더니, 그들이 야유하여 패싸움이 붙었다.. 아버지는 한창 싸우다보니, 힘깨나 쓰던 한국청년 아무개와 아무개등 모두 달아나 버린 후였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연마한 무술(?)을 발휘하여 용맹하기 짝이 없이 일당백의 투지로 싸워서 결국 싸움패 백인놈들을 모두 쫓아 버렸다. 그래서 사방을 둘러보니, 거기에는 아버지 혼자가 아니고 이희경씨가 계셨다.
그래서 두분이 결의형제가 되었고 이희경씨의 아파트로 들어가서 한동안 함께 계셨는데, 요리는 이희경씨가 하고, 설거지와 청소는 아버지가 하였다. 아버지가 그분으로부터 배워 갖고 오신 Recipe 하나는 이름이 “Italian soup”인데 감자, 파, 가다꾸리 즉 Starch, 작은 고기토막 여러개를 양재기에 넣어서 한동안 끓인 후 먹는다. 어머니가 내게 몇 번 하여서 먹인 적이 있었다. 아주 맛 있었다.

4-9 아버지의 송금건
아버지의 송금이 끊어졌다. 이 미국인 선교사를 통한 송금은 아버지 유학기간 10년동안에 계속적으로 힘든 문제였다. 여기서 나는 아버지의 수학경력을 재정리한다.
도미연도: 1903년도 후반(추정)
Elementary School at New York City: 1904-1908 from the 4th grade to the 8th grade.
Williston Seminary 1909-1913. 9th -10th -11th – 11th grades
Wharton School (University of Pennsylvania) 1913-1914 Freshman course
The reason of his failure to proceed from the 11th grade on 1912:was due to the failure of remittance from Grandfather to Jewhan Chung by an American Missionary.
그리하여 2013년 백주년 사진촬영 기념은 끝났고, 나도 좀 더 정보를 받았다. 한가지 추가할 사항이 있다. Mr.Teller, the Archivist and Librarian of the Williston School로부터 받은 아버지 재학시절에 학교에 지불한 Tuition 은 얼마였는가? 일년에 $100.00이었다. 그럼 같은 학교에서 현재의 Tuition은 얼마인가? .1년에 $64,000.00이다. 그러니 100여년동안에 학비가 640배나 뛰어올랐다!


5 아버지의 Williston Seminary 사진을 동창회 사진전에 출품하다.

아버지 유학기를 서울대학교의과대학동창회 Website에 출품하다.
August 2014. 이곳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북미주동창회가 상당히 많은 회원을 갖고 있으며, 우리동기만해도 40여명이니 전체수는 수백명은 된다. 그리하여 동창회에서 발간하는 정기간행물(Periodicals) 시계탑(時計塔)이 일년에 네번씩 나온다. 2014년 여름 간행물에 회원의 사진전을 공고하였고, 거기에 두 분야가 있어서 첫째는 예술사진(Artistic Photos), 둘째는 기념사진(Memorable Photos)가 있어서 나는 기념사진분야에 관심이 있었다 .
그래서 갖고 있는 아버지 사진과 Williston School 사진 등을 Scan하여 보내고 거기에 적절한 설명을 첨가하여 2014년 8월 6일에 등록하였다. 그랬더니 내가 예측하지 못한 대호응을 받게 되었다. 생각하기 힘들정도의 오래된 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까지 주었던 모양이다. 긴 얘기를 짧게 줄이자면 1년후에 사진전 결과를 결장하였는데, 기념사진분야에서는 내가 단연히 1등을 하였다. 그때 마침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주최하는 The 32nd Annual Medical Convention을 June 2015에 Glenpointe Marriott Hotel, Teaneck, NJ에서 열렸다. 그래서 거기에 참석하고 평생 처음으로 상장까지 받았다.


6. 2014년부터 추가 정보를 찾다.

이렇게 아버지 유학기록을 쓰기 사작하였더니 계속적으로 추가사항이 생겼고 또 전에 중단했던 기록의 추적 내지 추구를 재개하게 되어서 몇 달에 한번씩 내용을 추가한 Web page를 올렸다. 우선 첫번째 추가 정보부터 시작한다.

6-1. 1923년 제2차 미국방문 때 사진 4장은 모두 Belvedere Castle에서 촬영.
Belvedere Castle AM. January 6, 2015. 2 photos in front of stone wall Belvedere Castle, Central Park, 79th St, New York, NY 10021
1978년 첫번 귀국 때 이 사진 넉장을 갖고 왔다. 처음에는 1925년에 미국에 다시 가셨나하고 생각했다가 아비지가 어머니에게 하와이에서 보낸 엽서를 발견하고 그 날이 바로 1923년 7월23일자로 부친 엽서다. 그리고 엽서 내용에 뉴욕에 도착일이 8월 10일경으로 예정을 하셨는데, 이 사진 넉장에는 모두 겨울옷을 입으셨고, 나뭇잎은 다 떨어졌으니, 한 겨울중으로 보여서 내 추측에 사진은 그해 12월 아니면 다음해 1월 정도로 추측하였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찍으신 사진인가? 옆집 여성 영어선생이 대번에 이건 뉴욕시의 유명한 Cathedral일거라고 하여서 그말을 믿고 사진을 들고 찾아가려고 지도를 열었더니, 주소가 5th Ave & 50th St이기에 이건 전혀 불가능함을 깨닫고 다시 찾기 시작했는데 알아낼 수 없어서 New York Historical Society에 두번씩이나 방문조회한 후 완전이 알아 내었다.
그 건물은 Belvedere Castle이며 Central Park안에 있고 주소는 79th St, New York, NY 10024이었다. 그날이 바로 2015년 1월 6일 화요일 오전이었고, 밖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으며, Historical Society에서 Belvedere Castle이 도보로 10여분 거리였다.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곧장 찾아가서 Main Building안에 있는 Visitor’s Center로 들어가서 우선 책자를 한권사고 여자 안내원에게 나의 사진을 보여주고 이 돌담을 찾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 바로 입구 앞에 있는 Court Yard일거 라고 하여 그에게 내 사진을 찍어줄 수있느냐고 물어보니 다른여직원 한명을 대리고 와서 한 사람은 나의 위치를 정해주고 다른 사람은 나의 사진을 두장 찍어주었다. 하나는 내가 돌담에 접근한 사진과 다른 사진은 내가 약간 떨어져 있는 사진이었다. 그런데 눈은 계속 쏟아져서 나머지 사진 두장은 나중에 일기가 좋을 때 올 계획을하고 떠났다.
내가 뉴욕시에서 살고 있지 않기때문에 시일이 좀 걸렸다. 그해 여름에 내가 다시 와서 다른 두장 사진을 찍은 장소를 찾아 아버지 앉으셨던 보행로가에 있었던 벤치와 거기서 마주 보이는 큰 건물과 탑, 그리고 그 건물에서 나오는 길고 긴 돌담에 연덕위로 배열되었고, 또 그 벤치뒤에는 큰 원주기둥이 있었는데, 도저히 그 벤치 혹은 벤치위치를 알아낼 수 없어서 한 2년간 혼자서 찾아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도처히 성공할 수 없어서 다시 그 Visitor’s Center에 가서 이번에는 다른 두 사진을 보였다. 한가지 큰 변화는 내가 바로 그 보행로를 찾은 건 어렵지 않았는데, 거기서 건물-탑을 향해 보면 우측으로 상당히 큰 언덕이 있고 그 언덕위로 긴 돌담이 있는데, 그 우측에 그런 건 전혀 없고 그 장소에 아주 큰 못 (Pond)이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여자직원이 있어서 하여간 두 사진을 보이면서 설명을 하고 바로 벤치위치로 날 데려다 주겠느냐고 부탁하니 천절하게도 그러라고 하며 설명하기를, 그 사진을 찍은 후에 뉴욕시에서 그 지역 언덕을 모두 파서 거기에 현재보는 Pond가 생겼는데 그것을 Turtle Pond라고 하며 거기에 많은 Turtles 를 기르고 있다고 설명하였고 우리 둘이 내려가서 그 직원이 지적한 바로 그 장소에 나를 세워놓고 사진을 두어장 찍어주었다. 물론 길 우측은 완전히 바뀌어 Pond가 있어서 관광객이나 보행자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Cordon(저지선)을 설치해 놓았고 또 우측에 공간도 없어서 벤치가 없는 반면 그대신 반대편 좌측에 벤치를 설치하여서 내가 거기에 앉아서 찍은 사진도 있다.
그러니 아버지는 1924년 1월에 찍어셨다면, 나는 2015년 1월에 찍었기에 91년만이고 벤치사진은 한 2년후에 찍었기에 93년만에 그 자리에서 내가 사진을 찍었다. 나로서는 대단히 만족한 결과라고 믿는다.

뉴욕한인교회 70년사가 나와서 구입하고 싶어도 모두 매진되었다, 그리고 추후 백년사가 나온다고 하여서 나는 선친을 그 백년사에 올리고 싶어서 최병연 교수님과 교류를 하고 추후 귀국할 기회에 만나려고 한다.


6-2 My discovery of a letter from Charles Edey Fay on January 8, 1956 which was posted on Web page July 25, 2015 indicating misappropriation of an American Missionary from the Board of Foreign Mission.was found.
나와 Henry가 1985년 8월경에 두번째 Williston School의 Alumni Office에 들려서 아버지 전학교를 알아보려고 하였지만 그 정보는 없었고, 거기 여직원이 서류를 찾아보다가 이 예상치 않은 편지를 주어서 결국 그게 지환씨의 연락처를 문의한 편지지만 거기에 송금에 관한 중요하고 알려지지 않은 정보가 있어서 내가 사본을 갖고 왔으나, 그당시 내가 개업에 바빠서 그 사건을 보류하였고, 2014년 부터 아버지 유학기를 동창회 홈페이지에 싣게 되었기에 여러가지 의문과 보류건을 다시 알아보려고 하였다.
편지내용요약: 발신자는 Lake Worth, Florida에 사는 Charles Edey Fay란 점잖은 분이고, 날자는 1956년 1월 8일이었다. 본인이 25년 내지 30년전에 Williston Seminary의 학생이었던 Jewhan Chung와 친분을 갖게 되었어서 Stamford, Connecticut에 있는 자기집에도 온적이 있고, Wall Street, New York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도 찾아 온적이 있었는데, 자기에게 지환씨의 송금을 위탁받았던 장로교 선교사로부터 횡령을 당하였다는 재정적인 문제를 말하였다.
그래서 Mr. Fay가 알아본결과 해외선교이사회(The Board of Foreign Missions)는 주장하기를, 지환씨가 전부터 신경질환을 가졌기에 장로교위원회에서 지환씨와 관계를 끊었다고 회계담당자 Dwight H. Day가 대응하였으며, 또 장로교는 종교기관이기에, 이런 일에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Mr. Fay는 주장하기를, 이 문제는 장로교위원회가 종교기관이기에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함은 기술적으로 옳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도덕적 책임이 있다. 이 사건이 알려진다면 다년간 그 지역에서 노력했던 선교에 대단히 불행한 일일것이다. 그 후에 위원회 모임이 소집된 후 모든 회원은 Mr. Jewhan Chung에게 손해액을 보상하라고 결정하여 Mr. Fay에게 수표를 보냈다.
그런데 Mr. Chung에게 보낼 주소를 찾지 못하여 혹시 그의 졸업학교에서 알면 나에게 알려주시오.하는 두 장에 걸친 편지였다, 내가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읽어보니 이것이 이만저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게 사실은 아버지의 생활과 학비로 쓸 돈을 그 못된 장로교선교사가 횡령하였고, 아버지는 굶주리고 학교도 1년씩 쉬시게 되었다 .
그런데 지환씨가 Mr. Fay에게 이 사건을 알렸던 건 그가 Williston School다닐 때였으니, 적어도1956-1910=46년이나 된다. 아버지를 통한 어머니의 이야기에 선교사의 횡령건은 전혀 없었으니, 아비지도 모르셨던 사실이다. 그리고 지환씨는 우리 기록에 의하면 1914년에 대학 졸업하고 귀국한 후 겨우 2년만인 1916년에 자손도 없이 사망하였다.
그러니 Board of Foreign Missions에서 실제로 지환씨앞으로 Check을 써서 Mr. Fay에게 전달하라고 하였으니, 이런 식의 Check이었을 것이다. “Pay to the order of Jewhan Chung…..$XXX. “ 그를 찾을 수 없으니, Mr. Fay는 그 Check을 Board of Foreign Missions로 반납하였겠고, 그 문제는 거기서 일단락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나는 그당시 확실한 정보를 알고 싶다. 왜냐하면 이 돈을 보낸 분은 나의 조부님이시고 나는 우리가문의 13대 종손이기 때문이다.


6-3 Board of Foreign Missions: Where is it now?
우선 Presbyterian Church를 여러 군데에 편지를 보내서 Board of Foreign Missions를 문의하니 대다수 답장이 없었고, 또 한인교회 근방에 있는 Presbyterian에 직접 가서 문의해보아도 모른다는 소리만 들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를 발견하여 그곳에 나의 문제 즉 Jewhan Chung, Charles Edey Fay, Board of Foreign Missions, 그리고 그곳 Treasurer였던 Dwight H Day까지 추적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곳 위치는 425 Lombard St, Philadelphia, PA 19147에 위치한 곳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과 몇명과 나의 문제를 이야기하여 내가 알고 싶은 다음의 정보를 찾아 보려고 했다. .
첫째 Payment in the form of a check payable to Mr. Jewhan Chung. 수표 송금액
둘째 The nature of misappropriation and the amount : 지환씨가 주장한 횡령 내역과 그 횡령액.
셋째 Who was the Presbyterian missionary? Mr. Fay 편지에 알렸던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의 이름
넷째 Any other helpful information ; 기타 도움이 될만한 정보
그러면서 내가 문의해 보았던 그곳 직원들은 나에게 직접 와서 오십여년 (1956-1903=53)에 걸친 기록을 직접 열람해보던지, 아니면 그곳 전문가를 고용하여 대략 시간당 $30-40 지불하던지, 하보라고 하여서 우선 보류하였다. 하여간 Board of Foreign Missions가 책임자이기에 나는 찾고 찾다가 다음과 같은 정보를 받았다 .
Recently I obtained following information on the Brief History of Presbyterian Church in U S A from the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organized in 1837. The Board remained in existence until 1958, at which time its activities were transferred to the Commission on Ecumenical Mission and Relations (COEMAR) of the newly formed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In 1972, COEMAR was replaced by the Program Agency.In 1983, 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UPCUSA) reunited with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 (PCUS) to form the Presbyterian Church (U.S.A.).
The Program Agency of the former UPCUSA worked jointly with the General Assembly Mission Board Re of the former PCUS until 1988, when the General Assembly Council of the reunited Presbyterian Church (U.S.A.) was formed.In 2008, the General Assembly Council was renamed the General Assembly Mission Council. In 2012, the General Assembly Mission Council was renamed the Presbyterian Mission Agency, the current name.
위 글은 2017년 2월 1일에 Charlene Peacock, Reference Archivist, P.H.S.에서 받았는데, Board of Foreign Missions는 1837년에 창립되었고, 1958년까지 존재하다가 Commission on Ecumenical Mission and Relations로 변경되었고, 1972년에는 Program Agency가 대치되었다가 1983년에 Presbyterian Church가 대행하였고, 1988년엔 General Assembly Council로 갔고, 2008년에는 General Assembly Mission Council로 변경되었고, 2012년에는 Presbyterian Mission Agency가 되었다.
그곳에 연락하여 Board of Foreign Missions의 과거 횡령건과 책임자를 문의해보니, 그들은 이 Board of Foreign Missions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잡아떼었다.
이제 나의 결론을 내릴 때가 왔다 .나의 추측으로 Board of Foreign Missions는 1956년경에 그 기관이 아마 파산을 하게 되어 없어지기 직전에 자기들의 채무관계를 청산하려고 간단히 Check를 만들어 Mr. Fay에게 보냈고 그걸로 끝막음을 한 모양이다. 그런데 나의 의문은 수십년전에 횡령사견을 왜 그때까지 끌다가 갑자기 배상하려고 했겠는가? 하여간 여기서 그 선교회의 횡령건은 끝장낸다. 그러나 그 문제의 선교사에 관한 나의 지식이 있다. 이 사람이 횡령인인지 아닌지는 증명할 도리가 없지만 그가 바로 횡령인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나는 믿는다.

6-4 A slip of paper from Jewhan Chung’s school record: Dr. George H. Jones A slip of paper posted on:July 25, 2015 Jewhan Chung. The name of Dr. George H. Jones was found. I still think he was the very Presbyterian Missionary in question.
정지환씨 학교기록에서 쪽지 한장이 나왔다. 아버지 기록에서도 쪽지가 나왔는데 그건 아버지 주소였고, 그 곳이 결국 뉴욕한인교회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종조부님 쪽지는 조금 더 복잡하여 그것을 정리하여 여기에 올리겠다 .
Decoded the slip of paper :정지환씨 쪽지 해독.
1910’s Jewhan Chung (Seoul, Korea)
Colorado School of Mines, Golden, Colorado
Born 16, August 1884,
Address while at Williston, Care of Dr. George H Jones, Seoul, Korea
Address 125 Bubling Well, Shanghai, China
Bulletin returned, no information. August 1922
Died about 1911 or 1912. S.N.M. (Initials)
우선 이 쪽지는 지환씨의 주소이다. 여기서 Colorado School of Mines즉 칼로라도 광산대학으로 가셨다는 이야기다. 연도는 정확하지 않은 듯하다.
여기서 “care of” means “at the address of”. 그런데 Dr. George H Jones의 주소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서울 거주의 George H. Jones로 지환씨는 연락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생각한다.
도데체 그가 누군가? 얼마나 지환씨에게 중요한 인물이면 백여년이 된 지금까지 그의 이름과 주소의 쪽지가 지환씨 기록에 나오는가?
Wikipedia에서 찾아보니 아래에 기록을 내가 찾아서 실었다. 완전히 증명할 수는 없어도 가능성이 크다.
George Heber Jones (14 August 1867 – 11 May 1919) was an American Christian missionary in Korea. Jones, who grew up in Utica, New York, is notable as the first Protestant missionary in Korea, who took an academic approach to the research of Korean religions.
He arrived in Korea in 1887 as a Methodist minister; while there, he not only made major contributions to the spread of Christianity in Korea, but also founded three academic journals, the Korean Repository, the Korean Review, and Shinhak Wolbo (Theology Monthly).
He also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encouraging Korean immigration to Hawaii; of the first ship of Korean migrant laborers bound for Hawaii to work on sugar plantations there, which departed on 22 December 1902, more than half came from his church in Incheon.
In July 1907, he was the subject of a murder attempt; Yale University professor George Trumbull Ladd attributed the attack to opinions Jones had expressed in an article he wrote about the suppression of a Korean riot, in which he praised the Japanese police. In general, Jones had a high opinion of Koreans but not of the conditions in Korean society; in particular, he wrote high praise for Korean migrants in Hawaii,attributing their success in their adopted land to their liberation from "the oppressive weight of past tradition, language, [and] association".
He died in Miami, Florida on 11 May 1919 after a long illness; his funeral was held in Leonia, New Jersey four days later. His Korean name was 조원시(Jo Won-si).

횡령에 대한 나의 결론
아버지의 유학과 생활비용은 순전히 한국에 있었던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와 미국에 있는 Board of Foreign Missions(외국선교이사회)의 Treasurer(회계)에 의존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송금불이행이 단순이 기술적인 문제로 (그 당시에 그런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지환씨가 Misappropriation 즉 횡령이란 용어를 Mr. Fay에게 썼으니, 그는 크게 의심했겠지만, 그 당시 지환씨는 Colorado의 광산대학에, 아버지는 Massachusetts의 Williston Seminary에 멀리 떨어져 계셨으니, 두분사이에 그런 소통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그 선교사의 횡령은 확인되었고, The Board에서 수표까지 만들어 지불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지환씨의 주장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한다.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나는 이 사건을 제기하여 금액이 중요하다기보다, 아버지의 학업에 그런 지장을 초래한 장로교협회에 책임을 물어보고 싶다. 비록 The Board (이사회)는 없어졌을 망정. 그런데 그 재료를 찾자면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에 가서 묵으면서 수십년에 걸친 기록을 조사하여야겠다.
그 장소는425 Lombard St, Philadelphia, PA 19147인데 그 옛날1968-1970에 우리 세식구는 Franklin House, 269 South 9th Street, Philadelphia, PA 19107에 살았고, 우리는 갓난 Henry를 Baby coach에 태우고 대여섯 Block 밖에 있던 Independence Mall을 자주 걸아가서 Toddler인 Henry를 그곳 잔디밭에서 걸음마를 시켰고, 그 Society는 그 근방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곳 Upstate New York에 살고 있어서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회가 온다면 한번 찾아보고는 싶다.

내가 그 Society 기록에서 찾아 볼 문제점:
(1) 다음의 인물에 관한 정보: Sangwhan Chung: 나의 조부님으로 송금인
(2) Jewhan Chung 나의 종조부이며 송금수취인
(3) Dr, George Heber Jones, the possible Presbyterian missionary to Korea : 이 사람이 송금의 책임자 선교사였는가?
(4) Mr.Charles Edey Fay : 정지환씨의 지인이며 이 문제를 자발적으로 도와준 사람.
(5) Mr. Dwight H White , Treasurer at the Board of the Foreign Missions.
(6) The amount for financial damage committed to Mr. Jewhan Chung by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7) The period- Initial from 1903 to 1914. Final period fron 1950 to 1960

6-5 The role of Jewhan Chung: 종조부의 후견인으로서의 역할(役割)
조부님께서 자기의 동생 지환씨를 아버지 후견인으로 아버지 공부를 도우라고 보내셨지 그분의 공부하라고 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조부님의 허락을 받고 공부를 했는지 많은 의심이 생긴다.
우선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1904년부터 1909년까지 5년간 받으신걸로 추측한다. 그리고 1909년부터 1913년까지 Williston Seminary에서 4년간 수학하셨는데, 1911년에서 1912년까지 심각한 재정난으로 그해에 3학년 학업을 쉬셔야 됬다. 그래서 그 다음해에 즉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다시 3학년 학업을 끝마치셨다. 아버지의 재정적 곤란이 여러가지로 증명되었다. 그런후 1913년부터 1914년까지 Wharton School 의 1학년을 끝마치고 송금건을 변경시키려고 잠정적 귀국을 하셔서 조부님과 의론하셔서 해결은 보았지만, 세계대전의 발발로 귀교를 못하시고 학업은 중단으로 끝났다.
그런데 지환씨는 어떻게 하였는가? 1906년에 Williston Seminary에 들어가서 1910년에 좋업하고 1910년에 Colorado School of Mines (칼로라도 광산대학)에 입학하고 1914년에 졸업하고 승자의 기세로 아버지와 함께 귀국하셨다. 크게 잘못된 게 있다. 여기에 주인공은 아버지였고, 지환씨는 후견인으로 왔다가 젊은 나이에 형편에 맞추어 수학한다는 건 이해가 가지만, 목표는 아버지 교육을 끝내는 것이지, 후견인인 자기 공부를 위주로 하여 송금액을 자신의 필요대로 사용하고 나머지를 아버지에게 보낸 상황으로 보였다.
본국에 계신 조부님에게는 적당히 구실을 만들어 설명했는 듯하다. 아마 나의 추리가 정확하다고 믿는다. 아버지의 휴학사실과 지환씨의 두 학교를 졸업한 사실자체가 나의 설명을 더욱 확고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양쪽으로 송금액을 횡령당하였다. 밖으로는 미선교사로부터, 안으로는 자신의 삼촌으로부터 이용과 횡령을 당했다고 본다. 대딘히 불행한 일이다.

6-6 Charles Edey Fay: 촬스 이디 페이. Who was Mr. Charles Edey Fay?
내가 그에 관한 재료는오로지 그의 편지 두 페이지 뿐이다. 내가 그 편지를 정독할 때 그에 대한 고마움을 금할 수없었다 .참으로 진실하고 좋은 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 생각에 그는 지환씨보다 연배가 높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Google Search에서 찾아본 정보는 다음과 같다.
He was born on May 26, 1875 and died on May 28, 1957. His residence was recorded as Stamford, Connecticut. His major literary work was The story of the "Mary Celeste". He was a biographer.
그러니 페이씨는 우리 조부님과 연배가 같다. 조부님 생년월일은 1875년 1월 8일이다. 그의 편지에 자기는 정지환씨의 지인이라고 소개하였고 자기의 월스트리트 사무실과 컨네티컷 스탬포드의 집에 방문하였다고 말하였다. 이 편지에 자기의 직업과 개인적인 정보가 없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본 결과 미국 지방자치제 연맹의 회원이고 스탬포드 사학회의 전기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페이씨가 정지환씨에게 그러한 도움을 주려고 그러한 오랜 세월동안 노력하였음에 대단히 감사한다.
그런데 그가 1956년 편지에 말하기를, 대략 25년 내지 30년전에 윌리스턴 세미너리의 학생이었던 정지환씨와 알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나의 계산으로는 종조부의 그곳 학생시절은 1906년에서 1910년까지였으니, 그 때는 적어도 46년전이었었다. 페이씨는 세월이 그렇게 빨리 간줄 깨닫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노력을 그치지 않았고. 정지환씨가 신경쇠약 환자였다는 장로교 선교회측의 거짓 설명에도 불구하고 외국선교위원회와 장로교선교사는 법적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부당한 주장을 반박하여 결국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손해액을 보상하도록 하였다.
나 자신은 우리 진양정씨 가문의 종손으로서 선친과 종조부의 유일한 대리인이다. 그러기에 내가 노력하여서 이 고마운 분의 신상정보를 알아보고, 그의 자녀나 후손에게 나의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좀 더 추적해본 결과 두가지 사실을 발견하였다. 첫번째는 “메리 쎌레스트 이야기"의 저자인 촬스 이디 페이를 찾아내었고, 그가 전기작가임을 증명하게 되었다.
이 책의 초판이 1942년에 그리고 재판이 1988년에 출간되었다. 이는 19세기 후반에 있었던 논란이 많았던 미해결의 난파선 이야기다. 두번째는 그의 매장지를 발견하였다. 그곳은 플로리다, 팜비취, 레익 워스, 파인크레스트 묘지이며, 그의 편지주소 플로리다, 레익 워스, 12번 도로 남쪽, 1724번지와 근접한 거리이다. 그의 비석에는 생평연도: 1875년 출생, 1957년 사망으로 나와있다. 그러니 그가 1956년에 편지를 쓰고 1년후에 사망하였다.
다음에 그의 연대표, 메리 씰레스트의 이야기 겉장, 같은 책자내의 항해 그림, 그리고 묘비다.
연대표와 주소 설명:
1875: 촬스 이디 페이 출생. 1879: 종조부 정지환씨 출생. 1906-1910; 정지환씨가 윌리스턴 세미너리 수업시기이며 페이씨와 친교를 맺음.. 1916: 정지환씨 만성질환으로 사망.
1942: "메리 쎌레스트" 초본 출간.
1956: 페이씨가 편지로 정지환씨 주소를 윌리스턴 세미너리에 문의. 1957: 페이씨가 플로리다 레익 워스에서 사망. 1985:
본인 정관호가 1985년 윌리스턴 아카데미에서 촬스 이디 페이씨 편지를 읽다. 1988: 메리 쎌레스트 재판 출간.
Address 1: 컨네티컷 스탬포드에 거주, 월 스트리트 사무실 운영 -1906 to 1910.
Address 2: 컨네티컷 우드베리 그래씨 도로, 써니 크레스트 팜에 거주 (1942)
Address 3: 플로리다 레익워스 북부 에이 가, 1027번지 (33460) - 1956.
Address 4: 플로리다 레익워스 12번 가 남부 파인크레스트 묘지 – 1957.
기회가 된다면 어느 때 그분의 후손을 만나고 싶다.

6-7 Father’s second American visit 1923 : 부친의 제2차 미국 방문. The First World War lasted from 28 July 1914 to 11 November 1918.
이 세계제일차대전이 아버지 인생에 미친 영향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로지 송금문제를 해결하시려고 Wharton School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일시 귀국을 서둘르셨겠고, San Francisco Harbor을 떠나 Tokyo Harbor에 한달 걸려 도착한 후 다시 여객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하신 후 기차를 타고 경성역에 기다리는 가족을 만나셨는데 할머니는 열살짜기 어린 아들을 보내신 후 이제 20세의 청년아드님을 만나시려고 이리저리 기웃하셨다. 그때 어떤 장정에 할머니 앞에 나타나더니 아무말 없이 할머니를 안았다. 그러고 보니 장성한 아드님이었다. “어머니” 소리까지 잊어버리셨다고 한다.
이렇게 귀가하신 후 그 송금문제는 조부님과 해결을 보시고 예약했던 대로 다시 일본출발-미국도착의 Transpacific liner를 타시려고 하는 통에 날벼락 소식이 들어왔다.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그날이 1914년 7월 28일이었으니, 아버지 도착시기는 혹시 3, 4주 전이 아니었을까하고 추측한다. 하여간 이렇게 되어 전세계에 걸친 해상봉쇄령(Global naval blockade)이 선포되고 모든 민간상선의 운행은 일제히 정지되었다. 그리하여 아버지 대학교육은 거기서 끝났고 아버지는 가내 재정담당을 하셨고, 또 다음해에 결혼하였다. 그당시 대학에서 출발하시기 전에 비록 일시귀국이지만 몇달 걸릴 여행이었기에 아버지의 소유물을 모두 어떤 미국인 친구에게 맡기셨다. 이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에 4년반만에 끝났다.
아버지는 그 후 곧장 해외 즉 상해로 인삼수출을 시작하시려고 하다가 큰 손해를 보셨다. 그후에도 여러번 사업을 경영하시려도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셨고, 어머니 설명으로는 십여차례 큰 사업을 해 보시다가 모두 실패를 하셨더니 우리재산은 모두 없어졌다 .아마 그 중간에 아버지는 1923년 7월에 제2차 미국방문을 하셨다. 우선 Wharton School에 가셔서 그 중단되었던 연유를 알려야 하겠고 또 재교육건에 관해서 의론하였으나 가정 형편상 도저히 계속할 수 없었다. 그 다음 아버지의 미국인 친구를 찾아 소유물을 찾으려고 했지만, 알고보니 그는 전쟁중에 징집을 당하여 유럽전선에 배치되어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였고, 그리하여 주인없고 관리자 없었던 아버지 소유울을 거의 모두 분실되었다.
아버지가 어머니께 보낸 엽서에 의하면 1923년 7월 Hawaii에서 우편을 붙이셨고, 8월 10일경쯤 뉴욕시에 도착하실 예정이라고 하셨는데, 아버지 사진 넉장은 완전한 겨울사진이기에 아마 그해 12월 경이거나 다음해 1월쯤에 찍은 사진으로 사료된다. 그러니 전에 이야기했듯이 이희경선생님 아파트에서 두분이 반년 이상을 함께 계셨던 모양이다. 그 때 아버지 이야기에 의거하면 미국전역애 금주령이 시행되어서 길에 Alcoholics 즉 알폴중독자들이 술의 금단증상으르 쓸어져서 발작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고 하였다. Prohibition in the United States was from 1920 to 1933. (금주령연도 1920-1933).
두 인사의 이야기:
(1) 조병옥씨가 고학할 때 그는 어떤 Restaurant에서 dish를 산더미같이 높게 들고 날랐다고 하셨다.
(2) 어느날 어떤 분이 아버지를 만나자고 하여서 그 분 방에서 만났더니 아버지보고 Mr. 정이 술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다면서 소장한 Whiskey 두 병을 꺼내서 대접하여 두 분이 함께 술을 즐기셨다. 이 분이 바로 이기붕씨였다.
그 후 해방전에 아버지는 재정적 곤란을 많이 겪으셨는데, 두 분 즉 조병옥씨와 이기붕씨와 함께 단골 찻집에서 만나서 주머니에 현금이 없어서 차를 못시키고 공짜 냉수만 마셨다고 하였고, 해방 후 두 분이 출세한 후 아버지와는 거리가 멀어졌다고 들었다.
아마 그 다음 해 봄쯤 귀국하셨닥고 믿는다. 어떤 소식을 통하여 이승만박사께서 아버지를 하와이에서 만나자고 하여 귀국길에 들러서 여러해 만에 만나셨다. 이박사는 아버지에게 “현재 임시정부에 영어할 사람과 행정을 담당할 사림이 필요한데 자네가 가면 그 두가지를 할 수있겠으니, 가급적 조속히 결정을 해주게.” 이때 아버지는 이박사에게, “현재 우리 집안에 제가 없으면 운영을 할 수없습니다. 부모님이 노인이고 저만 의지하시니, 제가 그 일을 맡을 수 없습니다. “ 하니까 이박사가 많이 서운한 듯하며, "그래, 알겠다.”하고 헤어졌다. 이것이 두번 째 해후였다.


6-8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
아버지는 1914년에 귀국하신 후 예상치 못하게 귀교길이 막혀서 결국 국내에서 자리를 잡고 가문의 경영을 맡으셨다. 집안 살림이 워낙 컸기에 수입과 지출을 다루는 일이 대단히 복잡하였겠다고 믿는다. 또 대외적으로는 많은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YMCA의 초대 영어선생님이 되었고, 그 제자분중에 후일까지도 알려진 분이, 첫째 영문시인 수주변영로(樹州卞榮魯)선생. 둘째 언론인 성재이관구(誠齋李寬求)선생님, 그리고 셋째 기상대장우경이원철(禹卿李源喆)박사 이렇게 세분이다.아버지는 일생 반일인사였고, 많은 독립투사들이 일경에게 쫓김을 당하여 아는 분을 통하여 어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면 아버지는 흔쾌히 비용을 내어서 해외로 도피하도록 하셨고, 후에 가세가 기울어도 그런 위급한 일에는 어머니의 패물까지도 잡혀서 그들을 도왔다고 어머니는 내게 이야기하셨다.
가세가 계속 몰락하여 내가 태어난 직후에는 적선정 집까지 팔고 셋집으로 가는 형편이었고, 한번 잃어버린 재산은 영구히 우리를 떠나서 마지막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에는 한푼도 없었고, 겨우 개업한 누이에게 의탁하셨다.
아버지는 정직한 분이었고, 나라와 민족을 많이 걱정하셨던 우국지사였다. 아래에 몇가지 일화가 있다. 해방이 되니까 사람들은 아버지의 미국교육과 적지 않은 인맥이 있어 정부에 들어가서 요직을 하실 줄 기대하였으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이승만 박사 귀국환영식이 이화장에서 열렸을 적이었다. 그곳에 많은 인사가 모였는데, 아버지는 두 사람이 완장을 차고 손님을 바쁘게 정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윤치영과 유래장이었다. 아버지가 옆에 앉았던 여운홍씨(여운형씨의 弟氏:제씨)에게, “저 둘이 왜 여기에 있소?” 하니 여운홍씨는, “Mr. 정, 아직도 모르시오? 윤치영은 이박사의 비서요, 유래장은 윤치영의 비서라오.”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불끈하셨다. “저 두놈이 독립투사를 가장하여 무한히 많은 독립투사를 일경에게 밀고한 자들인데, 그것들을 쓰다니! 정신이 나간 늙은이로군. 나는 가겠소.” 하고 아버지는 나오셨고, 한번도 이박사를 칮지 않으셨다. 윤치영과 그의 가족 일파는 이 세상이 다 아는 친일파였지만, 유래장이란 이름은 듣지고 읽지도 못한 인물인데, 아마 해방 후 일찍 사망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아는 분을 통해서 개인회사에 취직을 하셔서 근근히 생활을 영위하셨다. 청빈하고 깨끗한 분이셨음에는 아무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또 춘원 이광수와의 이야기를 하겠다. 아버지는 어느때부터 춘원과 아주 친하게 지내셨다고 늘 이야기하셨다. 아버지가 미국에 계실 때 춘원의 편지를 받으셨고, 너무 슬퍼서 한동안 우셨다고 한다. 나는 처음에 아버지가 교육받으실 때인가하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다. 한번 찾아보자. 아마 그때가 춘원이 변절하기 전이었어야한다.
그러니 아버지가 제2차 미국방문시기일 가능성이 많다. 위키백과에서 찾아보니, 이광수씨가 1937년까지는 독립운동을 하였고, 그 이후에 변절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러니 1923-1924년 아버지가 뉴욕에 계실 때 그의 편지를 받고 많이 우셨다는게 납득이 간다. 그의 변절후 아버지는 그와 완전히 의절하였다. 아버지는 문인이 아니었지만, 많은 문인과 친분을 가졌다 .
그들은 단체가 되어서 자주 모임을 갖기도 했고 날씨가 좋으면 서울근교에 경치좋은 곳에서 만나서 좋은 하루를 갖기도 했다. 이광수씨는 변절후 많은 사람으로부터 비난 내지 규탄을 받아오던터라 많이 우울하기도 했기에 출입도 삼갈지경이었는데, 친구 한분이 그에게 전화를 걸고 나와서 같이 하루를 보내자는 제의에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이 누구들이냐고 물어서 그중에 아버지도 포함되었다고 하면, 그는, “Mr. 정이 나를 그렇게 싫어하니, 오늘은 내가 피하겠소.”하고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6.25동란 때 잠시 우리 삼선교집에서 나가셨다가 인민군보위대에게 붙들려가는 이광수씨를 돈암동종점근방에서 마지막으로 보셨다고 이야기하셨다. 아마 아버지도 예전에 그에게 너무 냉정했든게 후회가 되셨는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수주 변영로씨와의 이야기를 한다. 그의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는 그분의 처음 영어선생님이었고, 후에는 둘도 없는 주붕(酒朋) 즉 술친구였다. 아버지 이야기는 그분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에 잘 나온다.그래서 Google search에 酩酊四十年(명정사십년)과 淡齋鄭載謜(담재정재원)을 한문이나 한글로 넣어서 클릭하면 찾을 수 있다.
또 아버지 이야기를 찾을 웹을 알게 되었다. “노랑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잘 엮었다. “1900년대 초 미국유학자, 담재(淡齋) 정재원(鄭載謜) - 淡齋의 寬忍”은 변영로씨의 ‘명정사십년”에 나오는 아버지와의 이야기다.다음은 기억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다.
(1) 백점보다 팔십점을 선호한 아버지.
나는 소학교 1, 2, 3학년기간 그저 중간정도의 생도였다. 그래도 간혹 시험볼 때 100점을 받을 때도 있었다. 그럼 아버지는 날 보시고, “춘호야, 백점보다는 팔신점이 더 좋은 것이다.” 란 말씀을 가끔 들었다. 나는 그래도 이상하단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 오랜 세월후 그 기억이 떠 오른다. 내가 성인이 된 후 그리고 미국에 살면서 한국인 의사들과 만났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모두들 의아하였다.
나는 처음에 아버지는 짐수에 별로 집착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좀 의문이 남았다. 이 이야기를 가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그들의 생각을 물어보아도 아무도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한국인이나 미국인이나 마찬가지로. 어느날 Rochester시에서 조금 떨어진 Brockport란 작은 시에 있는 Lakeside Memorial Hospital에서 오후에 환자 회진을 끝내고 간호사실에 가서 Coffee 한잔 마실 때였다.
그러면 이런 저런 얘기도 주고받을 시간이 생긴다. 그 때 그 이야기를 간호사 몇 명이 있는 자리였다. 아버지는 나의 시헙성적이 만점일 때 날 보고 “만점도다는 80점 정도가 더 좋은 것이니라” 하고 이야기하셨는데, 나는 아직까지도 그 뜻을 모른다는 얘기였다.
거기에 Mary란 중년간호사가 듣더니 대뜸, “Don't you know, Dr. Chung? Your father wanted you to be an all-American boy with a well-rounded personality. He didn't want you just to be a so-called bookworm."
그래서 나는 완전히 깨달았다. 아버지는 내가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길 원하셨지, 1등, 특등하는 학생이 되는 걸 원하신게 아니다. 여기서 well-rounded 가 무슨 뜻인가? Webster Dictionary에서 “ fully or broadly developed: such as having a broad educational background” 완전하고 넓게 발전한 인격이라고 할까? 우리말로는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보면 좋겠다. 그래서 Mary는 나의 오래된 의문을 해결하여 주었다. 그런데 보통 한국 아버지들은 이렇지는 않았다.
(2) 어느날 우연히 아버지가 내게 종교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춘호야, 이 세상의 종교는 다 좋은 것이다. 너는 네가 원하는 종교를 택하여서 진실하게 믿으면 그게 가장 좋은 행위이다.” 그것을 나는 나의 며느리에게 그 얘기를 하여 주었다. 우리 부부는 한국에 있을떼부터 불자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며느리 둘은 모두 기독교 신도들이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말씀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3) “춘호야, 남자란 이 세상에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고, 못 견디는 일이 있어도 안된다. 그래야만 남자다. “
이 또한 중학교 2, 3학년 시절이었다. 그 유명한 보수동 사거리 초가 행랑방에 있으면, 바로 밖이 잡화상 가게인데, 거기서 아주 큰 소리로 Radio를 틀어 밤낮으로 유행가 소리가 쉴새 없이 나온다. 어떨 때는 잘 수없을 정도로. 지금도 그 가사 몇 쪽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래서 시끄럽다고 할 때 아버지가 말씀하셨을 것이다. “별을 보고 점을 치는 페르샤 왕자…아라비아 공주는 꿈 속의 공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것도 나의 수행시절의 하나였는가? 현인의 목소리였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유행가라면 싫어했다. 얼마나 싫어했나?
대학 입학 후 가끔 고교동창 서너명과 만나서 이얘기 저얘기 하는데, 나는 그들틈에 끼지 못하고 듣는 축이었다. 누가 “고복수”얘기를 하는데 친구들이 날 저희대화에 끌어 넣으려고 가끔 내게 물어보기도 했다. 고복수? 처음듣는 소리라 한다는 나도 참여차 한마디한 게, “고복수”가 무어지? “하니까 친구들이 어안이 벙벙했는지, 날 쳐다보가가 한 친구가 갑자기, ‘정관호, 난 네가 얌전한줄 알았는데, 너 유모아가 괜찮구나.앞으로 희극으로 나가면 어떨지?” 나는 답답해서, “몰라서 묻는데 고복수가 국수같은 음식인가?”하니, 그들은 참지 못하고 폭소를 하였다. 아직까지도 내가 농담을 하는줄 알았고, 나의 질문을 치지도외하였다. 나 또한 그들에게 질문을 포기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종암동 행길에서 전봇대에 크게 써 붙인 걸 보았다. “고복수 은퇴공연”이란 벽보다. 그래서 이 세상을 차츰 알게 되었다.
한동안 개업시절에 참으로 바쁘고 힘들때가 많았다. 특히 중환자를 병원에 입원시키면 가끔 ICU (Intensive Care Unit)에서 환자의 상태가 악화될 때 내가 차로 달려가야 한다. 중환자는 특히 한밤중에 악화되거나 사망하기에 자다가 일어나서 차몰고 가는 때가 많았고, 가끔 과속으로 순찰차에 잡히면 나의 용무를 이야기하여서 보내주기도 하고 또는 병원에 전화해서 확인 후 보내주기도 한다. 그래서 병원에서 한동안 치료하여 상태에 변화가 있으면 조금 안심하고 집에와서 자는둥 마는둥하다가 아침 일찍 얼머나 일찍? 항상 5시전에 집을 떠났다. 여름이나 겨울이나.그럴 때 차속에서 어버지 말씀이 생각났다. 남자란 못할 게 없어야 남자다. 혹시 아버지가 그런 예감을 가지셨던가? 내가 자라서 어느땐가 내가 그리 바빠질 줄 아셨던가?
아마 이런게 내가 받은 가문 Legacy라고 믿는다. 내가 한국에 얼마동안 있으면서 자원봉사를 한적도 있었다. 그 때 나 자신을 돌이켜보니, 돈받지 않고 일을 한적이 업었던 이기주의자였다. 이래서야 되겠는가하고 주말에 의사가 없는 동네에 간호사, 병원직원 몇명을 데리고 다녔다.
그 때 Merry Ewing란 Australia에서 온 영어선생을 내 환자로 알게 되었고, 언젠가 내가 쓴 가정이야기에 필요한대로 교정을 시켜달라고 했더니 우리 가정 즉 친가와 외가에 많은 흥미를 갖게 되어서 내게 가족이야기를 영문으로 써서 조그만 책자를 만들어 애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격려하였다. 그러지 않으면 이런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할게 아니냐하였기에 나도 결국 동감을 하고 다음과 같이 나의 이야기를 써서 즈그만 책자를 만들어서 귀가할 때 갖고 와서 애들에게 논아 주었다.
그 책 제목은 "In Search of My Family Legacy"였다. Merry의 아버지는 평생 교육자였고, 그때는 은퇴하였는데 자기도 많이 아버지의 도움을 받고 내 책의 교정을 하여 주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는 몇가지 질문을 내게 하였다.
(1) Are you ‘Yang Ban’(양반)? I said to her, “There is no such thing nowadays. It’s gone long time ago. Then Merry asked me again, “Then was your family ‘Yang Ban”?
They were only country yang bans, Does that mean anything to you? Merry said, “Koreans seem to be so occupied to yangban. I finally told her not to be occupied to such nonsense as yangban. 우리말로 시골양반도 무슨 대단한 양반인가?
(2) 아버지가 미국서 귀국하신 후 어머니와 결혼하였다는 구절에 나에게 물었다. How did your father court your mother? Did they acquaint each other? How long did they date before getting married?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중매로 양가를 통하여 결혼하였다고 설명하였다.
(3) 우리 모자의 생활이 매우 가난했다는 이야기에 Merry는 어떻게 생활하고 어떻게 학비를 만들었는지 물었다. 그는 한국인의 최저생활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생활은 방세를 놓아서 돈을 좀 받고 학비는 가정교사 즉 Tutorship으로 해결 했다고만 말했다.
(4) 그런데도 Merry는 아버지에 대한 Image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며 아버지가 혹시 Intellectual이 아닌지 하고 물었다. 나 자신은 Intellectual의 의미를 잘 몰랐다.Webster Dictionary에서 Intellectual은 “developed or chiefly guided by the intellect rather than by emotion or experience : RATIONAL”로 나아있으니, 지적능력에 의한 결정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아버지는 그런 부류의 사상가나 철학인은 아니었다. 그래서 Merry에게 내 생각으로는 아버지는 Intellectual은 아니고 내가 아버지를 to describe해 보자면, “A man of principle”이라고 말했고, 이 또한 올바른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정한 원측대로 행동하셨던 분이다.
(5) 내 생각으로는 아버니는 보수적인 한국인이었지만, 그 당시의 한국인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리고 많은 사람, 친척, 가족. 지인들로부터 이해를 받지 못하였다.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길로 가셨던 분이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를 이해한다. 하긴 나의 셋째 누이는 날 보고, "아버지는 그렇게 좋은 인맥과 교육을 받으시고 왜 이렇게 무의미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시다니!" 하고 말을 했지만, 고교 1학년생인 나는 생각이 달랐다. 아버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셨다. 장관이라도 되어서 뇌물이나 받아서 떵떵거리고 사는 게 그리 탐나는가? 이게 내가 누이에게 향한 나의 속생각이었다.

7-8 김규식 박사: 김박사님은 아버지에게 대단히 중요한 분이었다.
내가 소학교 2, 3학년시절에 어른들이 하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해방직후 그분들의 대화내용은 우리나라 삼대 지도자였다. 이승만, 김구 그리고 김규식 세 분 이름이었으며, 그들은 한결같이 이승만박사는 대통령이 되고, 김구선생은 다음 등급이 부통령이 되고, 김규식 박사는 그 다음 등급인 국무총리가 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였고, 그건 아버지 말씀이 아니고, 어른들 사이에서 돌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세상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믿고 함께 일하고 싶어했던 분이 김규식박사였다. 어머니이야기에 의하면 김규식박사와 조부님이 친하셨고, 할머니와는 의남매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때는 내가 이럴적이었기에 그런가보다하고 생각했지만, 이제와서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그 옛날에 어떤 연유로 의남매를 하셨는가? 그리고 조부님이 예안원님을 사직하고 가족을 이끌고 상경하신 후 많은 신지식인들과 교류 내지 친분을 가지셨다고 하며 또 종가의 의전을 폐하시고 기독교를 신봉하여 집안에서 난리가 나서, 많은 지손(支孫)분들이 진주지역으로부터 서울집으로 떼를 지어 올라와서 항의, 논쟁 그리고 마당에 자리를 깔고 누워서 요새말로 데모를 하였다고 어머니가 이야기하시자만, 그때는 어머니가 시집오시기 오래전 일이라 틀림없이 할머니로부터 들으셨다고 믿는다. 결국 몇달만에 조부님이 그들에게 항복하고 다시 제사와 기타 의전을 재개하셨다. 그런데 혹시 할머니 친정과 김박사의 가문이 같은 김씨이기때문에 가능했는지 의문만 남을 뿐이다.
하여간 아버지는 서울서 동경까지 어떤 분이 동행하고 기타 숙소등을 해결하였다고 하시는데, 나는 그분을 모르지만, 동경에서 뉴욕까지는 김규식박사가 동행하여 숙소와 학교등을 모두 해결하신걸로 들었다. 그럼 김규식박사는 아버지안내 역할만 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떠 오른다. 그 먼길을 안내 후 귀국하셨는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일어난다.
그래서 위키백과에서 찾아보니 많은 정보를 얻었다. 우선 1900년부터 1905년까지 연도에서 김박사의 활동과 거처(居處)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았다. [1900년 가을 정식으로 로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 입학, 1903년까지 로노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16] 이후 언더우드 선교사의 지원과 함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로노크 대학교에 재학 중 그는 대한제국 고종의 서자(庶子) 의친왕(義親王)과 만나 교우관계를 형성하였다.
1900년 5월에는 학교 잡지에 한국어에 대한 논문을 실었고, 1902년 2월호에는 '동방의 아침'이라는 이름으로 연설논문이 실리기도 했다. 한편 한국어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할 때는 한국어와 영어, 불어, 독일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와도 비교하면서 쓴 글이라 한다. 2006년 한국의 역사학자 이정식은 김규식의 글을 읽고 '그만한 글을 발견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며 찬탄하기도 하였다.
1901년 1월에 개최된 연설 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대학 잡지에 특집으로 실리기도 했다. 로노크 대학교 재학 당시 김규식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등에 뛰어났고, 동아리 활동으로는 웅변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데모스테니언 문학회 라는 문학클럽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02년 1월 문학 동호회의 회장이 되었다. 1902년 5월 로노크 대학교를 휴학하고, 미국 뉴욕주의 어빙턴에서 취직하였다. 학창시절의 학력 평점은 92.2점을 유지하였으며 1903년 6월 로노크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당시 성적은 전체 3등이었으며,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학사였다.1903년 5월에는 로노크 대학교 교내 잡지에 《러시아와 한국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였는데, 이 글에서 '한국의 정부는 천하고 무능력하며 정직하지 못한 정치가들의 정부이며 한국은 음모와 역 음모, 타성과 보수주의에 잠겨 있고 나라는 반역자들과 비겁한 겁쟁이들로 가득차있다'고 비판하였다. 대안으로 '한국이 지금이라도 깨어난다면 머지않아 드리워질 침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며 한탄하기도 하였다. 졸업식 당시 졸업 기념 연사 4인 중의 1인으로 선발되어 '러시아와 극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의 러시아 침략과 러일전쟁의 결과를 예견, 분석하였다.
1903년 가을 그는 미국 뉴저지주의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University)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 1904년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장학생으로 선발하고 학비를 지원한다 하였으나 러일전쟁이 전개됨에 따라 그는 '고국의 독립을 위해서' 라며 거절하고 귀국하였다.
1904년 가을 그는 YMCA 청년회 교육부 간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YMCA 이사회 이사 겸 서기를 거쳐 YMCA 교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는 YMCA 중학교 교장에 임명됐다.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청나라 상하이까지 갔으나 실패하고, 11월 7일 귀국하였다. 그 해 만주의 뤼순 항구가 일본에 함락되자 로노크 대학의 잡지에 여순항의 함락을 크림 전쟁에서의 세바스토폴의 함락과 비교한 '근대 세바스토폴의 함락'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1904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서가 되었다. 1905년 그는 상동교회를 찾아, 전덕기• 이동녕 등과 교류하는 가운데 한민족의 나갈 길을 의논하였다. 1904년 윤치호와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의 비서로 있으면서 YMCA학교 학생부 담당 겸 간사, YMCA 학교 교사, 경신학교 교사, 기독교 주일학교 교장, 배재전문학교 영어강사, 연희전문학교 영어강사, 조선기독교 대학교 1학년 2개반 담당 교수 등을 지냈다. 배재학당에서 그는 영어 과목과 수사학 과목을 가르쳤다.]
이리하여 1903년부터 1904년까지 프린스턴 대학에서 학위과정을 이수하셨으니 그해 여름에 귀국하여서 아버지를 대동하고 일시 미국에 가셨다고 믿게 된다. 해방후 김규식박사 환영회에서 환영객중에 아버지가 나서서 김박사에게 인사를 하시니까 김박사왈, “왜 얼굴이 그리 길어졌지?” 하셨다고 하니 아마 사십여년만에 처음으로 대면하는 자리에서 10세의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셨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이승만박사에게서 완전히 환멸을 일으킨 후, 김규식박사와 친하게 지내셨다.
나는 아버지가 광산진흥공사에 다니실 때 출퇴근 때 미고문관이 배려해 준 짚차를 어머니와 함께 타고 몇 차례 김규식박사가 거주하던 삼청장(三淸莊) 밖에서 짚차 안에서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내가 소학교 3, 4학년 때 일이었다. 아버지는 김규식박사만이 진실로 한국의 애국자이고, 그분과 함께 일하실 날이 오기를 기대하셨고,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어머니에게, “나는 김규식박사와 일할 날이 오기를 기대하였지만 이제는 모두 수포가 되었소.”하셨다고 어머니는 전했다.
어느 설날 아버지가 인사차 가셔서 옛날 처럼 절을 하시려니까, 김박사가 극구 만류하니, 아버지왈, “박사께서는 우리나라 예절을 잊으셨습니까?” 하셔서 절을 받으시고, 또 부인을 불러 아버지를 소개시키셨다고 들었다. 아버니는 어느 때 김규식박사는 아버지에게 삼촌같은 분이라고 하셨다.
내가 다음에 귀국하게되면 김규식박사기념회를 방문하고 헌금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나와 있는데, 확인이 필요하다. 법인명 : 사단법인 우사김규식박사기념사업회 / 주소 : (우)07238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70길 15-1 극동VIP빌딩 705호 / 대표 : 이기후
전화 (02) 2070-3133 / 팩스 02-535-2066 / 등록번호 : 211-82-15619 /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서울 동작구 현충길 210) 광복회
(07236)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62길 15, 광복회관 4층 (여의도동 17-6)
하지만 내가 직접 김규식박사 기념회를 알아 보려고 한다. .

7 나의 추후 계획

7-1 풀리지 않은 초등학교 문제
아버지의 초등학교를 찾을 도리가 없다. 그것이 뉴욕시에 있었겠고, 아마 현재 뉴욕한인교회근방일 가능성은 있지만 알아 낼 도리가 없다.
어느날 New York Historical Society를 방문하여 그것에 관한 정보를 얻는 방법을 문의하였지만, 문제는 아버지는 외국인이었기에 Public School에서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오로지 Private School에서 교육을 받으셨을텐데, 그 당시 Private School 목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7-2: 횡령건
횡령 사실은 정말 중요하다. 아버지의 길고 긴 십년 유학시절에 돈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니 그 고생을 말할 수 없었다. 견디다 못해 10년만에 일시 귀국하신 때가 공교롭게도 1차대전발발과 맞물려 결국 귀교하실 수없었고, 이리하여 수학과정은 대학교 1학년 수료로 끝마치게 되었다. 이 사실을 Mr. Fay의 상세한 편지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편지에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다음의 인명과 종교기관명이 열거되어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
Presbyterian Missionary, Board of Foreign Missions, the treasurer Mr Dwight H Da y 등 실명도 나오며, 위원회 회원의 모임과 그들의 만장일치의 결정으로 그 손해액을 지환씨에게 보상하라고 Check을 써서 자신 Mr. Fay에게 보냈다는 내용은 거의 완전히 신빙성이 있는 증거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다음에 열거한 객관적인 증명이 필요하다.
Board of Foreign Missions의 기록을 조사하여 송금관계, 그 선교사의 이름, 송금인과 수취인의 이름, 그 수표와 금액, 기티 필요한 사항을 찾아내어야 한다고 믿는다.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에서 직원이 나에게 직접 와서 조회하지 않겠느냐고 문의하였는데, 나로서 그렇게 하기에 몇 가지 애로가 있다.
첫째 나의 신체상의 문제인데, 10여년 전부터 청력손실이 와서 현재 누구와의 대화가 아주 제한이 된 상태이다.
둘째 Board of Foreign Missions의 기록이 모두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에 보관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셋째 이 문제가 관련된 기간이 이상할 정도로 길다. 1903년부터 1914년까지는 아버지의 교육기간이니 이 기간의 송금을 찾아야겠다.
다음 Mr. Fay의 편지가 1956년 1월 8일에 발송되었는데, Board of Foreign Missions에서 보낸 Check를 받고 그분이 지환씨의 행방을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도저히 알 수 없어서 아마 마지막 수단으로 Williston Seminary에 연락하였으니, 도대체 언제 이 수표를 발행하였는지 알수 없다.
Board of Foreign Missions의 최종 운영연도가 1958으로 나와있으니, 혹시 그 몇해 전에 자기들이 빚진 걸 갚으려고 Check로 지불하였다고 믿겠는데, 그렇다면 위원회의 최종연도부터 대략 10년전부터 시작하지 않았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1) 그렇게 추정하고서, 그 조회기간을 둘로 나누어 첫째 1903-1914년, 그리고는 1948-1958년간 조회하면 가능할듯 싶다.
(2) 그런데 조회가 가능할지도 모르겠고, 또 얼마나 많은 시일이 걸릴지도 모르겠고, 나 또한 그곳에서 호텔이 있으면서 작업을 하여야겠다.
(3) 이러한 애로때문에 아직 결정을 못하겠다. 그런데 내가 만일 원하는 재료의 대부분을 찾게 된다면 무엇을 할건가?
나는 여기에서 금전적인 손해보상을 기대할 수없다. 하지만 장로교회 선교위원회에서 이러한 부도덕한 행위를 자행한 사실을 세상에 밝히고 싶다. 그것만이 내가 할 일이라고 믿는다. 그곳에 가서 체류하면서 조회한다는 게 나 혼자 힘으로 과할 듯싶다. 가능하면 누구 한명을 대동하고 싶지만 이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여간 좀더 고려해 보려고 한다.
아래에 선친의 발자취를 찾아서 제5회를 싣는다. http://www.snuma.net/xe/freeboard/64337
(4) My preparation to the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My letter to the staff re: Charlene Peacock. Whether I could find the records of the former Board of Foreign Missions from 1903 to 1914 and from 1948 to 1958 or not.
(5) Father’s alma mater, Williston Northampton School의 Director of Alumni Association을 만나서 아버지의 족적 기록을 전달하고 아버지와 지환씨의 생평연도를 보고하여 그 두 분의 기록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6) Visit the Main Library of the Columbia University to enquire the private elementary schools in the neighborhood from 1903 to 1909.
(7) 나의 추가 추정: 왜 아버지가 1914년 여름에 귀국하셨는가? 이제야 깨달았다.
아버지의 학비와 생활비 자금은 조부님이 선교사를 통하여 이곳 Board of Foreign Mission에 전달되었고, 거기서 아버지의 후견인 정지환씨 즉 Jewhan Chung에게 전달되었는데, 이 송금건에 문제가 많아서 나는 정지환씨가 도미 후기에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그분이 처리하였기에 그분은 School of Colorado Mines를 1910부터 1914년까지 수학하고 졸업하여서 귀국하게 되었기에 아버지도 아마 함께 귀국하셔서 세분이 추후 송금건을 의론하기 위해서 그 시기에 귀국하셨다고 믿는다.

 
영상: IMAGES

1. Williston Seminary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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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own Library Easthampton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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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mily Williston Memorial Library August 3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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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mily Williston Memorial Library Hee and Kwan Chung June 1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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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Zachs Admission Center - August 3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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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Mr. Jeffrey Pilgrim and Kwan Chung August 3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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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ntrance of Korean Methodist Church and Institute September 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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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Frontal view of the building - Only right half belongs to the Church Sept 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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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Charles Edey Fay’s two-page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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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A slip of paper Jewhan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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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A slip of paper Jaone Chung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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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Portraits of Jaone Chung (father) left and Jewhan Chung (granduncle)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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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Father’s address during his Wharton School days 1913 to 1914 from the yearbook: 3911 Pine Street, Philadelphia, 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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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Henry(son) and Connor(grandson) in the Penn campus February 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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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The cover of THE STORY OF “MARY CELES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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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Mr. Charles Edey Fay's tomb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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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S.S. Siberia Maru, the transpacific liner which father went aboard. July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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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Father in front of stone wall winter of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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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Kwan Ho at the same spot January 6, 2015
January 6, 2015 Stone 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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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Father with a friend along a footpath winter of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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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Kwan Ho standing near the bench site Dec 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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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 Ho Chung - February 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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