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4 12:38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00804/102287749/1?ref=main
{동아플래시100] 동아일보 기자가 무단이탈해 워싱턴에 간 이유는?
본인설명
어제 동아닷컴에서 동아플래시 100라고 하는 난에 나온 이야기였다.
내용은 세계제1차 대전 이후 열강의 평화협상이 Washington에서 열렸는데 동아일보사에서도
조사부장 김동성씨를 보냈다는 내용이며, 천신만고를 하여 Washington에 도착하고
또 취재기자 자격으로 참석과 보도도 하였다는 좋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김동성(金東成)씨 성함은 비교적 자주 아버지께서 이야기를 하셔서 호기심이 생겨서 챶아 보니,
정말 바로 그분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천리구(千里駒)라고 그분의 호를 불렀다.
아버지와도 상당한 친분이 있었고, 또 아버지와 의형제를 하셨던 이희경 선생님과
대단히 막역한 사이였던 모양이었다. 이희경 선생께서 순국하신 후, 서울 음대교수이며 Soprano였던 외동따님
이관옥(李觀玉)씨가 자주 그댁을 방문하였고.우리집에 와서 그 이야기를 항상 아버지께 하였다.
그래서 옛날 생각이 나서 이곳에 기사를 올린다.
여러분, 귀중한 실화이니 위에 올린 URL을 클릭하고 잘 보시기 바랍니다.
Kwan Ho Chung on August 4, 2020
2020.08.04 20:12
2020.08.04 20:19
On November 11, 1918, World War I ended as Germany signed Armistice. There was the influenza pandemic from 1918-1919. On January 8, 1918, Woodrow Wilson declared 14 points and creation of League of Nations that included self-determination of colonized nations after the war for world peace on State of a Union address. In the spring of 1919, the Paris Peace Conference was held. It was hosted by France, United Kingdom, United States, Italy, and Japan. About 37 countries sent their representatives.
Wilson was very popular in the meeting and his 14 points would the principles of negotiation for the post-war world peace. 여운형 and other young Korean independent activists in Shanghai were encouraged by Wilson's self-determination. 여운형 decided to send 김규식 to Paris to promote Korean independence.
Before he left to Paris, 김규식 suggested 여운형 that Korean people had to do something to impress the world, so other countries got to know how much Korean people desire to be independent. 여운형 agreed to it. As Kim got on the way to Paris, 여운형 began to organize 3.1. Movement in 1919. In April in the same year,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was formed. After 3.1 movements, 서재필 who was a successful businessman in Philadelphia jumped into the independent movement because he saw some hope in Koreans.
He probably disregarded Korean people as less civilized before. He began to work with 이승만. He spent too much money and time on independence movement and ended up bankrupting his business.
2020.08.05 04:56
여기에 이 분의 약력소개를 한다.
金東成(김동성)
이칭별칭 |
호 천리구(千里駒) |
생애 1890년 ~ 1969
출신지 |
경기도 개성 |
저서(작품) |
신문학, 중남미기행, 한영사전, 열국지, 중국문화사 |
해방 이후 합동통신사 제3대 회장, 조선일보 발행인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생애 및 활동사항:
1908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에 유학하여 수학하였으며, 귀국한 뒤 1920년 4월에 동아일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921년에 동아일보 제2대 조사부장이 되었으며, 1924년 5월에 이 회사를 퇴사하였다.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조선일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약하였고,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에 민원식(閔瑗植)·남상일(南相一)·남정린(南廷麟) 등과 합동통신사를 설립하여 초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합동통신사 제3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그 뒤 1964년까지 고문직에 있었다. 또한, 언론계뿐만 아니라 관계로 진출하여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공보처장에 임명되었으며,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투신하였다. 1952년에는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60년에 민의원 사무처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그 뒤 민주공화당 중앙위원으로 있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보다는 언론인으로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20년 8월 중국을 비롯하여 아시아 각국을 순방중이던 미국 국회의원시찰단을 우리 나라에 유치하여 일제 식민치하의 실상을 해외에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1921년 10월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제2차 만국기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부의장에 피선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태평양군축회의에 한국기자로는 최초로 참석하여 취재활동을 폈다.
우리 나라 언론사상 최초의 해외특파원, 국제기자대회 최초의 참석자, 최초의 군정청 여권소지자, 맥아더(MacArthur,D.)를 회견한 최초의 한국기자 등 언론인으로서 최초의 기록을 많이 보유한 것으로 유명하다.
千里駒(천리구)의 의미:
내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가끔 천리구라고 부르시기에 그이름이 이상해서 어머니께 물어보니, 어머니께서 그 뜻을 알려주셨다.
①천리마(千里馬) 즉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명마. 그래서 ②뛰어나게 잘난 자제(子弟)를 칭찬(稱讚)하는 말이었다.
2020.08.05 12:40
(여운형과 김규식의 3.1운동 이야기)
일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서 열린 파리 평화 회의는 한국의 젊은
독립운동가 들에게 희망과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 습니다. 나라가 망한지
거의 10년만에 본격적인 독립운동 분위기가 조성된 것입니다. 김동성 기자
가 군축회의를 취재하러 간 것도 혹시나 한국독립기회가 없을 까 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평화회의 5대 주최국중의 하나였고 점점 강해
지는 나라였습니다.
2020.08.05 15:41
그분은 국내에서 언론인으로 활동을 하셨는데 분명히 독립운동에
직접, 간접으로 협력하셨을 것으로 믿습니다.
좋은 가정에서 출생하셨고, 해방후에도 많은 활동을 하신 분이지요.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4&levelId=tg_004_1830&ganada=&pageUnit=10
[정의]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국제회의.
[내용]
워싱턴 회의는 1921년 11월 12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에서 미국, 영국, 중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의 9개국 대표단이 모여서 군비 축소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여러 문제를 논의한 국제회의였다. 1921년 7월 미국 대통령 하딩(Warren G. Harding)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열국(列國) 간 회의를 제안하였다. 이 회의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서로의 권익을 보장하는 가운데 상호 협력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실패했지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은 워싱턴 회의를 민족 자결주의에 근거한 외교 독립운동의 마지막 기회로 인식하였다. 한국은 워싱턴 회의에 초청을 받지 못했지만 임시 정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이 주도하여 서재필(徐載弼), 정한경(鄭翰景), 돌프(Fred A. Dolph) 등으로 대표단을 구성했다. 이승만은 대표단장으로 임시 정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워싱턴 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회의의 의제로 선정되도록 활동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한국 대표단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워싱턴 회의 의제에서도 한국 문제를 완전히 제외시켰다. 결국 민족 자결주의에 근거한 ‘외교독립론’은 파리 강화 회의와 마찬가지로 워싱턴 회의에서도 성과를 얻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워싱턴 회의의 실패로 외교독립론을 가장 앞장서서 주장한 이승만은 임시 정부에서의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다. 또한 외교를 통한 한국 독립이 가시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면서, 이를 전제로 상하이에 수립되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재편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를 위한 국민 대표 회의 소집 주장이 대세를 얻어갔고, 재편의 방향을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 등 치열한 내부 논쟁이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