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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l 무은재(無垠齋) 김호길(金浩吉) 박사

2012.04.24 11:09

이기우*71문리대 Views:6355

무은재(無垠齋·학문엔 경계가 없다) 김호길(金浩吉) 박사



세계를 무대로 못다 핀 과학영재교육의 꿈


[ 얼마전에 이한중님께서 올려주신 '한동대학 총장 김영길의 말씀들' 을 읽고서 나에게 깊숙히 박혀있던 분이 수면에 떠 오릅니다. 이제 바야흐로 대통령 선거를 몇달 앞두고 우후 죽순으로 너도 나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소위 정치인들, 그들의 지성과 철학과 애국심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신문에 오르 내리는 이름들도 참으로 많기도 합니다. 진정한 애국자의 자질을 갖으신 김호길 박사, 18년전인 1994년 4월 30일, 61세의 한참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친 분을 잘 알게 된 것은 본인이 물리학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잠시간 김호길 박사님댁에 묵기도 하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까이서 보고 듣고 하던 기억을 더듬어 이곳 저곳에 기록 되어 있는 문서들을 발췌초록하여 올려 봅니다. - 이기우 - ]

- 기적 일궈낸 학계의 큰 별

5월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넘어가지만 포항공대 교수, 학생과 교직원들은 잔인한 4월 마지막날의 충격과 슬픔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교내체육대회 도중 불의의 사고로 타계한 고 김호길총장의 유해가 학교를 떠난 지 닷새가 지나도 연구실에서 창밖 교정을 내려다보는 교수들의 눈시울은 아직도 불그스레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펴는 학생들의 손길은 무겁기만 하다. 모두들 “지금 당장이라도 특유의 뒤뚱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나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자네 요즘 잘돼가나’라고 격려해 줄 것만 같다”며 말을 잊지 못한다.

올해로 예순하나, 환갑을 갓 넘긴 나이에 ‘포항공대서 한국의 첫 노벨상 수상자 탄생’이라는 미완의 꿈을 남겨둔 채 ‘자연법칙은 신도 바꿀 수 없다’는 자신의 수상집 제목을 그대로 증명해 보이고 만 그의 죽음이 남긴 여백이 그만큼 넓고 허전하기 때문이다.

그가 미래 과학한국을 꿈꾸며 온 정열을 쏟아부어온 포항공대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MIT’로 본 궤도에 올라서 있고 그가 평생 숙원사업으로 추진해오던 방사광가속기도 연내 완공을 목전에 두고 있어 그 안타까움은 더욱 크다.

세계 최고의 핵물리학자, 한국과학계의 큰 별, 뚝심있는 대학행정가, 뛰어난 교육자, 양심있는 학자, 그 어떤 명성과 칭호도 김총장을 잃은 유가족의 슬픔과 포항공대인들의 애통함을 달래진 못한다.

고 지파 김호길 총장의 ‘젊고 풋풋한 삶’은 물리학을 향한 집념에서 출발, 개인적 영광을 버리고 민족과학의 발전과 후진양성을 향한 열망으로 이어져 한 지방의 바닷가 오지에 세계적 석학들을 교수로 모셔오고 많은 영재들을 학생으로 불러모아 국내최고의 연구중심대학이라는 ‘기적’을 이뤄냈다.

재치와 해학이 넘치는 그의 달변은 과학기술분야 뿐 아니라 인생관과 우주관에서 시사문제와 사회가치, 문명비평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했다. 대학행정가로서 보여준 놀라운 추진력과 소신, “획일적이고 대중적인 대학교육이 인재를 망친다”며 줄곧 외쳐온 교육개혁 의지로 세계적 물리학자 이상의 국민적 신망을 얻었었다.


- 부친 엄명 어기고 물리학 전공

김총장은 일제통치하인 1933년 유교의 본고장인 경북 안동군 임동면 지례동 산골에서 교육자인 부친 김용대옹(88)의 4남4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집에서 1백20리나 떨어진 퇴계 이황선생의 고향인 안동군 도산면의 도산국교에 다닐 때부터 그는 수학과 역사에 재능이 있었고 당시 담임이었던 이원강 선생님(83년까지 서울고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했으나 현재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이 수학 개인지도를 해줄만큼 그의 학문의 길에 일찍부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부친 김옹은 회고한다.

어릴 때 전통을 중시하는 양반집안에서 엄한 한학교육을 받은 그는 서양학문인 물리학에 심취하면서도 여행을 떠나거나 강연 도중에 즉흥적으로 한시를 읊어내려갈 정도로 한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안동중학을 다닐 때 그가 수학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안 담임교사가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 진학을 권유했을 때의 일화를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소개한다. “문리대학이라는 이름은 시골중학교 1학년 학생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었죠. 당시만해도 시골 아이들사이에선 고려대학하면 먹는 ‘고래’를 연상했고 대구대학하면 ‘대구’를 생각했고 해서 문리대학이라면 안동말로 ‘문어나 오징어’라는 뜻이 머리에 떠올라 ‘참 이상한 이름의 학교도 있다’싶었지요”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국교 교사를 하라는 부친의 엄명을 뒤로하고 서울대 물리과에 진학, 입학금을 친척에게서 얻어내면서 그는 본격적인 고학의 문을 들어선다. 야근을 밥먹듯 하는 국립 중앙관상대 말단공무원과 중학교 수학강사자리를 전전하며 한달의 열흘은 보리밥과 소금만 먹기도 하고 그것도 떨어지면 아예 굶기도 하면서 휴학 한번 없이 56년 대학을 졸업했다.

물리학을 전공하고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제대한 후에도 당시 교육제도의 모순으로 고교 물리교사 취업조차 못한 처절한 현실을 그는 어린시절 나눗셈을 하다 거추장스럽게 남는 나머지 숫자와 같은 ‘사회의 잉여인가’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달관의 철학은 그를 세계적 물리학자로 키워냈다. 59년 원자력연구소에 촉탁으로 취업, 서울 사대 국어과 재학시절 만난 부인 권봉순여사와 결혼한 그는 61년 9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연수생으로 영국 버밍엄대학에서 홀로 유학의 길을 올랐다.


- ‘버클리의 노벨상 후보’ 유혹

64년 버밍엄대학 개교이래 최단기간인 2년반만에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버클리대학 로렌스연구소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본격적인 물리학연구에 전념한다. 물질의 궁극적인 본질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입자가속장치분야에서 그의 학문적 권위는 미국과 유럽 뿐만 아니라 소련권까지도 널리 번져갔다.

미 메릴랜드대학의 물리학과와 전자전기공학과 교수를 66년부터 78년까지 12년동안 맡으면서 그의 연구관심은 입자가속기에서 핵물리학과 플라즈마물리학으로 차츰 옮겨가 이 분야의 세계적인 업적을 쌓았다.

69년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가속장치학회 참석을 위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구소련을 방문한 후 한국일보에 ‘철의 장막을 뚫은 최초의 한국인 과학자의 여행기’라는 표제로 8회에 걸쳐 공산사회의 실상을 소개, 당시 우리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던지기도 했다.

로렌스버클리연구소 선임과학자로서 미국시민이 되라는 학교측의 끈질긴 유혹과 ‘버클리의 차기 노벨물리학상 후보’라는 개인적 명성과 지위를 뿌리치고 그가 국내과학발전과 후진양성을 위해 22년간의 긴 해외체류를 끝내며 영구 귀국한 것은 지난 83년. 럭키금성그룹 구자경회장의 권유로 경남 진주의 연암공전 초대학장직을 맡은 그는 제일 먼저 4년제대학으로 승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좌절되고 공대 신설을 추진하던 포항제철과 인연을 맺게 된다.

“우리나라 실정에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세계적 수준의 공대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단과대학으로는 과학발전을 기대조차 할 수 없다”는 주위의 비아냥과 만류를 뿌리치고 당시 박태준 포철회장으로부터 포항공과대학의 초대학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은 그는 포철로부터 “천문학적 투자비가 드는 가속기장치의 국내설립과 대학발전을 위한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이를 수락했다.

이때부터 그는 우수한 해외석학유치를 위해 미국과 캐나다 등 국내 인재들이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세계 각지를 직접 돌아다니며 해당 학교나 연구소는 물론 자택에까지 찾아가 학교 청사진과 장기발전계획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간곡한 설득작업을 벌였다.

그가 학장으로 취임한지 7년. 포항공대는 국내최고의 연구 학습시설, 전체 학생 장학금 지급, 전원 기숙사 생활, 교수 1인당 연구논문수 최다, 부설연구소 연구실적 최고, 교수 1인당 최저 학생수 등 수많은 진기록들을 쏟아내면서 신생대학이 얼마나 빠른시일내에 세계적 대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지를 보란듯이 증명해냈다.


- “선배덕 보려거든 다른대학 가라”

과학기술분야의 인재발굴과 전문인양성을 향한 그의 열정과 의지는 남달랐다. 천리길도 마다않고 서울을 가면 반드시 교육부에 들렀다. 학력고사일에 앞서 먼저 특차로 시험을 보겠다는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그의 뜻은 교육법 시행령의 벽을 넘지 못하다 지난해 입시제도개혁으로 숙원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우수학생의 재수 방지를 위해 94학년도 입시에서 서울대와 입시일을 달리했다가 일반전형 1백80명중 90%인 1백62명이 서울대에 이중합격, 이중 1백22명을 빼앗기는 아픈 기억을 안게됐다. 사상 처음 본고사에서 만점을 받은 수석합격자를 서울대로 보낸 뒤에는 ‘실속과 내실’(포항공대)이 ‘명성과 지명도’(서울대)에 눌렸다는 비아냥을 감수해야 한다. 그는 당시 참담한 상황에서 주간한국과 특별인터뷰를 갖고 “앞으로는 서울대와 떳떳이 경쟁하겠다”고 선언한 뒤 “세계적인 학자가 되려거든 오고 선배덕 보려거든 다른 대학가라”면서 전혀 자신감을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올해 또다시 ‘체면손상의 우려’를 버리고 서울대와 입시일을 차별화, 수험생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작지만 큰 대학’의 자신감을 돋보이게 했다. 창의력과 지도력을 겸비한 학생을 선발하기 위한 그의 입시개혁의지는 2탄, 3탄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포항공대와 우리나라 대학교육을 송두리째 동료와 후진에게 남겨두고 홀연히 떠났다. 고인과 30년 지기인 포항공대 대학원장 최상일교수(62·물리학)는 “김총장만큼 적당주의를 싫어하며 일을 할 때는 전력투구로 몰두하고 악의없이 솔직한 사람은 드물었다”며 “교육발전을 위해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배짱있는 사람을 잃었다”며 아쉬워한다.

“과학기술 발전은 제2의 독립운동”이라며 ‘포항공대 신화’를 만들어 가던 길목에서 그가 남긴 수많은 미완의 과제와 해결해야할 숙제는 이 시대 우리 교육·과학계가 맡아야 할 커다란 짐인 동시에 희망이다.

지난해 펴낸 ‘자연법칙은 신도 바꿀 수 없지요’란 수상집에는 그는 “선진국을 만드는 데는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창의력 있고 장기적 안목을 가진 국민을 기르는 길이 왕도다”라고 적고 있다.

“교수와 학생이 합심해서 세계적 연구실적을 내고 우수한 과학자를 많이 배출하는 것이 남아있는 우리들이 할 일”이라는 포항공대인들의 다짐에서 김호길총장이 남겨둔 우리나라 과학발전의 유산이 어떻게 꽃 피워질 지가 잘 나타나 있다.


- "형님은 포항공대 기적일으킨 분" ─ 동생 김영길 박사가 본 형 김호길 총장

학교법인 현동학원(이사장 송태헌)이 포항에서 오는 95년 개교예정인 한동대의 초대 총장을 맡은 김영길박사(55·한국과학기술원 교수)는 형인 고 김호길총장을 “소탈하고 벽이 없는 분”이라고 말한다. 누구를 만나도 친한 친구처럼 얘기를 늘어놓고 속마음을 감출 줄 모르는 ‘아이같은’ 대학총장이었다.

“과학자나 대학총장이라면 있을 법한 연구실에서 몸에 밴 깐깐함이나 학생들을 대하면서 오는 위엄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죠. 오히려 시골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푸근한 동네어른 같았어요”
김교수는 포항공대를 일컬어 ‘기적’이라고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형님이 아니었으면 지금과 같은 대학이 될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발전과 대학교육혁신에 기여한 공로는 평가받을 것입니다” 고국에 오고싶어도 연구할 곳이 마땅찮은 해외두뇌들에게 자리를 제공하는데 일조한 곳이 포항공대라는 것이다.

“어릴적부터 형님은 늘 착한 사람이 되는 일, 특히 효도와 우애를 강조했죠. 돌이켜보면 동생들을 자식처럼 위했던 형님으로 인해 남들이 우애있는 집안이라고 얘기하는 셈입니다”라고 말하는 김교수는 8남매의 셋째인 형과 6살 차이로 4형제중 남자로는 막내다. “이상한 얘기로 들릴 지 모르지만 형님은 저의 결혼까지 대신 해줬죠. 함께 미국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 중매결혼을 앞두고 학위논문 쓰기에 바쁜 저를 대신해 형님이 일시 귀국, 맞선을 보고와 지금의 아내와 만났어요”

두사람이 포항공대에서 함께 연구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박태준 전 포철회장이 동생도 학교에 데려오자고 제안했지만 이정오 당시 과학기술원장이 동의서를 써주지 않아 실패했다. 김총장은 당시 “네가 없으면 학교가 안될 줄 아느냐”며 농담조로 동생을 타박했다고 한다.

64년 서울공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한 김교수는 “뿌리깊은 유교의 전통을 가진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엘 간 형님을 따라 당시 인기학과인 서울대 화공과를 가려 했을 때 형이 ‘공업이 발전하려면 소재산업이 발달해야 한다. 금속학이 반드시 각광받을 것이다’라는 권유를 해 진로를 바꿨다”고 회고한다. 김교수는 이후 형이 미 메릴랜드대 교수로 있을 무렵인 67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RPI공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미 항공우주국(NASA)에 근무하면서 제트엔진의 내열합금에 관한 연구로 2회에 걸쳐 NASA발명상을 수상했다.

동생이 먼저 78년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11년만에 미국을 떠났고 형님도 뒤따라 귀국을 결정했다.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애국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둘다 조금 모자랐기 때문이죠” 외국에 있으면서 그 나라 좋은 줄 모르고 한국과 고향 좋은 것만 안 바보였다는 설명이다.

“형님의 뒤를 이어 신생대학의 총장을 맡기로 했을 때 형은 ‘골머리 아프고 의지대로 안되는 학교일을 맡는 것 보다 연구활동에 전념하는 것이 국가 발전에 보탬이 된다’며 환영하지는 않았지만 대학행정가로서의 형님의 추진력과 뚝심있는 교육철학을 앞으로 한동대에서 펼쳐갈 생각”이라고 말하는 김교수의 얼굴엔 슬픔을 이기려는 의지가 역력했다.


- 꿈의 연구시설 ‘방사광가속기’ ─ 고 김호길 총장의 평생숙원사업

국내 첨단과학분야의 새 지평을 열 ‘꿈의 연구시설’로 불리는 포항방사광가속기(Pohang Light Source)는 입자가속장치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고 김호길총장의 평생숙원사업이었다. 기초과학연구분야에서 대동맥과 같은 가속기 건설을 추진하면서 1천4백49억여원의 천문학적 예산과 정부지원확보를 위해 지병을 얻으면서까지 동분서주했고 기술진확보를 위해 한중수교 이전부터 중국인학자초빙에 열을 올렸다.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1초동안 지구를 7곱바퀴반 도는 빠른 속도로 가속하면 커브를 틀 때 그 접점에서 레이저와 같은 강한 빛을 방출한다는 물리학적 원리를 적용, 기존 광원보다 최고 1억배이상 밝은 빛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빛공장’. 이 빛을 이용해 물리·화학·생명공학은 물론 반도체산업·신소재개발에서 뇌혈관질환과 암세포조기진단 등 의료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구가 동시에 이곳에서 이뤄지게 된다.

선형가속기와 전자 저장링, 방사광관 등 3개부문으로 구성돼 올 연말 완공을 앞두고 90%의 공사진척을 보이고 있는 방사광가속기는 21세기 과학한국의 견인차 역할을 할 대역사로 국내 과학계를 벌써부터 설레게 하고 있다.

88년 김호길박사가 1천4백여억원의 예산을 들여 방사광가속기연구소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국내 과학계와 대다수 대학인들은 규모의 방대함과 예산확보의 어려움을 들어 사업성공을 의심했었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추진력으로 가속기건설본부를 발족하고 국가적 연구시설로 완공후 운영비를 정부에서 지원토록 각계의 설득작업을 벌여 재원조달방안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물리학박사 7명을 비롯, 핵공학, 전기·전자공학 등 박사 29명과 석사·학사연구원 62명, 기술원 36명 등 모두 2백13명의 가속기연구를 위한 과학두뇌 유치도 해냈다.

지금은 본격적인 연구활동과 이용을 앞두고 가속기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국내외 가속기 이용가능자 2백여명을 초청, 이용자 연구발표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대학생을 상대로 기초과학분야 강의를 펼치는 등 가속기 이용교육을 실시해오고 있다.

이동녕 방사광가속기 연구소장은 “이용가치와 활용분야가 넓은 다목적 연구시설인 방사광가속기는 전세계에 현재 36기만 있을 정도로 과학기술선진화엔 필수적인 것”이라며 “아직도 기초과학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이만한 위업을 이뤄낸다는 것은 고인이 된 김총장의 빛나는 금자탑”이라고 평가했다.

(주간한국, 1994.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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