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26 01:54
"해방 후 몇몇 신문에 만화가 연재됐는데, 모두 1주일을 넘기지 못했 어요. '왜 신문에 만화를 싣느냐'는 독자의 항의가 빗발쳤기 때문이죠. 그런데 동아일보에 '고바우 영감'을 그리기 시작하니까 다른 신문도 따라하더라고요. "만화를 하찮게 보던 시절이 있었다. 정권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에 불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어렵게 낳은 '자식'이 문화재가 되기 때문인지 22일 경기 분당 자택에서 만난 김성환 화백(80)의 표정은 상기돼 있었다. 각진 얼굴에 넉넉한 풍채, 깐깐하면서도 친근한 말투, 콧등에 얹은 안경까지 '고바우 영감'과 꼭 닮은 모습이었다. 1955년부터 1980년까지 본보에 연재된 '고바우 영감'은 한국 최장수 시사만화다. 이후 조선일보와 문화일보로 옮겨가 2000년 9월까지 총 1만4139회가 연재됐다. 이중 문화재청이 학술적 사료적 가치가 높다며 문화재로 등록하기로 한 작품은 김 화백이 소장한 원화 6496장과 본사가 소장한 4247장을 더해 총 1만743장이다. 김 화백은 본보 문화부 기자였던 이상노 시인의 청탁으로 1955년 2월 1일자부터 본보에 '고바우 영감'을 연재했다. 처음에는 한 컷 만평과 네 컷 만화인 '고바우 영감'을 함께 그렸다. 만평에선 시사적인 내용을, '고바우 영감'에선 소소한 일상을 다뤘다. 하지만 만평을 그만 둔 뒤 '고바우 영감'에 시사적인 소재를 녹여 넣기 시작했더니 독자들의 반응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신문 만화로는 처음으로 '허위 보도'라는 이유로 이승만 정권의 제재를 받은 '대통령 관저의 변소 치우는 인부' 에피소드는 두 어 달 연구한 끝에 나온 작품이다. "그때 고작 450원 벌금형을 받았는데, 그 돈마저도 독자들이 동아일보사 현관 앞에 놓고 갔지요. 하지만 이 만화가 필화 사건으로 불거지면서 이승만 정권은 큰 타격을 받았죠. 나는 약하게 맞고 상대방을 1만 배쯤 맞게 하는 방법을 연구했는데 이 전략이 먹힌 겁니다." 만화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고바우 영감'에 대한 검열도 독해졌다. 하루에 네 번이나 소재를 달리해가며 그린 적도 있었다. "고바우 영감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검열관은 이 모습이 구속을 당해 꼼짝 못하는 것을 상징한다며 트집을 잡더군요. 이런 상황이 1년여 계속되니 만화가 싱거워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자 독자들이 '고바우 영감' 이상해졌 다고 해요. 심지어 '김성환이 죽고 가짜가 앉아서 그린다'는 루머까지 돌았죠. " 김 화백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대학생일 무렵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어느 모임에서 만났는데 저를 빤히 쳐다보더군요. 아마 부모에 게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나 봐요. 아버지를 괴롭히는 사람이라고. 허허."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공과(功過) 모두 많은 사람"이라며 "박 당선인이 아버지의 공과를 모두 기억해 국정에 임한다면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문의 시사만화 시대를 연 김 화백은 시사만화가 사라지는 추세를 안타까워했다. "신문에 시사만화가 없다는 건 중요한 무기 하나를 버린 것과 같아요. 민주화가 됐어도 우리 사회는 일상화된 억압이 남아있지요. 이를 비틀어 볼 수 있는 시사만화는 여전히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
2012.12.26 02:15
2012.12.26 11:12
You have good memory, sunbaenim,
about "Ger-Ddae, Ger-Si-Jeul".
The reason Park Geun-Hye stared at him
was out of curiosity - wondering who
"Go-Ba-Wu Young-Gam" is, not hatred.
(my interpretation in 2012)
2012.12.26 14:19
그당시 재치문답은 인기있는 라디오 프로그람 이었는데 특히 한국남과
안의섭의 재치대결이 들어볼만 했었습니다.
한번은 문제가 연속되는 두숫자를 넣어 글짖기 시합이었는데 1,2에서
부터 차례로 재치박사들이 돌아가면서 글을 지어 내려가다 마침 한국남
박사가9,10을 '박사님들이 구(9)구절절 열(10)심히 답변하셨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다음 차례가 안의섭 이었는데 11,12이라서 글짖기가
몹시 어려울것으로 생각 한박사가 안의섭 박사를 코너에 몰아 넣은줄
알았는데 안의섭 박사는 한참만에 예의 그의 능청스런 말투로 '박사님
들의 답변 하나 하나(11)가 다 일리(12)가 있습니다' 라고 대답
그의 임기응변에 혀를 찻던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다 즐거웠던 옛추억이지요. 규정
2012.12.26 18:50
2012.12.26 20:40
이승만 정권하 자유당 독재 시대에 고바우위 정치적 비난 만화가 생각납니다.
그당시 동아일보는 유일한 야당신문으로서 우리의 애독신문이였지요.
고바우의 명성은 사실상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하에 빛나게 되었지요.
따라서 고바우는 이 두 독재자들에게 감사해야겠지요.
그렇지 안었다면 고바우 만화는 한낮 그냥 보통 만화에 지나지 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것을 보면 세상은 묘해서 성공은 Enemy가 필요하며,
이런 역경에서의 투쟁이 데려 오는것 같지요.
2012.12.27 01:28
여당에 대항했던 신익희-조병옥에 이은 정통야당이 있었던 그시절을
생각하면 한국정치는 퇴보해 가는것이 아닐까? 아니면 인재부족일까?
그많은 사람들로 메웠던 한강 백사장에서의 유세들! 그물결로 충분히
정권 교체가 가능했건만 '나라를 맏는 지도자는 하늘이 내시는것'인듯
두분다 유세중 별세하고 하늘은 이승만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었다.
건전한 양당제도가 이룩되는 그날이 대한민국도 정치의 선진국가의
문을 두드리게 될겄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규정
2012.12.27 02:04
하나.
어느 날 분뇨차가 지나가는데
그 분뇨차를 끌고 가던 청소원이 마주 오던 분뇨차를 보더니
별안간 급히 마차를 세우고 옆으로 피했다.
고바우영감이 왜그러냐고 물으니
"저 마차는 경무대 O치우는 차에요!"
둘
5-16직후에 청량리 의예과 뒤 청량경찰서에서 쓰던 옛 한옥이 있었다.
통행금지 위반으로 잡혀 온 사람들 때문에 유치장이모자라서 빈 집을 빌린 것이다.
의예과 한 친구가 밤중에 대문밖에 있던 변소에 소변보러 나갔다가
통금에 걸려 거기 들어갔다.
거기서 안의섭화백의 형이란 분을 만났는데
그분 유머가 두꺼비보다 훨씬 재미있어서
우리 예과 친구는 2박 3일을 웃다가 나왔다고 한다.
60년대 한국 시사만화로 '고바우 영감'과 쌍벽을 이루었던것은
안의섭의 '두꺼비'가 있지요 전자가 정통성을 띈 시사만화이것에
비해 후자는 더직설적이고 해학적이어서 그당시 서민들이 즐겨보았
다고 생각합니다.
만화가 안희섭하면 또 생각나는것이 TV없던 시대여서 종로통에서
산부인과 개업하던 한국남 박사와 만화가 안의섭이 나오는 라디오
프로그람 '재치문답'을 들을수가 있지요.
두분다 번뜩이는 재치와 해학이 넘쳐 본인이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람이기도 하였습니다.
안의섭 만화가의 약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규정
안의섭(安義燮,1928. 1. 16 경기 이천~1994. 8. 3 서울)
시사만화가.
시사만화 〈두꺼비〉의 작가로, 해학과 풍자가 담긴 소시민적 풍자만화로
유명하다. 춘천교육대학과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하였다.
1953년 〈경향신문〉에 편집부 기자로 입사한 뒤 우연찮게 그려본 만화가
신문에 실리면서 1955년 7월부터 시사만평과 4컷짜리 만화 〈두꺼비〉를
연재하였다. 1961년 〈대한일보〉, 1963년 〈동아일보〉, 1964년
〈경향신문〉, 1966년〈조선일보〉, 1977년 〈한국일보〉를 거쳐 〈세계일보〉·
〈문화일보〉 등에 재직하면서 40년 동안 〈두꺼비〉를 연재하였다.
압축된 언어와 우회를 거부하는 직설적 필치, 통쾌한 해학과 걸쭉한 입심
으로 정부의 비정과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질타하며 세태를 풍자하였다.
1960년 자유당 정권의 실정을 신랄하게 풍자하다가 1년간 연재를 중단당했고,
유신정권 말기인 1979년 가을 3개월간 또다시 연재를 중단해야 했다.
제5공화국 시절인 1986년에는 당시 종양을 앓고 있던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장수를 비는 내용의 만화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건강악화를 기원하는 내용이라는
오해를 사게 되어 국가원수모독죄 혐의로 사흘 동안 수사기관에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80년 관훈클럽 언론인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