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4 13:46
판문점 (연속 #3/7)
남북 이산가족찾기 회담 제의
1971년 8월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북한적십자사에 ‘남북 이산가족찾기’를 공식 제의했다. 회담 제의의 목적은 1945년 타율적인 남북 분단과 6·25전쟁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1000만 이산가족의 주소와 생사 확인, 상호방문, 서신교환을 주선하고 당사자들의 희망에 따라 재결합시켜주자는 의도였다. 북한적십자사도 이틀 뒤인 8월14일 회담을 수락했다. 이로써 1970년대 남북대화의 문은 당국자간 회담이 아니라 민간단체인 적십자 사 사이의 접촉으로 처음 열렸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겨레의 바람이던가. 이제 한(恨)과 슬픔이 가시고 부모 형제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모두들 들떠 있었다. 사반세기 힘의 대결만이 팽팽하던 군사분계선 위의 판문점에서 군복 차림의 군사정전회담이 아닌 남북적십자사 민간인 네 명의 파견원이 1차 접촉을 갖고 대화의 물꼬를 텄다. 1971년 8월20일의 일이다.
그때 나는 열두 살, 누나는 열네 살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우리 네 식구는 불길이 솟구치는 무연탄 더미에서 뛰쳐나와 인파 속으로 휩쓸렸다.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정신없이 한참을 내달리다, 나는 아버지의 울부짖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뒤따라오던 어머니와 누나가 보이질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누나를 부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사방에서 가족을 찾는 소리가 곡소리처럼 울렸다. 앞을 가늠하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피난 인파는 남으로 남으로 행렬을 이루며 내려가고 있었다. 판문점을 향해 달리던 버스가 어느새 임진강 철교에 들어선 모양이다. 버스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반복되면서 고향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겨 있던 나의 귀를 자극했다. 차창을 보니 임진강 물이 반짝인다. 붉은 물결이 도도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대동강가 갈대숲에서 고추잠자리를 잡아주던 누나의 조심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내 고향은 장화홍련전으로 유명한 평안북도 철산이다. 광복 전 우리 집은 자수성가한 아버지 덕분에 2000석 정도의 지주로 부유하게 살았다. 광복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우리 집은 1946년 토지개혁으로 하루아침에 토지를 몰수당했다. 전 재산과 집을 군 인민위원회에서 접수당하고 나자 우리 식구는 거리에 나앉은 꼴이 되었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우리 가족에게 평안북도 중강진이라는 벽촌으로 가서 살라고 이전명령을 내렸다. 그야말로 생면부지인 그곳에 가서 어떻게 살 것인지 하늘이 내려앉는 듯했다.
지금도 생생한 장면은 이모부라는 사람이 낫을 허리춤에 차고 우리 집으로 와서 아버지를 위협한 일이었다. 이모부는 우리 집의 마름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몸이 성치 않은 이모와 함께 살아주는 것이 고마워 이모부를 끔찍하게 챙겼다. 이모부도 아버지는 물론 우리 집 식구 모두를 예의를 다해 대했다. 그런 이모부가 세월이 바뀌었다고 제일 먼저 아버지한테 낫을 들이댄 것이었다. 일본 놈의 앞잡이라고, 농민의 피를 빨아먹은 반동분자라고 아버지를 몰아세웠다.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이모부가 어느 틈엔가 공산주의 이론과 용어를 들먹이며 소작인들을 독려하고 호령했다. 안하무인이었다. 정해진 시간까지 집을 비우라는 통보대로 어렵게 마련한 트럭에 필요한 짐을 대충 실었다. 가구와 당장 필요하지 않은 세간은 동네 아낙들에게 맡겨놓았다. 다시 돌아올 테니 좀 보관해달라는 부탁도 함께 남겼다. 우리는 중강진으로 간다고 속이고 도망치다시피 고향을 떠났다. 동평양 선교리에는 고모가 살고 있었다. 선교리에 하나밖에 없는 3층집 여관이 고모네 집이었다. 우리는 고모 집에 숨었다. 그렇게 곧 돌아간다던 것이 어느새 사반세기였다. 네 명의 남북 적십자사 파견원은 각기 ‘자유의 다리’와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 들어섰다. 민간인으로는 광복 후 처음으로 이뤄진 공식적인 만남이다. 남북 적십자사 파견원들이 지니고간 신임장 문건 수교가 13분 만에 이뤄졌다. 그러나 그 13분간 파견원들의 첫 대화는 그리 잘 통하지 않았다.
보도일꾼 최수만 남북 적십자회담엔 군사정전회담 때보다 많은 기자가 취재를 나왔다. 북한의 보도일꾼도 두 배나 늘었다. 시골장터가 되어버린 판문점 뜰에는 처음 보는 북한 기자가 많았다. 나는 이들 중 나이는 나보다 좀 들어 보였는데, 작달막한 키에 양쪽 어깨에 사진기를 두 개나 둘러메고 카메라 가방을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이 우스워 보였다. 그래도 잽싸게 사진을 찍는 모습은 필름도 없이 빈 카메라로 엉거주춤 사진을 찍는 척하는 다른 북한 기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접근했다. 양쪽으로 푹 파진 이마가 귀하게 자란 얼굴이었고 작은 입으로 웃는 모습은 소녀같이 나약해 보였다. 우악스러운 북한 기자들과 달리 좀 가냘픈 인상이었다. “필름도 없는 카메라로 사진은 뭐하러 그렇게 찍어?” “필름이 없다니?” 나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래전부터 사귄 친구처럼 정이 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최수만이란 기자를 잘 골랐다고 생각했다. 첩보 수집에 필요하기도 했지만, 지루한 회담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기보다는 북한 기자와 아웅다웅하면서 보내는 게 훨씬 재미있었다. 나와 최수만은 인사가 끝나자 동시에 담배를 꺼내 내밀었다. 청자와 금강산이었다. 우리는 굳이 자기 담배를 피우라고 고집을 피웠다. 그러면 담배를 갑째로 바꾸자고 내가 제의했더니, 최수만은 싫다며 “각기 피우기요” 하면서 넌지시 거절하는 것이다. 나는 계속 졸라서 담배를 갑째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최수만은 아쉬운 듯 청자한 대를 피워 물며 “순하구만” 하면서 씩 웃는다. 판문점에서 남과 북의 기자들은 담배 교환을 많이 했다. 그런데 북한 기자들은 교환한 담배를 자기가 피우지 못하고 상급 지도원 동지에게 갖다줘야 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북한 기자와 교환한 금강산 담배를 사무실 동료와 부담 없이 나누어 피운 것과는 사뭇 달랐다. 부르주아 담배를 피울 수 없다는 뜻인지, 그들은 남측 기자들이 주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한국의 담배를 피우다가는 자아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판문각 쪽 그늘진 토담에 걸터앉아 무료함을 달랬다. 회담장에서는 이산과 상봉에 관해 설전이 오가고있었다. 나는 문득 어머니와 누나가 생각났다. “최 동무는 6·25 때 뭘 했소?” 내가 왜 모르겠는가. 그 전쟁으로 나는 어머니와 누나를 잃었다. 인천에 생활터전을 잡은 아버지는 어머니와 누나 생각에 실의에 빠져 있었다. 새어머니를 맞이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와 누나에게 죄를 지었다고 늘 한탄하면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상을 떴다. “최 동무는 어떻게 살아남았소?” 1950년 7월, 내가 동평양 인민학교 3학년 때 전쟁에 흥분한 당 선전선동부의 승전 소식은 요란했다. 인민군 총부리에 두 손을 높이 든 미군 병사의 사진을 게시판에서 본 기억이 났다. 어느새 나의 마음은 헝클어져 있었다. 시선은 표적 없이 허공을 꿰뚫고 있었다. 얼굴엔 어머니와 누나에 대한 상념으로 꽉 차 있었을 것이다. 최수만은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엇인가 찾으려는 눈빛이었다.
민족의 혈맥 이은 남북 직통전화
이 회담에서 한적은 판문점 남쪽의 자유의집과 약 70m 떨어진 맞은편의 판문각에 각기 상설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두 곳을 잇는 직통전화를 가설하자고 제의했고, 북적은 이를 기적적으로 받아들였다. 광복 후 26년 만에 끊어졌던 민족의 혈맥이 가느다랗게나마 이어진 것이다. 북적의 속셈이야 어찌됐든 사상 최초의 판문점 내 남북 직통전화는 합의를 본 지 이틀 만인 9월22일 오전 남북 작업반의 공동작업으로 가설됐다. 이날 낮 12시 정각, 한적이 임명한 초대 연락사무소장 최동일씨는 역사적인 첫 통화를 위해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보도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첫 대화를 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통신선의 점검이나 의례적인 인사도 건너뛴 채 대뜸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나는 오늘 북남조선 사이에 첫 직통전화가 개설된 것과 관련, 귀하에게 열열한 축하를 보냅니다….” “이거 좀 천천히 불러줘야지 이쪽에서 필기를 할 것 아닙니까.” 수화자가 주의를 환기시키자 북쪽 송화자는 비로소 냉정을 되찾은 듯 멈칫하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개통된 판문점의 남북 직통전화는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가동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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