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30 21:33
<올해는 甲午年입니다. 위 붓글씨 세개에서 모두 庚午年은 甲午年을 잘못 쓴 실수입니다.>
지난 6월 4일부터 제5회 한국의사서화회전에서 전시되었던 저의 작품입니다.
저는 전시회에 못 가보았는데 25인의 92점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던 것 같습니다.
서화회 총무께서 저의 휴대폰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이 李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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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36년 음력 12월 26일 양력 1537년 1월 7일 조선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 오죽헌 몽룡실 |
사망 | 1584년 2월 27일 (음력 1월 16일) (47세) 조선 한성부 대사동 자택 |
사인 | 병사 |
국적 | 조선 |
별칭 | 호는 율곡, 자는 숙헌 |
학력 | 한성시 장원급제 |
직업 | 문인, 시인, 사상가, 정치가, 교육자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곡산 노씨, 부실 김씨,이씨 |
자녀 | 이씨(서녀) |
부모 | 부 이원수, 모 신사임당, 서모 권씨 |
친척 | 할아버지 이천, 재종조부 이기, 이행, 누이 이매창, 형 이번, 형 이선, 동생 이우, 종증조부 이의무, 친족 이순신, 사돈 김장생[1], 서녀사위 김집 |
웹사이트 | 율곡학회 홈페이지 |
이이(李珥, 1537년 1월 7일(1536년 음력 12월 26일) ~ 1584년 2월 27일(음력 1월 16일))는 조선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관직은 숭정대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성혼, 송익필, 김장생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西人)의 종주로 추앙된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 깎고 중이 되려다가 환속한 자 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공납(貢納)의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분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 뒤 그를 문묘에 제향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 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다.
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의 5대손이며, 중종 때의 재상 이기, 이행 형제의 재종손[2]이자 통덕랑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李元秀)와 정경부인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었다. 휴암 백인걸의 문인이다.
月(달)
栗谷 李 珥
萬 里 無 雲 一 碧 天 만리무운일벽천
廣 寒 宮 出 翠 微 巓 광한궁출취미전
世 人 只 見 盈 還 缺 세인지견영환결
不 識 氷 輪 夜 夜 圓 불식빙륜야야원
푸른 하늘은 끝없이 구름한점 없는데
광한궁에서 나온 달, 산마루에 아스리히 밝기도하네
세상사람들 단지( 달의) 차고 이즈러짐을 보지만
달의 수레바퀴 돌아가는 길, 밤마다 둥글음을 아지 못하네.
출처: http://cafe.daum.net/kyelsung/YQFB/167?q=%BC%AD%BB%EA%B4%EB%BB%E7
서산대사의 생애
서산대사 하면 우리는 임진란 때 의병을 이끈 스님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사실 그의 진정한 업적은 그러한 세속적인 공헌에 못지않게 <선가귀감>을 통한 선.교 양종의 융합을 시도한 종교적 측면에도 있다.
서산이라 본래 묘향산의 별칭인데, 만년에 그가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법명은 휴정, 호를 서산.청허라 했다. 9세에 부모를 잃고 훗날 임꺽정을 진압한 안주목사 이사증의 양자로 입적되어 서울에 올라온다. 15세에 진사시에 낙방하자 지리산에 들어가 영관을 은사로 승려가 되어 30세에 승과에 장원급제한다.
36세에 교종과 선종의 일을 총괄하는 양종판사(교종판사와 선종판사)가 되고 이어 보우대사의 후임으로 선.교 양종의 일을 총관리하던 봉은사의 주지가 되었다. 한편 이런 불교진흥이 이루어지자 유교의 벼슬아치와 선비들은 물끓듯이 일어나 승려들을 비난했고, 그 비난은 주로 보우에게 집중되었다.
휴정은 3년 동안 이 일을 본 후 일체의 승직을 사퇴하고, 역시 명예는 자기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이어 금강산.묘향산.지리산 등을 두루 여행하게 된다. 그는 금강산에 있으나 묘향산에 있으나 항상 1000여 명의 제자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제자들에게 칼쓰기.활쏘기 등을 가르쳤다.
임진왜란 3년 전에 정여립 모반사건도 일어나는데, 여기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잠시 투옥된
1592년 일본군은 동래를 함락시키고 신립 장군이 충주에서 패하자 선조의 어가는 마침내 의주에 도착하고 선조는 휴정을 찾았다. 선조를 만난 휴정은 신이 비록 늙고 병들었으나 나라의 위급함을 앉아서 볼 수는 없습니다. 늙은 스님은 절에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게 하고 젊은 스님들은 나라를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미 그의 나이 73세였다. 이에 선조는 휴정을 8도 16종도총섭으로 삼았고 73세의 휴정은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려 1500명을 모으고 이들을 지휘하였는데 이때 그의 제자들 중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유정(사명대사).영규.처영이다.
휴정의 생애는 무엇이 참된 승려의 길인가를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 여파는 마침내 전국의 승려들에게 감화를 주었고 그것이 결국 선불교 중흥의 새 장을 열기에 이르른 것이다. 실로 조선불교는 휴정이라는 거대한 봉우리의 출현으로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도 매우 잘 지어 불교의 깊고 신묘한 경지를 읊은 불교시와 애국시가 많이 남아있다. 저서에는 <청허당집><선가귀감> 등이 있다 |
西山大師 詩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B%B0%B1
생애[편집] 이백은 촉나라 쓰촨 성에서 태어났다. 이백의 아버지가 중앙 아시아에서 장사를 하던 무역상이었기 때문에 이백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25세나 26세까지 고향인 촉나라에서 살면서 동암자(東巖子)라는 선인과 쓰촨 성의 산들을 오르며 도교를 수양하였다. 25세나 26세에 고향을 떠나 강남(江南)을 여행하였으며, 아버지의 유산을 소비하며 몰락한 귀족의 자제들과 어울렸다. 724년 43세에 현종의 칙령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어 장안(長安)에 머물렀으나 관리의 따분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44세에 현종의 측근인 고역사(高力士)와 다투고 사직하였다. 사직 후에 낙양에서 산둥까지 두보와 함께 여행하였다. 54세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 56세에 현종의 열여섯 번째 아들인 영왕 인(永王 璘)의 군대에 참여하였으나 영왕의 군대가 숙종에 의해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이백도 야랑(夜郞, 지금의 구이저우 성)에 유배되었다. 다행히 삼협(三峽) 부근까지 왔을 때에 은사(恩赦)를 받아 다시 강남으로 돌아왔다. 만년에는 강남의 각지를 유람하였고, 62세에 안후이 성 당도(安徽省當塗)의 현령(縣令)이었던 종숙 이양빙(李陽冰)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이백이 장강(長江)에 비치는 달 그림자를 잡으려다가 익사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백은 고시(古詩)와 절구(絶句)를 특기로 했다. 그의 절구는 '신품(神品)'이라고 평해졌고, 그의 시재(詩才)는 천래(天來)의 재, 즉 '천재(天才)'라고 했다. 그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또한 박진감이 있으며, 때때로 환상적이다. 또한 그의 시는 매우 자유로우며 많은 고민을 하지 않고 한 번에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동시대에 살았던 11세 연하의 시인 두보(杜甫)가 1자 1구의 조탁(彫琢)에 뼈를 깎는 고심을 기울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편 술을 몹시 좋아하여 술에 취해 있을 때 현종의 부름을 받고 그대로 궁전으로 들어가 계속해서 시를 읊었다고 한다.
이백(리바이, 李白, 중국어 병음: Lǐ Bái, 701년 ~ 762년)은 중국의 시인이다.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촉나라 쓰촨 성 출생이다. 두보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힌다. 이 두 사람을 합쳐서 이두(李杜)라고 칭하고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른다. 현재 약 1100여 수의 시들이 남아 있다. 작품[편집]
淸平調詞
李白
雲想衣裳花想容 운상의상화상용
春風拂檻露華濃 춘풍불함노화농
若非群玉山頭見 야비군옥산두견
會向瑤臺月下逢 회향요대월하봉
구름 같은 치맛자락, 꽃 같은 얼굴
살랑이는 봄바람, 영롱한 이슬일레라
군옥산 마루서 못 볼 양이면
요대의 달 아래서 만날 선녀여
2014.06.30 21:48
2014.07.01 03:52
2014.07.01 04:10
고이 간직하셨던 신사임당 漢詩 병풍을 물려받으신 따님은 행복하십니다.
결혼하시어 사임당같이 아름다운 모법적 주부로 생활하실 것입니다.
따님 세분이 모두 의사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운영자님 비롯하여 동문선생님들께서 멍석을 깔아주시니 이제 서슴치 않고 무엇이나 이곳에 다 올리게 됩니다.
때만 되면 먹을 갈고 글씨판을 잠깐씩 펼쳐 놓는 외에 연습을 안 하고 있어 죄책감을 느낍니다.
기회가 되면 書室에 규칙적으로 다니며 연습해야 글씨가 좋아질텐데 못하고 있습니다.
위 글들은 초서와 행서의 중간쯤 되는 글로 생각됩니다.
이백은 배를 타고 쓴 시가 많은 것 같습니다.
長江에 비추인 달그림자를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세상을 떴다는 전설로 그의 浪漫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014.07.01 12:33
2014.07.01 14:13
운영자님,
연습을 더 많이 하고 진전된 글씨를 써보겠습니다.
펼쳐 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글 올리기 머리에 category를 선택할 때 이것도 art에 넣어도 되나? 하고 홀로 웃으면서 그래도 art 버튼을 눌렀습니다.
운영자님 커멘트,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4.07.01 15:13
2014.07.01 15:59
한글은 손도 안 대었고 漢字만 쓰고 있는데 글자를 보면 그대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으면 좋겠습니다.
아직은 체본을 보며 조심스럽게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자풀이도 할 수 있도록 한문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이날 이때까지 안 하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국민학교때 일본선생님께서 학교의 큰 행사에서, 저에게 좀 서예를 쓰게 하여 校內 전시회에 출품했지요.
크고 굵은 글자로 [此處も 戰場 だ. - 여기도 싸움터이다. 제2차세계대전중 성생님들은 脚絆을 다리에 감고 다니던 시절입니다.]라고 썼습니다.
남산 京城神社엔가 근처 天滿宮[글씨를 잘 쓰게 해준다는 神을 모셨다는 곳] 이라는 절에 한 학년에 한 명씩 뽑혀가서 붓글씨 딱 한자씩을 쓰고 온 적이 두어번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누가 '잘 한다, 잘 한다.' 하면 어린아이들이 격려를 많이 받는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뒤늦게라도 서예를 꼭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바쁘게 젊음을 보내다가, 서예를 시작해서 그럭저럭 20여년이 지났습니다.
노영일 선생님, 감사합니다.
2014.07.02 16:35
2014.07.02 16:52
친정어머님께서도 서예를 하신다고 하시어 반갑습니다.
붓글씨를 시작하신 환갑의 연세는 가장 활동적인 인생의 전성기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있는 것은 언젠가 실현되는 것 같습니다.
젊을 때 아이들 한참 기르면서는 몸에 힘은 있어도 정신적으로 더 바빠서 안 되던 것이 노년기에 이루어지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조승자선생님,
이 홈에서 스스럼 없이 느끼어 저의 구석구석의 것을 솔직하게 펼쳐 놓을 수 있는 것은 항상 사랑으로 대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감사드리며 건강히 늘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14.07.03 21:14
I appreciate for sharing your Artistic Caligraphy. I think it's good for our web page
for the variety of our web's contents. Please, share with us your caligraphy in the
future.
PS;
1. I tried to learn caligraphy writing when I was young boy, but I didn't continue.
2. My late father was very diligent in writing caligraphy and had many exihibitions
in Jinju. I saw his "Ban-ya Sim-kyung" caligraphy writing when I visited my friend
living in Jirisan. He showed it to me for my late father's memory.
3. I have several friends in Korea, especially graduates from Korean Military Academy,
they were practing caligraphy up until now. I don't know whether caligraphy is a part
of their training as the leader during their military service.
Thank you again, sunbaenim.
2014.07.03 22:22
방준재 선생님,
반야심경은 260자로 되어 있어 저희 서울의대 소아과를 한 계희숙이란 친구는 이것을 써놓고
나이가 많아지면서 그런 것을 쌓아두면 뭐 하느냐고 모두 찢어 버렸다고 합니다. 아깝지요.
그러나 용기있는 결단인 것도 같습니다. 주위의 물건들 하나둘씩 살아 생전에 자기 손으로 없애는 것도 깨끗한 일 같네요.
춘부장님께서 쓰신 붓글씨를 한 작품이라도 미국에 가지고 계시는지요.
옛 어른들은 표현도 빨리빨리 하지 않으시고 붓글씨로 왔다갔다 본인들의 마음을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급하게 내뱉고 싶었던 말도 붓글씨 쓰는 동안 다 가라앉아 스스로 마음의 해결을 볼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般若心經 讀誦 -영인 스님- 붙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GiVRwhzuPC8
2014.07.04 01:03
다재 다능하신 선배님께 축하말씀 올리겠습니다.
저도 한국에 사시는 아는 많은분들이 은퇴후 서예에 정진하시는것을
알고 있는데 한획한획 정신을 집중해서 쓰는 이 서예는 정신수양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선배님은 우리후진들에게 여러모로 좋은 본보기가 되십니다.
감사드립니다. 규정
2014.07.04 02:37
황규정 선생님,
후배선생님들께서 늘 격려하여주시면 무슨 재주를 넘어서 보여드릴까 생각하게 됩니다. 나올 것도 없는데 ---.
늙으면 다시 아이가 된다는 말이 참 그대로 맞습니다.
한 획 한 획 집중하면 정신수양도 되지만, 더운 여름 맥주 한잔 들이켜고 붓을 잡으면 여고시절 수영장에서 배영하며 미래에의 희망으로 물위에 둥둥 떠있는듯.
李白 시를 마침 쓰고 있을 때는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노든 달아 --' 이 浪漫의 시인과 함께 뱃놀이를 하는 기분입니다.
먼 발치에서 후배선생님들 따라가기 바쁜데, 미쳐 따라가지 못해 한참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홈에서 함께 하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추신: 홍명보-호 월드컾 축구 잘 안 되었을 때 스포츠에 열광하시는 황규정 선생님 생각이 먼저 났습니다.
2014.07.04 09:15
2014.07.04 10:53
석주님,
감사합니다.
우리 고등학교 친구들이 나를 얌전한 줄만 알고 있을텐데 때로 엉뚱한 것을 모르는가봅니다.
나를 잘 아는 상도동 천주교회 친구들, 46년째 믿음으로 얽혀진 7-8명만이 가끔 만나 농담도 하고 밥을 같이 먹습니다.
붓글씨는 쓸 때마다 환경이 달라지는데, 벼루 먹, 밑에 까는 까만 천, 서진, 그리고 화선지를 하나씩 꺼내어 준비하고 먹을 갈고 있으려면
지나온 과거가 주마등같이 스쳐갑니다. 이 세상 삶을 단단히 정리해야 할 현실은?
붓글씨 쓰는 가장 중요한 조건, 그날의 날씨입니다. 습도에 많이 관계되는 것인지. 서울에서는 글씨 시작하고 10분 20분 쓰면 붓이 자꾸 짝짝 갈라졌는데
임시 거처, 이곳 제주에서는 전혀 붓이 갈라지지 않아 아주 호조건이었습니다.
응접실 외숙모님 작품으로 고국의 향수를 느끼시기도 하실테지요. 귀한 글 잘 간직하고 계십니다.
이한중 선생님께서 올리시는 게재물, 눈여겨 뵙고 있습니다. 동문님과 가족 되시는 분들과 어울리는 이 홈에서 새로운 사회생활을 하는 마음입니다.
홀로 달리다가는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도 할 몸, 이 홈에서 늘 나자신을 견제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석주 내외님,
주님의 평화속에서 은총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14.09.18 00:20
2014.11.09 10:58
정관호 선생님,
古書(고서) 1 : 唐詩長篇(당시장편) 잘 읽었습니다.
이곳에 우연히 들렸다가 이제야 선생님 댓글을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의사서화회가 발족하여 제5회 의사서화회 전시를 올해도 하였습니다.
忙中閑, 그림, 글씨 등 고유의 취미를 기울여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휴대폰에 들어 있던 이성락 정헌 선생님 작품입니다.
흔히 생명의 위급한 상황에서 온 힘을 기울여온 저희들은 하고자 하면 뭣이든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시회에 참석을 못하여 전시된 여러 작품을 못 올리고 (어디엔가 정리된 것이 있으면 링크하고 싶습니다마는)
苦 衷 을 담은 것인가 생각됩니다.
졸작이나마 저의 것만을 올렸습니다.
세월호 등 어수선한 틈에 한가한 마음을 가져보기 위하여 올린 게재물입니다.
그러나 어느세월에서나 사람 사는 것은 비슷하여 이들 한시 속에도 當代에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