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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Essay] 시인과 대통령

2011.05.05 15:38

Rover Views:6844

입력 : 2011.05.05

박해현 논설위원

시인 지망생 오바마의 감성적 연설은 빛났다. 그를 키운 8할은 문학이었다는데 오바마의 '정의'는 케네디가 꿈꾼 '문명'도 껴안을 수 있어야…

"9월의 화창한 하루는 역사상 미국인에게 가해진 최악의 공격으로 컴컴해졌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일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 특수부대의 손에 사살됐다고 밝히는 연설에서 9·11 테러를 빛과 어둠의 충돌로 묘사했다. 오바마는 9·11의 끔찍한 이미지들을 나열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가르던 비행기, 무너지는 쌍둥이 빌딩, 펜타곤에서 솟아오른 검은 연기, 펜실베이니아에 떨어진 비행기 잔해. 이어서 오바마는 그날 가장 슬펐던 이미지로 '저녁 식탁의 빈자리들'을 꼽았다. 무고하게 희생되지 않았다면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냈을 3000여 명의 죽음을 빈 의자라는 사물에 비유했다. 미국인 가슴에 깊이 뚫린 구멍을 시각화(視覺化)한 수사학이었다. 젊은 시절 시인 지망생이었던 오바마의 감성이 빛난 대목이었다.

오바마를 키운 외할아버지는 시와 재즈를 즐겼고, 술친구 중엔 흑인 시인 프랭크가 있었다. 소년 오바마는 프랭크를 자주 찾아가 문학의 세례를 받으면서 지성과 감성을 키웠다. 오바마는 대학 신입생 때 교지에 시(詩)를 발표했다. '널찍하지만 망가지고/ 곳곳에 재로 얼룩진/ 의자에 앉아 계신/ 아버지는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시그램 위스키 한 잔을 더 비운 아버지가 묻는다/ 나랑 뭐 하려고 하니/ 풋내 나는 아들아…'

오바마가 대선 후보로 떠오르자 저명한 문학비평가 헤럴드 블룸은 그 시를 읽곤 '비애가 유머와 곁들인 민중시'라고 호평했다. 그러나 그는 "오바마가 내 제자였다면 아마 나는 이마를 문지르면서 '귀하의 미래는 문인이 되는 게 아니다'고 했을 것"이라고 했다. 흑인 시인은 많으니 첫 흑인 대통령이 되라는 속내가 담긴 말이었다. 오바마는 자서전 '아버지로부터의 희망'에서도 빼어난 글솜씨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흑인 소년이 인종 차별의 벽을 뚫고 미국의 희망을 제시하는 정치인으로 우뚝 선 과정을 성장소설처럼 그려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빈 라덴이 사살된 날 오바마는 백악관 상황실에서 실시간 영상으로 작전을 지켜본 뒤 연설문 작성에 들어갔다. 스피치 라이터가 있지만 오바마는 의원 시절부터 직접 연설문 초안을 써왔다. 연설은 현지시각으로 밤 10시 30분에 TV로 방송될 예정이었다. 오바마는 연설문을 고치고 다듬느라 1시간 늦게 카메라 앞에 섰다.

그 사이에 트위터를 통해 빈 라덴 사살 소식이 퍼졌고, TV에서도 긴급 뉴스 자막이 떴다. 백악관 입장에선 김 새는 일이었지만, 오바마는 탁월한 연설 솜씨로 "정의가 이뤄졌다(Justice has been done)"고 선언해 역사의 한순간을 한 문장 속에 담았다. 10년 가까이 걸린 9·11 테러 응징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가 1면 제목으로 "정의가 이뤄졌다"를 뽑곤 오바마의 연설문을 발췌해 실었을 정도였다. 르몽드는 사설을 통해 "알카에다의 설립자가 두 번째로 죽었다"고 했다. 아랍 청년들이 이슬람주의가 아닌 민주주의 혁명을 주도하면서 알카에다의 영향력은 사실상 죽었고, 빈 라덴이 사살됨으로써 다시 죽었다는 것이다.

오바마의 "정의가 이뤄졌다"는 선언은 "원수를 갚았다"로 의역(意譯)할 수도 있다. 그 선언은 미국을 향해 또 다른 '정의'를 내세우는 알카에다로 하여금 보복을 다짐케 하기 때문에 세상은 아직 100% 안전해지지 않았다. 오바마가 실현했다는 '정의'도 논란이 됐다. "빈 라덴을 굳이 사살했어야 하나" "뭍에서 죽은 사람을 수장(水葬)한 것은 이슬람 율법에 어긋난다"는 비난이 제기됐다. 미국의 중동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테러와의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오바마는 연설을 통해 미국이 테러리스트 응징에 성공한 것은 '부(富)와 힘'이 아니라 '신(神)의 가호 아래 모든 이에게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인 덕분'이라고 했다. 아마 그는 이 문장을 쓰면서 케네디 전 대통령의 연설문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케네디는 1963년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추모한 연설에서 "비단 힘 때문만이 아니라 그 문명 때문에 전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미국을 떠올립니다"라고 했다. 그는 일찌감치 군사력과 경제력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의 소프트 파워도 미국이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시인의 감수성을 지닌 오바마가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정의를 지상에서 이룰 때까지 되새겨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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