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19 18:46
그 때 그 때 - 1 영도 경기여중 천막교사 1.4후퇴로 큰언니 가족과 대전 근처 구만리에 있다가 부산에서 학교가 열렸다고 하여 그곳은 거제리, 기차 철도건너 저쪽 하늘 아래 콘센트집 포로수용소가 보이는 곳, 누군가가 팔을 잡아올려야 겨우 올라타는 곳간차, 영도의 경기여중(당시 교명은 경기여중으로 1학년에서 6학년까지) 가교사 역시 텐트 밑, 6학년초 학제 변동이 있어 6월이 학년 시작이었는데 이 해에는 다시 9월초가 학년의 시작이 된다고 한다. 그 때 -2避難 1.4 후퇴를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본다. 9.15 상륙작전으로 대포소리가 연일 쿵-, 쿵 하더니 9. 28에는 서울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한파가 닥쳐온 어느 겨울날 서울은 다시 술렁거리는 동요가 일어났다. 특수층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가 물론 여의치 않아 서울역, 용산역, 영등포역 등으로 몰려간다. 캄캄한 겨울 밤, 기차는 남으로 남으로. 이제는 살았나보다, 두근거리던 가슴이 편안하다. 가다 서고 또 가다 서는 것은 비상시에 정상적인 일이었었을 수 밖에. 대전, 下車, 우리들 가족은 어느새 어슴푸레 앞이 보이기 사작하는 새벽길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정처없이 뚫려있는 시골길을 걸었다. 대전에서 한참을 논밭을 눈에 가득 바라보며 구비구비 길을 돌아 걸어가니 ‘구만리’ 라는 한적한 마을이 있었다. 넓직한 방은 일곱 식구가 넉넉히 뒹굴 수 있는 공간이다. 흰 옥양목으로 아래 위 바지 저고리에 회색 또는 옥색 조끼를 입고 양말에 대님을 매신 중년보다 나이 드신 혈색 좋으신 분이 그곳의 주인아저씨이다. 저녁밥을 끝내면 의례히 노크 한번으로 자동적으로 쪽문이 열리면서 주인아저씨는 거의 하루도 안 빼놓고 마슬 오신다. 계다가 그 주인아저씨는 우리 세 명 한참 나이 처녀들의 인물 평을 하신다. 노래가 나름대로 그의 귀와 마음을 만족시키면 그 조끼주머니에서 삶은 밤 한 톨씩 賞品으로 꺼내신다. “앗따! 시구지다!" 하시면서. 불룩하지도 않은 그 주머니에서 때로 엄청 많이 나오는 걸 보면 퍽 큰 주머니인가보다. 상품용호주머니를 마나님께 특별히 주문하셨는지. 그 부인은 얌전하신 현모양처형이셨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뭐하러 처녀들 많은 그 방에 밤마다 놀러가느냐"고 바가지도 일체 안 긁으셨나보다. 4살 위 언니가 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한 달을 모 여고교사로 취직하고 월급 받은 날에 6.25전쟁이 일어났는데 이것도 7-8 개월이 지난 시점 그 월급을 아직도 좀 지니고 있었는지. 한 시간 이상 두 시간도 걸리는지 대전시내까지 나가면 그곳 형편은 어떤지 알 필요도 없고 아랑곳 없다. 지금이 전시인지 아닌지 인식한들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능동적인 생활형편도 아닌 시점에서 말이다. 늦은 봄에인가, 우리 학교가 부산에서 공부를 시작했다는 소식에 나는 구포에서 부산으로 통근하고 있는 큰 오빠집 한칸 방에 올케언니도 있는데 끼어 자기로 하고 그곳으로 이동하였다. 무슨 교통편으로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급급하게 긴장되었던 일이 아니니 이렇게 기억이 희미한가보다. 1.4 후퇴 무렵 결혼한 비교적 신혼부부 오빠내외가 사는 단칸방에, 공부가 아무리 좋아도 얼마나 영치없는 일인가 생각된다. 친한 친구 오복근과의 구포에서의 우연한 만남은 퍽 신기한 것이었다. 매일 등교 하교를 기차통학으로 함께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 전주에서의 피난생활을 거두고 부산으로 오신 보모에게 가게 된 것이 가장 적합한 나의 피난지 보금자리가 되었다.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가 11세에 돌아가시고 새로 오셔서 여러 남매를 보살펴주신 분이시다. |
2011.08.19 20:30
2011.08.19 21:09
방준재 선생님,
우리 사회, 우리 나라 그리고 하나가 되어 잘 해나가야 하는 우리 인류,
누가 당해도 기꺼히 모든 것을 감수해야겠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야 하겠지요.
역사롤 왜곡하고 엉뚱한 소리하여 앞 뒤 안 맞는 말, 행동으로
순수하고 존엄해야하는 인간의 주장하는 권리와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의식 못하는 것은 유감이지요.
백 사람이 희다하여도 검은 것은 검으니 말입니다.
언젠가는 어린이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큰 일들을 할 것입니다.
어릴적에 뇌리에 박힌 것은 지우려도 지울 수 없는데 바른 역사 바른 판단으로
집에서는 부모, 학교에서는 선생님들께서 한 마디도 소홀히 하는 일 없이 좋은 교육으로 귀한 후세에게 대하기를 바랍니다.
2차대전, 육이오 등 겪은 저희 연배의 분들이 차츰 수가 줄어들지만
불행했던 과거를 뇌까리고 싶지는 않은데 머리 속, 가슴 속 가득 비참했던 일들도 자꾸 생각나는군요.
행여 감상적인 것들은 다 걷어내고 즐기고 사는 중에 중요한 일들은 직시하며 생각하며 살고 싶습니다.
슬기롭게, 그리고 예도 바르게, 그러나 운치도 있게 살다가 가신 우리 조상들의 넋을 기리며
그분들께서 물려주신 우리나라가 앞으로도 우리의 평소생활에서 힘을 모아 잘 되어나가리라고 믿습니다.
뜻 있는 답글을 써주시어 감사드립니다.
2011.08.19 21:23
2011.08.19 21:32
방준재 선생님,
감사합니다.
조금 더 계속될 것입니다.
2011.08.20 01:08
김선생님! 그 당시가 생각나는 사진들과 노래 하나 붙입니다.
http://blog.naver.com/vnfmstjfxkd/70033423019
2011.08.20 03:40
김창현 선생님,
저의 글을 읽어주시고 또,
6.25 당시의 자료들을 답글에 link하여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2011.08.20 22:33
6 25,
9 15,
9 28.
Unforgettable Historical Dates in Korean History.
What was I doing during those period?
Fishing "Boong-er(carp)" for my late father's dinner.
I was only five years old.
How am I trying to memorize 6 25 and related dates as above?
Trying to use those days to Remind People in General, especially
Young Generation to Remember and to Let Them Know How We
Built Korea Today from the Ashes of 6 25.
The first attempt will be on September 29th for our first public
gathering using War Documentary(e.g, "Inchon" - about Inchon
Landing and General McArthur) by Korean-American Society
for Tomorrow(KAST.US.COM) at Open Space in Flushing, NY.
It will be direct attack to "Jun-Gyo-Jo"(Teachers and Education
Workers' Union in Korea) who teaches Distorted Korean History
to our Young Generation in Korea. And I see it's spreading to our
children in the USA.
Thank you, sun-bae-nim, for your sharing - sharing your
memories of dark days in our history. I hope it would not
happen again on our Korean Peninsula.
Once is Enoug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