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9 08:28
(서울역사 박물관)
(경희궁)
(독립공원,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서울 역사박물관은 경희궁 터에 있다. 정확히 옛 서울중고등학교 자리이다. 일제는
조선의 왕궁중의 하나였던 경희궁을 없애고 경성중학교를 세워 일본인들만의 교육
을 시켰다. 지금은 경희궁의 일부가 복원되고 서울역사박물관이 관광객을 모으고
있다. 광화문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8번 출구로 나와 신문로를 따라 서대문 쪽으로
약 1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가는길에 새문안교회가 있다. 박물관은 조선, 구한말
과 일제 강점기, 현대로 나뉘어 있다. 무료 해설자가 있다. 11시 해설 시작시간에
집합장소에가니 방문객이 우리부부 둘밖에 없다. 약 시간반에 걸려서 관람을 마치고
독립공원과 서대문 형무소로 향했다. 가는길에 샌드위치를 사먹고 약20분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독립문과 영은문의 흔적, 서대문형무소를 볼 수있다.
주위는 잘 단장되어 아름다운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형무소 내부는 유관순, 김구,
여운형등의 독립운동가의 수감 경험을 생생하게 관람할 수있다. 그리고 문익환,
김근태등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인사들도 접할 수 있다.
2019.10.29 10:01
2019.10.31 10:09
박문사(博文寺)는 일제 강점기에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 동쪽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사찰이다.
장충단은 본래 을미사변 때 피살된 시위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을 기리기 위해 대한제국 고종이 쌓은 제단이었다.
이 곳은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에 대한 항일 감정을 상징하는 장소였기에 1919년 조선총독부는 장충단 자리를 공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32년에는 공원 동쪽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을 짓고 사찰이 자리잡은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불렀다. 박문사라는 이름은 이토의 이름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고, 춘무는 이토의 호이다. 박문사는 이토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에 완공되었다.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와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의 친일부역자와 그외 천여명의 참석하였다.[1]
정무총감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가 발기하여 세워진 소토슈 사찰로 건평은 387평이었다. 설립 목적은 "조선 초대총감 이토 히로부미의 훈업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박문사 건축에는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 등이 사용되었으며,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이전하여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참석하고 히로히토 천황과 황족들의 하사품도 전해졌다.
1937년에는 일본군 육탄3용사의 동상을 세워 대륙침략을 위한 '정신기지'로 삼기도 하였다.[1] 1939년에는 이 곳에서 이토를 포함하여 이용구, 송병준, 이완용 등 한일 병합 공로자를 위한 감사 위령제가 열리기도 했다. 이용구의 아들인 이석규가 흑룡회와 함께 개최한 이 행사에는 이광수와 최린, 윤덕영 등 약 1천여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사찰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철거되었고, 박문사 터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현재 신라호텔이 세워져 있다.
(위키피디아에서)
일제의 서울 유린의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 있으나 사람들이 잘모른다. 그래서 "자주 독립"이 절대 절명의 과제제인 것이다.
2019.11.03 01:41
우리의 국적 이등박문을 기리던 사찰이었고, 이제는 자취를 감추었다니 다행이군요.
일본과 타협하고 화해하여서 상호친목을 이루어야겠지만
일본의 만행은 자자손손에 잊으면 안된다고 믿습니다.
본인의 개인생각으로는 일본 군화는 우리나라 땅을 밟으면 안된다는 헌법조항을 만들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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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공원, 특히 서대문형무소 주차장에는 관광버스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관람객
중에는 어린 학생들이 많이 있어서 형무소 안이 씨끌벅적했다. 아마 이들은 집에 돌아
갈때 일본놈들에 대한 적개심에 이를 갈고 있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과연 이러한
정부의 역사관이 국가의 장래에 도움이 될까? 생각해 본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대한 전시가 옛날에 비해 많이 관대해 졌다.
홍범도, 여운형, 김원봉등에 대한 남한 국민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눈에 들어왔다.
1910년 부터 1945년 까지는 일제강점기라고 하고 1945년 부터 1948년 까지는 미군정기
라고 한다. 어렸을 때 어른들은 일정시대라고 했다. 모두 외국에 점령 당했던 시절이다.
전자는 우리민족이 원치 않았던 역사적 사건이고 후자는 그래도 된다는 뉘앙스가 진하게
풍긴다. 1945년에 우리민족이 원했던 것은 우리민족에 의한 수권이었다. 따라서 미강점기
라고 해야하지 않을 까? 이때 미국의 남한건설이 남한국민에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고 해서
남한국민의 외세에 대한 오해(?)를 초래해서는 않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