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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진의 길 위에서] 진안 원연장마을 꽃잔디 동산과 마을 박물관

  • 입력 : 2011.05.23 21:58
"마이산 북쪽 2만평 구릉 온통 분홍빛 꽃사태
일흔 명 사는 이 마을에 어린이날 1만 명 몰려

일흔 넷 出鄕인사가 고향에 가꾼 꽃잔디 동산
입장료 받지 않고 누구나 꽃길 걸을 수 있어"



말 귀처럼 솟은 마이산(馬耳山), 그 두 봉우리가 지척인 듯 바라다보이는 산비탈에 분홍빛 꽃융단이 깔렸다. 7㏊, 2만여 평 구릉에 온통 꽃사태가 났다. 분홍 꽃물결이 언덕을 뒤덮고서 흘러내린다.

전북 진안군 진안읍 연장리 원연장마을 뒷동산엔 4월 중순부터 한 달 남짓 꽃잔디가 지천으로 핀다. 도시 찻길가에서도 흔히 보는 꽃잔디가 장관을 이룰 수 있다는 걸 이곳에 와 보면 안다. 꽃잔디밭 이랑 따라 자줏빛 박태기나무꽃, 빨간 철쭉과 겹복사꽃, 때늦은 산벚꽃·겹벚꽃까지 피어 어질어질 꽃멀미가 난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이 별천지는 관광농원도 아니고 입장료를 받지도 않는다. 누구나 와서 꽃길을 거닐며 즐길 수 있다. 주차장도 닦고 간이화장실도 마련해놓았다. 원연장마을 꽃잔디 동산엔 한 출향(出鄕)인사의 고향 사랑과 정성이 배어 있다.


일흔네 살 이기선씨는 1945년 여덟 살에 마을을 떠났다.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공무원을 거쳐 사업을 해 성공했다. 그는 아버지가 "선산(先山)을 만남의 장소 삼아 친척, 고향 이웃들과 우애를 다져라"고 이른 유언을 기억했다. 선산발치에 주말 주택을 짓고 2002년부터 꽃잔디를 심었다. 공원처럼 꽃이 만발했던 오스트리아 빈의 공동묘지처럼 꾸며보고 싶었다.
"꽃잔디를 택한 건 우선 꽃이 한 달 넘게 피는 게 좋아서였다. 겨울에 모질게 추워도 푸른 빛이 생생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는 선산 주변 땅을 사들여 계속 넓히면서 꽃잔디를 채워나갔다. 독일에서 사는 독일인 매제가 와서 보더니 "여기 묻히고 싶다"고 했다. 매제는 4년 전 숨진 뒤 운구돼 와 이곳에 잠들었다.

꽃잔디밭이 커가면서 이씨와 마을 사람들은 '우리끼리만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이름 내건 축제를 꾸려보자고 자연스럽게 뜻을 모았다. 2009년 '원연장마을 꽃잔디축제'가 시작됐고, 올해 세 번째 축제가 지난 5일부터 나흘 열렸다.

잔디밭에 천막 몇 채가 전부인 축제장은 마을 사람들의 축제장이기도 했다. 할머니들은 전 부칠 파를 다듬고 김밥을 말았다. 할아버지들은 도시 꼬마들 앞에서 짚으로 달걀 꾸러미를 엮어 보이고 달걀을 담아 선물했다.

어린이날엔 서른여덟 가구 일흔 명이 사는 작은 마을에 1만명이 몰려들었다. 꽃잔디동산 주변 주차장 셋이 꽉 차는 바람에 차를 마을 마당에 세우게 하고 '셔틀 트랙터'에 손님들을 태워 날랐다. 마을 노인들이 나무로 짜 만든 객차 한 칸을 트랙터가 끄는 원연장식 셔틀버스다. 객차엔 색색깔 조화(造花)를 걸어 장식했다. 거기엔 손님을 진심으로 반기고 잘 대접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어떤 생화(生花)보다 아름다운 조화다.



축제장에서 만난 축제추진위원장 겸 이장 신애숙씨도 신바람이 나 있었다. 마흔아홉 살인 그가 마을에서 가장 어리다고 했다. 신씨에게 마을을 구경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정자가 있는 복판 마당엔 꽃잔디로 장식한 꽃탑에 마이산 탑사(塔寺)를 본뜬 돌탑이 손님을 맞는다. 마을 사람들이 일구고 거둔 배추를 절여 파는 작업장, 농촌 체험 온 단체를 먹이고 재우는 체험관도 구경했다.

체험관 옆 황토 흙집엔 방 둘, 화장실 둘에 깔끔한 입식 부엌이 마련돼 있다. 귀농(歸農)을 꿈꾸는 도시민이 묵으면서 농촌생활을 실제로 겪어보는 '귀농인의 집'이다. 한 달 빌리는 값이 30만원인데, 신청자가 밀려 1~2주 단위로만 빌려준다고 한다. 원연장마을에서 접한 농촌의 모습은 뜻밖에 활기찼다. 주민 대부분이 60~70대인 마을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의욕과 생기가 넘쳤다.



마을 복판을 흐르는 개천 건너엔 초가지붕을 얹은 하얀 집이 서 있다. 쓰레기 집하장을 고치고 단장해 만든 '꽃잔디마을 박물관'이다. 명색이 박물관인데 함석지붕이어서야 되겠느냐며 마을 어른들이 짚을 엮어 올렸다고 한다. 아담한 공간에 놓인 소장품을 보자마자 푸근한 미소부터 떠오른다. 괘종시계, 됫박, 다듬이 방망이, 남폿불, 옷 담는 대나무 상자 도방구리, 소 발에 씌웠던 소 짚신까지. 이젠 쓸모없어졌지만 마을 사람들과 함께 긴 세월을 보낸 소중한 물건들이다.

무엇보다 빛바랜 흑백사진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녹여버린다. 병풍 앞에 서서 사모관대 쓰고 띠 색종이에 파묻힌 신랑 신부, 구례 화엄사에 나들이 간 마을 사람들이 대웅전 계단에 앉아 찍은 기념사진…. 가난했어도 이웃끼리 아끼던 그 시절을 미소로 돌아보게 한다. 명찰 달린 교복에 머리보다 더 큰 교모를 쓴 국민학생 형이 동생들을 거느리고 찍은 사진을 보면서는 "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원연장마을 박물관엔 그 어떤 번듯한 박물관도 흉내 내지 못할 따사로운 정이 가득했다.

마을 마당 돌탑에 할아버지 한 분이 또박또박 정성껏 쓴 기원문을 걸어놓는다. '원연장 꽃잔디마을 거부마을 되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걸 보며 마을 분들 모두 거부(巨富) 되시라고 빌었다.

Essay from Chosun.com, modified by SNUMA WM, May 2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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