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日記) 2012년 2 월 11 일 토요일 김선철 (64) 선배님의 일주기(一週忌) 추도식에 다녀왔다. 장례식을 치룬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일년이 지났다. 몇몇 가까운 동창들, 친구들, 교인들이 모여 가족들을 위로 헀다. 김선철 선배님은 30여년간 이웃에 살며 산부인과 전문의로 나와 같은 병원에 나가셨다. 주관이 강하셨고, 자기가 옳다고 믿는것은 무서운집념과 끈기로관철하셨던분이다. 혹자에게는 편견이 강하다는 인상을 주었을지도 모르나 이는 서울대학 출신들의 속성일지도 모른다. 남에게 지고는 못견디는 강한 승부욕을 가지신 그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재치와 유머감각이 뛰어나서 동창회모임등에서는 여러사람들이 배꼽을 쥐고 웃게 만드셨으며, 다방면에 취미와 재능이 있으셨다. 음악, 문학, 영화,등에 조예가 깊으셨고, 시카고 오페라 공연은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보시고 어쩌다 부드기한 사정으로 못보게 되면 나에게 표를 주고 갔다와서 어땠는가 이야기 해 달라고 하셨다. 골프, 테니스, 낚시, 바이킹, 등 스포츠도 무척 즐기셨다. 같이 중국여행을 할때, 황산(黃山)에서 소위 5성급 호텔에 들었는데 밤에 불이났다. 복도에 연기가 자욱하여 창문을 열고 전기줄을 타고 일층 베란다 까지 내려와 거기서 뛰어 내렸다. 호텔측은 한마디의 사과도 없고 도리여 자기네도 큰손해를 봤다는 태도다. 비분강개 하였지만 잘못 대들었다가는 집에 오지도 못할것 같아 꾹 참았다. 그후 그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자주 하시곤 했다. 작년 이맘때, Mrs. 김이 황급히 나에게 전화를 하고 지금 김선배님이 병원에 가셨단다. 어제까지도 멀쩡하시던분이 무슨일인가 의아해서 가보니 대량의 토혈을 하고 응급실을 통하여 입원하셨단다. 하시는 말씀이 사실 암진단을 2년전에 받고 용하다는 의사들을 다 찾아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조차 전혀 내색을 안하시고 깜족같이 숨기셨다. 그러고 보니 지난 2년간 골프치자고 해도 이핑계 저핑계 대며 피하신 생각이 났다. 남에게 지기 싫어 하는 성격에 계속 나에게 지니까 그러시는줄 알았다. 평소에 치료받으셨던 노스웨스턴 대학병원으로 후송된후로는 시간 날때마다 병문안을 갔다. 이미 병이 워낙 깊어져서 상태는 급속히 악화되어 갔으며 말기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마지막 병문안을 갔을때는 지금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음식을 한번 맛있게 먹어봤으면 좋겠다고 하시며, “내가 조금나면 우리 조선옥에 불갈비나 먹으러 갑시다”하셨다. 이런 소박한 소원도 이루지 못하고 가셨다. 운명하시기 이틀전에 고대하시던 손자가 태어났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임에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다. 노목이 쓸어진 자리에 새싹이 돋아 나는것을 보았다. 일주기 추도식은 돌잔치와 함께 했다. 2012년 2월 12 일 일요일 아침에 9순이신 어머니를 모시고 교회에 갔다. 어머니에게는 교회가 일주일에 단 한번의 나들이나 마찬가지이다. 얼마 않남은 인생에 종교는 절대적인 위안인것 같아 보인다. 교회에 가서 한국사람들과 한국말로 이야기하고 한국 음식을 먹는것도 또한 큰 기쁨이다. 어쩌다가 내가 무슨일이 있어 교회에 못가면 그렇게 섭섭해 하실수가 없다. 오후에는 시카고시내에 사는 아들내외가 손자 손녀를 데리고 집에 왔다. 딸들은 멀리서 사나 아들이 가까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식구가 다 모이면 4대가 한자리에 있는 셈이다. 어머니는 춥다고 방온도를 올리라신다. 아이들은 떠죽겠다고 물어보지도 않고 온도조절기를 내린다. 몇번 올렸다 내렸다 하다가 고장난적도 있다. 어머니는 테레비 소리가 않들린다고 크게 틀어놓으면 아이들은 귀청떨어지겠다고 다른방으로 도망가 버린다. 어머니는 큰소리로 이야기해야만 들으시는데 손주들은 한국말을 잘 모르니까 할아버지는 왜 증조할머니한테 소리를 지르냐고 나무란다. 설명하기 귀챦아서 그냥 잘못했다고 그러고 만다. 대가족은 즐거우면서도 쉬운것은 절대 아니다. 어머니는 한국말을 유창하게하는 손주며느리를 제일 좋아 하신다. 맛벌이하는 아들내외에게 잠시나마 휴가를 주는 의미도 있고, 사실 솔직히 말해서 잠시나마 손주들을 독차지하고 싶은마음이 더 크다. 어떤때는 동심으로 돌아가 아이들 보다도 내가 더 좋아하는 때도 있다. 미키 미니 구피등 캐렉터들이나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손주들도 따라서 노래를 하며 춤추는것이 그렇게 귀여울수가 없다. 신데렐라등 이야기는 하도 여러번 보아서 다음대사가 무엇인지 미리 알 정도다. 아이들이 홀딱 반하는 빙수며 솜사탕을 사주고 환심을 산다. 저희 부모들이 알면 질겁을 하겠지만 애들이 그렇게 좋아하니 한번쯤 사주면 어떠랴 싶다. 이번 주말 이틀간은 생노병사 (生老病死) 인생의 파노라마를 축소판으로 본듯하다. February 2012 photo & text by Y. RO |
2012.02.22 10:46
2012.02.22 11:18
노영일 선생님,
고 김선철 선생님 일주기 글에 숙연한 마음으로 고인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드립니다.
선생님들께서 건강 관리에 모두 힘쓰시면 좋겠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국내에서 병원에 가서 진료 받기가 더 임의로운듯 합니다.
후배선생님들께서 세상 뜨는 소식은 오래 살고 있는 저에게 늘 면목이 없는듯 느껴집니다.
손주님들과의 나들이, 참으로 마음 훈훈합니다.
솜 사탕! 오랜만에 저의 어릴적으로 되돌아갑니다.
색갈이 예뻤는지, 달콤해서 그랬는지, 무척 커서 더 좋았는지
양 입가에 뻘겋게 묻혀가면서 입 속에 들어가면 살살 녹아서 신기했던지,
다 먹고 남은 막대기 하나, 참으로 허무했지요.
아직도 환상적이 그것, 한 개 먹어보고 싶습니다. 그때 그 식구들을 생각하며.
구순의 노모님 모시고 4代의 아름다운 정경이 눈에 선합니다.
교회에 가시는 일, 손자며느님과의 우리말 대화, 모두 기다려지시는 즐거움이시리라 생각합니다.
행복한 가정의 어느 하루의 일기, 참으로 즐겁습니다.
2012.02.22 11:46
조부모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과 질이 다른것 같이 느겨져요.
부모들은 애들 공부시키고 멕여살리고 직장다니고 하니, exclusive 한 사랑을 베풀수없지만,
조부모는 그런 구속이 없으니,..
저도 전쟁통에 시골 대대로 살아온 조부댁에 맏겨져, 10-13 세 까지 살면서,
전쟁중 석달, 그후 학교시작한후 3 년간은 학교 끝나면, 강아지 마냥 졸졸
딸다니면서, 논에 들어가 모심는것, 피뽑는것, 밭에서 김매는것, 가마니짜고, 집신 짜는것, 도라개질하는것, 노끈 짜는법,
할머니한테는 댕댕이 광주리 만드는것, 두부만드는것, 막걸리 담는법,.. 모든 기술을 전수 받엇지요.
그때, 제가 말잘듣고, "싹싹하게" 모든기술 전수 받을때, 조부모님이 무척 속으로 흐믓해하셧을테지만,
그런 티는 내지를 않으시드군요.
10 세때 천자문을 하루에 8 자씩 외우라고 해서, 신문지에다, 쓰고, 외우고 햇는데,
동네 애들이 창호지 문밖에서,
시시닥 거리고, "서울 까투리 놈" 피난와서, 잘못걸려 "재수없게 쌩고생" 한다고 놀리든 기억이있지요.
그때 외운 漢字 1000 중 많은 글자는 아직도 써먹으니,
할아버님 생각은 일생 잊을수가 없는겁니다.
벌써 60 년전 얘기가 되네요.
2012.02.22 11:47
노선생께서는 복이 많으신 분이네요.
장수하시는 노모님 모시고 아들손주 근처에 있으시니
행복이라는것이 다 그런거 아닐런지요.
건강하시게 나날을 지내십시요. 규정
2012.02.22 16:19
일년전 동기 한재은 부부와 같이 훌로리다에서 휴가하는중에
김선철 선배님의 서거소식을 한재은형이 전화로 받고 몹씨 괴로와하는 것을 목격하였읍니다.
사진을 보니까 나도 기억이 날만큼 안면이 있었든 분이었읍니다.
한재은 친구한테도 들었지만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었읍니다.
신의 축복을 받은 노영일 님의 family diary 즐겁게 읽었읍니다.
2012.02.23 00:03
노선배님! 방 온도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할머니와 손주 이야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과거 동양에서는 절대적으로 할배 할매에게 파워가 주어져 있었는데...
요즘 한국 일부에선 어디서 들어온 풍조인지 모르지만, 손자에게 파워가.
효까지 엷어져......
君師父一體라는말은 사전 속에나...학생이 선생을 패고...
완전 들짐승체제로 바뀌어 가는 추세가 안타깝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