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털이 무성한 손이 대뜸 내 코 앞까지 뻗어와 우뚝 멈추었다. 그의 손아귀에 펴든 패스포트 속에서 금발의 아가씨가 살짝 웃고 있었다." 박완서가 마흔살에 쓴 데뷔작 '나목(裸木)'의 첫 구절이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미군 PX에 근무하는 소녀가 달러 한 장을 벌기 위해 미군 병사를 꼬여 그의 애인 초상화를 주문받으려는 장면이다.
▶소동파는 "글 중에 좋은 글은 쓰지 않을 수 없어 쓴 글"이라고 했다. '나목'의 소녀는 대학 입학 한 달 만에 일어난 전쟁으로 오빠를 잃고 소녀가장으로 삶의 최전선에 내몰려야 했던 박완서 자신이다. 그는 결혼해 남들 부러워하는 가정을 꾸린 20년 후에도 전쟁이 몰고 온 고달픔과 억울함, 절망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걸 누가 들어주건 말건 외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절박함, 그게 박완서 문학의 시작이었다.
▶동인문학상 심사 자리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작가 작품이라도 완성도가 떨어지면 앞장서 칼날 같은 비평을 하던 박완서였다. 그런 한편 여자 후배가 임신을 하면 "순산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며 갈비와 냉면을 사주고 소주병 가득 참기름을 담아주기도 했다. 설날 출판사 편집자들이 세배를 가면 직급에 따라 1만원 2만원씩 세뱃돈을 주었다. "이념이라면 넌더리가 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8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작가회의)가 어려울 때는 남몰래 수백만원씩 도왔다.
▶작년 8월 나온 그의 생애 마지막 책 제목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였다. 그 직전 나온 마지막 동화책 제목은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이다. 이런 아쉬움도 있고 저런 어려움도 있지만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하다는 게 그의 노년의 심경이었을까.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는 앞서 간 그의 남편과 아들 묘비에는 박완서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생년월일만 있고 몰년(沒年)은 비어 있던 자리가 이제 채워지게 됐다. 박수근의 그림에 나오는 나목을 보고 박완서가 한 말이 떠오른다. "조금만 더 견디렴. 곧 봄이 오리니. 꼭 이렇게 말하며 서 있는 것 같다."
본인은 박완서씨를 잘 몰랐었고 이분의 책을 읽은적도 없지만,
남은 사람들의 추모하는 글을 읽어보니 훌륭한 작가였던 분이군요.
처참했던 625의 비극을 가슴에 안은채 살아오신분 같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지고 살기가 좋아져도, 어릴때의 고난스러웠던 기억은
아마 영원히 가슴속에 새겨지는 모양입니다.
박완서씨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남아있는것이죠.
지나간 슬픔일랑 모두 이 세상에 남겨 버리시고, 저세상에서의 새로운 봄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