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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검사와 여선생'

박한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선생님과 같이 거닐었던
허수아비가 서 있는 논둑길을 다시 걷고 싶다.
선생님이 손수 만들어주시는
밥 한 그릇 다시 얻어 먹고싶다.

박한제 서울대동양사학과 교수
''검사와 여선생'은 우리 세대 사람들에게는 쉽게 잊히지 않는 영화다. 그 세세한 줄거리는 잊었지만, 당시에 받은 느낌만은 아직도 나에게 생생하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가난한 학생과 도시락을 만들어 배를 채워주기도 하고 꿈을 키워준 어느 초등학교 여선생님 사이의 이야기다. 여선생님은 결혼 후 사정 딱한 탈옥수를 집에 숨겨둔 일로 남편의 오해를 사게 되었다. 칼을 들고 달려든 남편이 문지방에 발이 걸려 넘어져 칼에 찔려 즉사함으로써 여선생님은 살인범이란 누명을 쓰게 된다. 법정에 선 여선생님은 검사가 된 옛날 초등학교 시절의 가난한 제자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검사는 은사가 살인을 범하지 않았음을 입증함으로써 그 누명을 벗긴다.

그 영화 제목만 들어도 그 옛날 초등학교 시절의 일들이 아스라이 나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내가 그 영화를 보았던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내가 다닌 진주 대곡초등학교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목조 단층건물이었다. 졸업식 등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교실 두 개를 터서 강당을 만들어 썼다. '검사와 여선생'도 그곳에서 상영되었다. 햇빛을 막기 위해 임시로 커튼을 쳤으나 사이사이로 햇빛이 마구 새어 들어왔다. 또 낡은 필름이라 대낮 풍경인데도 빗물과 은하수가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변사의 구성진 목소리에 녹아들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교실로 돌아온 담임 선생님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그 눈물은 우리들에게 영화의 주인공처럼 검사로 커주었으면 하는 선생님의 간절한 바람이 응결되어 있다고 느껴졌다. 고시는 과거제도와 마찬가지로 입신출세를 위한 가장 유효한 사다리였다. 돈도 배경도 없는 민초들이 매달리는 거의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다. 이후 검사는 한동안 나의 꿈이 되었다.

선생님은 본가가 진주 시내에 있었기 때문에 운동장 옆 초가집에 방 한 칸을 빌려 자취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둘째 형님의 진주사범학교 2년 후배였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은 나의 월사금을 대납해 주어 창피스런 귀가 조치를 몇 번이나 면하게 해 주셨다.

그해 9월 중순 어느 날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선생님은 하교 후 남으라고 하시더니 남강변의 송곡마을로 가는 논둑길로 나를 데리고 나섰다. 허수아비가 한가롭게 서 있는 들판은 이미 온통 황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연두색 원피스가 하늘색 파라솔과 잘 어울렸다. 개울가에 다다르자 선생님은 방천 둑에 앉았고, 나는 개천에 내려가 돌팔매질로 파문을 일으켰다. 선생님도 곧 개울로 내려와 나와 같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파문의 숫자는 선생님보다 내가 더 많이 만들 수 있었다.

나는 신이 났고 선생님도 즐거워했다. 우리는 징검다리에 걸터앉아 발을 물에 담갔다. 선생님의 발은 희고 가늘었다. "넌 앞으로 뭐가 되고 싶니?" 대뜸 "검사가 되고 싶어요!"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선생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래. 넌 분명 검사가 될 수 있을 거야!"라고 했다.

선생님은 댁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검사가 되면 무척 기쁠 것이라고 했다. 작은 부엌을 통해 선생님의 방을 들어서니 고급 비누 냄새 같은 것이 방안에 가득했다. 남으로 향한 창문 밑에는 백양목을 씌운 앉은뱅이 책상이 있었고,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액자 속에는 교복차림의 선생님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선생님은 저녁밥을 지으셨다. 하얀 쌀밥에 왜간장에 버터를 넣어 비빈 것이었다. 수저가 한 벌밖에 없었다. 내가 첫 손님이었던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숟갈을 나에게 넘기고는 작은 미제 포크로 밥을 드셨다. 밥알들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민망하면서도 행복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선생님의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집에서 기다리시겠지!"를 되풀이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이제 가야지! 저 위에 삼거리까지 데려다 줄게. 다음에 또 오면 되잖아." 선생님의 배웅을 사양하지도 않았다.

9월의 신작로는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나의 손을 장터까지 한 번도 놓지 않았다. 손바닥이 따뜻하고 끈끈했다. "선생님, 다음에 검사가 꼭 될 겁니다!" 선생님은 내 손을 더 굳게 쥐어주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선생님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누구에게나 꿈을 심어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 선생님이 그러했다. 월사금을 제때 못 내어 쩔쩔매던 50여년 전의 옛 제자를, 그리고 그때의 약속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약속을 그대로 지키지는 않고 역사학 교수가 되었다.

역사가란 지금 일어나는 사건을 기소하는 검사는 아니지만 역사 속의 무수한 사건과 사람들을 다시 불러내어 가차없이 기소하고 추상같이 판결하는 사람이다. 선생님을 다시 만난다면 "선생님, 저 공소시효 없이 기소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진짜 검사가 되었어요. 몇천 년간 훌륭한 사람인 양 위장해 온 범인을 찾아내 혼내주고 구천을 떠돌고 있는 원혼들을 위로하기도 해요!"라며 초등학교 5학년 소년처럼 으스대고 싶다.

그리고 선생님과 같이 거닐었던 허수아비가 서 있는 논둑길을 다시 걷고 싶다. 선생님이 손수 만들어주시는 밥 한 그릇 다시 얻어먹고 싶다. 진간장에 버터로 비빈 것이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출처 : 조선일보 200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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