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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연속 #5/7)

 

7·4 남북공동성명


먼저 정홍진 국장이 1972년 3월28일부터 31일까지 평양을 다녀왔다. 죽을 각오를 한 출장길이었다. 그 다음에 는 김덕현 노동당 책임지도원이 4월19일부터 21일까지 서울을 다녀갔다. 역시 죽을 각오를 하고 왔을 것이다.
 

이 무렵 어느 날, 나는 동료들과 대포 한잔을 하러 광화문 근처로 나간 일이 있었다. 유명한 막걸리 가게였는데, 술집 안에 초가집을 지어놓고 그 속에서 막걸리 동이를 갖다놓아 쪽박으로 술을 퍼마시는 집이었다. 마치 농촌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분위기였다.
 

동료 몇 명과 술집 안으로 성큼 들어서는데, 손님이 꽉 차 소음이 요란했다. 앉을 자리가 없어 두리번거리며 여 기저기 기웃댔다. 그런데 한 초가집에서 낯익은 사람을 발견했다. ‘누구였더라? 어디선가 많이 본 사람인데….’ 기억을 더듬었다. ‘아차!’ 나는 그곳에서 북한의 실세 김덕현을 본 것이다.
 

어떻게 서울 한복판에 앉아 있는 것일까, 간첩으로 남파되어 내려왔나, 김덕현이 혼자 서울에 들어올 수 있을까. 나는 5~6명의 동행자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정홍진 국장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면 그렇지, 정홍진 국장이 나에게 눈짓으로 사인을 보낸다. 빨리 나가라는 뜻이다. 나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동료들을 몰 고 밖으로 나왔다.
 

이들이 서울과 평양을 사전답사한 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박성철 부수상은 서울에 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서울과 평양에서 국가원수를 만나는 장면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1971년 11월20일부터 이듬해 7월1일까지 8개월간 판문점에서 24차례의 비접촉을 가진 끝에, ‘자주·평화·민 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을 골간으로 하는 남북통일의 헌장 7·4 공동성명이 탄생했다. 이후락 부장은 이문동 정보부 강당에서, 김영주 부장은 평양에서 각기 같은 내용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이 발표된 다 음날 문공부가 주관한 각 부처 공보관 회의에서 북괴를 북한으로 호칭하기로 결정했고, 이어서 서울-평양 간 직 통전화가 가설됐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금딱지 오메가 시계
 

다시 적십자회담 얘기로 돌아가보자. 16차 예비회담이 열린 1972년 1월28일에는 남쪽 기자들을 놀라게 한 사건 이 벌어졌다. 80명이나 되는 북한 보도일꾼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금딱지 오메가 시계를 차고 판문점에 나타난 것이다. 시골 중학생이 처음 손목에 시계를 차고 연신 손을 들어 보이듯, 북한 보도일꾼들도 차고 나온 시계를 좀 봐달라는 눈치여서 남쪽의 기자들이 말을 걸었다.
 

“당신들 무슨 일 있소? 갑자기 번쩍거리는 시계는 뭐요?”
“이거, 하사품이요.”
“하사품이라니? 누가 줬는데?”
“하사품이면 하사품인 줄 알면 됐지, 꼬치꼬치 묻기는!”
“당신네 사회는 오메가 시계 배급 주는 임금님이 계신가?”
“동무는 내가 작년부터 차고 있는 걸 못 봤구만.”
“배급받았다는 말은 듣기 거북한가 보지, 금방 하사품이라더니!”
“왜? 배 아프오?”
“당신들의 손목에 오메가 시계가 걸렸으니 본회담 준비가 잘될 것 같군 그래.”

 

갓 쓰고 자전거 타던 개화 초기의 꼴불견을 판문점에서 보는 것 같아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최수만도 금딱지 오메가 시계를 차고 내게 다가왔다.
“김 기자, 이런 시계 남한에도 있나?”
“얼마든지 있지. 하나 갖다줘?”
“김 기자, 답장 안 쓸 거야?”
“무슨 답장?”
“어머니와 누나가 김 기자 답장을 얼마나 기다리는 줄 알아?”

 

어머니의 편지로 인해 내 가슴에는 최수만에 대한 불쾌한 감정이 응어리지고 있었다. 이들은 내게 낚시질을 하 고 있다. 낚싯밥을 던져놓고 입질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비록 어머니가 아니라도 좋다, 누나가 아니라도 좋다, 이들이 거짓으로 꾸민 조작이라도 좋다, 어머니와 누나가 살아만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좋다. 나는 메모지에 어머니한테 보내는 편지를 즉석에서 썼다
 

‘어머니! 지금도 어머니의 숨결이 내 귀 밑에서 들려오는 듯합니다. 잔주름으로 꽉찬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봅니 다. 그런데 그렇게 다정했던 어머니의 모습 같지가 않으니 웬일입니까? 자식은 통곡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보고 싶습니다.’

편지를 접고 또 접어 최수만에게 주었다. 나는 가슴속 깊은 곳 에서 응어리가 터져 분화구로 치솟아오름을 느꼈다. 마음이 후 련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김 기자, 고향에 가서 어머니하고 잘 살아보지 않겠어? 간단 해. 나하고 슬쩍 판문각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우리 는 문을 열어놓고 있어. 그러면 동무는 최초로 남북 이산가족 찾기 영웅이 되는 거야.”
 

이들은 나를 북으로 끌고 가려고 공작을 하고 있었다. 최수만이 나를 낚싯줄에 꿰어 당기고 있었다.
최수만이 서울 B고보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근거로 인적사항을 수사국에 의뢰한 것이 회신되어 왔다. 학적부에 기록된 최수만 의 주소는 서울 왕십리로 돼 있었다. 주소를 연결해서 친척을 수배했다. 어렵게 최수만의 삼촌 최봉오를 찾아냈다. 어느 주물 공장의 기술자로 일하고 있었다. 사촌들도 있었다. 최수만의 삼 촌을 통해 광복 전후 최수만의 집안을 알아보니 그의 가족은 6·25전쟁 전에 월북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구한말 왕십리에서 알아주는 한의사였다고 했 다. 아버지 최봉기는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공산주의 청년운동 을 하며 할아버지 속을 꽤나 썩였고 할아버지는 그 때문에 일찍 세상을 떴다며, 삼촌은 자신의 형을 원망했다. 광복 후에는 남로당원으로 서울시 당위원장이던 이승엽과 함께 활동했다고 한다. 광복 수년 후 최수만의 가족은 월북했고 전쟁 이후로는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삼촌도 형 때문 에 연좌제의 그물에 걸려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었다. 삼촌은 어렴풋이 최수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체격은 작았 지만 다부지고 머리가 영리했다”는 것이었다.

요해 해설요원


예비회담이 시작될 무렵부터 한국 적십자사측은 꽤나 애를 먹었다. 회담이 두서가 없어서였다. 그래서 한적은 “가장 절박한 사업부터 가장 현실적인 사업을 순차에 따라 해결해 나가자”고 북측에 호소했다. 그러나 북측은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과 친척의 주소 및 생사 확인, 통보는 적십자사가 굳이 개입할 필요 없이 당사자들이 상대 측 지역에 가서 자유롭게 다니면서 찾자”고 주장했다. 가족과 친척을 만나는데 무슨 복잡한 수속이나 절차가 필 요하냐는 억지였다.
 

북측의 한결 같은 주장은 쌍방이 상대측 지역의 리(里) 또는 동(洞) 단위로 1명씩 소위 ‘적십자 요해 해설요원(了 解 解說要員)’을 파견해, 흩어진 가족 친척들의 상태를 요해하며 해설과 불신임을 제거하자는 내용이었다. 상호 신뢰할 만한 요원을 파견하자는 주장이었다. 내무부에 행정적으로 기록된 리와 동의 숫자만 3만5997곳이었다. 다시 말해 북한의 요해 해설요원 3만6000명을 한국에 내려 보내겠다는 말이다. 적십자 정신에 어긋남은 물론이 거니와 이렇듯 엄청난 숫자의 간첩을 남파하겠다는 북한의 속셈이 보이는 듯했다.
 

북한 기자들은 남측 기자들에게 그들이 주장하는 요해 해설요원의 타당성을 강조했다. 최수만도 나에게 마구잡 이로 요해 해설요원을 한국에 내려 보내야 한다고 열을 냈다. 북한 기자들은 당에서 요해 해설요원에 대한 교육 을 받고 나온 것 같았다.
 

“김 기자, 왜 남조선이 적십자사 요해 해설요원 파견을 반대하는가?”
“그런데 말이야 최 동무, 요해 해설요원이란 뭐 하는 자들이야?”
“이산가족과 친척을 찾아주는 동무를 말하는 거지.”
“그거야 남북 적십자사가 주선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리고 흩어진 가족의 자유의사에 따라 재결합하면 되는 것 이지, 요해 해설요원은 또 뭐야?”
“김 동무는 요해 해설요원에 대해 이해를 잘 못하는구만.”
“왜 못해, 요해 해설요원은 결국 간첩을 내려 보내겠다는 거 아니야?”
“김 기자는 항상 반동적인 언동을 하느만, 혼 좀 나야겠는데?”
“허튼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서 3만6000명이나 되는 간첩을 한국으로 내려 보내 공산혁명을 하겠다는 거야?”

 

최수만은 논쟁을 그만하자고 자르더니, 슬그머니 누나가 보낸 편지라며 봉투를 하나 건넨다.
“김 동무 잘 생각하라우, 김 동무에게는 지금이 영웅이 될 기회야!”

 

꼭꼭 눌러 꽤나 정성스럽게 쓴 누나의 편지였다. 왜 너는 그렇게 무심하고 성의가 없느냐며 나를 나무랐다. 얼마 나 고생이 심하면 편지를 쓸 기회도 없이 날림으로 갈겨 써 보냈느냐고 힐난했다. 그리고 당장 평양에 와서 어머 니와 같이 살자고 했다.
나는 싸늘한 피가 솟구침을 느꼈다. 정말 누나가 보낸 편지일까.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래, 살아 있어 만 주라, 누나.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최 동무, 하나 묻자. 정말 내 어머니가 맞아?”
“무슨 말이야? 동무는 말을 못 믿는 병이 걸렸군.”
“병이야 동무가 걸렸지. 이건 내가 생각하는 어머니, 누나가 아니야. 너희들이 조작한 인물이야.”
“김 기자는 암만 해두 혼 좀 나야겠군, 부르주아 물이 들어두 무섭게 들었어.”

나는 흥분했고, 최수만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서로 위협의 눈빛이 작렬 했다.
“그런데 말이야, 최 동무 고향이 서울이더군, 광복 후 월북했고.”
“월북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곳으로 간 것이지.”
“내가 알기로는 월북한 사람들은 다 숙청당했다고 하던데?”
“그거야 당성이 부족해서 그렇티.”
“최 동무 삼촌 최봉오라고 있지? 내가 사진을 가지고 왔지. 자 이거.”

 

최수만의 얼굴은 최봉오라는 말에 깜짝 놀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변했다.

최수만은 아무 말 없이 사진을 받 았다. 그리고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계속) 본회담 의제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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