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6 20:20
https://news.joins.com/article/23921929?cloc=joongang-home-opinioncolumn
[중앙일보] 입력 2020.11.17 00:17 | 종합 3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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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효 시인
6·25 전쟁이 끝난 이듬해, 저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학교는 미군이 막사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산비탈 천막 교실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출처: 중앙일보] [삶의 향기] 고맙습니다 조 바이든 씨
1945년 남한과 미군
8.5.2019(온기철 번역)
1945년 10월12일 부산항에서 미군이 일본으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는 일본군 한명이 소지한 현금을 점검하고 있다. 일본으로 송환되는 일본인이 소지할 수 있는 돈은 민간인은 1000엔, 군 장교는 500엔, 사병은 250엔이 상한선이었다. 미국 국립문서관,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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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82415.html#csidx9c1a85f742b611aa82710d100fa939c (한겨레 신문)
Morrisonville, Illinois가 고향인 William P. Jones 중령은 2차대전이 끝날 무렵 이태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그의 부대는 필립핀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징집으로 전쟁에 동원되었던 그의 부하들은 거의
대부분이 귀향하기를 원했다. 겨우 두명의 공병 엔진니어 장교만 남기고 엔지니어들을 전부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하지중장 지휘하의 24사단이 남한 점령군으로 투입되었고
점령군 부대는 부대막사등 시설이 필요했으나, 당시 한국은 군부대에게 시설을 제공할 만큼 풍요한 나라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에 필요한 시설을 만들기위해서는 엔지니어가 절실하게 필요 했다. 존스는 상부에 항의했으나 미국회, 정부는 군인들의 본국 귀환이 우선이라고 그의 요구를 들어 주지않고 보충병력을 전부 기술자들이 아닌 보통군인으로 채워 주었다. 승전과 종전의 기쁨에 흠뻑 젖어 있는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중장에게 신고 하자, 공병대를 지휘하여 부산에 미군 직업군인들이 살수 있는 주택을 건설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말이 공병대지 전부 보통군인들이었다. 일생을 군인으로 보내기위해서 군인이된 직업군인들은 참으로 참기 힘든 일들이었다. 국방의무라는 국민의 의무 때문에 전쟁에 투입되었던 일반 시민들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집에 갈려고 기를 썼다. 겨우 3개월전에 징집되었던 군인들도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집에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세계 최강의 군대는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다행이도 일본군인들이 아직도 본국으로 가지않고 남이 있었다. 한국사람들은 해방되었다고 좋아서 술에 취해 있었고 미군들은 비록 군복을 입었지만 정신은 이미 민간복으로 갈아 입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노동이 끔찍한 일이었다.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군인들과 일본인 기술자들은 대동아전쟁에서 패배한 마당에 미군들에게 잡혀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포로로 잡혀갈 수도 있었다. 존스는 이들에게 일을 시켰다. 그들은 웃으며 시키는 일을 잘해냈다. 기술도 좋았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본국으로 돌아 갔다. 일본장교, 전문직업인들, 엔진니어, 은행원, 공장 사장들이 모두 떠났다. 부산전체가 마비되었다.
한국(조선)에 온 미국사람들은 미국의 발달된 환경에 익숙한 18세 부터 20대의 젊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참을 성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이 어떤나라인 지 전혀 알지 못하고 타향생활을 시작했다. 조선은 형편없이 가난했고 먼지투성이었으며 길거리는 더러웠고 사람들은 청결하지 못했고 시가지는 사람들 떠드는 소리로 번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고아들은 코를 줄줄 흘리며 길가에 누워 있었다. 일본사람들이 귀국하기 전에 많은 화폐를 발행하여 돈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 좀 학식이 있고 쓸만한 사람들은 친일파라고 하여 지탄을 받아서 버려지기 일수였다.
갓 쓰고 흰 두루마기 입고 수염기른 양반들은 술에 취해 가지고 비틀거리며 걸어 다녔다.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이 길가에 죽어 있어도 관리들이나 행인들은 본척도 하지 않았다. 한여자가 교통순경이 말리는 데도 길을 건너자
순경이 그 여자를 때려서 쓸어졌다. 행인들은 그여자를 일으켜 세우려 하지도 않고 그냥 지나 갔다. 이것을 본 존스는 미군정이 지옥 같은 임무를 맡았다고 생각했다. 약 40년동안 노예같은 취급을 받았고 무지비한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을 한달만에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는 데마다 나는 악취는 존스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썩은 생선, 장작연기, 쓰레기, 목욕하지 않은 사람들 등이 악취를 만들어 냈다. 맑은 공기가 있어야 할 실외에서 나는 냄새가 더 고약했다. 모든 동양사람들이 그렇듯이 한국사람들도 인분을 비료로 썼다. 이 냄새는 도시나 시골 어디에 서나 전국에 배여 있었다. 옷을 강물에 빨면 옷은 보기싫은 갈색으로 변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코를 움켜잡고 냄새를 참으며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누구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행정 경험이 있지도 않았고 무지한 동양사람들을 겪어 본적도 없었다. 독일과 일본에서는 미군이 이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곳에는 이미 필요한 일에 익숙한 전문인이나 기술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정부, 기업
이 필요로 하는 훈련된 행정가들이 전혀 없었다. 그들의 정치성향이 미국을 싫어 하든 좋아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존스중령은 당시의 한국정치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가를 점차 알게 되었다. 그는 화재가 발생하면 진화시키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부산에 소방서가 없기 때문에 이일을 공병대가 맡아야 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화재가 자주 발생했다. 그는 한 한국인 소방서원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서로 반대하는 파당들이 반대파의 집에 불을 지르는 거에요."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부산에는 판자집이 많아서 쉽게 불을 지를 수 있었다. 하루는 화재현장에서 아주 특이한 장면을 보았다. 한국인 소방원이 아주 용감하게 불을 끄고 있는 데, 한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가려고 하니 부관이 소매끝을 잡아 끌며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한다. 고개를 돌려 보니 서너명의 소방원과 한 경찰이 한 사람을 사정없이 구타하고 있었다. 부관이 "저사람들은 불를 지른 사람을 처벌 하고 있는 거애요." 라고 일어 주었다.
하루는 한 어린아이가 자기부대 트럭에 치어서 죽었다. 한장교가 사고조사를 하고 돌아와서 죽은아이의 가족들은 별로 걱정하지 않는 다고 보고 했다. 먹을 것이 없는 데 식구하나가 줄었으니 괜찮다는 설명이었다.
지독하게 가난한 한국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훔쳤다. 심지어 박아놓은 못을 빼서 팔 정도 였다. 미군 상점들을 미군이 지키는 것보다 한국인이 지키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것을 곧 알게 되었다. 여자들과 소년들이 휘발유통과 물통을 들고 도망치곤 했다. 미군 감시병이 이들에게 한번 총으로 쏘아서 죽게되자 그후로는 너무 끔찍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한국인 가드는 가차없이 쏘아 죽였다. 미군은 한국인 가드를 고용하여
많은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일리노이 출신의 존스중령은 진실하고 양심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심껏 맡은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사람들을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한국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정착 시킨다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도 이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1946년 초에 그는 임기가 다되어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날아갈 것 같이 기쁠 뿐이었다.
50th Anniversary Edition; This Kind of War by T.R. Fehrenbach, The Classic Korea War History 에서.
힌국말 번역 판이 나와 있습니다.한국전쟁 책중에서 제일 잘 쓰여진 책이라고 생각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