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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Essay] 남방셔츠

2011.07.18 02:32

오세윤*65 Views:5181






    남방셔츠

                                                                            오세윤


     선배라니, 그깟 남방 하나가 뭐라고! 실크나 뭐 그 비스름한 고급소재라면 또 몰라. 면으로 된 남방 하나 때문에 앙심을 품고 이따위 평가표를 작성해 올리는 법이 어디 있담. 5년이나 선배이면서 쩨쩨하게 시리, 그것도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 

     수련부장을 맡고 있는 G교수가 눈앞에 바싹 들이대고 흔들어대는 근무평가표를 보자 속이 헌 양말짝처럼 뒤집혔다. 볼을 씰룩거리며 서 있는 나를 던적스럽게 쳐다보며 교수는 이따위로 근무하면 진로에도 영향이 지대할거라고 장래문제까지 들먹이며 겁을 줬다.

     있는 대로 어금니를 앙다물어 참으며 지난 두 달을 돌이키고 또 돌이켜봐도 그저 억울하기만 했다. 근무시간을 빼먹고 농땡이를 부린 적도 없었고 검사를 미루거나 처치나 기록을 게을리 한 적도 없이 정말 열심히 근무하지 않았던가. 새벽 5시면 병실에 나와 검사를 위한 채혈을 모두 마쳐놓고, 간밤의 상태를 기록한 병력일지를 살펴 주임교수의 오전회진을 위한 리포트를 준비하느라 아침도 거른 날이 허다하지 않았던가. 점심도 저녁도 겨우 일 이 십분 짬을 내어 인턴숙소 식당에 들어가 선채 서둘러 걸터먹고 다시 병실에 올라가곤 하지 않았던가. 자정 전에 일을 끝낸 날이 하루라도 있었던가. 언제나 두세 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들어가 세수나 양치질은커녕 발도 씻지 못하고 잠드는 게 다반사가 아니었던가.


     4년 규정보다 1년을 더 군에서 복무하고 병원에 복귀한 선배는 지나치다 싶으리만치 후배들에게 위압적이고 주임교수 못지않게 엄격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처치를 위해 뭘 물어볼라치면 선배는 “야, 그것도 모르냐. 강의시간엔 뭘 들었냐. 교과서는 폼으로 가지고 다녔냐!” 면서 통박주기 일쑤였다.

     당한 우리들은 선배가 자리를 뜬 뒤에야 한 구석에 모여 서서 병이 어떻게 교과서대로만 진행 되냐고, 사람 생명이 교과서대로 되는 걸 봤냐고, 세상살이 그 어느 것이 교과서대로 되는 게 있냐고 쑤군대는 걸로 선배를 곱씹었다. 선배 성품이 원래 상후하박해서 그렇다는 둥 임상을 떠난 긴 기간 무뎌진 머리와 빈곤해진 지식을 숨기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고약하게 구는 거라고 선배가 듣지 않는 걸 기화로 구시렁구시렁 분을 풀었다. 

     기실 선배들도 딱했다.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나가면 긴장의 연속이던 학창에서의 해방감과 장교라는 우쭐함, 게다가 제법 두둑한 봉급으로 교과서는 고사하고 의학저널 한권 들여다보지 않고 사오년을 팡팡 놀고 지내기가 예사였다. 그 바람에 임상에 복귀하고도 실력이 딸려 기를 펴지 못하고 눈치껏 과정을 이수하거나 배짱으로 밀어붙이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게 상례였다.

     정상코스로 올라온 후배 밑에서 전공의과정을 밟아야하는 선배도 힘들었겠지만 그런 선배를 보필하는 우리들도 힘들었다. 하지만 선배는 스태프와 치프(수석 전공의) 앞에선 우리들을 대하는 것과는 정 반대로 마네킹처럼 상냥하고 증자曾子처럼 공손했다. 나중 언젠가는 선배가 병원장까지 할 거라는 데 대해 우리들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토를 달지 않았다. 선배는 우리 모두에게 스스럽기로 주임교수나 막상막하였다.


     내과 로테이션 두 주가 지난 때, 주임교수의 특진으로 아주머니 한분이 특실에 입원했다. 위하수에 병발한 급성 위염, 나이 48세, 수더분하게 보이는 환자분을 두 딸이 보살폈다. 나와 엇비슷한 나이의 직장인으로 보이는 언니와 대학 3학년인 동생 B. 교수는 선배를 주치의로 정해 환자를 돌보게 하면서 미망인이 된지 겨우 석 달째라며 각별히 신경 쓰도록 당부했다. 죽어나는 건 나였다. 아침저녁 두 차례의 교수회진과 특별히 열을 올리는 선배를 따라, 그 외에도 검사와 처치를 위해 나는 하루 열 번도 넘게 병실을 드나들어야 했다. 

     부지런히 병실을 드나드는 내가 고마워서였는지 아니면 뜻이 나변에 있었던건지 환자분은 사나흘 뒤부터 거의 매일이다시피 선물공세를 폈다. 언니도 가세했다. 담배에 화과자에 과일에 술에- , 주말이면 자매가 나를 명동으로 데리고 나가 근사하게 양식으로 저녁을 대접했다. 모든 절차는 언니가 주도했다. 동생은 수줍음만 타며 그냥  따르기만 했다. 

     증세가 호전되고도 환자는 보름을 더 있다가 퇴원했다. 퇴원하면서 환자분이 나에게 남방셔츠 두 벌을 줬다. 한 벌은 선배 몫, 숙소에 들어와 포장지를 벗기고 본 남방이 그렇게 촌스러울 수가 없었다. 무감각한 흰색에 노년층에게나 어울릴 후진 디자인. 두 번 다시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대로 침대 밑에 처박아버렸다. 선배라고 다를까. 그 깐깐한 -


     한 주 지나, 외래로 진찰을 받으러 왔던 환자분에게서 남방 이야기를 들은 선배가 화를 내며 자기 것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일이 공교롭게 됐다. 그 주말 군에서 휴가 나왔다 들른 시골 중학교 동창 친구에게 남방 두 벌과 함께 담배랑 술이랑 몽땅 줘버린 뒤여서 일이 난처하게 꼬이고 말았다. 결국 그 달의 내 고과표는 ‘D'로 낙찰되는 수모를 당했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나는 엉뚱하게 B에게 풀었다. 엄마의 성화로 그 주말에도 또 의례나 되는 것처럼 어김없이 찾아와 인턴숙소 앞에서 무한정 기다리는 B를 나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어 매몰차게 돌려세웠다. 하지만 다음 주 그녀가 들고 온 뉴욕 필 내한공연 티켓만큼은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G호텔 양식당에서 와인을 곁들여 티 본 스테이크로 이른 저녁을 먹고 세종문화회관에 들어가기까지는 기분이 그럴 수없이 삼삼했다. 선배와의 일 따위는 그만 잊어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호쾌하게 풀어졌다. 하지만 - ,

     언니가 선배의 팔짱을 끼고 홀에 들어와 곁으로 다가오는 걸 보자 그만 속이 삽시간에 변덕을 부렸다. 공연 내내 나는 무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집중이 다 뭐냐. 피콜로 소리와 혼 소리조차 구별을 못할 정도로 귀가 엉망으로 우왕좌왕했다. 진땀이 다 났다. 까딱 잘못하면 선배와 동서지간이 될게 아닌가. 공연이 끝나고 나와 커피숍에 들어가 앉은 자리에서 선배가 말했다.

     “오 선생, 걱정이 많았지? 염려 마, 수련부장께 부탁해서 근무점수를 ‘B'로 고쳐 놓았으니깐 그런 줄 알아. 남들한텐 얘기 말고 - 헛 헛 헛.”

     선배가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래도 그와 인척으로 얽힌다는 건 암만 생각해도 영 마음 내키지 않는 소름 돋는 일이었다. 헤어져 숙소에 들어서는 나에게 사감이 편지 한 통을 건네줬다. 전날 휴가 나와 자고 간 친구가 보낸 편지.


    ‘·········

     지난번에는 여러 가지로 고마웠다. 입성이 마땅찮던 터에 남방 참 잘 입었다. 게다가 뭔 두둑한 봉투까지 곁들여 줘 휴가기간 내내 아주 요긴하게 썼지. 종종 나를 이렇게 기쁘게 해 주기를 바란다. 히 히.

     * 추신 : 그런데 어느 양반인지 자네 성씨를 잘못알고 있더군. 겉봉에 “이 선생님께” 라고 썼으니 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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