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토유정기(鄕土有情記 ) /노천명 ★수필 밤 기차가 가는 소리는 흔히 긴 여행과 고향을 생각하게 해준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정거장 대합실에 가서 자기 고향 이름을 외치는 스피커의 소리를 듣고 온다는 탁목(琢木)이도 나 만큼이나 고향을 못잊어 했던가보다 아버지가 손수 심으신 아라사 버들이 개울가에 하늘을 찌를 듯이 늘어서 있고 뒤 울안에는 사과꽃이 피는 우리집. 눈내리는 밤처럼 꿈을 지니고 터키 보석모양 찬란했다. 눈이 오면 아버지는 노루사냥을 가신다고 곧잘 산으로 가셨다. 우리들은 곳간에서 강난콩을 꺼내다가 먹으며 늦도록 사랑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수염 덥석부리 영감에게 나는 으레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면 영감은"어제 장마당에 가서 팔고 와서 없어." "아이 그러지 말구 어서 하나만." "이거 또 성화 났군. 그렇게 얘길 좋아하면 이 다음에 시집갈 때 뒤에 범이 따라 간단다." "그래도 괜찮아, 그럼 박첨지더러 쫓으라지.무섭나, 뭐." 램프불 밑에서 듣는 얘기는 재미있었다. 이런 밤이면 어머니는 엿을 녹이고 광에서 연시를 꺼내다 사랑으로 보내주셨다. 고향과 함께 그리운 여인이다. 내 어머니 처럼 그렇게 고운 이를 나는 오늘날 까지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늘 옥루몽 (玉樓夢)을 즐겨 읽으셨다. 읽으시고 또 읽으시고는 읽을수록 맛이 난다고 하셨다. 백지로 책 뚜껑을 한 이 다섯 질의 책을 나는 어머니의 기념으로 두어뒀다. 어머니가 보고 싶를 때면 장마다 어머니의 손때가 묻었을 이 책을 꺼내서 본다. 어머니의 책 읽는 음성이 어찌 좋던지 어려서 나는 어머니의 이 책 보시는 소리를 들으며 늘상 잠이 들었다. 이 고장 아낙네들은 머리를 얹는 것이 풍습이다. 공단결 같은 머리를 두 갈래로 나누어 땋아서는 끝에다 새삘긴 댕기를 물려 머리를 얹고서 하아얀 수건을 쓰고 그 밖으로 댕기를 사뿐 내 놓는다. 이런 모양을 한 고향의 여인들이 나는 가끔 그립다. 서울의 번화한 거리에서도 이따금 이런 여인이 보고 싶다. 뒤는 산이 둘러 있고 앞에는 바다가 시원하게 내다보였다. 여기서 윤선을 타면 진남포로, 평양으로 간다고 했다. 해변에는 갈밭이 있어 사람의 키보다 더 큰 갈대들이 우거지고 그 위에는 낭떠러지 험한 절벽이 깎은 듯이 서 있었다. 아래는 퍼런 물이 있는데 여름이면 이곳 큰 애기들은 갈밭을 헤치고 이 물을 찾아와 멱을 감았다. 물 속에서 헤엄을 치고 놀다가는 산으로 기어 올라간다. 절벽을 더듬어 올라가느라면 바위 속에서 부엉이 집을 보게 되고 산개나리꽃을 꺾게 된다. 산개나리를 한 아름 꺾어 안고는 산마루에 올라서서 수평선에서 아물거리는 감빛 돗폭을 보며 훗날 크면 저 배를 타고 대처(大處)로 공부를 간다고 작은 소녀는 꿈이 많았다. 내가 사는 데서 한 20리를 걸어가면 읍이었다. 고모님댁이 거기 있고, 또 성당이 있어서 가톨릭신자인 우리집에선 큰 미사가 있을 때면 읍엘 들어가야 했다. 달구지를 타거나 걷거나 하는데, 고모집엘 갔다 올때면 고모가 언제나 당아니(거위)알을 꽃바구니에 하나 가득 담아 달구지 위에다 올려놔 주는 것이었다. 흔들거라는 달구지 위에서 이 당아니 알이 깨어질까봐 나는 몹시 조심이 됐다.펑펑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달구지에 쪼그리고 앉아서, 눈덮이는 좌우의 산과 촌락들을 보며 어린 나는 말이 없었다. 고향을 버린 지도 20여 년, 낯선 타관이 이제 고향처럼 되어 버리고 그리운 고향은 멀리 두고 그리게 되었다. 나는 고향에 돌아 갈 기약이 없다. 앞마당에는 아라사 버들이 높게 서 있는 집, 거기엔 어머니가 계셨고, 아버지가 계셨다. |
2014.02.01 18:47
2014.02.01 19:30
* 아래글들은 전부 인용문임.
이분의 현실 도피적인 경향과
너무 과도한 현실참여로 양쪽을 왓다갓다 하는 경향이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갔군요.
사 슴
- 노천명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族屬)이었다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
어찌할 수 없는 향수(鄕愁)에
슬픈 모가질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산호림>(1938)-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겉으로는 사슴을 가볍게 스케치한 한 폭의 작은 그림 같지만, 사슴에게 인격을 불어 넣고 감정을 이입(移入)시켜 어느덧 사슴은 시인 자신의 모습으로 변모되어 독자 앞에 나타난다. 불행한 현실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이는 사람에게 하나의 질곡(桎梏)일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거기에 바로 노천명 시인의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
두 연만으로 된 단순한 구도의 이 작품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된다. 목이 긴 것과 슬픈 것과는 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짐승들은 목이 짧다. 그런 가운데서 목이 길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남다른 모습이기에 홀로 외톨이가 되는 이유일 수 있겠고, 목이 길기에 높이 세운 머리가 더욱 오만하고도 고고한 외로움을 지니게도 할 듯하다. 이러한 사슴은 또한 다른 이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혼자 말없이 점잖고 쓸쓸하게 살아간다. 이러한 모습에서 시인은 사슴의 먼 과거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향기롭고 우아한 뿔이 있는 것을 보면 무척 고귀한 족속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사슴은 때때로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잃어 버린 전설을 떠올리며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먼 산을 바라본다. 그 때의 사슴은 더욱 가냘프고도 슬프게만 보인다.
이 시는 '사슴'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시인의 사상이나 감정을 개성적으로 표현한 시로서,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사슴의 귀족적인 품위와 고고한 아름다움에 감정을 이입시켜 '시인 내면의 근원적인 고독과 이상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고 있다. 현실의 세계보다는 어떤 먼 이상의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정신적 고고함과 자기애에 빠져 버리고 있다. 현실과 타협할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현실에 절망하지도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독한 자아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2014.02.01 23:33
2014.02.02 02:06
민선생!
고국을 떠나 외지에서 오래살은 우리들에게 이수필은 특히 가슴에
와 닿는군요. 비록 육체는 시들스들 늙어 버렸지만 마음만큼은 크게
달러지지 않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그 어렵고 어려웠던 일제 시대에 친일을 했다고 지금와서 몰아 부치
는것은 일부를 빼놓고는 어쩧면 불공평한 처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비판하고 나서는 그사람들은 그때 어디서 무었을 했길래
그리도 당당할까? 그리고 우리는 모든사람이 안중근 의사같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기대하는것은 무리가 아닐지?
제세푼어치 생각입니다.
세상은 불공평해서 이곳 미시간에는 1월에 39인치 이상 눈이와서
역대 최고량이라고 하더니 2월이 시작하는 어제 눈이 또 하루종일와서
이곳 미시간 서울의대 구정모임도 취소할 지경인데 칼리포니아는
drought이 심각하다니 말입니다.
모든일은 결국 지나가는법이니 얼마후에 어김없이 돌아올 봄이나
기다릴수밖에----. 규정
2014.02.02 07:40
That has been my opinion to those that are shouting
as "pro-Japanese Colonial Rule", Hwang sunbaenim.
Where were they and what were they doing then?
2014.02.02 09:59
노천명씨는 "고향을 버린 지도 20여 년, 낯선 타관이 이제 고향처럼 되어 버리고..."라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거의 50년이 되어간다.
하긴, 우리에게는 언제나 돌아갈수있는 고향이란점에서, 아쉬움이 덜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거기엔 어머니가 계셨고, 아버지가 계셨다. "
이건 우리 맘대로 돌아가서 찾을수 없는것...
노영일 형글을 읽고 또 이분 이애기를 읽으니 갑자기 엣 생각이 나서
읽은 글을 여기 올립니다.
이분의 시를 고등학교때인가 읽은 적이 있엇는데, 청록파 시인같은 여자 분으로 만 알고있엇고
그분의 일생을 읽어 보니 파란 만장한 분이 군요.
정치적으로 항상 줄을 잘못붓잡아 엉뚱한 사람들을 찬양하면서 딸아다니면서
정력을 낭비하면서 빨갱이, 일본 군국주의 찬양하고 딸아다니기도하고, 감옥에도 들어가고
요새같은면 종북파로 따라다닐 비운의 시인이드군요.
세상을 판단하는 눈과 詩的인 感覺은 전혀 별개란 것을 깨달음니다.
여기 아래는 위키페디아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그 당시 공산주의는 지신인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엇든 가보지요.
이차대전 초기에 일본이 계속 승리하는걸 보고, 조선의 독립이란것을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이 전쟁에 이기기를 기원한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친일 파로 몰리는데,
그때 제가 어른 이엿드라면 어ㄷㅓㅎ게 핼동을 햇을찌 궁금합니다.
노천명은 1911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군 박택면 비석리[1]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기선인데 어릴 때 병으로 사경을 헤맨 뒤 천명으로 개명하게 되었다. 1930년 3월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하여 1934년 봄에 졸업하였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입사 학예부 기자로 4년간 근무하다가 1938년에 퇴사했다. 1938년 조선일보사의 학예부 기자가 되었다. 그 뒤 4년동안 조선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여성(女性) 지의 편집인이 되어 여성지 편집을 맡아 보았으며, 1943년에는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고, 1946년까지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있었다.
문학활동[편집]
1932년〈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근무하면서 창작 활동을 했으며,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시 〈사슴〉이 유명하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가 부드럽게 표현되고 있으며,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 현실에 초연한 비정치성이 특징이다. 1938년 1월 1일 처녀시집 《산호림》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 쓴 작품 중에는 〈군신송〉등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특히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라는 시는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다면 귀한 부르심을 입었을 것을'이라며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일제의 인적 수탈(강제 징병)을 찬양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1945년 2월 25일 시집 제2집 《창변》을 발표하였다.
광복 직후[편집]
이화여전 동문이며 기자 출신으로서 같은 친일파 시인인 모윤숙과는 달리 광복 후에도 우파 정치 운동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해방 직후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에 강사로 출강하고, 서라벌 예술대학 등에도 강사로 나가 출강하였다.
1946년 부녀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고, 동시에 부녀신문 편집부 차장에 임명되었으며, 또한 모교인 이화여대의 출판부에 졸업생 자격으로 참여하여 이대 출판부 일에도 참여, 1956년 5월에 발표한 《梨大 70年史》의 자료 수집과, 정리를 담당하였다. 1949년 3월 10일 동지사에서 《현대시인 전집》을 내면서 제2권에 몇편의 시를 발표, 《노천명집》을 수록하였다.
한국전쟁 전후[편집]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피신하지 않고, 임화 등 월북한 좌파 작가들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행사에 참가했다가,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조경희와 함께 부역죄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모윤숙 등 우파 계열 문인들의 위치를 염탐하여 인민군에 알려주고, 대중 집회에서 의용군으로 지원할 것을 부추기는 시를 낭송한 혐의로 징역 20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했으며, 몇 개월 후에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1953년 3월 30일 제3차 시집 《별을 처다보며》를 출간했다. 1951년 공보실 중앙방송국 방송담당 촉탁에 임명되었다.
1957년 3월, 길에서 쓰러져 백혈병 진단을 받은 후 누하동 자택에서 요양하다가[4] 6월 16일 세상을 떠났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