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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帝國[대한제국: Korean Empire]

 

대한제국은 우리학교 국사시간에 나왔겠다고 나는 믿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의 중학교 교육은 참담할 지경이었다. 1950년 중1 일학기가 끝나기 전에 육이오 동란이 일어났고, 9.28 서울수복 이후에 임시로 교주댁에서 공부를 하다가 중공군 개입으로 무기한 휴교를 한게 같은 해 10월경이었고, 다음해 1951년 1월 4일에 모든 서울시민은 보행으로 남행하였고, 결국 여름에 겨우 부산에 도착한 후 9월중에 피란학교에 들어갈 수있었다.

그때 2학년 과목은 영어, 수학, 국어, 역사등이었다. 역사시간에 국사와 서양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국사에서 삼국시대, 고려, 조선, 일제 등을 배웠지만, 여기 제목인 대한제국은 들은 기억에 없다.

아마 어머니로부터, 이조말에 뜻있는 분들이 고종에게 설득하여서 우리나라도 서양문명국가처럼 현대식 정부를 세우자고 하여서 결국 대한제국이 탄생하였지만 결국 일본의 강요로 얼마 안되어서 나라는 일한합병으로 끝났다. 나의 외조부께서 이조말에 참판벼슬을 하셨고 대원군과 고종을 받들었기에,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으셨다.

현재 세계의 제국역사를 뒤지다가 우연히 대한제국 생각이 들어서 나무위키에서 정보를 찾아 정리된 글을 올리게 되었다. 또 한가지 문제점은 우리끼리나 대한제국 이야기를 주고 받지, 이 세상에서 누가 대한제국을 알아줄건가? 하는 우려가 생겼다. 그리하여 중국 백도백과와 유기백과에서 그리고 영문 Wikipedia에서 대한제국과 Korean Empire에서 찾아 내었다. 그것은 나의 뜻밖의 소득이었다. 우선 국제적으로 이 초라하고 처량한 제국의 이름이 올렸음이 고마운 일이다. 그럼 여기서 시작하겠다.

 

I. 개요[槪要]

 

대한제국[大韓帝國,1897年10月12日-1910年8月29日]은 조선왕조 말기 군왕 고종[高宗]이 건립한 군주입헌국가[君主立憲国家]라고 칭하였다. 국토[国土]와 왕조는 전왕조인 이씨왕조와 같았고, 국도[国都]도 같은 한성[漢城]이었다. 넓은 의미로 조선왕조역사의 (일)부분[朝鲜王朝历史部分]이었고, 오로지 국호[國號]가 조선국에서 대한제국이었고, 여기 한[韓]이란 글자는 고대삼한[古時三韓]에서 나왔다.

1897년 아관파천[俄馆播迁]했던 고종[高宗]이 덕수궁으로 돌아와서 칭제[稱帝: proclaim oneself emperor]하였다. 대한제국은 양대십사년[兩代十四年]을 지내고 1819년 8월에 일본의 병탄[併吞; Annex]을 만나 결국 멸망 하였다. 제이차대전[ 第二次大戰]종말이후 일본이 투항한 후 조선반도는 분열이 되었으니, 대한제국은 지금까지 실제로 반도전체를 다스렸던 최후의 주권국가였다. “슬프다. 이제 대한민국은 국토의 반을 잃어버렸으니!”

 

背景[배경]

 

甲午戰爭與乙未事變[갑오전쟁과 을미사변]

1895년 7월6일 민비[閔妃]는 미국고문[美國顧問 李仙得 Li Xiande]건의하에 박영효[朴泳孝]의 친일내각[親日內閣]을 전복하고, 이범진, 이완용, 윤치호[李范晉、李完用、尹致昊]로 친아내각[親俄內閣]의 중추를 만들었다. 일본은 민비가 조선에 대한 이익에 위협이 됨을 의식한 후 신속하게 주조일본공사 정상형[日本駐朝公使井上馨가오루 이노우에]을 군사배경을 가진 삼보오루[三浦梧樓; 미우라우울로우]로 바꾸었다. 10월 8일 한 집단의 일본병사가 경복궁을 강제로 침입하여 민비를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웠으니,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抗日義兵與俄館播遷[항일의병과 아관파천]

1895년말 을미사변과 단발령[乙未事變和斷髮令]이 도화가 되어 조선은 대규모항일운동을 폭발시켰다. 의병운동은 「尊王攘夷恢復國權; 군왕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를 구호로 하였고, 「국권회복」의 사상을 조선유생이 농민의거로 영도하였다. 의병부대는 충주, 진주를 점령하고 대구, 원산, 부산과 수도한성[大邱、元山、釜山乃至首都漢城等]까지 위협하였다.

1896년 1월9일, 아주조선공사 Weber[俄駐朝鮮公使韋貝] 는 퇴임[退任] 한 후, 이범진[李範晉]을 통하여 고종에게 고하기를, “대원군이 친일파와 함께 일본인과 연합하여 국왕을 폐립하려고 하니, 고종께서 아국공사관[俄國公使館]으로 오십시오.”하였다. 2월10일 아국공사는 공사관방어[公使館防禦]를 강화하여, 인천항에 배치한 120명의 수병과 대포를 한성으로 옮기고 다음날 고종은 세자와 함께 한밤중에 비밀리에 아국주조선공사관[俄國駐朝鮮公使館]으로 도주하였으니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한다.

고종은 아국공사관에 도착한 후 즉시 성명을 발표하였다. 「모든 반역도들이 날뛰고 횡포를 자행하니, 이 모두 그들의 죄이며 사람마다 잘 알다시피, 최근 공표된 법령은 모두 나의 뜻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리고 영을 내려 친일내각을 해산하고 친일대신을 체포하였다. 친아파는 차후 윤용선[尹容善]이 총리대신이 되어 친아내각을 건립하고, 신내각은 관병[官兵]을 불러 의병을 진압하고, 조세를 면제하고, 단발령[斷髮令]에 대하여 명령에 따르라고 하였다.

 

帝國成立[제국성립]

1897년 고종은 독립협회[獨立協會]로부터 조선국내외에서 받은 정치압력으로, 아국주조선공사관으로부터 덕수궁[德壽宮]으로 돌아왔다. 독립실현을 한발자국 나가려고, 신하들은 떠들석하게 고종에게 중국 일본과 같은 군주제(君主制)를 건립하라고 상주하였다. 신하들이 여러차례 건의하여서, 고종은 최종으로 문무대신의 건의를 접수하였다.

1897년 10월 12일 새벽2시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고 황제로 즉위[卽位]하였다. 그는 황금색 자리에 앉고, 새로만든 대한국쇄[大韓國璽; The New Korean Seal]을 받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다음날 고종은 경운궁[慶運宮]으로 가서 정오 12시에 태극전[太極殿]에 가서 백관조하의식[百官朝賀儀式]을 거행하였고, 왕세자를 황태자[皇太子]로, 민비를 추봉[追封; 사후에 봉하다]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일컬었다. 저녁때 한성에서 각집마다 등롱[燈籠: Lantern]을 걸어서, 밝기가 대낮 같앴고, 집집마다 태극국기를 높이 달아서, 백성의 애국심을 널리 알리었다.

일본공사 가등증웅[加藤增雄: 마사오가또], 미국공사 안련[安連: Anlian], 아국공사 사패야[士貝耶: Beyer], 그외에 법국, 영국, 덕국등의 사절 축하를 받았다. 황제를 포고하는 규격은 대명회전 권45[《大明會典》卷四十五所錄之]에 고좡제등극의[《高皇帝登極儀》]기록에 의거하였다. 대한제국 탄생 과정은 대례의궤《大禮儀軌》책에 편집되어있다.

1897년 10월 14일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改國號「大韓帝國」]으로 바꾸었고, 천하에 대사[大赦: 큰 사면]를 시행하였다. 11월 20일 독립협회로부터 조선독립상징건물 독립문[獨立門]을 정식 완공하였다.

 

大韓帝國國歌[대한제국국가]

 

근대 한국어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사

셩슈무강하사 하이옥듀를 산갓치 ㅂ사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ㅅ들치사

오쳔만셰에 복녹이 일신케 하소셔

 

현대 한국어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시고

환영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改革與變革[개혁과 변혁]

 

大韓國國制[대한국국제: National System of Korean Empire]

1899년 제정된 헌법으로 《대한국국제》는 대한제국황제에게 가장 높은 지위와 무상의 권력을 부여하고, 이리하여 대한제국명의상 군주입헌제[君主立憲制]를 실행하기로 되었지만, 실제상 군주전제국가[君主專制國家]였다.

 

光武改革[광무개혁]

개혁기간 서방관복이 소개되었다. 대한제국황제는 보통형식의 황실복장을 입었고, 외교인원은 서방제복을 입었다. 1900년 조선관원 모두 서양식 복장을 입었다. 몇년후 조선군경은 서방제복을 입었다. 그러나 원래 복장은 없애지 않았다.

1897년 광무정부에서 토지측량계획을 실시하여 조선토지소유권제도를 개혁하였다. 서방적방법을 사용하기위하여 광무정부는 미국측량인원을 고용하였다. 정부는 이 결과에 근거하여 토지소유권을 분배하고, 아울러 징세를 진행하고, 동시에 금융체제개혁을 수행한다. 그러나 조선반도의 2/3토지측량을 한 후 1904년에서 05년까지 일아전쟁으로 중단되었다.

성시[城市: City]에서는 광무정부는 기초건설을 진행하였다. 1898년 고종은 미국상인합자 한성전력공사와건립[美國商人合資的漢城電力公司]을 비준하였고, 전기와 유궤전차계통[電和有軌電車(Tram)系統]을 함께 건설 하였다. 당시에 한성광천수공사[漢城礦泉水公司]는 미국상인이 참여하였다. 1902년 조선반도에 전화가 제6년째 들어왔고, 첫번째 장거리전화선이 정식으로 설치되었다.

광무정부는 공업화조치[工業化措置]를 전개하고 고무하였고, 과학기술학교 건립을 지지하였다. 따라서 전통방직공업을 현대화하였고, 공업기술혁신은 조선반도에서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 대한제국은 조선반도에서 최초로 전리법, 외관설계법과 상표법[《專利法》、《外觀設計法》和《商標法》: Patent Law, Design Law and Trademark Law]을 반포[頒布] 하였다.

 

愛國啟蒙運動[애국계몽운동]

1896년 4월 7일 조선지식인 서재필[徐載弼]은 서방민주사상을 전파하고, 민족독립을 장려하여, 조선역사상 처음으로 국문민영신문,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시하였고, 같은 해 7월 2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성립하였다. 1898년 12월, 독립협회는 무함(誣陷)을 받아서 고종이 금지하였다. 1906년 이준[李儁]은 입헌민주적연구회[立憲民主的研究會]를 선양하여 후에 일본통감부[日本統監府]로부터 해산을 당했다.

그후 장지연[張志淵]등은 대한자강회[大韓自強會]를 조직하고,1909년 2월 대한협회지부[大韓協會分部]는 이미 60개를 초과하고 회원은 수만명이었다. 이 시기에 상관정치단체[相關政治團體; Related Political Groups]를 설립하여 1907년 4월에 이미 양기택[梁起鐸]등이 신민회[新民會]등을 조직하였다.

이 시기에 문화계몽학술단체[文化啟蒙學術團體]는 박은식[朴殷植]등이 성립한 서우학회[西友學會(1906年10月)]와 이동휘[李東輝]등이 성립한 한우학회 [漢北學會(1906年11月)]였다. 1908년 1월 양개학회가 합병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그후 호남, 관동학회[湖南、關東學會]등 학술단체가 잇따라 성립되었다. 이러한 학술단체는 학교설립을 통하여 민중에게 조선역사와 지리를 가르치고, 민중의 구국사상을 배양하였다. 이외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한문[韓文 즉 한글]을 사용하여 국문운동[國文運動]을 제창하였다. 국문정리, 대한문전, 국어문법[《國文整理》、《大韓文典》、《國語文法》]등 한어저작[韓語著作]이 계속하여 출판되었다.

 

日俄戰爭與乙巳條約[일아전쟁과 을사조약[]

1905년 7월; 일미비밀조약[日美秘密條約: Japan and the United States sign Katsura-Taft secret treaty]으로 일본은, 미국이 비율빈을 그의 세력범위로 인정하는 교환조건으로, 한국에 일본의 특권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비밀조[二次英日同盟簽訂]으로 영국은 일본에 대한에 대한 특권을 체결하였고, 9월에는 아라사제국은 일본의 대한에 대한 특권에 합의한다는 Portsmouth 평화조약에 서명하였다.

1905년 가을 고종은 3명의 외교밀사를 미국국무원에 파견하여 그 주장을 규탄하고 국가주권의 보호를 찾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 나사복정부 [Roosevelt Administration]는 이미 통지를 받고 있었고, 대한사절을 거절을 당하였다. 1905년 10월27일 일본은 한국보호권각의결정 《關於韓國保護權閣議決定》을 통과하였다.

이등박문은 고종에게 이 조목[條款: Terms]를 접수하라고 권하였지만, 고종은 거절하였다. 그후 이등은 또 다시 한국대신을 유인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거듭 거절당하였다. 11월 17일 이등은 수만일군[數萬日軍]을 한성에 진입하여 계엄[戒嚴; Martial Law]를 명령하고 대한황궁은 일군의 포위와 강탈을 하였다. 이 무력위협하에 이등은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하여금 고종을 핍박하여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서명케 하였다.

협약[協約]에 의하면, 한국은 일본보호국[日本保護國]이 된다. 이 소식이 나간 후 한국 각층의 국민은 일제히 요구하기를, “보호조약 폐지하라, 왜구를 몰아내자. 오적을 죽여 없애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은 이 서명의 진실을 세계에 알렸다. 보호협약공포일자[保護協約公布日子]를 이르되, “한국전국민의 애도의 날[韓國的全民哀悼之日]”이라 하였다. 주필장지연[主筆張志淵]은 논설제목에서 쓰기를, “오늘 날 목놓아 통곡하리로다.” 「是日也放聲大哭」的社論. 일주 후에 미국은 주한대사를 철수시켰다.

 

反日義兵運動再起[반일의병운동재기]

일본이 불평등 을사조약을 강박한 후 한국반일의병운동이 재기하였다. 1906년 3월 참판 민종식[閔宗植]은 500명 의병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성을 점령하여 조선반도 각지에서 모두 향응[響應]하였다. 동년 6월 일찍이 찬의에 임명된 호조참판등 고관의 유생 최익현[崔益鉉]은 전라북도순창에서 무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영향이 비교적 큰 의병은 경상도영해지구 평민 신돌석[申乭石]의 의병과 경북 동대산 의병 정용기[鄭鏞基]등이었다. 1906년 하반년부터 1907년 하반년까지 강원, 경기, 충청, 전라, 경상등에서 의병대오가 진일보 장대 하였고, 심지어 한성부근과 연해의 영종도에서 반항봉화가 불을 올렸다. 조선반도 북부의 황해도, 평안남도와 함경남도에서 의병운동이 신속하게 확장되었다. 각지의병은 일본헌병주둔지를 습격하였고, 일본군과 친일분자를 사살하였다. 이와동시 조선각지의 농민과 공인(工人)도 뒤섞여 폭동 혹은 파업하여 의병과 더불어 서로 돕고 호응하였다.

1907년7월19일, 일본이 고종을 핍박하여 퇴위후, 한국각지상인들이 파시(罷市)하고 학생은 파과(罷課)하고, 군중은 집회와 시위하고, 최후에 폭동으로 발전하였다. 8웗1일 일본은 한국군대를 강제해산시켰다. 경성시위제일단제일영영장박성환[京城侍衛第一團第一營營長朴星煥]은 비분자살하였고, 그후 해당영[과 제2영[該營和第二營] 전체사병은 무장폭동을 일으켰고, 일군대위 가지하라[日軍大尉梶原)와 수십명의 일군을 죽였다.

한성군인의 폭동은 조선각지의 연쇄반응을 이르켰다. 원주, 홍주, 강화 등지 에서 관군이 어지러이 의병을 일으켰다. 12월 반일의병은 이인영[李麟榮]을 대장으로 전국적무장역량을 형성하였고, 한성에 대하여 진격을 발기 하였지만, 일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서, 중상을 당하였다. 1908-1909년에 의병운동은 조선반도에서 고조에 이르렀고, 의병은 일군시설을 때려부수고, 친일파를 제거하고, 많은 지구에서 일본식민통치기구는 탄탄[癱瘓: 반신불수]에 빠졌다. 일본관방통계에 의하면 1907-1911년간 조선반도에서 의병작전숫자는 143600여인이며 작전은 2900건 이상이었다.

 

日韓合併[일한합병]

1909년10월26일 반일의병참모중장 안중근은 합이빈화차점[哈爾濱火站: Harbin Fire Station]에서 이등박문[伊藤博文; Ito Hirobumi]을 격폐[擊斃 즉 擊殺]하였다. 동년12월22일 내각총리 대신 이완용은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귀한 많은 의사의 의거도 대한제국의 멸망운명을 구하지는 못했다. 1920년 8월 22일 일본과 경술국적[庚戌國賊]의 두목,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일한합병조약《日韓合併條約》을 서명하여 조선반도는 일본의 탄병[吞併]을 당하였다!

 

年表[연표]

 

1897年

8月,高宗改元光武[고종개원광무]

10月,高宗稱帝登極,改國名朝鮮為大韓帝國。[고종칭제등극, 개국명조선위대한제국]

1898年

2月 大院君逝世[대원군서세]

9月 暗殺高宗未遂[암살고종미수]

12月 獨立協會領導之一李承晚遭捕[독립협회영도지-이승만체 포]

1899年

6月 大韓國國制制定[대한국국제제정](8月發布)

11月 韓清通商條約(韓清修好條規)締結[한청통상조약(한청수호조규) 체결]

1900年

軍人勅諭制定。[군인칙유제정: Edict]]

1904年

李承晩被釋放[이승만석방]

2月 《日韓議定書》訂立。[일한협의서정립]

8月 《第一次日韓協約》。[제1차일한협의]

1905年

11月18日 - 《第二次日韓協約》(《乙巳條約》)[재2차일한협약. 을사조약

1906年

日本設置韓國統監府。[일본설치한국통감부]

1907年

6月 海牙密使事件[해아밀사사건]

7月 高宗退位,純宗即位[고종퇴위, 순종즉위]

同月 《第三次日韓協約》。大韓帝國軍隊解散[제3차일한협약. 대한제국군대해산]

1909年

安重根暗殺伊藤博文[안중근암살이등박문]

1910年

8月22日 - 《日韓合併條約》,日本吞併[일한합병조약. 일본탄병]

8月29日 - 開設朝鮮總督府。[개설조선총독부]

 

조선과 대한제국의 연속성

 

대한제국 시대 당대에는 공문서는 물론 모든 신문·잡지를 비롯한 모든 사적인 출판물조차 국호를 엄격히 지켜 '대한국', '대한', '한국'으로 사용하였다. 황제가 바꾸어 공포한 새 국호를 무시하고 예전의 국호를 고집하는 것 자체가 불충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니 당연하다.

일본도 대한제국을 함부로 '조선'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없었으며 (남한대토벌작전 등), 한일병합조약문에서까지 '한국'이라는 국호는 유지되었다. 따라서 대한제국과 조선의 실체가 동일하다고 하여 대한제국시대를 다룬 미디어에서 대한제국을 함부로 '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 역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성혁명[逆成革命]으로 왕조가 뒤집어 엎어진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있던 왕조가 이름만 바꾼 것일 뿐더러, 어차피 대한제국으로 바뀌어 봤자 군주의 호칭이 황제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그 전의 조선과 별로 다를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 머릿 속에서의 역사상의 비중은 '그런 게 있었지' 수준이다. 이 시대를 구한말이라고 부르면서도 '조선시대 언제 끝났어?'라고 물어보면 1910년의 경술국치를 대는 사람이 대부분. 사실 한반도의 여타 왕조들의 사례로 미루어 보면 대한제국만 따로 특별히 취급해야 할 이유가 칭제말고는 없긴 하다.

궁예의 태봉의 경우 '고려'나 '마진'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한 나라로 취급하며, 심지어 조선마저 극 초창기(1392년 ~ 1393년)에는 이전 왕조의 국호인 '고려'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 시기만을 따로 떼어 내어 이때의 조선을 '고려'라고 부르거나 조선의 건국 연도를 1392년이 아닌 1393년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고구려역시 장수왕 때 국호를 '고려'로 바꿨으며 이의 사용 기간 역시 '대한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어 후기에 이르러서는 대내외적으로 '고려'라는 호칭이 널리 보편화되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단지 국호 변경만을 이유로 '고구려'의 멸망 시기를 장수왕 때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구려'로 불리든 '고려'로 불리든 700년 역사 전체를 고구려의 것으로 보고 있지. 백제도 '십제'나 '남부여'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고, 신라 또한 '사로국' · '서라벌' · '계림' 등 다양한 국호를 사용하다가 지증왕의 통치기인 503년에 이르러서야 '신라'로 국호를 통일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냥 전체 역사를 통칭해서 '백제'나 '신라'로 부른다. 이름만 바꾸었을 뿐 왕조 교체 없이 국체가 조선에서 물 흐르듯 그대로 이어진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부르는 게 아주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조선과 대한제국을 칼로 무 베듯 생판 별개로 취급하여 조선이 1897년에 끝났다고 생각하는 게 되레 이상하다고 할수도 있다.

한 예로 1900년 10월 14일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선원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 안에 있던 어진들이 소실되자 '정묘년과 병자년의 오랑캐 난리말고는 이처럼 큰 재앙이 없었다'는 표현까지 써 가며 매우 비통해한 고종은 넉넉지 않은 자금 사정에도 불구하고 사비[私費;내탕전(內帑錢)]까지 털어 가며 선원전 복원 및 어진 모사 작업을 추진했으며, 모사를 위해 함경남도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한양으로 옮길 때에도 대규모의 화려한 행렬을 꾸렸을 만큼 극진한 예를 갖추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고종이 이렇게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이유는 조선과 대한제국이 동일한 국체(國體)이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이 외에 대한제국 시대에도(심지어 일제 강점기에도) 황실에서는 태조 이성계의 생일을 꼬박꼬박 챙겼으며, 순종 역시 즉위 교서에서 ''우리나라의 터전을 열어준 분은 태조 고황제'라고 똑똑히 명시해 놓았다.

대한제국이 조선에서 그대로 이어져 온 나라라는 사실은 대한제국 스스로 자신들의 정치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과거 '500년간' 전래되어 왔음을 밝힌 대한국 국제 제2조로도 확인 가능하며, 대한제국 수립 이후의 고종 실록과 순종 실록에도 '500년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는 문구가 다수 등장한다. 조선 시대에 역적으로 몰린 신하들을 대한제국 시대에 대거신원(大擧伸冤)한 것도, 박지원과 정약용 등 조선 시대의 명신들을 대한제국 시대에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내린 것도, 대한제국 수립 후 일반적인 추존 대상인 고종의 4대조뿐 아니라 한참 옛날의 인물인 조선 왕조의 개창자 태조 이성계까지 그 범위에 포함시켜 '태조 고황제'로 추존했던 것도 같은 의미이다.

이후 순종 시대에도 조선의 임금 및 세자에 대한 추존 작업은 계속 이루어졌던 데 반해 삼국이나 남북국이나 고려와 같은 이전 왕조의 군주들은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것도 대한제국이 조선 왕조의 연속체임을 증명하는 사례라 하겠다. 정치체제가 공화제(共和制), 하다못해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로라도 바뀌었으면 몰라도, 실제로는 군주의 직함 이름이 '황제'로 바뀌었을 뿐인 전제군주제를 그대로 유지했으니 정치 체제에 급격한 변동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일본이 한일합방을 통해 옛 대한제국의 영역에 성립된 식민지를 '조선'이라 칭한 것은 대한제국의 존재를 지워버리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당대 백성들에게 이전부터 계속 써온 '조선'(朝鮮)이란 단어가 훨씬 친숙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식민지 한반도 내에서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한국 대신 조선이란 명칭이 보편적으로 계속 쓰였다.

 

13년간 대한제국시절에 시도한 현대화

 

하기에 본인 정관호의 생각을 써 보았다.

이 기간에 정치적인 변동은 거의 없었다고 본다. 국호만 조선에서 대한제국이 되었지, 왕권은 여전히 전제군주제였다. 하지만 황국파와 독립파가 있었으니, 점차 민주화가 올것을 기대할 수있었다.

또한 서방문물은 계속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문전용에서 벗어나 국문을 연론에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 짧았던 세월에 일어난 변화를 열거해보겠다. 관리, 경찰 그리고 군인도 서방제복을 입었다.

현대문물을 가르치는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전기가 들어오고, 전화와 전차가 들어왔다. 서방 측량이 들어와서 토지제도에 개혁이 왔다. 앞으로도 무한히 많은 발전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일본이 들어와서 대한의 숨통을 조이고 조이다가 1910년에 완전히 합병을 하였다. 이 세상 좋은 것을 아무리 많이 가지면 무엇하나?

나라를 지킬 힘이 전혀 없었기에 오천년 역사에 처음으로 왜적에게 나라를 송두리채 빼앗기고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오백년간 부패하기 짝이 없었던 이조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이조의 위정자들은 무고한 백성에게 끝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구하라! 해당 임금과 대신들을 모두 포함한 위정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민비[閔妃]에 관하여

 

대한제국역사에서 빠질 수없는 인물이 있다. 그는 고종의 비 민비이다. 민비가 한 일은 많은 사람의 생각을 뒤집어 놓았고, 일본을 불러드렸고, 그리고 시아버지 대원군을 집정에서 축출 하였고, 부패한 민씨일가의 족벌세도[族閥勢道]를 시작하여 임오군란을 일으켰고,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까지 하였고, 후에는 일본과 청국을 부른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아라사[Russia]을 불렀다가 일본 낭인으로부터 무참하게 살해를 당했고, 시신조차 없어졌다. 민비의 행적을 간단히 요약하여 본다.

출생: 1851년 11월 17일(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시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 사저[私邸:현재의 여주시 능현동 250-1]에서 민유중의 6대손으로 사도시 첨정이었던 민치록(閔致祿)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는 민비의 5대 고모뻘로, 5대조 민진후의 누이였다. 1866년 3월 6일에 간택[揀擇]으로 뽑혔다.

왕비시절: 민비는 안전과 권력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민승호[閔升鎬] 등 일가 친척,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각시킨 풍양 조씨의 조영하[趙寧夏], 안동 김씨의 김병기[金炳冀],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서원 철폐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유림의 거두 최익현[崔益鉉] 등과 제휴했다. 결국 고종을 유도하여 대원군의 11년 집권을 끝냈지만 대원군과 권력투쟁은 계속되었다. 그후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끝내고 개화파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金弘集. 魚允中, 金允植]을 등용하였고, 문호를 개방하여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을 맺었다.

임오군란[壬午軍亂]; 민비는 대원군과 허욱의 임오군란 때에 죽을 위험에 달하였으나, 미리 변장을 해 홍계훈[洪啓薰]의 등에 업혀 궁궐을 벗어나 여주로 내려가 은신했다. 일본군과 청군이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가 한양까지 진주한 일본군에게 대원군이 퇴각을 요청하여 다시 인천으로 퇵각한 사이에 중국인 제독 오장경(吳長慶)은 7월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했고, 그날 밤엔 한성을 장악했다. 이와 함께 민비는 청군의 보호하에 입궁했다. 이일 이후 민비는 급진 개화파 등을 정권에서 점차 배제시키며 외교적으론 친청정책[親淸政策]으로 기울어졌다.

개화파와의 대립: 급진개혁파 김옥균과 박영효의 표적이 되어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의 군인 난입 때에 피습당한다. 고종과 민비는 경우궁으로 옮겨졌으며, 그들의 주위에 일본 군인 1개 중대가 보초로 둘러진다. 이에 는 민비와 민영익과 경기 감사 심상훈(沈相薰) 등 으로 하여금 청군의 원조를 청하도록 했다. 고종은 10월 18일 청나라 공사 원세개(袁世凱)와 6백 명의 군인들의 면회 요구를 받았고, 김옥균은 이를 저지하려하여 그들간에 말씨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날 오후에는 중국군인들이 배로 늘어났고, 일본군인들은 혼란 와중에 민심의 표적이 되어 공격받았다. 이런 때에 민비는 고종과 함께 홍영식, 박영교, 몇 명의 사관생도의 호위를 받으며 이탈하여 청군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김옥균은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변수, 유혁로와 함께 다케조에 공사의 뒤를 따라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북문을 통해 삼각산과 양화나루,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도피했다.

민비는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에 의존하게 되었다. 조선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혼란으로 더욱 약화되어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는데, 남하 정책으로 얼지 않는 항구를 얻으려는 러시아의 개입으로 러시아와 청나라와 일본 등 열강들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왔다. 민비는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의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를 매개로 러시아 공사와 접촉하여 밀약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밀약은 먼저 중국에 발각되어, 1885년 2월엔 묄렌도르프에게 영장이 발부되고 대원군은 원세개를 대동하여 귀국되었다.

1885년 3월에는 거문도가 영국 함대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1887년엔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러시아와의 합의 끝에 철수했다. 이런 한편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는 민비와 밀약을 또 맺으려 했으나 원세개가 정보를 먼저 입수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조정의 실력자였던 조정내의 민씨 일가 척족의 대다수가 1884년 10월의 갑신정변의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의 표적이 되어 죽음을 당했다. 내관 유재현은 민비의 개인 비서였으나, 그 조차도 표적이 되어 죽음을 당한다. 그 때 미국인 의원인 호러스 뉴턴 앨런(한국이름 안련)은 양조카 민영익의 부상을 치료해주어 생명을 건져준다. 이 일로 말미암아 민비는 일본과 급진 개화파를 매우 경계하게 된다.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 갈등: 1892년 봄엔, 운현궁으로부터 화약이 터지고 또 화약이 여러 건물에 장치된 것이 발견됐다. 다행히 이 폭탄들은 점화되지 않은 채로 발견됐다.민비는 이 일에 대한 음모론의 표적이 되어, 그 전날, 민비의 양오빠인 민승호에게 대원군이 폭약을 보내 일가를 죽게 만든 일에 대한 정치적 보복극을 꿈꾸지 않았겠느냐는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운현궁의 폭탄 테러는 민비가 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추측성 유언비어를 옮겨 놓은 것이다.

동학 농민군과의 대립: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을 중심으로 재기했다.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 집회에서는 농민들이 2만여명 모여 농민을 괴롭히는 지방관들의 퇴출과 민생고를 탕감하고, 오랑캐들을 몰아낼 것 등을 요구하였고, 전봉준을 중심으로 1894년 1월에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패를 규탄하는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같은 해 4월 전주성이 동학농민군 에 의해 점령되고 흥선대원군이 반군을 지원하여 고종을 폐위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명성황후는 지원을 위해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군인들이 청나라에 의해 파병되자 이에 일본도 톈진 조약을 빌미로 파병하였다. 조선의 내정 개혁과 갑오경장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군을 먼저 공격한 뒤에야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으며, 7월 ~ 9월 사이에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민비의 마지막: 조선은 1895년 4월 일본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일본은 대원군을 퇴진시키는 한편 의정부의 명칭을 내각으로 바꾸고 물러나있던 김홍집을 7월에 다시 총리대신으로 앞세워 연립 내각을 구성했고, 내정의 내각엔 일본인 고문관을 두어 내정 간섭을 강화했다. 이에 민비는 프랑스, 러시아, 독일의 압박으로 일본은 요동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정세를 이용하여,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몰아내려 했다.민비는 박정양을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고 김홍집 내각을 퇴출했다.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낭인들, 낭인들에게 협력한 조선인 군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였다. 외침을 들은 명성황후는 궁녀복으로 갈아입고 건청궁 곤녕합 쪽에 있는 옥호루로 은신했는데, 궁녀와 내관들은 낭인들에 의해 피습당하고 있었다.

궁녀들과 함께 있던 명성황후는 대궐에 다다른 낭인들을 만난다. 민비는 방 한 구석에 기대어 몸을 감추고 있다가, 낭인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눈에 띄어 검에 베여 죽었다 한다. 민비의 죽은 몸은 그뒤 석유가 뿌려진 다음 불태워졌다. 이때 민비의 나이는 43세였다.

 

을사오적이완용[乙巳五賊李完用]

1905년11월17일 일본제국은 대한제국과 제2차일한협약 혹은 을사조약 혹은 을사보호조약[《第二次日韓協約》又稱為《乙巳條約》或《乙巳保護條約》]을 체결(서명)하였다. 일본측과 더불어 서명한 다섯 한국관원은 학부대신이완용[學部大臣李完用], 외부대신박제순[外部大臣樸齊純], 농상공부대신권중현[農商工部大臣權重顯], 군부대신이근택[軍部大臣李根澤]과 내무대신이진용[內部大臣李址镕] 5인이었고, 그들은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부른다.

그중 매국노 이완용은 오천년 우리나라의 최악의 다섯역적의 두목이었다. 이제 이완용의 족적을 알아보겠다.

이완용(1858年—1926年)은 조선왕조 후기대신으로 조선이 일본의 점령기간에 귀족이었고, 오늘날 그는 남북한을 통털어서 매국적의 두목 {頭號賣國賊]이다.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고, 젊어서 미국에 사절로 가서 친미파와 친아파의 대표였다. 일아전쟁후 신속하게 일본으로 돌아서서 친일파의 머리가 되었다. 이후 적극적으로 매국행위에 종사하였고, 1905년 전력으로 을사조약[乙巳條約]에 찬성하였다.

1907년 고종이희[高宗李熙]를 핍박하여서, 1910년 대한제국 일한합병조약《日韓合並條約》에 서명하였고, 이에 일본은 조선반도를 탄병[吞並; 모두 삼키다.]히였다. 이완용은 일본제국의 백작(伯爵)이 되었고, 후에 후작(侯爵)으로 승진하였고 직위는 화족[華族: 지체가 높은 사람이나, 나라에 공훈(功勳)이 있는 사람의 집안과 그 자손(子孫)들]에 들었다. 그는조선반도국민의 타매[唾罵: 침을 뱉어가며 꾸짖다]를 받았으며, 그의 더러운 이름은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乙巳五賊”、“丁未七賊”及“庚戌國賊]으로 들어갔다.

이런 더러운 종자를 가리켜 유취만년[遺臭萬年; 냄새가 만년까지 남겨진다]의 한마디를 던지고, 안중근의사에게는 유방백세[流芳百世: 향기(香氣)가 백 대에 걸쳐 흐름] 를 올린다.

 

IMAGES

 

1. 경운궁 석조전[慶運宮石造殿]

덕수궁 석조전

 

2. 太極旗: 태극기

대한제국 국기

3. 大韓帝國國章: 대한제국국장

대한제국 국장

4. 首爾的俄羅斯公使館舊址[수이적아라사공사관구지; The former site of the Russian embassy in Seoul]

5. 高宗祭天登基之處: 고종제천등기지처

6. 大韓帝國光武皇帝: 대한제국광무황제

7. 1904年世福蘭斯醫院: 1904년 세복란사의원(Severance Hospital)

8. 1903年首爾有軌電車: 1903년 수이유궤전차(Seoul Tram)

9. 海牙和平會議3名特使: 해아화평의회삼명특사(3 special envoys to the Hague Peace Conference)

10. 朝鮮高宗: 조선고종

11. 大韓帝國海軍廣濟號: 대한제국해군광제호(Korean Imperial Navy Gwangje)

12. Territory of the Korean Empire 1903–1905. The disputed Gando region is shaded in lighter green.

Territory of the Korean Empire 1903–1905. The disputed Gando region is shaded in lighter green.

13. Seal of the Korean Empire

14. 佛國寺: 불국사

Bulguksa temple, Gyeongju

15. Korean civil official in uniform 1900

16. Hanseong Electric Company

17. 一百多年前 大韓帝國 成立: 일백다년전 대한제국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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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大韓帝國 最後的皇帝: 대한제국 최후적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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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大韓帝國 唯一的皇后: 대한제국 유일적황후. 純貞孝皇后; 순정효황후 大韓帝國唯一皇后純貞孝皇后的坎坷人生,純貞孝皇后的生平簡介- 歷史趣聞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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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大韓帝國群臣罕見老照片: 대한제국군신흔견노조편 [Rare old photos of ministers of the Korean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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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大韓帝國時期爲稱帝建立的漢城天壇: 대한제국시기위칭제건립적한성 천단. [The Temple of Heaven in Seoul, built for the emperor during the Korean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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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建立了史上第一個帝國: 건립요사상제일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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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大韓帝國的皇帝美夢只做了十三年,日本又把名字改回朝鮮; 韓日合邦當時: 대한제국적황제미몽지주요십삼년, 일본우파명자개회조선, 한일합방 당시 [The emperor's dream of the Korean Empire was only for thirteen years, and Japan changed its name back to Korea: 대한제국황제의 아름다운 꿈은 겨우 십삼년이요, 일본은 다시 조선이란 이름으로 바꾸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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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The headquarters office building of the Hanseong Electric Company

25. Japanese infantry marching through Seoul during the Russo-Japanese War in 1904

26. 閔妃[明成皇后]; 민비. 명성황후

민비 악행 우리가몰랐던 진실들 : 네이버 블로그

27. 玉壺樓[옥호루]

28. 李完用[乙巳五賊]

Lee Wan-yong Portrait.jpg

 

결론[結論]

이제 대한제국의 비극적인 단명과 멸망도 끝났다.

그 짧은 13년간 왜적의 찬탈속에서도 그 많은 선각자들의 노력과 그 많은 애국자, 그리고 애국국민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제국을 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그 힘든 13년간 엄연히 존재하였다. 그리고 제국은 없어졌지만, 우리 대한국민은 그 제국을 잊지 않았다.

만해 한용운은 말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대한제국의 명맥은 지금까지 우리대한민국에서 이어진다.

한[韓]이란 글자는 옛부터 내려오던 삼한[三韓]에서 유래되었고, 대한[大韓]이란 글자는 대한제국[大帝韓國]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내려왔다.

그때 이루지 못했던 꿈을 우리는 지금 반드시 이루어야하고, 이제와서 실제로 이루고 있다. 우리 대한민국은 13년의 단명했던 대한제국의 꿈을 이루는 자랑스런 후예이다.

 

대한제국 만세… Long Live Korean Empire!

 

대한민국 만세…Long Live Republic of Korea!

 

 

Kwan Ho Chung - February 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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