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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연속 #2/7)

 

이수근 탈출사건 특종

 

판문점 출입기자들 가운데 ‘동양방송’의 김집 사회부장과 ‘조선일보’의 김도형 외신부 차장은 입심이 셌다. 이들 은 말로 북한 기자들을 휘어잡는 재치와 배짱이 남달랐다. 특히 남북한 기자들의 기 싸움에서 북한 기자들을 놀 려 먹는 데는 김집 기자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김 기자는 평양 출신이었기 때문에 북한 기자들이 호기심을 갖고 대했는데, 작달막한 키에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막말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판문점 군사정전회담 때마다 김 기자는 마이크를 잡고 중계방송을 하듯 현장의 분위기를 녹화했는데, 그럴 때면 북한 기자들은 김 기자 옆에 빙 둘러서서 신기한 듯 쳐다보곤 했다. 김 기자에게는 그야말로 판문점을 장악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북한 기자들의 테러 대상이었고, 한때는 공작 대상이기도 했다. 1967년 3월22일 판문점에서 탈출에 성공해 귀순한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의 탈출사건을 특종보도한 김집 기자는 재미있는 일화를 갖고 있다.

 

그날 아침, 김 기자는 출발지인 문공부 앞뜰에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되자 쌕 버스는 판문점을 향해 떠났고, 기자들은 늘상 하던 대로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 부족한 잠을 청하고 있었다. 불광동 삼거리쯤 지났을까. 영업 택 시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쌕 버스를 따라붙었다. 가끔 지각한 기자들이 택시를 타고 달려오는 경우가 있었기 때 문에 쌕 버스는 길옆에 섰다. 오늘의 주인공은 김 기자였다. 전날 밤 얼마나 술을 퍼마셨는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쌕 버스가 판문점 뜰에 도착하자 김 기자는 아예 취재를 포기하고 자유의집 화장실 근처 외진 곳에 자리를 잡고 드러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이날 따라 제242차 군사정전회담이 질질 끌며 이어져 기자들은 무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회담 도중 유엔군 수석대표 치코렐라 소장에게 쪽지가 전달됐다. 북한의 한 기자가 남한 쪽으로 탈출의사를 보냈다는 상황 보고였다. 보고 내용을 읽은 수석대표는 계획대로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시간을 벌기 위해 회담을 끌었다.

 

유엔사측은 회담이 끝나기 전 기자들을 먼저 철수시키기로 했다. 사건의 성격으로 미루어볼때 기자들이 있으면 탈출계획에 방해가 될 수 있을뿐더러, 기자들의 안전을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쌕 버스가 판문점 뜰에 나타났다. 회담이 미처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유엔사 홍보담당관은 기자들에게 버스를 타라고 독촉했다. 회담이 끝나면 대표들이 먼저 떠난 다음 기자들이 판문점을 떠나는 보통 때와는 반대였다.

 

그때까지도 김집 기자는 화장실 근처에서 잠에 취해 있었다. 쌕 버스가 기자들을 태우고 판문점을 출발할 때는 반드시 인원수를 확인하고 떠나야 했는데, 이날은 너무 급하게 서두르다 보니 미처 머릿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철수했다.

 

기자들을 태운 쌕 버스가 에드번스 캠프까지 갔을까.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북한 경무원들이 유엔 군 수석대표의 세단차를 향해 쏘아대는 총소리였다. 특등사수인 북한의 경무원들이 쏜 총은 모두 빗나갔다. 이 수근이 탄 세단차와의 거리는 10m도 안 됐는데 말이다. 왜일까?

 

잠에 취해 있던 김집 기자가 총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전쟁이라도 터진 것일까. 정신이 없는 가운데 오랜 기자생활의 감각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때는 이미 이수근이 탄 차가 마지막 차단기를 들이받고 남쪽으로 넘 어간 후였다. 김 기자는 화약 냄새가 나는 삭막한 판문점 뜰에서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는 KATUSA 병사를 붙잡 고 사건의 내막을 꼬치꼬치 물었다. 그렇게 해서 사건의 줄거리를 어렵사리 알게 된 그는 미군 경비전화에서 육군본부 전화로, 다시 일반 전화로 연결해 ‘동양방송’ 데스크와 통화를 시작했다. 그 시간부터 이수근의 판문점 탈출사건은 방송을 통해 특급뉴스로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같은 시간, 쌕 버스를 타고 판문점에서 철수한 기자들은 회담이 끝나면 항상 거쳐 가는 에드번스 캠프 클럽에 들러 맥주와 햄버거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때 대부분의 기자들은 소형 라디오를 틀어 북한 방송을 듣는다. 판문점 출입기자들은 거의 소형 라디오를 휴대하고 다녔다. 약삭빠른 기자들이 쌕 버스가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 북한 방송에 주파수를 맞추어놓고 판문점 회담에 대한 북측 보도내용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해 특종을 한 경우가 있 었다. 그래서 그 무렵에는 버스 안에서도 온통 북한 방송을 듣느라고 법석을 떠는 경우가 많았다.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북한 방송은 조용한데 서울의 방송들이 난리를 치고 있으니. ‘동양방송’ 김집 기자의 보도 를 인용해 이수근의 판문점 탈출사건 뉴스가 특보로 나가고 있는 것 아닌가. 쌕 버스 안에 있는 기자들은 당황했다. 기자들은 버스를 돌려 다시 판문점으로 가자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끝난 뒤였다.

 

김집 기자가 술에 취해 판문점 화장실 외진 곳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사실을 판문점 출입기자들은 알 리 없었다. 기자들은 회사로 돌아와 데스크로부터 모진 호통을 받았다. “판문점에 가서 뭐했어! 어디 가서 술 쳐먹고 낮잠 자고 있었어?” 특종을 놓친 기자들은 김 기자를 빗대어 “어느 놈은 술 취해 잠자다가 특종을 했다”고 두고두고 농담했다.   

 

판문점의 남북 기자들

 

판문점은 이색지대다. 남북 기자들이 직접 몸으로 접촉하며 공작과 첩보를 수집하는 유일한 대치공간이다. 북한은 폐쇄사회이기 때문에 우리가 북한의 모든 것을 알기는 어렵다. ‘로동신문’이나 평양방송의 내용을 정보부 분석관들이 분석해 공개되는 정도만이 유일한 정보일 뿐, 북한의 정보 루트는 거의 없는 셈이다. 그래서 판문점은 첩보의 근원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 흘리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첩보였다.

 

군사정전회담이 열릴 때면 남북 기자들은 서로 파트너를 선택해 대화를 한다. 처음에는 견제와 탐색전을 벌인다. 그러나 자주 만나게 되면 처음의 긴장은 사라지고, 도깨비처럼 느껴지던 북한 기자도 동족으로 보인다. 자연 스럽게 친밀감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할 말 못할 말을 하다가 보안이 누설되는 경우가 많았다. 까딱 잘 못하면 북한 기자들의 공작에 말려 사고가 일어난다. 어수룩해 보이는 북한 기자들이 실제로는 심리 공작에 능한 경우가 많았다. 판문점에 출입하는 북한 기자들은 노동당에서 공작요원이나 심리전 요원 교육을 받은 이들로, 유일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한 보도일꾼들이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서로 감시하며 통일된 행동을 한다. 뒤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통솔자가 있다.

 

앞서 등장했던 김집 기자는 후일 북한 기자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그 때의 일이다. 북한 기자들은 김 기자를 가운데 세워놓고 공갈 협박을 했다. 그런데도 한국 기자들은 소 닭 쳐다보듯 멀건히 서 있기만 하는 것이었 다. 북한 기자 행동대원 한 사람이 김집 기자와 악수를 하는 척하다가 손을 꺾었다. 테러를 시작할 찰나였다. 이 들의 행동을 탐지한 팀장과 나는 그들 속으로 끼어들었다. 결국 가까스로 험악한 순간을 넘겼지만 아슬아슬한 위기였다. 언론사 간에 경쟁이 심하다 보니 동료의식이 없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남북한의 기자들은 상대방의 실체를 알고자 한다. 상대방의 이름, 소속 신문사, 출신성분 등에 대해 탐문한다. 남한 기자들은 이름과 소속을 거침없이 말한다. 그러나 북한 기자들은 장소마다 이름과 소속이 달라진다. 북한 기자들은 판문점에 출입하는 한국 기자들의 신상과 소속을 거의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간혹 그들의 생각에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한국 기자가 나타나면 그들은 인물 정보를 잽싸게, 그러나 은근히 물어온 다.

 

“동무, 저기 하늘색 잠바를 입구 있는 동무가 어디메 소속이가?”

“저 친구는 중앙정보부 친구야.”

 

자랑이나 하듯 술술 이야기해버리는 한국 기자들이 간혹 있다. 이렇게 되면 몇 안 되는 판문점 출입 정보요원의 신분이 노출되어 입지가 곤란해진다. 정보요원의 생명이 바로 비노출 아니겠는가. 이문동 사무실에서 이러한 문제를 놓고 많은 논의를 했다. 북한 기자들이 남한 기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1970년 4월. 며칠 전 내린 비로 초목에 물이 한껏 올랐다. 이문동 정보부 청사 안에는 철쭉꽃과 개나리가 활짝 피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판문점에서는 오늘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군사정전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정보의 눈을 매섭게 굴렸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판문점에서 내 자리가 굳어가던 시점이 었다.

 

남북을 오간 사다트 여사

 

항상 그렇듯 그날도 남북 기자들은 판문점 뜰에서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이들의 기 싸움에서 한발 벗어나 좀 떨어진 벤치에 앉아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마리 비둘기가 반원을 그리며 자유의 집에서 북쪽 판문각으로 비상했다. 내 눈길이 비둘기의 비상을 좇다 북쪽 판문각에서 멈췄다. 봄날같이 화사한 여인이 눈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하늘색 원피스 차림의 북한 여인은 단아해 보였다. 아름다운 여인이 판문점에 나타나기란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녀 옆에는 덩치가 엄청나게 큰 외국 여자가 서 있었다. 정보요원의 육감으로 보고거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들은 천천히 판문각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제각기 떠들던 기자들이 그제야 그녀들을 발견하고 우르르 몰려 갔다. 취재원이라는 판단이 떨어지면 곧바로 취재경쟁에 들어가는 것은 기자들의 반사적인 생리인 모양이었다. 나는 뒤늦게 천천히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기자들에 의해 그들의 신상이 어느 정도 파악됐다. 큰 체구의 외국 여 인은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의 여동생이었다. 거물이 판문점에 나타난 것이다. 옆에 선 청아한 북한 여인은 김일성대학 역사학과 교수라고 했다. 취재를 끝낸 기자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난 후 나는 두 여인에게 접근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북한 여인에게 정중하게 인사의 말을 건넸다.

“혹시 어느 나라에서 오신 분인지?”

나는 다시 확인하듯 외국 여인에 대해 물었다.

“이분은 이집트에서 오신 사다트 여사입니다.”

“형제 공화국 나라의 하늘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나는 수만리 떨어진 이집트에서 왔습니다. 당신들은 같은 동포이면서 왜 이 짧은 거리를 오가지 못합니까?”

 

사다트 여사의 말이었다. 북측 관계자들이 항상 늘어놓는 선전의 말을 앵무새 같이 되뇌는 듯한 느낌이다.

“혹시 한국에서 초청하면 오실 수 있습니까?”

나는 사다트 여사에게 한국 초청 의사를 던졌다. 북한 여인은 사다트 여사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나에게 말 했다.

“초청만 하면 언제든 환영이라고 합니다.”

초청을 거부하리라 생각하고 던진 말인데 초청만 해주면 환영한다는 뜻밖의 반응이 나오자, 나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사다트 여사에게 S신문사 문화부장 직함으로 된 명함을 건넸고, 사다트 여사는 이집트 영화예술잡지 편집장이라고 적힌 명함을 내게 주었다. 사다트 여사의 남편이 이집트 신문사의 사장이라고도 했다.

 

당시 이집트와 우리나라는 관계가 소원한 편이었다. 한국은 1962년 5월 카이로에 총영사관을 개설했으나, 중동 전쟁 당시 이집트가 북한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은 이래 1970년 중반까지 이집트는 반한(反韓)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사다트 여사는 김일성 주체사상 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북한에 왔다고 했다. 그리고 청산리 협동농장이며 금강산을 관광하고 판문점에 들른 것이다. 이번 기회에 영향력이 있는 사다트 대통령의 여동생을 초청해 남북한을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할 기회를 주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문동 사무실에 돌아온 나는 판문점 동향보고서를 쓰고 사다트 여사를 한국으로 초청하자는 내용의 공작계획서를 작성해 팀장에게 제출했다. 사다트 여사를 한국에 초청해 비약적인 발전상을 보여줌으로써 이집트의 반한 정책 기조를 친한(親韓)정책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로 삼자는 것이 공작의 목적이었다.

 

또 다른 목적도 있었다. 사다트 여사의 남편이 이집트 신문사의 사장이라니 잘만 하면 이집트 신문에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부흥과 새마을사업 같은 치적을 대대적으로 알릴 수도 있을 터였다. 이집트 신문은 온통 김일성에 대한 홍보 기사로 도배되던 무렵이니 욕심이 날 만도 했다.

 

상부에서 공작 계획서를 결재했다. 이제부터 나는 북한을 통해 판문점에 나타난 사다트 여사를 친한인사로 바꾸 어놓아야 했다.

 

1970년 8월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무렵, 우여곡절 끝에 사다트 여사와 수행원 두 명이 우리나라에 오게 됐 다. 한국예술협회에서 이집트 예술영화 잡지사 대표를 초청하는 형식이었다. 나는 몇 명의 예술인을 대동하고 김포공항으로 사다트 여사를 마중하러 나갔다. 마침 공항을 출입하는 기자들이 사다트 여사의 방한을 알고 취재 하느라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어쩌면 사다트 여사 일행을 환영한다는 표시로는 잘된 일이었다.

 

꽃다발을 가슴에 안기고 나는 여사를 차에 태워 김포가도를 달리며 워커힐로 향했다. 사다트 여사는 환대에 대한 만족감에 연상 “원더풀”을 외치며 물결치듯 출렁이며 익어가는 김포평야의 벼를 감상하고 있었다. 아마도 북한의 논이나 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일정은 산업시찰을 중심으로 되도록 정치적인 색깔을 뺐다. 저녁에 남는 시간을 이용해 연예인과 함께하는 파티를 주선했다. 최희준씨 댁에서 가수분들이 마련한 조촐한 파티는 사다트 여사를 감격하게 했다. 물론 최희준씨에게는 사전에 협조를 받은 사업이었다.

 

호스트인 최희준씨를 비롯해 조영남, 김추자 등 한국의 베스트 가수들이 즉흥적으로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살 려 나가는 모습이 대단했다. 돈이나 잡아먹는 형식적인 환영파티보다 효과가 월등했다. 조영남씨는 피아노를 치며 재치 있는 만담과 노래를 이어갔다. 김추자씨도 히트했던 노래를 불러 박수를 받았다. 가수들은 사다트 여사 에게도 노래를 시켰다. 사다트 여사와 수행원 두 명이 이집트 민요를 불렀다. 조영남씨는 이집트의 민요를 단 한 번 듣고는 즉석에서 피아노를 치며 반주를 했다. 그러자 가수들도 다 같이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아마도 사다 트 여사에게 이날의 파티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경험이었을 것이다.

 

서울 문래동의 가발 공장과 태평양화장품 공장에 갔을 때는 여사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게 느껴졌다. 가발 공장에서 회사 홍보팀이 소개하는 가발을 보고 여사는 꽤 관심을 갖는 듯했다. 이미 여사는 한국의 가발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회사에서 가발을 선사하고자 한다고 말하자 여사의 얼굴에 스친 기쁨의 표정이 란…. 진열대에서 고르기 시작한 가발이 듬뿍듬뿍 여사의 가슴에 쌓였다. 그리고 나를 쳐다본다, 더 골라도 되느 냐는 표정으로. 나는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태평양화장품 공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화장품에 대한 욕심이란 여성에게는 본능에 가까운 것인 모양이다. 여사는 여러 박스의 화장품 세트를 선물로 받아 숙소로 돌아왔다.

 

마지막 날에는 신영균씨 댁에서 영화인 주최의 파티를 주선했다. 현악4중주단의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많은 영화인이 어울렸다. 파티는 우아하고 고상했지만 최희준씨 댁에서 만큼 웃음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바쁜 일정을 끝내고 사다트 여사를 보내는 날이 왔다. 물론 그녀의 손에는 선물이 한보따리 들려 있었다. 공항에서 사다트 여사는 이집트에 한번 오라고 당부하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진실된 정성이 통했나 보다. 흔히 공작이라는 말에 음습함을 느끼기 십상이지만, 진정한 공작의 성공은 인간적으로 얼마나 진실했는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다트 여사를 통해 새삼 느낀 대목이었다.   

 

 (계속) 남북 이산가족찾기 회담 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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