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20 17:23
그 때 -4, 의예과 합격자 발표 대학입시를 위한 학원 등록, 아버지는 피난살이에 어려우셔도 공부시키시는 열은 대단하여 나에게 진학에 대하여 불편을 주지 않으셨다. 대신동에 있는 학원에 다녔다. 낙동강을 끼고 그 남쪽은 한번도 인민군 점령으로 피난등 동요는 없었던 곳이므로 전시이기는 하나 부산시내의 이 학원도 어느 정도 안정된 환경에서의 입시 준비 강의를 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드디어 시험날, 머리에 있는 것 없는 것 전력을 자아내어 답안지위에 펜을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언제나 시험이란 답안지를 대하면 죽을 기를 썼듯이.
'서울대하교 문리과대학 의예과부'에 입학하였다. 외부 강사들도 혹 오셨는지 모르지만 대부분 문리과대학의 교수님들이 오신 듯하다. 11명은 경기 2-맹시선, 김성심, 숙명 1-이화순, 이화 1-계희숙, 무학 1-김평남, 수도 1-이민자, 경남 2- 김명희, 신옥하, 부산 1-김동필, 군산 1-김순덕, 이리 1- 유명해진 이길여 이었다. 전라도에서 온 두 학생은 조금 후에 강의 들으러 부산에 왔다. 1년 위 상급반에는 백은진 언니가 계셨다. 세 자매가 고요 동문이신데, 백경진선배님, 벽형진은 나의 친구. 모두 다 나와 함께 내가 3학년때 전학갔던 경성여자사범학교부속국민학교의 동문이기도 하다. 백은진언니는 얼마 후 미국유학을 떠나 미국에서 이학박사를 받고 미국에서 대학 교수로 계시다가 은퇴하셨다. 송도해수욕장에서 얼마 안 있다가 부산역에서 도보로 10-15분 걸렸을까, 제5육군병원이 있던 근처 부둣가의 2층 건물로 강의실을 옮겼다. 남태경교수의 생물학 강의는 능숙한 속기라야만 노트가 정리되는 것아다. 강의 후에는 뒤에서 등을 쿡쿡 찌르며 노트 보여달라고 한다. 번번히 노트를 내어줄 때 좀 짜증나지만 그때에는 일반적으로 책도 구매하여 사서 보기도 어려웠고 내어주시는 교재도 변변치 못할 사정들이 있는 때이었으며 물론 요즘같이 인터넷 혜택도 없었으니 서로 돕고 공부해야 했다. 교재는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강의하시는 분도 가끔 계셨고 최윤식 수학교수님의 '해석개론' 강의는 정말 쫓아가기 난감했다. 문영현 국어교수께서는 큼직한 얼굴에 어울리는 큰 입으로 웃으시면서 '허 허-" 하시면서 뭔가 유머를 말씀하실듯 말듯, "---- 가라리 너이로다. 둘은 내해였고 둘은 누해인고." 교재로 선택한 것 중에서 옛글을 읽으시는데 남여 학생들은 킥킥 웃었다. 교수님도 웃으시고. 왜 그때 학생들의 웃음소리는 당당하지 못했을까. 영어시간, 박충집교수님(두 아드님, 박병걸, 박병ㅇ도 우리 선배로 계시다가 유학 떠나신 듯)의 강의, Civilization - past and present - 끝도 안 나게 긴, 활자도 알아보기 어려운 등사판 유인물 교재. 1단계로는 그 spell을 정확히 덧그려 놓기 2 단계로 그 많은 단어 사전에서 찾아 빽빽하게 써 넣은 후 완벽히 해석을 해가는 예습을 해야만 두 시간씩 계속되는 강의를 놓지지 않게 된다. 본 시험에서의 통과가 드믈고 재시험이 다반사이었다. 황득현 교수의 독일어 강의 들으면서는 구라파에 대한 어떤 연민을 느끼기도 하였다. 성공회신부님 Father 바로우의 'Hey ho, Hey ho ---' 하며 英詩 읊으시던 크신 키에 조용한 목소리가 떠오른다. Latin어는 신사훈 교수께서 가르치셨다. 당시 해부학에서 용어가 라틴어로 되어 있어 불가결한 필수과목이었던 것인지 어미변화가 재미있었다. 문화사는 유홍렬교수님으로부터 배웠다. 두번 째 부둣가 2층 집 강의실로 이사 가서 화장실은 좁은 골목 길가, 강의실 건너편에 날림으로 판자로 준비된 남녀공용 재래식 화장실 두 칸이 있었는데 칸막이 木材에 옹이 빠져나간 구멍으로 매우 불편하였다. 어느 기말고사 때인지 컨닝 예방 목적으로 여학생은 2층 남학생은 아래층에서 시험 치른 적이 있었다. 시험은 홀가분하게 끝나고 공지사항이 있어 기다리는 시간에 여학생들이 장난을 쳤다. 기차통학하던 그때 간간이 휴강으로 집에 일찍 돌아가야 하게 되면 버스를 이용할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난로 꺼진 추운 강의실에 남아 있다가 오후 퇴근자들을 위한 시간의 기차를 타야만 하는 것도 나의 인내심을 길러주었다. 전시에 그렇게 기차가 자주 움직이지 못한 것 같다. 부산역에서 송도해수욕장까지 걸어다니던 긴 길을, 곳깐차 속에서 둘둘 말은 영어교재, 내 것과 똑 같은 종이를 들고 있던 남학생과 만나 걸어간 날이 있었다. 그 남학생은 그 후도 60년가까이 같은 세월을 나와 동행하고 있다. 이제 할 말도 별로 없이 쳐다보며 살면서 외모도 너무 달라져서 서로 측은하다. '의예과' 하면 항상 웃으며 친절하셨던 사무직원 'にこにこさん'을 생각 안 할 수 없다. 그 분을 알고 계신 의예과 선후배님과 함께 지금도 그 분의 웃으시는 얼굴에 박수를 드린다. 계속 ->그 때 -6, -7[끝] |
2011.08.21 11:15
2011.08.21 13:28
황규정 선생님,
댓글 감사합니다.
brain의 capacity에 한계가 있을텐데 저는 때로 별의별 것이 다 떠오릅니다.
지난 얘가거 머리 하나 가득, 새롭고 유익한 일들을 충전 시키지 못하는 불리한 점이 있겠지요.
'박병락'이란 고인이 되신 Endocrinologist 아드님도 계셨군요.
일찌기 유명을 달리하셔서 애석합니다.
피난지, 부산에서 시험을 보아, 여학생이 부산에서 , 전라도에서도 지원을 하고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간 피난생활의 학생등, 유난히 저희 class에 여학생이 많았습니다.
저의 윗반 아랫반은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의대시절의 추억은, 글로는 참아 못 올릴 episode들도 많지만 극히 피상적으로
배운 과목과 교수님 성함만 나열하면서 말 못할 추억들은 마음 속에만 가득하였습니다.
그나마 3, 4년 때 얘기와 스승님들의 얘기는 너무 지루해져서 말을 못 꺼냈고
황급히 말이 끝나버려서 제목에 부합하지 못한 글이 된 것 같습니다.
황규정 선생님,
건강하시고 즐거운 시간들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선배님께서는 어쩌면 그렇게 기억력이 좋으세요.
각과마다 조목 조목 다기억하시고. 말씀하신 많은 교수님들한테
저의도 배워서 더욱 흥미가 있네요.
120명중에 여학생이 11분이나 되셨다니 그당시를 생각하면 상당히
파격적이라 생각됩니다. 저희때는 120명중에 두명 이었거든요.
지금은 여학생이 반이상이라는 소리를 듣고 격세지감을 금할수없습니다.
말씀하신 박충집 영어 교수님한테는 저희도 배웠으며 그분 아드님이 우리동기였습니다.
박병락이라고 뉴욕에서 Endocrinology개업했었는데 지금은 유명을 달리해서 지금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