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유언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 되어야겠지만, 제 명대로 살만치 살다가 가는 사람에겐 그 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유서에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 올련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 나를 쏠련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걸음 한걸음 죽어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결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 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白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서는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걸 남길만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 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할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저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 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있다. 허물이란 너무 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괴의 눈이 멀고 작을 때에만 기억이 남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그 한 가지일로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문덕 문덕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죽을 때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 보다 한술 더 떠 거창한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게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 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화장)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걸 남겨 이웃을 구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하고싶지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다시 출가 수행자 가되어 금생에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
정말 유언인지는 모릅니다.
최소한도 그의 평소의 말씀을 모은 어록의 글인지도 모르지요.
하여간 그의 철학이 잘 표현된것 같어서 우선 올려놓고, 나중에 재 정리 합니다.
속세의 못난 인간들이 죽은후에 거창한 장례식을 또는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집념을
멀리 초월한 깨달은 철학인/종교인의 견해가 보이는 글입니다.
정말 유언은 그의 변호사인 김유후 (본인의 옛학교 동문)가 가지고있다 하는데
공개가 되지 않은것 같습니다. 아니면 이것이 그건지 (?)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