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English
                 

홍종우

김옥균을 암살

by온기철 James Ohn,  Jun 28. 2021(Brunch)

 

WeeuqONuiNwNEOCsHCQwbskZu4Y.jpg  김옥균 암실 장면

 

갑신정변(1884)과 을미사변(1895)은 공통점이 있다. 고종에 대한 반역이며 반역자들의 뒤에는 일본이 있었다. 반역자들은 개화파 였고 그들은 일본의 힘을 빌려서 조국을 근대화 시키려고 했다. 반역자들은 잡혀서 처형을 받거나 일본으로 망명 했다. 고종은 도망간 반역자들을 암살 하기 위해서 자객을 끝임 없이 보냈다. 김옥균을 암살하기위해서 지운영을 보냈지만 실패 했다. 그후 홍종우는 김옥균을 상해에서, 고영근은 우범선을 일본에서 암살 하는 데 성공 한다.   

 

홍종우


1899년1월30일 이승만은 최정식, 서상대와 함께 서소문안 감옥에서 탈출 했다. 이승만은 뒤 처저서 곧 다시 붙잡히고 최정식은 감옥에서 빠저나와 일본으로 밀항하려다가 체포 되었다. 서상대만 탈출에 성공 했다. 붙잡힌 최정식과 이승만은 법정에서 재판장 홍종우 앞에 서게 되었다. 최정식은 이승만이 탈출을 주도 했다고 증언 했다. 그러나 홍종우는 그의 증언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왜냐면 최정식이 앞장서서 권총을 3발이나 발사 하는 동안 이승만은 한발도 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최정식에게 교수형을 이승만에게 태형 백대를 선고 했다. 만약 홍종우가 최정식의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강경파에 속해 있었다. 홍종우는 독립협회의 반대 단체인 횡국협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홍종우는 어떻게 해서 대한제국의 재판장이 되었을 까? 

1850년 홍종우는 경기도 안산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 났다. 아버지를 따라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도로 이주하여  가난하게 자랐다. (*고금도는 정유재란때 조선수군 본부가 있었고 이순신 장군이 노량진 전투에서 전사한 후 그의 시신이 잠시 안치되었던 곳이다.)  한때는 제주도에서 화전민과 같이 살기도 했다고 한다. 

 

1886년 모친상을 당한 후 일본으로 건너 갔다.  일본으로 간 동기에 대해서는 기록에 잘 나와 있지 않다. 당시에 고종은 외국에 다녀와서 그 곳 이야기를 잘 하면 별시를 치게 하여 등용 했다고 한다. 그가 이 출세길을 노렸는 지는 잘 모른다. 

 

일본 나가사끼에 도착한 그는 막노동을 하며 규슈, 오사카를 거처 도꾜에서 아사히 신문사 식자 공으로 2년동안 일 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된 일본을 보고 감탄 했다. 식자공을 하면서 신문을 읽고 세계 정세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 그는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라면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가 돼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여비에 충분한 돈이 모여지자 1890년 동경하던 프랑스로 떠났다.  요꼬하마를 출발한지 40여일이 되어 프랑스 마르세이우 항구에 도착 했다. 그 후 파리에서 레가미라는 프랑스 사람을 만났다. 이렇게 그는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 되었다. 

 

0Y053chYGzZAnxye7nonoxDHdM4.jpg레가미가 그린 홍종우 초상화

 

"그의 머리는 천장 까지 와 닿는 것 같았다. 그를 보자 나는 일종의 신비러운 공포감에 사로 잡혔다. 그 느낌은 예전 동양에서 본 큰 호랑이가 내게 불러 일으켰던 경외감과 같은 것이었다. " 레가미는 처음 만난 홍종우를 이렇게 묘사 하고 있다.  그는 잡지 통보에 "정치적 암살자"라는 제목으로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화가이기도 한 그는 홍종우의 초상화도 기고문에 그려 넣었다. 

 

홍종우의 나이 41세 였다. 그는 양복을 입지 않고 꼭 조선복을 착용했다(*아마 당시에 한복이란 말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품속에는 항상 대원군과 고종의 사진이 있었다. 그가 프랑스에서 근대문명을 배워서 조선을 개화시키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의 전통과 왕에 대한 충성을 중요시 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2006년 한국 국립발레단은 1936년 러시아 발레리나 미하일 포킨이 제작한 발레 "사랑의 시련"을 복원해서 공연 했다. 사랑의 시련은 조선의 춘향전을 원본으로 하여 서양식으로 각색한 작품이었다. 포킨이 춘향전을 접하게 된것은 홍종우 덕분이었다. 홍종우는 프랑스 작가 로니와 협조하여 춘향전을 불어로 번역 했다. 직역이라기 보다는 춘향전을 바탕으로 불어 식 소설을 쓴 것이나 다름 없었다. 제목은 춘향을 풀어서 번역 한 "향기로운 봄"이었다. 홍종우는 로니에게 춘향가를 들려 주며 그로하여금 소설의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포킨은 향기로운 봄을 읽고 사랑의 시련이라는 발레를 제작 했다. 이외에도 그는 심청전을 불어로 변역하여 "마른 나무에 끛을 피우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17세기 까지 코리아는 지구상에 하나의 섬처럼 표기 되어 있다. 이러한 무지의 주된 원인은 우리가 서양문명과의 접촉을 시도하려는 열의가 적었기 때문이었 슴을 겸허히 고백 한다." 홍종우는 "마른나무에 꽃이 피다"의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갓을 쓰고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파리 거리를 거닐 던 양반 홍종우는 조선이 약소국인 원인을 서양문명을 받아드리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코리아의 상황을 발칸반도와 비교 할 것이다. 조선은 강대국에 둘러 싸여 있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의 지배권을 놓고 각축을 벌려왔으며 얼마후 먼 러시아가 끼어 들 것이다." 라고 서문은 계속 된다. 그는 당시 조선이 처한 국제적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인디언들이 에스키모인들과 같이 옷을 입고 있지 않는 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 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마다 각각 다른 정체를 가지고 있다." 라고 나라의 정체성을 강조 했다. 그는 조선이 서양문물을 받아드리야 하지만 우리것을 버리지 말고 지켜야 한다고 한다고 생각 했다. 

 

"당신들은 우리 조선의 연대가 기원전 2천년 이전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조선은 강대국에 둘러 싸여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저는 유럽문명을 조속히 받아들이는 것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자리에서 여러분의들의 도움과 충고를 바랍니다." 파리 카페 리 마고에서 홍종우가 한 연설 내용이다.  이곳에는 파리의 유명인사가 자주 모이는 카페 였다. 레가미는 홍종우를 이곳에 데리고 가서 연설을 하게 해주었다. 

 

레가미의 소개로 홍종우는 파리 기메박물관에서 일 했다. 그는 그곳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물건들을 모아 조선문화 전시실을 만들었다. 춘향전과 심청전 외에도 직성행년편람을 불어로 번역 했다. 1893년7월22일, 2년7개월동안의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 왔다. 그는 왕권을 튼튼히 하여 국민이 총 단결 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강하게 하되 조선의 전통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고종은 일본 망명 개화파를 암살하려 했다.

1884년 갑신정변은 급진개화파들의 고종과 민씨 세력을 무력화 시키려는 쿠테타 였다.  쿠테타가 실패 했기 때문에 주모자들은 모두 반역자로 처형 되었다. 역모는 삼족이 멸하는 처벌을 받아야 했다.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등은 일본으로 망명해서 생명을 부지 했다. 고종은 일본에게 이들의 송환을 요구 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부 했다. 고종은 자객을 보내어 이들을 암살 하려 했다. 

 

1886년 고종은 지운영을 일본에 보내어 김옥균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 했다  (*지운영은 천연두 예방주사를 조선에 최초로 도입한 지석영의 형이다. ) 1890년 김옥균이 북해도에서 도꾜로 돌아 왔다. 일본정부는 조선정부가 끝임 없이 그를 암살하려 했기 때문에 그의 거처를 이리저리 옮겼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정부는 다시 적극적으로 김옥균을 알살 할 계획을 진행 하였다. 

 

1892년5월 당시 민씨 척족의 영수, 병조판서 민영소는 이일직을 두목으로 권동수, 권재수 형제를 김옥균 암살의 임무를 주어 일본으로 파견 했다. 이일직은 풍부한 자금을 쓰며 김옥균, 박영효 등에게 접근 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홍종우를 포섭했다.  이일직이 김옥균을 유인해서 암살 할 것을 제안하자 홍종우는 이에 동의 했다. 

 

홍종우는 쉽게 김옥균에게 접근 할 수 있었다. 서로 개화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홍종우는 프랑스 요리를 해서 김옥균을 대접 했다. 그의 요리 솜씨는 김옥균 뿐만 아니라 일본인 친구들도 맛있게 먹을 정도 였다. 

 

한편 조선정부는 당시 조선의 감국(총독에 해당) 위안스카이에게 "동양평화를 논의 하기 위해서 김옥균을 청으로 초청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김옥균에게 보낼 것을 요청 했다. 위안스카이는 홍종우를 동반자로 추천 한다는 내용까지 첨부하여 김옥균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개화파와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일본에서 일을 벌리면 조선이 일본에게 곤혹을 치룰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달랐다. 청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일으킨 갑신정변을 제압한 나라이다. 청나라에서 친일 개화파 우두머리를 처단 하면 조선에게 큰 부담이 없을 것은 당연한 이치 였다. 

 

1894년 3월경 이일직은 김옥균이 진 빚를 갚아 주 었다. 주색에 빠저 방탕한 생활을 하던 김옥균은 항상 돈이 모자랐다. 그는 일본은 위험하니 상해로 갈것을 종용 했다. 그리고 상해로 가는 배표와 중국에서 쓰라고 5,000원 짜리 수표를 주었다.  상해 동문 밖에 있는 천풍보호(은행?)에 가서 환불하라고 했다.  그리고 홍종우가 자신의 대리인으로 되어 있으니 그를 데리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 수표는 가짜 였다. 

 

김옥균과 홍종우는1894년3월23일 고베항을 출발해서 3월27일에 상해에 도착 했다. 그들은 뚱허양행(동양양행)에 서로 다른 방에 투숙 했다. 다음날 3월28일 홍종우는 김옥균의 방에 침임하여 권총으로 그를 사살 했다. 

 

이일직는 권동수, 권재수 형제와 함께 일본인 가와쿠보를 매수해 박영효를 암살 하려다 체포 되었다. 일본경찰은 그들을 조선으로 압송 했다. 

 

청나라는 형식적인 재판을 하고 "조선의 관원 자격으로 공무를 이행"한 것에 불과 하다고 석방되었다. 조선과 청이 미리 짜 놓은 각본이었다. 1894년 4월 홍종우가 김옥균의 시체를 가지고 들어오자 고종은 버선발로 뛰어 나갔다. 고종의 환심을 산 그는 출세가도를 달 렸다. 특별히 실시한 과거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는 것을 필두로 1897년8월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비서원승, 의정부 총무국장, 평리원 판사, 중추원 의관, 태의원 소경등  요직을 역임 했다. 평리원 판사 시절 이승만을 재판 하였다. 

 

1898년6월 홍종우는 보부상을 중심으로 황국 협회를 조직하였다. 독립협회가 입헌군주 제도를 주장 하던 때이다. 황국협회는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을 했다. 독립협회가 주도하는 만민공동회의를 습격했다.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강경파 였다. 황실을 보호 하는 입장이었던 홍종우가 분별있는 판결을 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강직한 성격이 작용 했던 것으로 생각 된다.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홀대 했지만 도아마 미츠르가 창설한 겐요사(현양사)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겐요사는 일본 우익 낭인 들이 만든 집단 이었다. 후에 민비 시해에 참여 한다. 친왕파인 홍종우가 친일 성향이 짙은 김옥균을 좋아 할리가 없었다. 

 

김옥균을 홀대하던 일본정부는 그가 죽은 후 완전히 태도를 바꾼다. 신문에 그의 죽음을 애도 하는 기사를 대서 특필하고 모금 운동 까지 했다. 암살에 관련된 조선 정부와 청나라 정부를 비난 했다. 일본 국민의 반청 감정을 고무 시켜 청과 전쟁을 하려는 포석 이었다. 

 

고종은 청일전쟁이 끝나고 민비가 살해 되고 아관파천을 할 때 까지 홍종우를 등용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개화파와 일본세력이 조선 조정을 지배하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관파천 이후에는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견제하는 시대 여서 고종이 비교적 자기 권력을 행사 할 수 있었다. 홍종우는 아관파천 이후에 출세 가도를 달린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1905년 을사 조약이 맺어진 후로는 제주목사를 끝으로 행방이 묘현 하다. 외세를 경계 하라는 상소를 올렸던 그도 외세의 영향을 벗어 날 수 없었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조선이 망한 것이 아니라 부패가 망국의 원인 이었다. 부패한 나라가 하는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리사욕이기 때문이다.  

 

*KBS 한국사전 - 네가 김옥균을 쏜 이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2007.8.18 방송 참조

  위키 백과를 비롯한 여러 인터넽에 포스팅 된 정보를 망라 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No. Subject Date Author Last Update Views
Notice How to write your comments onto a webpage [2] 2016.07.06 운영자 2016.11.20 18154
Notice How to Upload Pictures in webpages 2016.07.06 운영자 2018.10.19 32295
Notice How to use Rich Text Editor [3] 2016.06.28 운영자 2018.10.19 5879
Notice How to Write a Webpage 2016.06.28 운영자 2020.12.23 43801
8661 반등 성공한 고진영, 연장 접전 끝 LPGA 통산 15승 ‘입맞춤’ [8] 2023.05.15 황규정*65 2023.05.23 54
8660 사의 찬미 [死의 讚美] [1] 2023.05.15 정관호*63 2023.05.15 94
8659 시차도 잔디도 못막은 ‘PGA 스타’ 임성재… 우리금융챔피언십 5타차 역전승 [1] 2023.05.14 황규정*65 2023.05.14 60
8658 Wind & Solar Power are just a Pipe-Dream (?) [5] 2023.05.10 운영자 2023.05.13 120
8657 Trump Finally takes A Lesson - Guilty !! [4] 2023.05.09 운영자 2023.05.10 70
8656 How British Empire did not perish. [2] 2023.05.07 온기철*71 2023.05.14 79
8655 Paul Georg von Mollendorf: 조선 중립을 주장 했던 독일인 조선 외교 세관 고문 [5] 2023.05.06 온기철*71 2023.05.15 116
8654 Metformin as a Logevity Drug? [2] 2023.05.06 운영자 2023.05.06 89
8653 John Mcleavy Brown; 조선말기 세관장, 재무 고문관 영국인 [3] 2023.05.05 온기철*71 2023.05.06 73
8652 영화 "말모이" [4] 2023.05.02 온기철*71 2023.05.03 125
8651 삼성 태일러 택사스 공장, 기회일까? 위기 일까? [3] 2023.05.01 온기철*71 2023.05.02 77
8650 지나가는 길손이여 [1] 2023.05.01 정관호*63 2023.07.31 74
8649 미국의 배반 _Washinton 공동 선언의 내막은 무엇인가? [5] 2023.04.30 운영자 2023.05.02 131
8648 Korean President speaks in U.S. Congress [3] 2023.04.27 온기철*71 2023.04.28 103
8647 김두봉; 독립운동가, 한글학자,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3] 2023.04.24 온기철*71 2023.04.25 132
8646 한국도 핵국가가 돼야 한다. [7] 2023.04.22 온기철*71 2023.04.30 83
8645 첫딸 출산 박인비 “세상 모든 엄마들 존경스러운 순간” [1] 2023.04.22 황규정*65 2023.04.22 70
8644 할미꽃 [1] 2023.04.21 정관호*63 2023.04.21 69
8643 조선인 밀정들 [1] 2023.04.20 온기철*71 2023.04.21 50
8642 수탈: 조선 왕조 vs 일제 [2] 2023.04.19 온기철*71 2023.04.19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