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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초 어느날

 

이 일화 아니 사건은 내가 이미 이곳에 2016년 7월 11일에 써서 올렸는데, 요즘 북한과의 문제가 한창 열기를 띄우고 있으며 게다가 Dr. 온께서, “14세 소년이 겪은 한국전쟁”을 올렸는데, 나 역시 거의 비슷한 연배인 듯하여, 비교적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고, 나의 무시무시한 경험담을 약간 교정을 하고 다시 올리려고 한다.

그러니 그때가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지 한 2, 3주 지났을 때인 듯하다.

 

우리는 돈암동 삼선교 전찻길 다음에 있는 중형 도로에 집이 있었고, 그곳에 내 동네친구들도 있었으며, 서너집 건너편에 같은 보성 중1학년인 원철수가 살고 있어서 매일 보다싶이 하였다.

그는 나에 비하여 훨씬 약았고, 소식도 빨리 듣고 내게 전해 주었다. 물론 학교는 전쟁초에 무기휴학으로 들어갔으니, 가끔 학교소식을 물어보았는데, 어느날 그가 내게 학교에서 빨리 나오라고 하며 안나오면 제적시킨다고 했다.

집에서 아버지는  내게, ”학교가 무슨 학교냐? 그들이 너희를 데리고가서 총알받이로 쓰려고 하니 꼼짝말고 집에 있거라.” 하셨다.

그래도 어느날 철수가 나를 불러내어 “지금 내가 학교에 가니, 나와 함께 가자”고 꼬여서, 부모님께 아무 말 없이 둘이서 학교에 갔다.

 

그때 학교에서 책임자인 상급학생이 전 학생을 학년별로 운동장에 배열하여 세운 후 학교 교실 뒤에 있는 강당에 들여 보냈다. 거기서 두가지 가장 인상적인 연설을 들었다.

첫번째 연사가 아무개라는’빨치산동무’이었다. 험악한 인상, 얼굴에는 차갑고 엷은 미소를 띄운 살기가 가득하였고, 목소리가 힘차고 굵었으며, 강한 북한 사투리를 썼다. 몇 마디 기억이 난다.

 

“친애하는 동무 여러분 반갑습네다. 나 아무개는 빨치산이요. 나는 내 목숨을 내 놓고 놈들과 싸우고 있소. 놈들은 나의 부모를 죽였고, 아내를 죽였고, 아들과 딸을 모두 죽였소. 멀지 않아 놈들이 나를 죽일 게요. 하지만 놈들에게 죽을 때까지 나도 놈들을 죽일것이요…” 이렇게 소름이 돋는 소리를 하였다. 도대체 죽이고 죽고 한다는 소리뿐이었다.

두번째 기억나는 연사는 북조선 학교시설에 관한 설명이다. 첫 연사보다 깔끔하게 생겼고 또 달변으로, 조선인민공화국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교육을 시키고, 학비는 모두 나라에서 내어주며, 방학때에는 금강산에 가서 운동, 예술, 기타 취미에 맞는 교육을 받는다는 설명이며,마지막으로, “여러분, 이렇게 좋은 나라, 학교, 교육은 모두 김일성 원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무한한 은혜입니다. 이러한 좋은 앞날이 있는데 여러분은 이제도 어머니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버지 생각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는 김일성 원수만 계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 일어나서 김일성 원수를 따라갑시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습니다. 김일성 원수의 지시를 따라 모두 의용군으로 나갑시다!!!” 하고 고함을 지르니, 학생 일동이 모두 가만히 있었다. 거의 모두 주저하는 모양이었다.

그리도 그중 몇 몇 학생이 일어나서 나가기 시작하니까 그들은 크게 박수치며 빨리 나오라고 재촉을 하였다. 그때, 간부와 지원자들이 합쳐서 유명한 ‘의용군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나는 그 가사 일부를 기억하고 곡조 역시 기억한다.

 

원쑤와 더불어 싸우다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올려 다오,
붉은 깃발을.
XYZ, XYZ.
ABCDE. ABCDE

 

 

 

여기서 XYZ. ABCDE.는 완전히 잊은 가사, 다시 말하면 악쓰던 욕설이었다. 이게 흥분제의 효력을 가진 노래였다. 그러니 점점 많은 학생들이 점차 지원하여 나가 섰다.

그렇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학생은 앉아 있었다. 이때 그 주동자 상급학교의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여러분, 무엇을 주저합니까? 여러분 삼일은동을 잊었습니까? 광주학생운동을 잊었습니까? 앉아 있는 윗줄부터 차례로 나오세요.” 하며 목이 터져라하고 “원쑤와 더불어 …”를 부르니, 이미 나온 학생, 나오려는 학생, 모두 “원쑤와 더불어 …”를 더욱 더 크게 부르면서 모두 지원자가 되었고, 다음에는 지원자, 비지원자의 차이없이 모두 열을 서서 강당을 나와서 운동장으로 내려가서 학년별로 4열 배열시키는 후, 행진을 하며 보성중학교 교정을 몇바퀴 돌며 “원쑤와 더불어 ..”를 계속 불렀다.

 

이때에 이르러 능동적 지원자나 수동적 지원자나 다름없이 “원쑤와 더불어 …”로 흥분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나는 처음부터 우리 일학년은 해당이 안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꼼짝없이 함께 어린 의용군으로 가게 생겼다.

중힉교 정문에서 나와 혜화동 길로 나가서 혜화동 로터리에서 몇 바퀴를 돈 후 혜화동에서 명륜동으로 가는 전차길로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나는 행렬의 뒷부분에 있었고 행렬은 이미 로터리를 지나 명륜동 전차역으로 향할 때였다.

그 때 나는 이제 꼼짝없이 의용군 꽁문이에 매달려거 끌려가지 않을 수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내가 어디 간다고 말해야되지 않겠는가? 그렇다. 나는 어머니에게 어디 간다고 말해야겠다. 그래서 그 행렬에서 빠져나왔다.

 

바로 이때 행렬 뒷부분에서 지휘봉을 들고 감시하던 사람이 있어서 나는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어머니에게 의용군으로 간다고 말해야겠어요.” 하니 그는 사나운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갓!”하고 소리쳐서 그에게 거수경례하고 뛰어서 집에 왔다.

그런데 와서 약삭빠른 철수는 이미 저의 집에 와 있었다. 그 사건이 적어도 서너 시간은 걸렸던 모양이었다. 집문으로 들어서니 마침 누나가 날 보고 어디 갔느냐고 물어서 원철수와 함께 있었다고 대답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역시 내게 어떤 의심도 하지 않으셨고, 내 말 처럼 학교에 가서 어린 의용군으로 끌려 갈 뻔한 건 전혀 모르시는 눈치였다.

평생 처음으로 나의 이 위험했던 행적을 부모님께 말씀 드리지 않았다. 말씀드렸다가는 난리가 날 정도로 혼이 날테니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후에 가끔 생각해 본다.‘그때 우리학년 학생중에 의용군 행렬에 나간 학생이 돌아왔을 까?’하고. 아마 단 한명이라도 돌려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나 역시 그 절대절명(絕對絕命)의 순간에 나와서 어머니에게 알리겠다는 구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따라만 갔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버지의 말씀도 듣지 않고 올바르지 못한 길로 끌려갔다면 아마 나는  다시 집에 오지 못했을뿐더러, 무자비한 인민군앞에서 총알받이로 끝나지 않을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절대절명(絕對絕命)의 의미: 이를 절체절명(絕體絕命)이라고도 한다. 그 뜻은 몸도 목숨도 다 되었다는 뜻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아마 그 부모님은 아들이 잘못되어서 어린인민군으로 끌려갔다고만 생각하실 것으로 믿는다. 이 얼마나 참혹한 불효를 부모님께 드렸을까하는 생각을 두고 두고 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말할것도 없이 공산당원들은 미국에 대한 적개감을 일으킬 모든 방법을 일으켜서 손으로 그린 그림과 글자를 넣은 벽보를 전봇대나 건물 담벼락에 붙였다. 그 대표적인 작품은 총 끝에 칼을 낀 미군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날을 겁에 질린 어린 소년소녀들에게 찌르는 참혹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며, 거기에, “이 원쑤놈들을…”하는 글자 역시 붉은 색갈이었다.

물론 그 이후 나는 다시는 빨갱이들이 학생을 차출했던 보성중학교 건물 가까이도 가지 않았다. 9.28수복때까지.

 

나는 우리세대 대다수와 같이 일생 반공주의

내가 처음 이 나라에 와서 Jersey City Medical Center에서 Internship 할 때, 함께 일했던 큐바 망명의, Dr. Castro가 내게 한 말이 있다.

“Democracy may not be the best idea, but Communism is the worst for sure since it denies humanity.”

 

 

인민군 영상 1
north Korean Soldier 2.jpg

인민군 영상 2
North Korean soldiers 1.jpg

 

부록

 

6•25전쟁 휴전협상 중 남한출신 의용군 문제 누락 배경과 해결 방안

통일문제연구

2011, vol.23, no.1, 통권 55호 pp. 107-142 (36 pages)

발행기관 : 평화문제연구소. 연구분야 : 사회과학 : 정치외교학 :

조성훈 /Sung Hun Cho 1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초록

 

본고에서는 전쟁 중 발생한 남한 지역 의용군 발생 배경 및 규모, 휴전협상시 의용군 문제 누락과정, 전후 귀환 노력 및 해결 방안 등을 검토했다. 흔히 한국전쟁 시기 납북자라고 하면, 정치지도자 • 학자 • 우익 단체 간부 등 사회지도층 인사만을 떠올리지만, 그 구성비율 가운데 남한출신 의용군이 가장 많이 차지했다. 예를 들면, 1951년 말 작성된 내무부 피랍자 명단 126,000여 명 가운데 의용군의 규모는 약 9만 명에 이르렀다. 의용군들은 전쟁 시기 피랍자가족회나 정부 조사에서 학생, 청년단 등으로 분류되어 있어서 납북자와 관련해서 이들이 제외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국군과 유엔군의 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52년 석방된 인원과, 휴전 후 북한을 선택한 이들은 제외되겠지만, 강제로 북한군에 끌려간 경우는 전쟁의 피해자로서 당연히 납북자 범주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휴전협상에서는 포로명단에서 누락된 ‘국군포로’의 해결과 정전협정 체결을 서두르면서 북한에 억류된 일반 납북자와 함께 남한 의용군 출신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 결과 남북이산가족 상봉시 전쟁 시기 및 휴전협정 후 작성된 피랍자 명단에 없는 인사가 등장하는 것처럼 자진 월북자이거나, 전쟁시기 남한의 강경한 부역자 처벌에 따른 북한 도주자 등만 부각되었다. 전쟁시기 끌려간 후 60년이 다 되도록 강제의용군의 생사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비극이다. 가족들의 염원처럼 북한에 거주하고 있는 의용군 출신들에 대한 생사확인이 우선이다. 이를 토대로 지나간 대결을 반복하기 보다는 이산가족 범주에서 해결을 모색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내가 Google에서 찾고 찾다가 결국 가사를 찾아냈다.

 

인민 항쟁가 임화 작사 김순남 작곡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 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

더운 피 흘리며 말하던 동무
쟁쟁히 가슴 속 울려온다.
동무야 잘 가거라 원한의 길을
복수의 끓는 피 용솟음친다

백색 테러에 쓰러진 동무
원수를 찾아 떨리는 총칼
조국의 자유를 팔려는 원수
무찔러 나가자 인민유격대

 

 

 

 

그런데 육이오 발발 일이년 전 그러니까 내가 소학교 5, 6학년시절에 다음 노래를 접하고 우리누나 피아노로 건반을 뚜드렸고, 또 그 악보에 나온 노래를 알게 되었다. 지금도 그 곡조는 내게 선하다.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물론 그 내용중 오로지 조금만 기억하고 전체는 “원쑤와 더불어”처럼 모두 망각의 세계로 들어갔고, 다시는 접하지 못했다. 생각나는 가사를 무순서로 적어본다.

 

 

전사들아 일어나거라, 영웅들아 일어나거라,
시베리아 바람찬 벌판...
현해탄에 푸른 파도여,,,
갓발은 벌거이 피에 젖었다. ...
아, 아. 해방 조선은 우리의 나라

 

 

 

Naver와 Google 검색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이 전편을 싣는다. 놀랍게도 이 작사를 지은 문인은 역시 동일인 임화였고, 북한으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사형을 당했다고 나와있다.

 

해방조선 임화

전사들아 일어나거라
영웅들아 일어나거라,
압박의 사슬은 끊어지고
자유와 희망의 새날이 왔다
일어나거라 전사들아
아- 해방조선은 인민의 나라

서백리아(西伯利亞) 바람 찬 벌판
현해탄의 거친 파도에
한 많이 쓰러진 수없는 생명
旗ㅅ발은 벌거니 피에 젖었다.
잊지 말아라 혁명 동지를
아- 해방조선은 인민의 나라

등불도 없이 걸어오던
눈물도 없이 울어오던
어둔 밤 우리의 머리 위 높이
호올로 빛나는 그대들 이름
높이 들어라 전사의 旗ㅅ발
아- 해방조선은 인민의 나라

 

 

 

 

글자풀이

 

총알받이란 무슨 말인가? : 발음 총알바지. 영어로 Cannon fodder or Bullet bait라고 부른다.

날아오는 총알을 막으려고 앞에 내세우는 사람이나 군대.

호 속에는 일본군이 들어 앉고 그 앞에는 정부군이 총알받이로 나앉았다. → 총알받이

Standard Korean Dict.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을 정신대와 총알받이로 전장에 끌고 갔다. → 총알받이

Korea Univ. Korean Dict.

 

보성중학교강당에서 빨갱이 한 무리는 인민군 앞에 세울 총알받이로 어린 중학생 모두 강제 동원시켰다.

악랄한 “원쑤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이란 인민 항쟁가를 부르고 또 부르게 하며...

정관호 수기에서

 

 

내가 알았던 이 충격적인 공산당 군가를 지었다고 하는 임화는 누구인가? 그를 찾아 보았더니 다음과 같다.

 

임화 [ 林和 ]

 

요약: 그가 한국문학에서의 근대의 문제를 깊이있게 인식함으로써, 문학사 서술과 문학이론의 수립에 과학성과 역사성을 부여한 것은 가장 중요한 이론적 성취라 할 만하다.

본명: 임인식(林仁植) [1908. 10. 13. ~ 1953년 ]

출생지: 국내 서울특별시

데뷔: 1926. 시, 수필 등 발표하며 문단 등장

소개: 본명은 임인식(林仁植). 필명은 성아(星兒), 쌍수대인(雙樹台人). 1908년 10월 13일 서울 출생.

 

1925년 보성중학교를 중퇴하고 1926년부터 시, 수필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문학활동 초기에는 다다이즘에 경도했지만, 1927년 카프(KAPF)에 가입하면서 다다이즘으로부터 탈피, 계급문학으로 전향했다.

 

1929년 「네 거리의 순이」, 「우리 오빠와 화로」 등 이른바 ‘단편서사시’를 발표하면서 일약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시인으로 부상했다. 이후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인 1931년경부터 카프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1932년부터 카프가 해산되는 1935년까지 카프의 서기장직을 맡았다.그 후 우리 근대문학 발전과정의 합법칙성을 규명하려는 목적으로 신문학사 연구에도 착수, 「개설 신문학사」(1939~1941)를 저술했으며, 그와 함께 우리 근대문학 발전의 특수성을 ‘이식을 통한 새로운 전통의 창조’로 이론화한 이른바 ‘이식문학사론’을 제출하기도 했다. 시에서도 초기의 ‘단편서사시’에서 벗어나,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어가던 당대의 민족적 운명과 그 초극의 의지를 노래한 서정적 경향의 시를 많이 창작했다.이 시기의 이론‧비평적 성과는 평론집 『문학의 논리』(1940)에 수록되어 있으며, 시적 성과는 『현해탄』(1938)에 주로 수록되어 있다.

 

광복 직후 그는 계급문학론을 부정하고 반제 반봉건을 중요 이념으로 하는 민족문학론을 새롭게 제기했으며, 그에 입각하여 문학운동의 통일전선적 조직인 조선문학가동맹을 결성, 지도해 나갔다. 또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 계열의 문화부문 통일전선체인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을 조직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그 부위원장을 맡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였다. 1947년 제2시집 『찬가』를 간행하고, 같은 해 4월 『현해탄』의 재판인 『회상시집』을 내는 등 시작 활동도 계속했으나 좌익활동에 대한 탄압의 강화로 월북함으로써 남한에서의 활동은 마감했다.

 

북한에서도 해주 제일인쇄소에 근무하면서 남로당의 문화활동을 주도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서울에 와서 조선문화총동맹을 조직하고 그 부위원장을 맡았으며, 전선문고로 제3시집 『너 어느 곳에 있느냐』를 출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 8월 남로당 숙청과 관련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로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으로 이승엽 등과 함께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진보적 문학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만큼 그는 근대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선 시와 비평, 그리고 문학사 서술에서 그는 당대의 가장 문제적인 성과를 남겼다.

그러고보니 이 공산당 군가의 작사자는 빨찌산 괴수 정도로 생각했던 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러나 저러나 골수 빨갱이임에는 틀림없으니 나의 추적은 완성되었고, 나는 이에 만족한다.

 

부록:

그 해 여름에 우리 일가중에서 두 명의 중학생이 학교에 나갔다가 나처럼 의용군으로 끌려나갔고, 가족은 지금 2020년 말까지 소식을 모른다. 다음에 그들의 신원이 있다.

1. 정길호: 나의 6촌형. 1936년 생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어느 중학교인지는 기억이 없다. 나와 자주 놀았다. 그러니 그는 15세 소년이었고, 중학교 2학년이었다.

2. 박원원: 나의 조카다. 나의 둘째누나는 나보다 21년 연상이며 일찍이 결혼하였는데 ,또 일찍이 과부가 되었고 이 외아들만 키우고 있었다. 그의 생년이 1933년이고 용산중학교 5학년이었다. 그 또한 학교에서 오라는 통지를 받고 나갔다가 의용군으로 끌려 간 후 오늘날 까지 소식이 없다.

 

그러니 이들은 나처럼 학교 강당에서 강제로 의용군이란 명목으로 끌려 전투지로 갔다가 죽지 않았으면 후퇴하던 인민군에 끼어 북한으로 갔을 것이다. 내가 반나절의 경험으로 그들이 어떻게 끌려 갔는지 너무나 잘 안다.

 

여기에 한마디만 추가하고 싶다.

그 당시 3개월간 북한 인민군 치하에서 이런 식으로 많은 중학생과 대학생을 강제로 끌고 가면서 "의용군"이란 가명하에 전투지 전방에 배치하여서, 말할것도 없이 대다수는 그곳에서 죽었고, 살아 남은 몇 명은 패전하여 도주하던 인민군에 끌려 북한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고, 얼마전 남북교류당시 내 나이 또래의 이러한 "강제의용군"이 북한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들은 우리 대한민국에서 무어라고 호칭하여야겠는가? "학생 의용군"? 이건 아니다. 진실로 "학생 의용군"은 후퇴했던 국군이 인민군과 대치해서 싸울 때, 그 지역에 있는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생의용군"으로 선출되었고, 그들중 많은 의용군을 나라를 위하여 전투에 참여하여목숨을 바친 고귀한 대한민국의 아들의용군이다.

그러니 이 강제로 공산당원에게 끌려 가서 대다수 죽었거나, 아니면 아직도 북한에서 살고 있는 무고한 아들들은 도대체 무어라고 부른단 말인가? 거듭 말하거니와 나라를 위하여 어린 나이에 자원한 대한민국 학생 의용군은 참다운 어린 애국자다. 결국 북한공산당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죽어버린 처참한 "서울 학생의용군"은 무명의 잊어버린 비참한 한떼의 희생자였을 뿐이다.

지금도 내 귀에는 공산당원에게 강제로 끌려갔던 보성 중학교 학생들의 "원쑤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슾퍼 말아라. 깃발을 높여 다오, 붉은 갓발을"의 희미한 함성이 들려온다.

 

정관호의 회상: Sept 19, 2022
이 잊을 수없는 기억, 그리고 절체절명(絕體絕命)으로 향했던 순간, 내가 그때 감독에게 한 말 "어머니에게 의용군으로 나간다고 말해야겠어요."는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확고한 말이었다. 어쩔 수없어 끌려 가더라도 어머니께 알리지 않고 떠날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나는 구명(救命)의 행운을 얻었다. 사실 내가 쟁취하였다.
이 행운은 나는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항상 절에 가서 불공하시고 관세음보살 염불을 하신 결과라고 굳게 믿는다. 관세음보살께서 어렸고 어리석은 나를 그렇게 할 생각을 주셨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Kwan Ho Chung - July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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