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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 년  서울 의대 졸업하신 김익창 선배 (현재 은퇴 남가주 거주) 님의 저서인 "사선을
넘어서"를 받고 이틀 만에 다 읽어 치웟다. 한 번 손에 들면 떼기 힘든 주옥 갚은 책이다.

의예과때 전쟁을 격으신 얘기며, 신의주에서 3.8 선을 건너 도망오는 예기, 자주들어온,  오산 중학교( 이학교에 관련된 분으로 김소월, 이광수, 조만식, 북한의 최용건, 한경직 목사 함석헌 선생, 모두 들어본 이름이다.) 얘기도 나온다.  손기정 선생도 신의주 태생이라 그곳에서 열심히 어릴때 부터 열심히 뛰엇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가면 망각속으로 사라질 번한 귀중한 역사 이얘기다. 흥남 철수얘기도, 역사책으로만 읽던 글을 여기서 생생하게 다시 읽어본다.

김선배님은 주미 한인 정신과 협회를 근 40 여년전 에 창설하시고 여기 다 쓰기 힘든 공적을 남기시고' 지금은 Seal Beach 에 은퇴하시고, 파킨슨 증세로 고생을 하시고 계시다.
김 선배님이 직접 콤멘트 답을 하실수있기 바란다.


하래에 본 문 전재

사선을 넘어서

한국전쟁의 상처를 딛고 역경속에서도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열정적인 삶을 살아온
미국 정신과전문의 김익창의 자서전


책머리에

36년간의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후 조국 대한민국은 38선으로 두 동강이 되고, 이남으로 온 많은 피난민들이 겨우 숨을 돌리고 자리를 잡아갈 때 북한 인민군의 갑작스런 남침으로 다시 비극이 시작되었다. 3년간의 한국전쟁은 지옥과 같았다. 도시는 파괴되
고,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고, 이산가족과 전쟁고아들이 거리를 헤매게 된 가슴 아픈 비극이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미군들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탄절이 되면 심하게 추웠던 1950년 12월 전쟁터의 겨울날씨, 또 갑자기 나타난 중공군의 습격으로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였을 때가 생각난다고 한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60년 전의 악몽들이 다시
아프게 살아나 매일 그 당시로 돌아가서 살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꾸준히 일기를 쓰시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셨다. 아버지의 일기는 우리 후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의 후반에 그분의 일기의 일부를 (
6) 사선을 넘어서 부록에 싣는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경주 김 씨의 가계보와 외할아버지, 주하룡 목사의 계보도 함께 부록에 싣는다.

이번에 이 글을 쓰면서 옆에서 격려하고 도와준 가족들에게 감사한다. 특히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주 주립대학(California State University, Los Angeles)의 사회학교수로 일생을 보내신 유의영 박사에게 감사한다.
유 박사는 많은 연구와 귀한 책들을 출판하여 학계와 커뮤니티에 공헌한 학자이고, 미국에서 한인 젊은이들의 지도자 훈련에 앞장서서 일을 하신 교육자이시다. 유 박사께서 대학을 은퇴하고 연구 자료를 정리하고 있던 중 우리 집에 오래간만에 오셨었다. 내가 자서전을 쓰는 것을 보시고 이 책은 꼭 출판하여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귀한 책이 될 것이라고 격려하면서 매일 우리 집에 오셔서 도와주셨다. 유 박사의 격려와 도움으로 이 책이 완성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북한과 남한은 긴장감 속에 지금도 대치하고 있으며, 간헐적으로 북한은 남한에 대해 도발과 위협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다시는 동족끼리 싸우고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루 속히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이루어지기
만을 기원한다.

2010년 10월 12일
California, Seal Beach Leisure World에서
김익창(Luke I.C. Kim)

축하의 말

금년 6월 25일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되는 날이다.
이 전쟁으로 나라가 초토화되었고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휴전이라는 협정에 의해 잠정적 정지 상태에 있다. 지난 3월 26일에 백령도 인근에서 북한의 어뢰 피격으로 침몰된 천안함 사건처럼 아직도 남북한은 휴전선 양쪽에서 최신의 무기로 서로 총구를 맞대고 있다. 이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의 나이가 이제 모두 60세가 넘었다. 지금 나라를 이끌고 있는 지도층이나 일반 국민이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에 태어난 전후세대 사람들이다. 이들은 책을 읽거나 학교에서 배운 것에 의해 한국전쟁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에 대해 부분적으로 알고 있거나 잘 모르고 있다.

한국전쟁은 북한 공산군이 남한을 전격 침공하여 일어난 전쟁이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은 한국 사람들과는 무관한 외부세력에 의해 나라가 둘로 갈라진 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한국을 식민지로 통치하던 일제가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에게 패하자, 미국과 소련이 한국을 반으로 갈랐다. 결과적으로 북에는 친소공산정권이 들어섰고, 남에는 친미 민주정권이 들어섰다. 한국전쟁은 국제적 냉전체제의 적대적 대결구조 속에서 불가항력의 외부세력에 의해 갈라서게 된 한민족의 강한 통일의지가 전쟁이라는 파괴적 수단으로 표출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식민통치, 남북분단, 그 후 전개된 냉전체제에서의 미소 패권대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김익창 교수는 이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고 파란만장한 그의 삶은 필연적으로 한국의 근대사를 꿰뚫는 과정과 사건에 의해 방향이 잡혀지고 전개
되었다.

이 책은 김익창 교수의 생애사를 통해 한국 사람들이 일본식민통치하에서 어떻게 살았고, 남북분단과 전쟁 속에서 어떻게 생존하였고, 외부세력의 압박과 전쟁의 역경 속에서의 경험이 그들의 가치관과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가를 이해하고, 배우고, 후세들에게 전달하려는 데에 그 출판의 목적이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통해 한국 사람들이 겪은 고난과, 생존을 위한 투쟁과, 역경 가운데서도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가정을 지키고, 인류의 최고 가치인 박애주의를 실천하려는 노력이 이 책에 소개된 김익창 교수의 생애사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전쟁세대는 그들의 생생한 체험을 후세에 남겨야 할 역사적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증인으로서의 생생한 기록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은 채 전쟁세대는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있다.

김익창
교수는 한국전쟁 세대의 마지막 산 증인으로 이 중요한 일을 착수한 것이다.

나는 김익창 교수가 파킨슨병으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이와 같이 중요한 일을 시작한 것을 보고 자원하여 도와드렸다. 김익창 교수는 정신과 의사로, 그리고 의과대학 교수로 학계에 공헌하였고, 특히 다문화정신의학에 관한 연구와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을
나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그의 부인 그레이스와 함께 커뮤니티 액티비스트(community activist)로 어려운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 이들을 위한 여러 봉사단체에 직접 참여와 기부를 통해 크게 공헌한 지도자로 내가 늘 존경하는 분이었다.

이 일을 도와드리면서 나는 이분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모르고 있던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하여 많이 배우게 되었다. 김 교수님은 이 책에 좀 더 깊고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도록 나의 전쟁경험과 다른 사람들의 경험도 포함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의 작은 경험도 실리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김익창 교수의 생애사를 읽으면서 우리는 일본식민통치, 남북분단, 한국전쟁, 흥남철수, 피난생활, 전쟁 후의 복구과정에서 한국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 애환, 노력과 성취를 함께 느낄 수 있다.
20대 초반으로 전쟁을 겪은 김 교수는 자기의 이야기와 함께, 흥남철수작전 가운데에 있었던 미국군인들의 회고, 부모를 잃고 마음 착한 한국군 천사와 함께 전선을 전전하며 도움을 받은 6살 소녀의 이야기, 먼 피난지에서 동생들을 데리고 영등포의 집으로 왔다 갔
다 하면서 숨겨 놓은 어머니의 옷가지를 날라 가족의 생존을 도운 12살 소년의 증언, 그리고 전쟁의 시작부터 최전선에서 대구, 원산, 청진, 삼수갑산, 흥남, 묵호, 대관령을 누비며 대한민국을 지킨 한 병사의 생생하고 눈물겨운 전투일지를 이 책에 실었다. 이 책을 한번 손에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놓을 수가 없다.

이 책은 전쟁세대가 다시 한 번 그때의 애환과 감격을 되새겨 보고, 전후세대가 한국전쟁을 체험적으로 느끼고 배울 수 있게 한 유익하고 감동적인 흥미가 넘치는 책이다. 이와 같이 훌륭한 책을 내 놓으신 김익창 박사에게 진심으로 축하와 감사의 말을 전한다.

유의영(Eui-Young Yu)
Professor Emeritus, California State University, Los Angeles
 

차례

책머리에 5
축하의 말 - 유의영 7

1. 아! 내 고향 신의주 13
2. 외할아버지 주하룡 목사와 강계독립만세 16
3. 새로운 학문을 찾아서 20
4. 영변 약산의 진달래꽃 25
5. 창씨 개명 30
6. 민족정신의 요람 오산학교 34
7. 못다 핀 꽃 - 신의주반공학생 사건 42
8. 자유를 찾아 남으로 46
9.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 일어나다 50
10.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55
11. 9.28 서울 수복과 첩보활동 63
12. 사상 최대의 구출작전, 흥남철수 67
13. 그들이 겪은 한국전쟁 80
14. 가족과 함께 다시 피난길로 82
15. 부산 피난 시절 85
16. 해군 입대 88
17. 의과대학 복학과 정신과와의 만남 90
18. 국제적십자사와 포로교환 97
19. 나의 아내 그레이스(전경자)와의 만남 102
20. 단돈 100달러 들고 도전한 미국 유학 104
21. 커뮤니티 액티비스트, 그레이스 108
22. 인종관계 개선에 앞장선 그레이스 121
23. 정신과 의사와 학자의 길 126
24. 이철수 사건의 진실 130
25. 나의 은퇴와 정신과 석좌교수 설치 133
26. 맺는 말 135

* 저자 김익창의 약력 139
* 김익창의 저작활동 142

부록 Ⅰ

1. 박관옥 여사 이야기 153
2. 모랫말의 평화를 깬 전쟁(유의영 교수가 겪은 한국전쟁) 157
3. 한국전쟁 참전용사 김선춘의 전투일지 179
4. 프랭크 다야크의 이야기 219
5. 러셀 풀턴의 이야기 220

부록 Ⅱ

1. 아버지의 비망록 중에서 221
2. 경주 김씨 가계보 245
3. 외할아버지 주하룡 가계보 248

1. 아! 내 고향 신의주 

“나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한국 사람이다. 광무 6년(1902) 12월 1일에 평안북도 의주군 가산면 도령동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났다. …… 나의 고향은 산골짝이나 뒤에 작은 산이 있어 올라가면 사방이 잘 보였고 뜰 앞에는 시내물이 흐르고 시냇가에는 큰 과수
(띨광나무)가 5,6그루 있었는데 가을과 첫 겨울에는 시냇물에 떨어져 있는 띨광이를 주워 먹던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나의 아버지(김권직, 金權稷)는 일기에 우리 고향 의주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셨다. 함경남도 풍산군과 신흥군 경계에 있는 명당봉(明堂峰, 1809m)에서 발원하여 서쪽을 향해 803km를 굽이굽이 흐르는 압록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강이다. 이 압록강이 황해 바다와 만나는 곳, 중국과 마주보고 있는 평야지대인 그곳에서 나는 1930년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의주는 신의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1905년에 한반도 종단철도인 경의선(평양-의주)을 건설하면서 이 도시의 이름을 신의주로 명명했다.

신의주는 중국 단동과 연결되어 예로부터 중국과 통하는 관문이자 우리 철도가 대륙으로 연결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했을 때 평안북도 도청소재지를 의주로 정했으나 1921년에 신의주로 옮겼다. 신의주의 북쪽에는 이성계의 회군으로
유명한 위화도가 있고, 서쪽에는 유초도 등 10여 개의 작은 섬들이 있고, 동쪽으로는 의주, 남쪽으로는 용천이 있다.

(저자가 유년시절에 친할아버지(김영호)와 찍은 유일한 사진)

어린 시절 해마다 모내기를 하고, 가을에 노랗게 물든 평원에서 벼를 수확하던 농부들의 행복에 찬 얼굴들, 동네 아이들과 논에서 우렁이와 개구리와 메뚜기를 잡아 구워 먹던 일들, 여름날 어머니의 품에 안겨 밤하늘에 가득한 별을 바라보며 옛 이야기 듣던 일
들, 해마다 홍수 때문에 압록강이 범람하여 논과 밭과 시가지가 물에 잠겼던 일들, 한여름에 압록강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겨울이면 썰매를 타면서 강 건너 단동으로 건너던 일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나의 친할아버지 김영호(金永浩)와 외할아버지 주하룡(朱夏龍) 목사는 사진으로 본 것 외에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의사로 침도 놓으시고 농사도 지으셨던 친할아버지는 내가 한 살 때에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는 서울에 사셨고 나는 신의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나는 직접적으로 그분을 뵌 적이 없다.

2. 외할아버지 주하룡 목사와 강계독립만세

외할아버지 주하룡 목사는 1885년 3월 3일에 평안북도 자성에서 태어나셨다. 청소년기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복 음 을 접하여 1910년에 기독교를 접하여 주님을 영접하셨고, 믿음이 독실했던 외할아버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1917년에 평
양신학교에 입학하셨다. 이서면교회(吏西面敎會)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신학교를
다니던 중 1919년 4월 8일 강계만세운 동 을 주도하셨다. 1922년 12월 22일에
할아버지 주하룡 목사 평양신학교를 졸업(12기)하
시고 목사안수를 받으신 후 중강진교회에서 10년 동안 시무하셨다.
1934년에는 사전평에 중강진 제2교회를 개척하셨고, 그 후 서울로 가셔서 영등포 양평동교회에서 시무하시다가 1942년에 소천하셨다.

외할아버지가 평양신학교 학생 시절인 기미년 3•1운동 당시에 평안북도 강계에서 독립 만세를 앞장서서 외치신 애국자로 활약하셨다는 것을 이 책을 쓰게 되면서 출판된 기사를 통하여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최근에 언론을 통해 소개된 외할아버지와 관련된 기사들을 간단히 소개하겠다.

1919년 4월 8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일본 헌병 1개 중대가 무차별 사격으로 시위 군중을 학살했다. 이것이 강계 학살사건이다. 한반도의 북쪽 끝이라고 할 만한 강계에 3•1만세운동의 물결이 닿은 것은 그 해 4월 평양신학교 학생 주하룡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반입하면서다. 4월 8일 장날을 맞아 주하룡은 몇몇 젊은이들과 함께 강계 장터에서 선언문을 읽은뒤 시위를 시작했고 삽시간에 수백 명의 군중이 몰려들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현장에서 다섯 명이 죽고 30여 명이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탁창국(卓昌國)ㆍ김명하(金明河) 두 사람은 장독(杖毒)으로 한 달 만에 사망했다. 강계 학살은 3•1운동 당시 일제가 한반도 전역에서 저지른 수많은 학살사건 가운데 규모가 작은 것이었지만, 이 운동이 가장 외진 곳까지 퍼져 나갔음을 일깨워 준다.(한국일보-“오늘 속으로”, 강계학살사건, 江界虐殺事件, 고종석 편집위원.
2002. 4. 4.1)

1919년 3•1운동 때 평안북도 강계에서 일본군이 시위군중을 학살한 사건. 강계에서 3•1만세운동은 평양신학교 학생 주하룡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강계에 들어옴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정준(鄭儁), 한봉민(韓奉民), 김경하(金京河) 등과 같이 4월 8일의 장날을 기하여 수천 명의 남녀노소가 모인 강계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군청, 면사무소, 헌병대, 파출소를 습격, 방화하는 등 시위운동이 과격해지자, 이웃 군에서도 수백 명이 응원하러 운집하였다.

이때 급보에 접한 일본헌병 1개 중대가 달려와 남녀노소 시위 군중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해, 정준과 김병찬(金秉贊), 손주송(孫周松), 한부인(韓夫人) 등이 현장에서 피살
되고, 30여 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이 중 탁창국(卓昌國)과 김명하(金明河) 두 사람은 장독(杖毒)으로 달포 만에 사망하였다. 이 학살사건 이후 일본 헌병의 검문검색과 미행이 극심해졌다. 정준의 장례식 날에는 이웃의 주민 수천 명이 운집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EnCyber 백과사전, 강계학살사건)

“…… 며칠 후 평양신학교 학생인 주하룡 전도사가 시국의 형편으로 학교 공부를 중단하게 되었으므로, 강계로 돌아
오는 길에 거리에서 독립만세 시위대를 만나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고, 살포되는 독립 선언서 한 장을 주워서 넣어 가지고 오다가 희천경찰서 앞길에서 일본 경찰관으로부터 몸수색을 당하여, 선언서는 빼앗기고 무수히 구타를 당한 후 강계 집에 돌아온 일이 생겼다. 그 소식을 듣고 주하룡 전도사로 하여금 송씨에게 있는 그 선언서는 주 전도사가 송 씨에게 전한 것이라고 하기로 하여서 그 책임을 지기로 하고, 선언서를 송 씨로부터 받아다가 그것을 본떠서, 계례지병원 지하실에서 함가륜 선교사의 서기인 김창욱 전도사가 능숙한 솜씨로 등사판 원지에 독립선언서를 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김경하, 한국장로교출판사, 2002. 2. 1.)

“주하룡 목사에 대한 재미나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자면, 주 목사께서는 새문안교회에서 하는 부흥회 기간 동안 한복을 입고 예배를 인도하셨는데 설교 도중에 갑자기 한복 바지가 뚝 떨어지며 벗겨져서 그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다 같이 기도하십시다.’라고 하시고 성도들이 눈을 감고 기도하는 사이 바지를 올려 허리대를 매셨다고 한다. 한복에는 바지 고리가 없어서 허리대를 올리는 중에 잘못하면 바지가 뚝 떨어진다고 한다.”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4가에 위치한 양평동교회의 홈페이지(http://www.ypdch/" target=_blank>www.ypdch.net)에 나와 있는 교회 연혁을 보면, ‘1907년에 양평동 교회 설립’, ‘1935년에 주하룡 목사 부임’을 알 수 있다.)

3. 새로운 학문을 찾아서
 
미국선교사들의 역할

19세기 후반의 북한은 미국 선교사들의 전도활동으로 기독교 신자들이 많이 생겼다. 1901년 마포삼열 선교사가 자신의 사택에서 시작한 평양신학교는 이후 장로교공의회로부터 ‘평양연합신학교’ 라는 명칭으로 승인을 받았고, 1907년에 길선주, 이기풍, 방기창, 서경조, 송인서, 양전백, 한석진 등 최초로 7명의 장로교 목사를 배출했다. 이처럼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는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 지역에서는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다.

나의 친할아버지도 이때에 한 미국 장로교 선교사를 만나게 되시고, 그의 영항으로 기독교 신자가 되셨다. 그리하여 내 손자들까지 합하여 우리 집안은 5세대 장로교 신자 가정이다. 기독교가 이북에 들어오면서 우리 조상들은 자연스럽게 서양 문화, 특히 기술, 과학과의 새로운 접촉이 이루어졌다. 자유 민주 사상이 싹트게 되었고, 고등교육에 대한 열정이 강해졌다. 선교사 들의 지도하에 성경을 읽기 위해 여자들이 언문(한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점점 교육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남학생만큼이나 여학생들도 많아졌다.

(신의주 삼일교회에서 한 부모님의 결혼식(1929년))

아버지의 일본 유학

나의 아버지는 네 분의 누님을 둔 외아들로,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 고등교육에 대한 꿈을 갖게 되셨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는 1929년에 결혼하시고 아이가 셋이나 생긴 환경에서도 일본의 유학을 결심하셨다. 아버지는 가족을 한국에 두고 약 1년 반 전에 먼저 동경으로 가셨다. 그는 이어 일본 동경의 물리학교(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셨다.  

(부모님의 신혼여행 사진, 1929년, 서울.)

그 후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동경으로 가서 이께부끄로 지역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기독교 계통기관에서 한국 유학생들에게 제공한 기숙사에서 살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신의주에서 기차로 부산까지 가고,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끼로 가서 다시 기차를 타고 동경까지 갔다. 차를 타고 가면서 어머니는 나에게 “이찌, 니, 산, 시” 등 간단한 일본말을 가르쳐 주신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동경에 살면서 나는 이께부끄로 유치원에 다녔다. 유치원에서 일본아이들이 나를 보고 “조센징”이라고 놀렸고, 자기네들끼리 전쟁놀이를 하면서 나를 끼워 주지 않았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일본인들이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동경에서 찍은 가족사진(1935년, 왼쪽으로부터 아버지, 저자, 익란, 익성, 어머니)

어느 날 나는 어머니와 공중목욕탕에 갔었는데 뜨거운 물에 발을 데어 화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했었다. 그 상처를 통해 균이 온 몸에 퍼져 열이 나고 몸도 부었었다. 의사의 진단이 패혈증(septicemia)으로 나왔다. 같은 때에 아버지도 공부가 너무 심하고 고학을 하느라고 약해지신 상태에서 폐렴(pneumonia)에 걸리셨다. 그리하여 나는 아버지와 함께 같은 병원에 입원하여 같은 병실에 나란히 누워 치료를 받은 일이 있다. 아직 항생제가 나오지 않았을 때라 아주 위험한 상태였다. 그때 어머니가 우리 침대 옆에서
간절히 기도를 드리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25 PAGE 까지 전재한다.
앞으로 며칠간 인테넷 공백으로 들어가 읽기 만하고  쓰지못함을 공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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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7 It's the most wonderful time of the year! [5] 2011.12.22 Chomee#65 2011.12.22 6924
2136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5] 2011.12.22 노영일*68 2011.12.22 6430
2135 [Book 연재] "사선을 넘어서" by 김익창*56 #2 [4] 2011.12.21 운영자 2011.12.21 4876
2134 Merry Christmas celebrating with Betelehemu [10] 2011.12.20 문광재*68 2011.12.20 6332
2133 Holiday Greetings With Arirang(From Maryland) [9] 2011.12.20 신성려#65 2011.12.20 5692
2132 Let's Pray, Koreans ! [5] 2011.12.19 이한중*65 2011.12.19 5586
2131 나의 "사선을 넘어서" [5] 2011.12.19 노영일*68 2011.12.19 5220
2130 새 얼굴 / 김광섭 [9] 2011.12.18 Chomee#65 2011.12.18 6255
2129 Kim Jong-il of North Korea dies [2] 2011.12.18 운영자 2011.12.18 2629
2128 북한의 김정일 급사 [3] 2011.12.18 운영자 2011.12.18 4538
2127 사랑 [7] 2011.12.18 조승자#65 2011.12.18 4996
» [Book 연재] "사선을 넘어서" by 김익창 (1956 Class) #1 [4] 2011.12.17 민경탁*65 2011.12.17 5272
2125 The Christian Living / John Eudes [7] 2011.12.17 이한중*65 2011.12.17 5131
2124 [re] 故 박태준 명예회장 사회장 엄수 [2] 2011.12.17 황규정*65 2011.12.17 5661
2123 멀리 사는 친구야 [3] 2011.12.16 조승자#65 2011.12.16 5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