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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limb of Mount McKinley, Alaska  

South (Kahiltna) to North (Muldrow) Traverse

June and July, 1979
Abridged and edited for non-climbers


그 당시 의예과는 문리대에 속해있었고, 따라서 나는 문리대 산악회의 일원이었다. 1961 년경 어느 주말 서울근교 산행 중 해외원정등반 얘기가 나왔었다. 그때 마침 처음으로 동국대 (아니면 경희대) 산악회에서 대만의 옥산을 처음 해외원정으로 등반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을 때였다. 그때 문리대 산악회 우리에게는 일전한 푼 없었던 주제에 국립학교에서의 해외원정 등반에 대한 보조는 꿈도 못 꾸는 때였다. 그때 문리대 선배 한 사람이 "그러면 우리는 언제고 Mount McKinley of Alaska를 해보자!" 했다. 그때 상황은 해외로 나간다는 것도 전혀 불가능했었거니와, 겨우 설악산이나 지리산 동기등반의 미비한 경험으로는 Mt. McKinley의 極地 高山 등반은 아주 감감하기 짝이 없는 얘기였었다. 그때 그 자리에서 분수에 넘친 희망을 토로했던 山 友들은 아마 다음 순간 까맣게 잊어버렸을 McKinley였지만, 무슨 이유였는지 몰라도, 내 기억에서는 잊히지 않고 살어 있었다. 문리대를 떠난 후 의대에서 그동안 끊어졌던 의대 산악부를 다시 시작했고, 문리대 산악회와는 더 접촉이 없었지만, 맘속 어디엔가 McKinley의 꿈을 언제 실현할 수 있을가 생각해 본적은 있었지만, 전혀 엄두도 못 낸 채 졸업했다. 그러나 뜻밖의 渡美와 함께, 나에게는 잊히지 않았던 Mount McKinley가 자유롭게 가까이 되자, 옛날 생각이 가끔 떠오르곤 했다. 미국에서의 바쁜 training을 끝내고 난 후, 시골구석에 틀어박혀서 외과 개업에 몰두하던 어느 날, 문득 나는 40 고개를 바라보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10년이면 50세, 또 한 번 10년이면 60세가 아닌가? 소년 시절의 꿈은 다 어디로 가고, 인생이 겨우 이걸로 끝나는것일가?

한번 지나간 시간과 젊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절실히 느끼면서, 1977년, 그 즉시 Mount McKinley 등반계획을 구체적인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막연했던 한 가닥의 잊혔던 희망이 하나의 견고한 執念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 당시 아주 바빴던 의사생활에 대한 일종의 반발, 아니면 나에게 mid-life crisis가 다가왔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예비등반으로 Mount Rainier (14,411 feet, 4,392m)를 목표로 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계획이 유산되었고 1978년에 다시 계획했었는데 동반할 친구들의 사정으로 다시 좌절되었다. 학교 다닐 때와는 달러 모두 결혼하고 의사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등반팀을 만든다는 것이 정말 어려웠고, 결국 어려운 꿈은 혼자서 꾸는 게 첩경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혼자 가기로 결정한다. Talkeetna, Alaska에서 McKinley 등반 안내를 하던 Ray Genet Expedition과 American Alpine Club을 통해 연결되어 1978년 가을에 구체적인 계획이 시작되었고, 집에서와 Colorado에서의 Training을 시작했다. 1979년 2월 말에 Colorado Outward Bound School의 훈련을 받으며 Ten Mile Range의 Pacific Peak (13,950 ft / 4,252 m) 동기등반을 하며 겨울 雪山등산기술과 겨울기본생존훈련(Winter survival training)을 맞추었다. Colorado의 13,000 feet 고지에서 일주일을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견뎌보며, 나의 집념과 신념이 흔들리기를 은근히 바랬지만, 산에서 내려왔을 때 McKinley의 꿈에는 변함이 없었고, 그해 6월 초에 McKinley 등반이 확정되었다.

Alaska로 떠나기 불과 10일 전, 1979년 5월 29일에 한국 산악회의 고상돈 씨 팀 (3명)이 성공적으로 한국인 최초의 Mount McKinley 정상에 올랐다. 1978에 일 년 더 기다린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곧바로 고상돈 씨 팀의 조난사고가 보도되고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산에서 죽는다. 이 사건이 나 자신과 가족들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놨지만, 내친김에 이미 결정된 계획대로 계속하기로 작정한다.




1979년 6월 9일, 집에 3살 6살 두 아이와 아내를 두고, 무거운 발길로 Henderson, Kentucky의 집을 떠나 Alaska로 향한다. 강 건너 Evansville, Indiana의 공항에서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뜨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Ohio 강가에 자리 잡은 Henderson 위를 잠간 지난다. 창문으로 밑에 보이는 조그만 도시를 보며, "다시 돌아 올 수 있을가" 하는 불안감에 잠긴다. 이틀 후 6월 11일, Mount McKinley등반의 base가 되는 Alaska의 내륙 조그만 마을인 Talkeetna에 도착한다. 그때 만 39세를 몇 달 앞둔 나의 모습이다.

6월 13일, 며칠 동안 바람으로 비행기가 뜨지 못하다가 드디어 Single-engine Cessna 경비행기로 Talkeetna를 떠나 Mount McKinley의 base camp가 되는 Kahiltna Glacier (6,000 feet)의 빙하 위에 착륙한다. 비행기에서 짐을 꺼내고 있다. 그때는 이름도 없는 빙하 위의 Landing strip이었지만, 후세의 Climber들이 KIA (Kahiltna International Airport)라는 애칭을 부쳤다. 일단 착륙하면 비행기의 스키가 눈에 박혀서, 이륙할 때는 승객들이 비행기를 한참 밀고 가다가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잽싸게올라타야 된다.

앞에 보이는 산이 Alaska Range에서 두 번째, 미국에서 4번째 높은, Mount Foraker (17,400 ft - 5,304 m). Base camp는 그 바로 동쪽 밑의 Kahiltna 빙하에 있다. Alaska Range의 주축인 Mount McKinley (20,320 feet - 6,194 m)는 누구나 알겠지만 북미대륙에서 제일 높은 산이며, 등반해야 할 고도로 치면 세계에서 제일 높이 올라가야 하는 산이다. Everest의 11,000 feet 등반보다, 여기는 base camp에서부터 14,000 feet을 올라가야 된다. 더구나 북극권에 가까운 산으로 세계에서 가장 추운 산이기도 하다. Mount Everest에서는 만년설이 18,000 feet에서 시작하지만, 여기에서는 불과 3,000 feet에서 시작된다.



비행기 쪽에서 바라본 McKinley Base camp의 모습. 세계각지에서 도착한 등산객들이 모인 조그만 국제사회.
올라가는 사람들은 비행기에서 내리고 등산을 끝내고 내려가는 사람들이 비행기를 기다린다.
그해 이미 많은 팀이 정상에 도전했지만, 돌아가는 사람 중에서 아무도 정상에 도달한 사람이 없었음에 문득 마음이 선뜻해짐을 금치 못한다.
어젯밤에 쓴 遺書와 아이들에게 남기는 내 육성의 cassette tape를 Talkeetna 여관, Road House 주인 부부에게 건네주었을 때, 말 한마디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받아준 그들의 얼굴이 생각났다. 거기에 아직도 집을 떠났을 때의 무거운 마음이 남아 있었지만, 곧 Base camp의 바쁜 설치 작업과 현지에서의 Glacier Rescue 훈련 등으로 다른 생각들이 곧 잊히기 시작했다.

흙이 보이지 않는 곳... 눈, 바위, 얼음뿐이다. 드디어 雪山의 생활이 시작된다. Tent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 그 바로 뒤에 Mount Foraker의 위용이 보인다. 산밑에 깊은 골짜기에 있는 우리에게는 McKinley 정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곧, 그날그날의 어려움과 등반에 대한 정신집중에, 모든 속세의 혼란한 생각이 점차 없어지고, 정상에 대한 목표만이 맘에 남게 된다. Tent 안에서 밖앗의 모진 바람 소리를 들을 때 가끔 집 생각이 나곤 했다. 나 자신은 아무런 염려 없이 안전하게 생각되는데, 집에 있는 두 아이와 아내가 오히려 모진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안하게 생각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Base Camp의 모습. 여기에서 하룻밤 보내고 내일부터 등반이 시작된다.



6월 14일 아침, 처음으로 Rope Team이 구성된다. 한 Rope에 네 또는 다섯 명씩 연결되고 제일 선두의 Rope Leader를 따라서 한 줄로 올라가게 된다. Rope leader가 climbing pace를 정하게 되는데, 서로 교대해가며 위치를 바꾸어 간다.

McKinley 남쪽의 Kahiltna Glacier. 여기는 빙하의 하류로서 아주 넓은 계곡을 이룬다. Base camp에서 출발해서 천천히 상류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빙하 위를 걸어가는데 빙하 자체는 갈라진 얼음덩어리이고 그 위에 눈이 사붓이 덮인 것이다. 가끔 눈 속에 숨겨진 얼음의 균열 (Crevasse)이 있고 거기는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멍이기 때문에 이미 밟아진 tract만을 따라가는데, 혼자서는 갈 수 없고 Rope로 서로 맨 채 앞뒤 한 줄로 전진한다. 이때 눈다리 (雪橋)가 무너져 한 사람이 빠져 들어가도, 다른 rope member와 줄로 연결되어서 빠지다가 매달리게 된다.
가끔 빠지는 사람이 생기는데 몸이 완전히 전체로 빠져버리는 경우는 적고, 대개 등에 진 배낭에 걸려 다리만 공중에 뜨는 경우가 많고 이때 이미 훈련된 구조방법으로 끌어 올린다.
 

위 사진에서 제일 마지막 사람이 짐을 썰매에 싣고 끌고 간다. 이게 두 배 고된 일인데 교대로 끌게 된다.



Kahiltna Glacier의 광대한 크기를 상상할 수 있다. 앞에 보이는 조그만 점들이 10리 20리 밖의 사람들이다.
산속의 깨끗한 공기 때문에 먼 거리도 아주 가까이 보인다. 따라서 전진이 한없이 늦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오늘의 등반은 짐 나르는 등반 (cache trip)으로, 한 짐 지고 올라가서 내려놓고 다시 내려와서 Base camp에서 잔다.
極地등반 방법(Polar method)으로 장비와 식량을 몇 번 며칠에 걸쳐 날러 올리면서 조금씩 전진한다. 따라서 전 길이를 두 번세 번 반복해가며 올라가는 셈이다. 또 고도적응을 위해서 일부러 하루에 1000feet이상 고도를 높이지 않는다.

이때는 내가 Rope leader인 모양 Rope의 제일 앞에 서 있다.
잠깐 쉬는 동안 옆의 Rope team인 Leigh와 사진 한 장.
지금 Leigh나 나의 배낭 속에는 식량과 연료 한통만 들어 있다. 이 수송이 끝나면 다시 먼저 Tent로 내려간다.
며칠 면도를 안 해서 그런지 내 코밑이 검게 보인다.
사진 오른쪽 밑에 내 배낭의 일부가 보이고 거기에 내 사진기인 Nikon FM이 매달린 게 보인다. 온도는 화씨 30도 부근이지만 계속 따가운 햇볕 아래 걷기에 옷이 땀으로 젔는다. 조금 더 더워지면 윗도리, 바지도 벗어버리고 속옷만 입고 가게 된다.
Snowshoes를 신고, 그 위에 신발은 Korean Boot으로 한국전쟁에서 쓰던 고무 군화. 이 군화만이 유일하게 동상을 방지할 수 있다 해서 모두 이것을 신는다. 신발 벽에 공기를 불어넣어 보온을 시키는데 아주 투박하고 무겁고 크다.



골짜기의 Kahiltna Glacier를 둘러싼 산들이 양쪽을 완전히 막고 있다.



6월 18일, 며칠이 지나 Kahiltna 빙하가 동쪽으로 꾸부러지며 산을 향해서 급경사가 되기 시작하는 곳이다.
여기는 Camp #5, 약 10,000 feet. 어젯밤에 도착해서 마침 정상등반하고 내려오는 한국의 고령산악회 팀을 만났는데 한 사람이 심한 동상을 입어 아픔에 고생하고 있었다. 전대원들이 모두 심하게 지친 모습이였지만 위로의 말밖에는 더 도와줄 수가없었다. 몇년후 들은 얘기지만, 이중의 한 사람은 하산을 하다가 base camp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고 했다. 한국 월간 사진잡지에 의하면 이 사람이 6월 16일에 사망했다 하는데, 내가 이들을 만났던 것이 분명히 6월 18일 저녁이어서 좀 의아한 데가 있다. 이들 7명 중에서 두 사람이 정상에 도달했다고 한다. 따라서 내가 성공한다면 나는 한국인으로서 6번째 정상에 도달하는 사람이 된다. 지금까지 성공한 한국인 다섯 사람 모두가 남면에서 올라가서 남면으로 내려왔기에 (세 사람은 죽어서 내려오고) 아직 한국인으로서는 McKinley 종주 (南面으로 올라가서 北面으로 하산하는) 한 사람이 없었다. 이 당시 국립공원 기록에 McKinley 정상에 도달한 사람이 전부 100명 남짓했었다.

나는 거기에 한 가닥의 희망을 걸게 된다. 그때 우리 팀 중의 8명이 나를 포함해서 종주(Traverse)를 하게 되어 있다. 과연 할 수 있을가? 올해에는Seattle 산악회 팀이 얼마 전에 처음으로 종주에 성공하고, 우리가 두 번째, 그리고 올해 마지막의 종주팀이 된다. 종주의 경우, 돌아오는 길이 달러서 식량과 장비를 모두 가지고 올라가야 된다. 따라서 종주하는 사람들은 아주 드물었다.



6월 20일, 어젯밤에 Windy Corner를 지나 Camp #6 에 도착했다. 여기는 14,000 feet.
우리는 드디어 끝없이 지루했던 Kahiltna 빙하를 벗어나 McKinley 산 중턱에 올라선 것이다.
그대신 여기는 보호되는 바람벽이 없어서 모진 바람과 추위를 맞이하게 된다.
낮에는 햇볓이 따가와서, 일부러 아침 일찍 짐을 나르고 낮에는 쉬거나 낮잠 자다가, 저녁에 해가 낮게 내려갈 때 산으로 또 올라가며 짐을 나른다. 이때는 여름 한 철이라 해가 밤 12시쯤 지고, 새벽 2시에 뜬다. 그 사이에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고 계속 밝은 채로 있어서 한밤중에도 등반이 계속된다. 따라서 식사는 좀 엉망진창이 된다. 그나마 우리가 시간 나는 대로 끓이는 식사인데 먹을 것도 좋은 게 별로 없었다.
정상에 서 보겠다는 執念, 그것 하나만이 매일매일의 피곤을 잊게 해주고 내일을 기다리며 살게 해준다.

다음이 West Butress인데 "Head Wall"이라고 부른다. Head Wall을 올라가기 전에 여기에서 고도적응도 할 겸 다시 하루를 완전히 쉰다.
여기에서 쉬는 동안 산 위에서 부터 조난자들이 몇 명 내려왔다. 지친 사람들이 걸어서 내려오지 못하고 급경사를 구르거나 기어 내려왔다. 그중의 두 명은 아주 심한 고산병과 탈수증에 걸려 있었다. 한 사람은 지극히 위중해서 Ray Genet이 무전기로 비행기를 불러서 이송해갔다. 이 고도의 작은 빙하에 비행기가 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온 종일 빙하 위의 눈을 밟아서 활주로를 만들어주었다. 다음날 Head Wall을 올라가면서 밑을 내려다보니 구조비행기가 착륙하고 환자를 싫고 간신히 낭떠러지 전에서 하늘로 이륙하는 것을 손에 땀을 쥐면서 보았다.

우리 팀 중에서도 환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4,000 feet의 고도와 그동안의 과로가 겹친 모양이었다. 다행히 우리 팀에는 나까지 3명의 의사가 있어서 돌아가면서 돌보아줄 수 있었다. 다행히도 나 자신은 여기까지는 건전했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급경사 6,000 feet (정상은 20,320 feet)이 걱정되었다.



며칠이 지났다. 6월 23일에, West Butress (가장급하고 힘든 부분의 하나. 사진을 여유조차 없었다.) Head Wall을 오르고, Camp #7인 West Butress Ridge (능선위)에서 Tent를 설치하자 (16,200 feet), 심한 폭설과 바람을 만났다. 무섭게 차가운 북극의 한파풍이 눈과께 계속 사흘안 불어댔다. 능선 위라 완전히 노출된 우리는 바람을 막아줄 것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Tent 안에서 꼼짝 못 하고 갇혀 있었다. 폭풍과 눈보라 속에서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닷새 후에 드디어 날이 개자, 6월 28일, 우리는 다시 정상 쪽으로 이동을 시작한다. 올라온 거리는 별로 높거나 멀지 않았지만 능선 위의 바윗길과 고도의 산소부족으로 아주 힘들었다. 이날 저녁 늦게 Camp #8을 17,200 feet에 설치한다.

6월 29일 (위 사진), 여기는 West Butress의 능선을 지나 Denali Pass로 올라오는 길이다. 고도는 이미 16,000 feet를 능선 위에서 보내고, 지금 Denali Pass 의 18,000 feet로 올라가고 있다. 누구에게나 처음 당하는 고도로서 눈 속에서의 등반전진이 한 걸음마다 아프고 힘들었다. 여기에서처럼 앉아서 쉬다가 뒷 팀이 도달하면 다시 일어나 올라가기 시작한다. 빤히 보이는 Denali Pass의 고개가 한없이 멀리 보인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sleeping bag만 가지고 갔지만, 우리 종주팀은 장비와 식량을 다 가지고 가기에 짐은 계속 무거웠다.
Denali Pass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바람만이 지나가는 곳이었다.
밤늦게 Denali Pass에 도착 (18,200 feet)해서 매서운 찬바람속에서 Camp#9을 설치한다.
어찌나 추운지 휘발유 Burner에 불을대도 불이 붇지않었다. 밤한시에 간신히 눈을 녹여 저녁을 데워먹는다.



6월 30일, 아침 일찍 Denali Pass를 떠나 마지막 2,000 feet를 오른다. 극심한 高度라 숨이 지극히 찼고,
마즈막 정상까지는 급경사의 계속이였다. 19,500 feet에 임시로 설치한 Tent안에서 (Camp #10) 잠간 쉬면서 몸을 녹히고, 마즈막 정상길에 오른다. 그동안 친하게 같이 지내며 등반했던 Leon이, 이제는 더 올라가지 못하겠다고 기권하면서, 나에게 남은 Camera film 한통을 꺼내주며 정상에서 쓰라고 준다. 그는 내가 사진 film이 떨어지게 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의 아름다운 친절에 깊이 감사한다.
Ohio에서 온 Leigh는 아픈 다리를 못 참아 엉엉 울면서 걸어갔지만 결국 나중에 정상에 도달한다.

한 반쯤 더 지나서 편편한 곳에 왔을 때 우리 중의 첫 번 팀이 정상을 들려 내려왔다. "바로 저쪽 위라고" 하지만 믿기 어려운 얘기... 하지만, 여기에 힘이 나서, 힘들고 숨찼지만 계속 올라간다. 정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비스듬히 정상 능선처럼 보이는 언덕을 땅만 보면서 올라간다. 조금 후 땅이 평평해지는 것 같기에 눈을 들어 앞을 보니, 약 30 meter 앞에 정상이 보이지 않는가 !! 두번 째 팀이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정상을 눈 앞에두고 나도 모르게 더운 눈물이 얼굴을 적시는 것을 느꼈는가 했는데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벗으니 눈물이 안경에 얼어붙어 있었다. 너무 지쳐서 기쁨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단지 더 올라갈 곳이 없다는 것과할 일이 다 끝나서 다행이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이 왔지만 우리가 모두 무심한 듯이 사진 몇장을 찍고 찍어준다.

6월 30일 오후 2:30 (위 사진)에 내 일생 이정표 중에서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의 하나가 왔다.
바로 Mount McKinley의 정상 (6,198 metres - 20,320 ft)이 내 발밑에 온 것이었다.
제일위의 흰색기가 태극기, 그 밑에 붉은색 기가 서울대 pennant이다.



정상의 하늘은 너무 맑아 오히려 우주에 떠있는 것처럼 어둑어둑했다. 전 북미대륙에서 내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순간이었다. 준비해온 두 개의 旗를 Ice Ax에 걸고 사진을 찍었다. 태극기, 그리고 서울대학교 旗였다.
여기에서 잠깐 장갑을 벗고 Camera의 film을 바꾸는 동안 Camera 쇠에 닿은 손가락 끝에 동상을 입는다.
오랫동안 원했던 정상이었지만 한 10분 후에 Rope의 방향을 바꾸어 하산을 시작한다. 오늘 내려갈 길이 멀다.

정상에서 내려와 Denali Pass에서 Tent를 거두고, McKinley의 북쪽 사면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처음에 만난 것이 Harper Glacier였는데 여기는 남쪽사면보다 훨씬 길이 험하고 급했고 여러 번 Ice piton과 Rope로 내려와야 했다.
사진에서 부서지고 쪼개지는 빙하가 잘 보인다. 이 부분을 Ice Fall이라고 부르는데, 밑의 바위지반이 급경사일 때, 어름이 넘어오면서 부서지기 때문이다. 이 부서지는 것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니, Ice Fall는 등반 때 조심해서 피해 가거나 빨리 지나치도록 한다. 여기 사진에서는 빙하 위의 길이 막히자 옆에 있는 산등성이로 올라와서 급사면을 Traverse 해서 다음 아래의 빙하로 옮기는 과정으로, 뒤에서 따라오는 내 Rope팀이 내려오는 것을 찍은 것이다. 가장 급한 경사를 한번에 한 사람씩 지나고 양쪽에서 줄을 잡아준다. 나는 이미 선두로 건너와서 줄을 잡고, 두 번째 (Mark)가 건너오는 중, 세 번째 (Rod)가 윗 모퉁이에서  줄을 잡고 있고, 네 번째 (Winslow)가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
 


McKinley의 북쪽 면을 내려오는 길. Orange color line이 내려온 길. 거의 수직으로 떨어지는 Harper Ice Falls을 피하기 위해서 Karstens Ridge를 타고 내려온다. 이 부분이 제일 어려웠던 곳이다.

결국 앞에 가린 산 뒤의 Harper Falls 밑에서 하루 자고 Muldrow Glacier로 내려온다.



Browne Tower를 지나고, Harper Glacier가 끝나자 곧 칼날 같은 Karstens Ridge가 나온다. 부드러운 눈으로 된 칼날인데 양쪽으로 3,000 feet의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다. 내 앞에 가는 나의 Rope mate (Rod Anderson)가 두 무릎을 눈에 꿇고 주저앉는다. 아무리 용감하고 오만한 사람이라도 부서지는 눈의 칼끝에 서면 두 무릎을 안 꿇고는 견딜 수 없는 곳이다. 山의 위대함에는 어쩔 수 없으리라.
 

여기부터 Rod가 약 20 meter 내려갈 때까지 내가 위에서 belay 해주고 앞에서는 다른 Rope mate가 잡아준다. 

사진 오른쪽 밑으로 좀 더 완만한 칼날 ridge가 보인다. 계속 ridge를 타고 가다가 사진 윗중간 지점에서 왼쪽 Muldrow Glacier로 줄을 타고 내려오게 된다.

밑의 세 사람 그림자 밑에 보이는 것이 MuldrowGlacier 이다. 사진에 자세히 보면 편편한 빙하를 가로지르는 선들이 많이 보인다. 이것들이 살짝 눈이 덮인 Crevasse (균열된 얼음)들이다. McKinley의 여러 빙하 중에서 가장 크고 빠르게 흐르는 위험한 빙하로 알려졌고,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이 빙하에서 내 Rope team 중의 하나가 Crevasse로 빠지게 된다.



우리 팀이 Karstens Ridge를 거의 다 내려와서 뒤를 보고 찍은 사진이다. 우리가 내려온 길이 전부 보인다.
오른쪽 윗 능선에서 시작, 왼쪽의 칼날을 타고 내려온 길이다. 오른쪽 골짜기는 Harper Glacier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 Karstens Ridge는 거의 어느 McKinley 사진에서나 정상 밑 중간부근에 보인다. 흰색 고기 등어리 처럼 날카롭게 보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앞에 앉어 있는 소년은 Mark Edwards (Anchorage, Alaska)로 이날이 그의 15세 생일 바로 전날이라, 이것으로 그 당시의 McKinley 정상등반의 最年少者 (14세)의 기록을 깬다.



Muldrow Glacier로 내려와 Camp #11을 설치, 하루 저녁 자고, Muldrow Glacier를 zigzag으로 Crevasse를 피하며 내려간다. 여기에서 두 번째로 가던 Winslow가 Crevasse에 빠졌는데 물론 줄을 매고 가기에 떨어지지는 않고 빙벽 사이에 걸려서 매달린 것을 나머지 Rope Team 3 사람이 두 시간에 걸려 끌어 올렸다. 바닥이 얼음이었으면 쉬웠을 텐데 눈이 깊어 더 힘들었다. Winslow는 얼음 속에서 새파랗게 얼어 있었지만 곧 회복했다. 사진 왼쪽에서 큰 벽을 이루는 산들이 Pioneer Ridge의 일부이다. 우리 앞에 가는 Rope Team 네 명이 보인다. West Butress Wall에서부터는 급경사에 단단한 눈과 바위 때문에 Crampon을 썼는데, Muldrow Glacier에 들어와서는 다시 Snowshoes로 바꾼다. 모두가 눈이라 어디에 앉을 곳이 없어 보통 그냥 선 채 쉰다. 내 앞의 두 친구는 배낭을 깔고 앉았다.



이날 밤은 시시각각 움직일 수 있는 위험한 Muldrow Glacier에 Tent를 칠 수 없어서 밤을 새우며 계속 걸어 내려온다. 새벽 3시경에 뒤를 돌아보니, 마침 아침 해가 뜨면서 McKinley의 North Summit을 찬란하게 비춰준다. 정말 정상 (South Summit)은 까만 구름 바로 뒤에 숨겨져 있다. 이날 아침에 McGonagall Pass 밑 빙하 위에 텐트를 설치한다. McGonagall Pass를 넘으면서 Muldrow Glacier를 떠나 Tundra 평원으로 들어가며, Wonder Lake을 향해서 걸어나간다. 정상에서부터 Denali National Park의 길 (Wonder Lake)까지는 36 miles (약 140리) 거리인데 사흘 동안 빙하와 Tundra를 걸어 나와서 McKinley River를 허리까지 빠지는 물속으로 건너서 Talkeetna 떠난 지 한 달 만에 문명세계에 도착했다.
 
회고록은 간단하게 쉽게 써졌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수없이 많았다. 특히 정상등반 후에Ray Genet은 남쪽으로 내려가고 우리는 북면에서 불행하게도 어설픈 프랑스 사람 leadership 밑에서 고생하게 된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전원이 무사히 큰 사고 없이 하산했으며, McKinley의 정상등반과 종주를 성공적으로 끝낸다. 자연의 잔인함은 그런대로 그러니라 하고 견딜 수 있지만, 인간관계의 문제는 참 어려운 것이였다. 다행히도 정상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준다. 이런 얘기는 구태여 독자들과 나눌 필요는 느끼지 않아 생략했을 뿐이다.

본인이 아는 바로는 이것이 한국인으로서는 제일 처음 Mount McKinley의 성공적 종주(縱走, Traverse)가 된다. 故고상돈씨의 한국인 최초등반 한달 후에 일어난 일이다. 이 한 달 안에 한국인 11명이 처음으로 여기를 지나갔고 나를 포함해서 6명이 정상에 도달했고, 나는 McKinley 종주에 성공했다.
이 기록은 McKinley 국립공원 기록에 Ray Genet이 그해에 올렸고,
American Alpine Club의 The American Alpine Journal에도 올려진 걸로 알고 있다.

그날 저녁 McKinley Park Hotel에서 한 달 만에 처음으로 더운물에 shower를 했다. 그동안 밀린 때가 속옷을 벗자마자 저절로 굴러떨어져 나왔다. 얼굴에 두꺼운 가죽처럼 덮였던 Sun-block lotion, Mosquito repellant를 밀어냈더니 그 속에서 흰 피부가 나타나서 깜짝 놀랐다. 그날 저녁, National Park Ranger의 초대로 호텔 부근 큰 텐트에서 열린 방문자를 위한 모임에서 Mount McKinley에 대한 안내 강연이 끝나고, "여기 지금 막 산을 넘어 내려온 Climber" 가 있다고 소개를 주었다. 그러자 관객 중의 한 사람이 나에게 물어 볼 것이 있다고 요청을 했다. 그의 질문은, "Why did you climb the McKinley?"
갑자기 나온 질문에 나는 할 말이 막혀버렸다. 사실 나는 왜 등반해야 되었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물론 그럴듯한 대답은 이미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잠시 후, 내 대답은, "I don't know." 모두 깜짝 놀라는 듯하며... "How could you do that without knowing why?"

그런 후 McKinley에서의 정신적 상처가 아물자, 나는 부지런히 세계의 이름 난 정상들을 찾아다녔다. Mont Blanc (France, 1988), Monte Rosa (Swiss, 1988), Mt. Kilmanjaro (Tanzania, 1988), Mt. Elbrus (Russia, 1990), Cero Aconcagua (Argentina, 1990)를 하나씩 성공적으로 등반하고, 1992년의 남극의 Mount Vinson (1991) 정상을 마지막으로 정상에 대한 집념을 거두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Mt. Everest의 기회가 4번 왔었고 마지막 기회는 대한산악회의 서기 2000년 기념등반에 초청받았는데, 그때는 이미 내 나이 60에 Everest는 무리라는 생각에 며칠밤 잠을 못 자고 고민하다가 못 가겠다고 알려주었다. 그 것으로 "Seven Summit"의 꿈도 끝이 났다. 또 한가지 애석하게 오르지 못한 정상은 Mongolian Altai Range의 최고봉인 Khuiten peak of the Altai Tavan Bogd Mountain (4,374m, 14,350 feet)이었다. 우리의 아주 먼 조상이 한반도로 이주하기 전에 그 밑에서 쳐다보며 살았었을지 모른다는 원초 고향의 정상이다. 우연히 Mount Elbrus에서 만났던 Mongolian Alpine club 사람들과 연결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쉽지 않았던 logistics에 끝내 실현은 되지 않았다 (지금은 쉬워졌지만).

요새는 틈나는 대로 가끔 Colorado의 Fourteeners (14000 feet 정상들) 를 등반하지만, 지금도 누가 나에게 "Why do you climb?" 하면, 나는 아직도, "I don't know" 라는 대답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긴 알았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된다. 18년 전에 문리대 산악회 山友, 선배, OB들과 잠깐 꾸었던 꿈을 잊지 않고 이루었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지켜야 될 약속은 아니였지만 나에게 꿈을 안겨준 그들에게 감사한다. 아마 그 중의 상당수가 미국에 있을거라고 생각하며 언제 어느 산에서 만나서 힌 머리의 노년생들이 그 동안의 회포를 풀어 봤으면 한다. 

Epilogue: 

30년 전의 옛날 얘기...
그런데도 먼 훗날인 지금도 그때의 생생한 기억이 아직도 내 가슴을 뜨듯하고 흐뭇하게 해준다.

1. Ray Genet (The captain of the McKinley expedition)은 같은 해 1979년 9월에 Mount Everest Expedition에 갔다가 정상등정 후에 독일여자를 구조해서 데리고 내려오다가 같이 정상능선에서 사망했다. Ray는 McKinley Expedition 동안 나를 특별히 친절하게 대접해주고 잘 돌보아 주었는데, 이상하게도 나에게 자기의 산 친구 하나가 맥박이 아주 늦게 뛰는데 심장 Pacemaker가 정말 필요한지 진지하게 자꾸 뭇곤 했다. 내가 Pacemaker가 필요할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그 친구의 자존심이 Pacemaker를 원하지 않을 거라고했다. 그는 내가 Pacemaker 전문의사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친구라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얘기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결국, 그것이 그의 Everest에서의 사망의 원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만일 Pacemaker를 달고 갔더라면 거기에서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내가 그때 왜 더 강력하게 Pacemaker의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았는지 후회된다. Ray 자신이 거의 Super-athlete 로 맥박이 낮은 사람이었기 아주 쉽다. 왜 그의 자존심이 Pacemaker를 원하지 않았을가? 

내가 Everest에 발을 못 디딘 이유의 하나는 믿을 만한 Expedition leader 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원정 등반의 성공 여부는 산의 어려움보다는 Leadership을 잘 만나야 된다. 만일 Ray가 Everest에서 살아왔고, 다시 Everest expedition을 모집했다면 나도 분명히 믿고 따라갔을 텐데....
 

2. 등반 후 한 10년이 지난 어느 날 신문에서 우연히 McKinley 최연소자 등반 기사를 보았다. 나이 13살에 정상에 오른 어느 소년의 얘기였는데 자세히 이름을 보니, 바로 Ray Genet의 아들이 아닌가! 그때 Talkeetna에서 땅 위로 코 흘리며기어 다니던 유아가 바로 그 소년이었다. 자세히 알아보니 Ray의 미국 wife인 Kathy는 Ray의 죽음 후에 계속 Talkeetna에 남아서 Ray의 McKinley 등반 사업을 계속했고, 그 어린아이가 자라서 最年少者 정상인이 된 것이였다. 인생과 직업의 끊임없는 흐름에 내 마음이 숙연해짐을 금할 수 없었다. 

3. 나와 같이 그 당시의 최연소자로, 같은 Rope team으로 등반했던 Mark Edwards는 그 후 커서 의사가 되었고, 그의 아버지 Dr. Edwards는 치매에 걸려 Anchorage, Alaska 에서의 정형외과 개업을 닫고 Arizona로 이사 갔다고 들었다. Dr. Edwards 는 1979년 고상돈 씨 조난 때 그때 살아남은 한국인 한 명의 동상을 치료했던 의사였고, McKinley 등반 후에 나를 Talkeetna에서 Anchorage로 데려다 준 사람이었다. 

4. 그때 같이 등반했었던 많은 사람과 2-3년 연락이 있었다가 결국은 모두 잊히기 시작했다. 한가지 기억에 생생한 것은 정상직전에서 등반을 기권하고 자기에게 남아 있던 Film 한통을 나에게 주었던 Leon Oregard 와는 오래 연락을 주고받다가 몇 년 후 그의 재혼 결혼 청첩장을 받았다. 불가피한 일로 못 갔지만 결혼 후 잘사는 모양이었다. 

필자 註: 사진에 맞추어 간단히 줄여서 쓴 한글판 등반기로 형식에 매달리지 않고 맘 내키는 대로 썼습니다.
원래 영문판 Daily Journal에서 간단히 추린 것입니다.

 

Photo and Climb Journal by SNUMA WM - Original journal written in 1979, modified in June,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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