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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 전투

청천강은 장진호에서 시작하여 평안 남도와 북도의 경계를 만들고 서해로 흘러 나간다. 평양으로 통하는 대동강 북쪽에 있다.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군대를 무찌른 살수대첩으로 유명하다. 귀주대첩, 행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힌다. 1300여 년 후 나라의 사활을 건 중국과의 전쟁이 이곳에서 또다시 일어났다. 

 

청천강과 장진호 전투는 남북통일을 목전에서 놓진 전투였다. 인공이 낙동강 전투에서 미군의 개입으로 적화통일에 실패했듯이 대한민국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통일의 희망을 접어야 했다. 살수 대첩은 중국의 침략을 물리친 전쟁이었지만 청천강 전투는 중국에게 패배 한 전쟁이었다. 

 

유엔군과 국군은 청천강 이북 깊숙이 북상했다. 인공의 영토는 압록강 이남의 평북과 함북 일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김일성은 압록강 근처 산골에서 이곳저곳 거처를 옮기며 숨어서 지냈다. 그 통에도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명령을 내리지만 인민 군은 이미 통솔이 불가능 한 지경으로 지리멸멸 했다. 전쟁은 중공군이 맡아서 하게 되었다. 전쟁 초기에 이승만이 맥 아터에게 전쟁 작전권을 넘기고 대구, 대전, 이리(익산), 목포를 거처 부산에 당도 한 것과 닮은꼴이다. 

 

1950년 10월 25일 미군 모르게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 13군은 미군 제1기갑사단과 국군 2군단을 기습 공격했다. 이들은 각각 운산과 온정리에서 패퇴하여 청천강 근처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국군 2군단은 많은 피해를 입었고 중공군은 국군이 미군에 비해서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공군은 1차 공세로 유엔군과 국군의 상황과 전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북한에 들어와 있는 중공군을 총지휘하고 있는 장군은 펑 더화이였다. 그는 11월 4일 갑자기 포로를 버리고 서쪽 전선의 23만 대군을 더 북쪽으로 철수시키고 15만 명을 장진호 쪽으로 진격하게 했다. 유엔군을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미처 보병을 따라오지 못한 화력 부대와 보급을 기다리기도 해야 했다.  

 

1950년 9월 말에 미 합참은 한국군 이외의 병력은 중공과 인공의 국경에서 작전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맥 아터는 11월 5일 압록강 다리 폭파를 명령했다. 미공군기가 일본을 출발한 지 2시간이 채 안되어 미 합참은  폭격을 하지 말라는 트루만 대통령의 명령을 맥 아터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국경 8 키로 이내의 폭격 금지 명령을 상기시켰다. 맥 아터의 폭격 명령은 이렇게 취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아터는 집요하게 미 합참을 설득했다. 결국 트루만은 국지전 형태로 폭격해서 확전을 방지하라고 명령하여 교량 폭파를 사실 상 허락했다.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blog.daum.net: 미국 역사상 최악의 명령 불복, 맥 아터 2015.8.20)

 

압록강 교량은 맥 아터가 원하던 대로 11월 8일에 폭파되었다. 맥 아터는 아직 심각한 수준의 중공군이 북한에 들어와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중공군 전 병력이 북한에 들어오기 전에 북한 전역을 점령하여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결정적인 오판이었다. 그렇게 맹열하게 공격해 오던 중공군이 11월 4일 이후로는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고작 3만 명의 중공군이 북한에 들어와 있다고 판단하고 11월 24일 유엔군과 국군에게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추수 감사절이었다. 맥 아터는 장병들에게 이번 크리스마스는 집에 돌아가서 지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터키 고기로 추수 감사절 저녁을 먹은 장병들은 사기가 충천했다. 그러나 쉽게 승전할 것이라는 안이 함은 군기를 해이하게 했다.

 

1951년 소련으로 도주한 매클린은 1950년 10월에 영국 외무성 미주 담당 국장이었다. 그의 책상에는 미국 정부, 합참과 맥 아터 사이에 오가는 비밀문서가 수시로 와 있었다. 소련으로 망명하면서 그 서류들을 가지고 갔다. 트루만이 맥 아터에게 압록강 다리 폭파, 정찰비행, 중공 항공기 추격을 금지하라고 명령한 정보가 고스란히 소련 측에 넘어갔다. 덕분에 중공군은 미군이 적극적으로 중국 본토를 공략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자신 있게 미군을 공략할 수 있었다.(1983.3.20; 중앙일보)

 

1950년 11월 말의 추위는 100년 만에 겪는 혹한이었다. 수은주는 섭씨 영하 34도까지 내려갔다. 유엔군은 정주, 영산동, 구장동, 덕천을 잇는 선에 진을 쳤다. 이 도시에서 신안주, 안주, 군우리, 북창리로 도로가 연결되었다.  남쪽으로 갈려면 군우리를 통과 해야 했다. 여기서 순천을 지나 평양으로 갈수 있다.  

 

서쪽은 미 제1군단이, 중앙은 9군단이, 동쪽은 국군 제2군단이 맡았다. 겨울까지 전투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던 유엔군(미군)과 국군은 방한복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다. 100년 만의 혹한은 전투 못지않게 그들을  괴롭혔다. 산악 행진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은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무기와 장비의 일부를 버리고 진격했다. 소총 부대 장병들의 대부분은 철모와 총검을 버리고 진격했다.  병사 한 명이 겨우 1개의 수류탄과 50발의 탄약을 휴대했다. 심지어 먹을 것 까지도 버렸다. 

 

1950년 11월 24일 오전 10시 크리스마스 귀향 공격(Home-by-Christmas Offensive)이 시작되었다. 동쪽(우측)의 국군 2군단은 강력한 중공군의 저항으로 진격이 저지되었다. 그러나 서쪽의 미 1군단과 중앙의 9군단은 중공군의 저항 없이 북진하여 11월 25일 밤에 정주와 영원을 점령했다. 

 

중공군은 산속에서 도로를 따라 북진하는 미군과 국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미군보다 전투력이 약한 국군을 공격하여 유엔군의 우측(동쪽)을 뚫어서 미군의 후미로 진출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중앙의 미군 9군단을 공격하여 우측 국군 지원을 막으려는 심산이었다.  중공군은 산속에 숨어서 미 1군단이 북으로 진격하는 것을 예의주시 하면서 공격의 적시를 기다렸다. 

 

중공군의 상황도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총을 가지고 있는 병사가 3명당 한 명이었다. 나머지 두 명은 수류탄을 던지는 것이 임무였다. 대포와 총을 만주에 두고 와서 박격포가 가장 큰 화력이었다. 겨우 닷세 동안 견딜 식량과 총탄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전쟁 터에서 노획해서 부족한 보급을 보충해야 했다. 중공군은 중국 내전에서 국민당군이 가지고 있던 무기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이 버리고 간 무기를 비교적 유용하게 쓸 수 있었를 것이다. 

 

인력은 중공군이 유엔군보다 우세했으나 화력과 공군력은 유엔군이 월등하게 강 했다. 중공군은 자신들의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서 산악지대인 동쪽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유엔군은 이 지역을 장비와 훈련이 부족한 국군 2군단에 맡겼다. 중공군은 미 공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서 밤중에 공격했다. 포병, 탱크 등은 평지에서는 움직이기가 수월 하나 산악지대에 접근하기는 힘들다.  중공군은 이렇게 미군의 화력과 공군력을 무력하게 했다.

 

1950년 11월 25일 오후 중공군은 총공격을 개시했다. 서쪽 영산동에서는 미 1군단이, 중앙의 입석과 구장동에서는 미 9군단이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중공군은 동쪽 덕천과 영동리에서 국군 2군단의 방어망을 뚫었다. 

11월 26일 아침,  크리스마스 공세는 완전히 저지되고 유엔군과 국군은 수세에 몰렸다. 미 8군 사령관 워커는 1군단과 9군단에게 동쪽 이동을 명령했다. 무너진 우측으로 중공군이 미군 후미로 가면 미군의 퇴로가 차단될 판국이었다. 

 

국군 2군단은 중공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붕괴되었다.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제각각 남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국군에 배치되었던 미군 고문관은 급히 출동한 미공군기를 타고 일본으로 후송되었다.  

 

국군 2군단에 가까운 우측을 맡고 있던 미군 9군단 제2사단 포플로 중령의 38 보병연대는 재수 좋게 군우리 회천 국도 남쪽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중공군은 11월 26일 밤에 중앙에 진을 치고 있던 미 9군단을 밀고 내려왔다. 중공군은 미군과 격전을 벌리기도 하고 어떤 지역에서는 어무런 저항 없이 미군의 후미에 도달했다. 

 

미군은 막강한 무기와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중공군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의 지형은 이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겹겹 산중은 미군을 여러 소규모의 군대로 나누어 놓았다. 당시의 통신 장비로는 이런 지형에서 부대 간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옆 부대가 어디 있는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재간이 없었다. 목소리가 터지게 외치면 메아리만 울려 퍼졌다. 명령이 잘 전달되지 않았다. 숫적으로 이미 우세한 중공군은  고립된 소규모의 부대들을 몇 배 되는 병력으로 하나하나 격파했다. 산과 계곡만 계속되고 평지를 찾기가 힘든 지형은 포병이 적당한 거리에 진을 칠 수가 없게 만들었다. 미군은 지형과 적에 대해서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남쪽으로 후퇴하던 국군 2군단 3사단은 포플로 중령의 미 38 연대에 합류했다. 오른쪽을 담당하던 국군 2군단이 섬멸되자 미군 2사단은 국군이 담당하던 오른쪽 방어를 위해서 금방 도착한 터키군을 군우리-덕천 방면으로 보냈다. 5천 명의 터키군은 와원에서 중공군과 교전하여 장열 하게 전사했다. 그들은 퇴각하는 국군 2군단 병력과 뒤섞였고  국군과 똑같은 운명이 되었다. 몇 명 안 되는 살아남은 터키군은 미 38 연대에 배속되었다. 터키군은 군인답게 용감하게 싸웠다.

 

38 연대장 포 플로우 중령은 시간이 가면서 연대의 오른쪽이 완전히 적에게 노출되었고 적이 이미 연대의 후미에와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미군 2 사딘이 군우리 쪽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동안 38 연대는 동남쪽으로 밀려갔다. 이와 같이 중앙의 미 9군단은 중공군에게 앞 되로 완전히 포위뒬 위기에 처했다.  

 

군우리 전투와 미군 2사단

11월 28일 맥 아터는 야전사령관 회의를 소집했다. 미 8군이 더 이상 중공군과 전투를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전면 후퇴하여 순천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할 것을 워커에게 명령했다. 군우리는 청천강 유역에서 순천으로 가려면 꼭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있었다.  11월 29일 미군 2사단이 군우리 북쪽에 남아, 내려오는 중공군을 막아 내는 동안 전미 군이  퇴각하라고 명령을 하달했다. 

 

터키군 보급 차량이 순천에서 출발하여 약 48킬로 북쪽에 있는 군우리 남쪽에서 싸우고 있는 터키 부대로 향 하던 중 영산리에서 중공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모두 전사했다. 그들은 터키군의 본부 대가 섬멸되었음을 모르고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언어 장벽 때문이었는지 미군이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공격에 정신이 없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너무나 허무한 일이었다. 두 분대 규모의 사단 헌병을 남쪽으로 보냈으나 이들도 중공군의 희생물이 되었다.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통하는 길가에 중공군이 잠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2 사단장 카이저는 약 900미터 정도의 도로를 중공군이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2사단은 점점 남쪽으로 밀렸다. 9군단 본부에 더 이상 버틸수기 없으니 퇴각할 것을 수 차례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터키군의 트럭이 중공군의 공격으로 파괴되는 것을 보고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2 사단장 카이저는 기차와 비전투 트럭, 간호장교들을 서쪽 신안주 방면으로 보냈다. 그리고 사단 병력은 군우리-순천 도로를 통과하여 남쪽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직 중공군의 주력 부대가  사단 후미에 내려와서 도로를 장악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기 전에 빨리 군우리를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단장 카이저와 참모들은 중공군이 이미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통하는 도로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순천에서 20마일 남쪽에 와 있는 영국군은 북쪽으로 진격하여 중공군을 무찌르고 퇴로를 터 줄 만한 병력이 아니었다. 

 

중공군은 도로가 언덕에 숨어서 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저 사단장은 전혀 전투준비를 하지 않고 전부 차량 이동으로 후퇴 전열을 짰다. 대부분의 트럭을 모두 기차에 실어서 서쪽 신안주 방면으로 보냈기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포차와 탱크에 올라탔다. 탱크는 사람을 태우기 위한 트럭 노릇을 하느라고 길에 늘어선 행열에 여기저기 끼어 있었다. 따라서 탱크부대가 한 지휘관에 의해서 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단순히 시람나르는 자동차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중공군은 일렬로 늘어서서 남쪽으로 가고 있는 미군을 집중 공격했다. 사단, 연대, 대대 등등의 지휘는 불가능 한 상황이 벌어졌다. 장교들도 주위에 있는 병사들 몇 명과 같이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 각자의 능력과 운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었다. 

 

길가운데 설치한 장애물 때문에 갑자기 앞에 가던 탱크가 섯다. 한줄로 움직이는 후퇴 행렬이 모두 멈쳤다. 길가에 숨어 있는 종공군은 총알을 비오듯이 퍼 부었다. 병사들은 총에 맞아 낙엽처럼 쓸어 졌다. 트럭이 폭파 되고 타고 있던 병사들은 주위 도랑으로 뛰어 내렸다. 움직이는 트럭들은 길 밖으로 튕겨저 나갔다. 부서진 운반 차량들은 길을 막아 버려서 후퇴 행렬은 한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포플로 중령의 38연대 병사들은 트럭과 탱크에서 뛰어 내려 길가 언덕에서 공격하고 있는 중공군에게 총을 쏘아 댔다. 그러나 그들을 조직적으로 지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병사들은 대대장, 소대장, 분대장과 모두 분리되어 있었다. 

 

6분 후에 앞에 섯던 탱크가 다시 움직였다. 살아 남는 오직 한가지 방법은 빠른 속도로 이 지옥 같은 턴널(도로)을 지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 운반 차량에서 뛰어 내린 병사들을 다시 태울 겨를 도 없었다.  길가 도랑은 부상병과 시체들로 꽉 차 있었다. 미처 차에 타지 못한 병사들은 안간 힘을 다해서 올라 타려고 쫒아 갔다. 그러나 차들은 그들을 태우기 위해서 설 여유가 없었다. 간혹 차가 서서 뛰어오는 병사들의 손을 잡아 올렸지만 이미 타고 있는 병사들로 꽉차 있어서 손을 놓아야 했다. 이렇게 차가 서면 행렬 전체의 후퇴 속도만 지연 시킬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후퇴 행렬은 "죽음의 계곡"을 통과 할 수 있었다.  중공군에 대한 미공군의 대 폭격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길은 부서진 차량들로 점점 통과하기가 힘들어저 갔다. 행렬의 진행은 점점 더디어 지고 마지막 좁은 계곡에 도달하자 중공군의 공격은 더욱 심해 졌다. 결국 길은 완전히 막혀 버렸다. 

 

38연대장 프플로우 중령은 길이 막히기 전에 마지막 좁은 계곡을 통과 할 수 있었다. 자기 지프차에 여러명의 부상병을 태우고 있었다. 지프 운전은 젊은 중위가 하고 있었다. 포플로우는 앞에 장애물이 많아서 지프가 도저히 통과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중위는 있는 힘을 다해서 개스 페달을 밟았다. 지프는 공중으로 튀워 올라서 옆 숲속 언덕에 섰다. 갑자기 친절한 영국 악센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트럭 옆에 서있던 영국 병사는 "이제 안심해도 돼요, 여긴 안전 합니다."라고 말 했다. 

 

포플로우 중령의 뒤에 막힌길 북쪽에는 아직도 많은 2사단 병력이 남아 있었다. 순천의 영국군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을 려고 중공군과 교전을 시도 했으나 실패 했다. 포위망을 뚫고 나온 미군이 영군군과 협력하여 죽음의 계곡에 갖처 있는 미군을 구출 할 수도 있었으나, 5일동안의 밤낮 없는 전투는 그들을 너무나 지치게 했다. 그들을 구하려 간다는 것은 신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인간인 그들로 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 (This Kind fo War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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