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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후배의 정년퇴임사

2010.01.20 08:53

유석희*72 Views:7659

제 목 : 감사합니다, 그리고 행복합니다 (정년퇴임 인사)

행정안전부 동료 여러분!

저는 오늘 2009년 12월 31일로 정년을 맞아 여러분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감사하면서 행복합니다.

제가 초임 사무관이던 시절, 국장님께 우기던 일이 먼저 떠오릅니다.
저의 생각이 옳다고 우겼지만, 나중에 제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제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은 국장님 수준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중요한 요소가 있었음에도,
제한된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우겼던 것이지요.
“허어, 이 사람, 그게 아니라니까…”하고 미소 지으시던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했던 똑같은 말을 나중에 제가 듣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무관 시절, 과장님께서 “너무 힘들면 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신 업무가 있었습니다.
투여한 시간과 노력에 비하여 결과물의 가치가 낮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지요.
저는 별로 힘든 일이 아니니까 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20년쯤 지난 뒤에 제가 직원에게
“너무 힘들면 이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다고 말하였지요.
그랬더니 그 직원은 20년 전 제가 했던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훈훈한 웃음을 머금고 제가 그 직원을 격려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저는 제26회 행정고시를 통하여, 보통 나이로 서른 다섯살 때인 1983년에
구 총무처로 발령받아 중앙공무원교육원 총무과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총무처와 주OECD대표부,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근무를 거쳐,
행정자치부 조직관리과장과 혁신총괄과장, 대전 및 과천청사관리소장,
노근리사건처리지원단장 등의 근무경험을 하였고,
올 한 해는 공로연수의 혜택까지 받아,
일반직 고위공무원으로는 드물게 정년퇴임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군필 후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구소에 다니다가
방향을 바꾸어 시험 준비를 하다 보니 공직생활 출발이 많이 늦었습니다.
사명당의 마지막 말씀이 “이 세상에 잠시 머무르려 하였으나
뜻밖에도 오래 머물렀다”라는 것이었다는데,
저도 처음에는 공직에서 이렇게 정년까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공직생활은 저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었습니다.
정부중앙청사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1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어떤 사람이 함께 11층에서 타서 10층에서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뒤통수를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보았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날 11층에서 10층으로 내려가는
비상계단 출입문의 손잡이가 고장 나서 열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탈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지요.
저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고 반성이 되었답니다.
남의 사정을 잘 모르고 속단하여 함부로 미워하고 비난한 것이니까요.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남의 머릿속에 있는 이유에 의해서보다
자기 자신이 발견한 이유로 더 잘 납득한다.”라고 하였지요.

남을 존중할 때 나도 존중 받을 수 있고,
겸손과 배려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으며 근무할 수 있었기에 저는 행복합니다.
저를 고용해서 월급까지 주면서 인생을 가르쳤으니
이런 혜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물론 가끔은, 월급의 절반은 참는 값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때도 있긴 하였지요.

저는 부임하는 곳마다 동료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함께 근무하다가 언젠가는 서로 헤어지게 되는데,
떠나간 사람들은 3가지로 분류됩니다.
특정한 어떤 사람을 생각해 보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만나도 그만이고 만나지 않아도 그만인 사람의 3가지 중 하나에 해당됩니다.
저는 적어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근무하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저 역시 남아있는 분들이 생각하실 때 3분류 중 하나에 해당되겠지요.

그런데, 단순히 인기위주로 대한다고 동료직원들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기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혹독하게 일을 시키던 분이라고 모두 다시 보기 싫지는 않지요.
세상은 냉혹하고 합리적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동안 근무하면서 한 가지 지키려고 상당히 노력한 것이 있습니다.
과장이 된 이후부터는 동료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
업무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무관 때의 경험에 의하면,
식사하면서 업무지시를 하는 상관이 참 싫었거든요.
상관과 같이 밥 먹으러 가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거기 있겠지요.
“사람의 성품은 역경을 이겨낼 때가 아니라
권력이 주어졌을 때 가장 잘 드러난다.”고 말한 사람은 링컨일 겁니다.

직장인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가장 신나는 때가 언제인가?”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응답 중
1위는 “자기 업무의 성과를 인정 받았을 때”였고,
2위는 “뜻하지 않은 보너스를 받았을 때”였습니다.
3위는 “동호인과 취미활동을 할 때”였고,
4위는 “보기 싫은 상사가 출장 갔을 때”였습니다.

제가 지키려고 노력한 또 한 가지는 바로 교육과 출장의 권장이었습니다.
저 자신부터 교육과 출장엔 먼저 나섰습니다.
직원들에게 신나는 시간을 준 것이지요. 2006년 당시 행정자치부 국장급 전원을
민간교육기관의 리더십 교육에 입교시키는 계획이 시행되었지요.
저는 맨 첫 입교자로 자원해서 들어갔는데,
연말까지 실제로 입교한 국장급 간부는 불과 서너명이었습니다.
민간교육기관에서 민간기업 임원들과 함께 토의한 것이
저에게는 색다르고 풍요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권한의 위임이 중요하다는 것도 새삼 느꼈지요.

어느 해 제가 떠나던 기관에서는 전 직원들이 정성껏 쓴 엽서를
그동안 찍었던 사진들과 함께 앨범에 넣어 선물로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앨범은 지금도 고이 간직하는 저의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동료직원들에게 웃음-칭찬-감사를 자주 말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제가 늘 실행하고 싶은 명제입니다.
즐거운 생각을 하며 많이 웃고,
약점을 지적하여 보완하기보다는 강점을 칭찬하여 강화해 주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나 자신이 행복해집니다.
삶이 힘든 것은 이루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라,
원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말은 쉽고 행동은 어려운 법이지요.

저는 우리 사회와 국가에 기여한 것보다
제가 받은 혜택이 더 크다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을 통한 보람과 자기발전을 모두 얻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2년간의 국비유학으로 미국 조지 워싱턴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고,
3년간 프랑스 근무 역시 저에게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주OECD대표부 시절에는,
같은 개혁(Reform)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서로 정반대의 조치를
할 수 있다는 현장을 목격하는 경험도 하였습니다.
1998년 OECD회의에서 당시 우리 정부 대표는 외환금융위기를 맞아
“개혁”의 이름으로 공무원과 교원의 정년을 단축했다고 발표하였는데,
유럽 국가 대표들 중 한 사람은 “개혁”의 이름으로 자기네 나라에서는
정년의 연장 조치를 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정년연장으로 연금 지급액을 줄이고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절대적으로 옳거나 절대적으로 잘못된 정책이란 없다는 걸 느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진리가 있을 수 있다는
사고의 유연성을 일깨워준 현장이었지요.

인생에서 큰 불행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조실부모(早失父母),
소년등과(少年登科),
중년상처(中年喪妻),
노년무전(老年無錢)이 그것인데,
국가에서 주는 연금까지 받게 되는 저는 하나도 해당 사항이 없네요.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행정안전부 동료 여러분!

이제 떠나는 입장에서 저는 새로운 시작으로 탈바꿈하면서
스스로에게 몇 가지를 다짐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이 많이 보일수록 삶은 더 편안해진다는
저의 생각을 변함없이 가지며 살고 싶습니다.
스스로 현명하다고 믿지 않으면 현명한 일이고,
판단이 잘못된 것일수록 그 고집은 더 세진다는
성현의 말씀도 깊이 새겨두었으면 합니다.
“남을 이기는 것은 힘이 있는 것이고,
자기를 이기는 것은 강한 것이다.”라는 도덕경의 금언과,
부드러움은 강한 사람으로부터만 기대될 수 있다는 명언도
늘 간직하고 싶습니다.

은퇴한 후 다른 생활을 할 때도 저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실패자에 대한 연구 결과, 실패의 원인 중
지식과 기술의 부족은 15%에 지나지 않고,
인간관계의 잘못이 85%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인간관계에서는 메아리의 원리와 널뛰기의 원리가 적용된다고 하지요.
이쪽에서 하는 대로 상대방으로부터 받게 되며,
내가 높이 뛰어오르려면 상대방을 더 높이 올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남아시아 어느 지역에는 원숭이를 잡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나무에 묶어둔 상자 안에 바나나를 넣고 작은 구멍을 뚫어 둡니다.
원숭이가 그 작은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고 바나나를 움켜쥐면
손을 뺄 수가 없다고 하네요.
사람이 원숭이를 잡으러 오는데도 원숭이는 팔짝팔짝 뛰기만 할 뿐,
바나나를 놓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그 바나나를 놓으면 손을 뺄 수가 있음에도 결국 잡히고 만답니다.

인간은 수많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숭이 이야기는, 이러한 욕망들을 바나나처럼 움켜쥐고 발버둥치던
저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그 바나나를 놓아 버리고,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애착과 미련을 버리고 꼭 잡고 있던 것을 놓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새로운 것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제 비로소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서
저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부자의 개념은 두 가지라고 하지요.
하나는 많이 가진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더 이상 가질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더 이상 가질 필요가 없는 사람은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지요.
필요한 것만 가지면 되는데 우리는 원하는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만족은 소유의 문제도 성취의 문제도 아니고,
밖이 아니라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지요.
저는, 자기가 가진 것을 사랑하면 행복하고,
자기가 가지지 않은 것을 사랑하면 불행해 진다는 것도
늘 염두에 두려고 합니다.

등산에는 2개의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정상에 빨리 올라가서 먼 곳의 경치를 즐기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천히 올라가면서 주변의 경치와 삼림욕을 즐기다
중간에 내려와도 좋다는 마음으로 올라가는 유형입니다.
산의 정상은 산의 일부분일 따름이지요.
정상에선 잠시 머물다 내려와야 하고,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보내게 됩니다.
앞으로도 저는 과정을 즐기는 생활을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피터 드러커는 “사람이 언제부터 늙는가”라는 질문에
“호기심이 없어질 때부터”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경영학과 정치학, 역사학의 연구에 이어
만년에는 페루의 미술을 공부하였지요.
저도 늘 호기심을 가지고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행정안전부 동료 여러분!

저 역시 선배 공무원들의 퇴임식에 여러 번 참석하였고
퇴임인사의 글도 읽었습니다마는,
조금은 무심한 마음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인사를 하는 입장이 되니까,
읽어 주시는 분들이 고맙기 그지없는 심정입니다.

소설 “어린 왕자”에서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드는 건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시간이란다.”라는 말이 나오지요.
그 소중한 시간을 내어, 저의 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75세 노인이 쓴 산상수훈”에서는
“나더러 그 얘기는 오늘만도 두 번이나 하는 것이라고
핀잔 주지 않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하였지요.
다소 길었지만 핀잔 주지 말고 복 받으세요.

오늘은 저에게 슬픈 이별이 아닌 행복한 졸업식과 새로운 출발의 날입니다.
뒷모습이 추하지 않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네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인연에도
감사의 마음을 느낍니다.

자랑스러운 행정안전부 동료 여러분의 노고 덕분에
저는 앞으로도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여러분에게도 “미래”는 반드시 옵니다.
저는 먼저 가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행복합니다.

2009년 12월 31일


위의 글은 나의 사랑하는 경북고등 2년 후배가 퇴임사를
부내의 전산망에 올린 것입니다.
저도 곧 정년이 닥칠 터라 곱씹어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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