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1 17:37
https://www.koreatimes.co.kr/www/nation/2020/08/356_265106.html
Margaret Chun, daughter of the late independence fighter Chun Myung-woon, poses in front of a photograph of her father, left, and Chang In-hwan, Feb. 23, who attempted to assassinate pro-Japan lobbyist and former diplomat Durham Stevens, at the Korea National Association Memorial Foundation in Los Angeles, Calif. / Korea Times photo by Park Jin-hai
https://en.wikipedia.org/wiki/Durham_Stevens
Durham White Stevens
Stevens returned to the United States in March 1908 to visit his family in Washington, D.C., and vacation with his sisters at a cottage they owned in Atlantic City, New Jersey.[18] Upon his arrival, he gave an interview with a San Francisco newspaper in which he stated that the common people of Korea were benefiting from the increasing Japanese presence and protection in their country, and that, in the state that Korea was in, Korea was not fit to be a liberated country. These statements provoked the ire of two local associations of Koreans, the Daedong Bogukhoe and the Independence Club, who held a joint meeting in which they agreed that something had to be done about Stevens.[19] On March 22, 1908, four Korean men chosen by the associations accosted Stevens at the Fairmont Hotel, where he was staying. Their leader, a man by the name of Earl Lee who was described as fluent in English, asked him if he had indeed made the statements attributed to him in the newspaper, and whether "Japanese were not killing off the Koreans". He answered yes to the first question and no to the second, then proceeded to tell Lee that he had "probably been too long away from his country to know the exact condition of the Government."[18] Upon this, the four men began to strike Stevens with chairs, knocking him down and causing him to strike his head against the marble flooring; Stevens backed up against the wall until help arrived. After the assault, Lee was quoted as saying, "We are all very sorry that we did not do more to him."[18]
https://www.sfexaminer.com/our_sections/forum/assassination-of-durham-white-stevens-by-korean-activists/article_921a0a36-b2e9-11ed-8d8e-f30832844f9e.html
On his tour, Stevens justified Japan’s actions by arguing that it was bringing progress to a backward and corrupt land, that most Koreans welcomed the Japanese intervention, and that if Japan had not intervened, others would. “Korea is a natural bulwark of Japan,” Stevens told his American audience. “Its state of complete isolation ... invited aggression and possible conquest.”
Stevens gave interviews to the San Francisco newspapers defending the Japanese takeover of Korea. The Call newspaper reported that “Stevens denies that the Japanese are exploiting Korea for Japanese profit or that the revenues of the land are being used in maintaining an arm of Japanese office holders.”
2023.06.11 18:16
2023.06.13 08:34
스티븐스는 1908년 3월에 워싱턴 D.C.에 있는 가족을 만나고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 있던 누이 소유의 전원 주택에서 누이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15] 스티븐스는 3월 21일에 니혼마루(日本丸)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 뒤 가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과의 인터뷰에서 대한제국은 독립국이 될 정도가 아니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16][17][18]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한 뒤로 대한제국에 유익한 일이 많으므로 근래 한일 양국 사람들 사이에 교제가 친밀하며 일본이 대한제국 백성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필리핀을 다스리는 것과 같고, 대한제국에 새 정부가 조직된 뒤로 정계에 참여하지 못한 자가 일본을 반대하나 농민들과 백성은 전일 정부의 학대와 같은 학대를 받지 아니하므로 농민들은 일본인을 환영한다.”
이 발언은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 등 항일 단체 회원들 사이에서 분노를 일으켰고, 회원들 사이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17] 1908년 3월 22일에 공립협회와 각 단체가 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한 끝에 최정익과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을 스티븐스가 묵고 있던 페어몬트 호텔로 보냈고, 이들은 스티븐스에게 대한제국에 관한 신문 기사를 정정하라고 요구했지만 스티븐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16]
“대한제국은 황제가 어리석어 생각이 어둡고, 정부 관리들이 백성을 학대하며 재산을 탈취하므로 백성의 원망이 심하다. 그리고 백성이 어리석어서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의 보호가 아니면 러시아에게 빼앗길 것이다."(위키백과)
*한국 국민으로서 듣기 싫은 말이지만 전부 부정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화가나는 말이다. 당시의 한국 국민은 토탄에 빠져 있었다. 매관
매직을 고위 관리 뿐만 아니라 고종자신도 했다. 임금은 보직도 없는 관직을 팔았다.
원님이 새 임지로 가고 있는 데 또 더 새로운 원님이 임명되어 되돌아 오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자리를 뇌물로 산 원님은 본전에다 이득을 챙기려고 국민을 쥐어
짰다. 대부분이 소작을 했던 국민들은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만주, 연해주
등지로 고향땅을 버리고 떠났다. 그들에게 하와이 이민도 기회 였다. 그러나 이 마
져도 일본정부의 반대로 중단 되었다.
무능한 고종과 민비는 산업혁명 이후에 밀어 닥친 근대화의 물결과 제국주의에 대처
하여 나라의 명맥을 유지 할 능력이 없었다. 거의 450년 동안 이어온 사대의 유전자는
변하지 않았다. 외세에 의존하여 나라를 유지하려 했다. 청에게 기댔다. 일본이
청을 물리쳤다. 이번에는 러시아를 불러 들였다. 일본이 러시아 마져 물리쳤다.
1905년이었다.
일본은 한국을 접수 하기 시작 했다. 일본은 한국 국민을 잘 살게 해주기 위해서
한국을 직접 다스린 다는 명분을 쌓아야 했다.
고종은 미국을 믿었다. 다른 열강들에 비해서 식민지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생각
했다. 처가 친척인 민영환을 치료해서 생명을 구해준 알렌을 크게 믿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국익을 희생시키면서 까지 한국을 돕지 않았다. 1901년 알렌은 대한 주재
미국 공사였다. 그는 스티븐스를 대한 외교 고문으로 추천했다. 1904년 8월22일 러일
전쟁이 한참일 때 일본은 대한제국과 1차 한일 협정을 맺었다. 제2항은 대한정부는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을 외교고문으로 임명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일본정부는
알렌의 추천을 근거로 스티븐스를 외교 고문으로 임명하라고 고종을 압박 했다.
고종은 스트븐스를 외교고문으로 임명하고 보수를 지급 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정부로
부터도 많은 보수를 받았다. 그리고 이토의 조선 합방 전략에 전적으로 협조 했다.
한일합방 후의 한국 국민의 삶이 이전 보다 더 좋아 졌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오랜
동안 인터넽 서취를 거듭하고 있지만 결정적인 데이터는 아직까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구한 말의 가렴주구을 참고 할 때 적어도 그 보다는 나아 졌을 것으로 추정
한다.
오늘날 우리는 스트븐스의 친일 행각에 분개하기 전에 어느 한 위정자의 실책이
국민의 삶과 나라의 운명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가를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2023.06.14 07:17
https://theme.archives.go.kr/next/immigration/endoftheJoseonDynasty.do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03년 1월 일단의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한인이민에서 한인들을 하와이로 끌어들인 흡인요인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값싼 노동력에 대한 필요였다. 1830년대부터 하와이에서 대규모의 노동집약적인 사탕수수 농장을 시작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이민자들이 노동자로서 모집되었다. 한인에 앞서 중국인들은 1852년부터 하와이에서 노동자로서 일을 하였는데 1882년 ‘중국인 배제법령(Chinese Exclusion Act)’에 의해 그들의 이민이 중지된 후에는 일본인들이 대용 노동자로서 1885년부터 대규모로 이민 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1990년경에는 전체 하와이 노동자들의 80%를 차지하면서 보다 높은 임금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백인 농장주들은 한국, 필리핀, 포르투갈에서 이민자들을 대용 노동자로 받아들임으로써 일본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결국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한편으로는 값싼 노동력으로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인의 파업 파괴자(strike breakers)로서 유입된 것이다. 101명의 한인들을 실은 최초의 이민선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을 출발해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이후 1905년 일본의 제지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이 중단되기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이들 중 84%는 20대의 젊은 남자들이었고 9% 가량만이 여성들이었으며 7% 가량이 어린이들이었다. 이러한 인구 구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빠른 시기에 큰돈을 벌어서 자기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려는 임시체류자(sojourner)의 성격이 강했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054678
file:///Users/jamesohn/Downloads/KCI_FI002054678%20(1).pdf
American Media Coverage of the Assassination of Durhum White Stev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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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s living in America shoould read the article. It will help you to understand how
much they struggled to live in a foreign country without their nation. Simply put it,
"without passport or legal residency"! Not to mention severe racial discrimin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