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지처란 무엇인가?
최근 내가 “산위에 올라 향초를 캐다.”라고 하는 고대 한시를 실었는데
그 내용은 이 여인의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잘못 판단하여
내 쫓김을 당했다는 슬픈 내용의 시다.
동문 여러분으로부터 그 무정한 남편을 규탄하는 글이 있었고, 또 거기에 반드시 “조강지처”에게
부당한 행위를 하였다고 명시하였다.
나는 물론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이왕 말이 난 김에 조강지처의 어원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내가 가장 자주 참조하는 중국사이트 百度百科를 이용하였다.
도대체 "糟糠之妻不下堂"을 넣었다니 다음과 같은 정보를 받았다.
糟糠之妻不下堂
“糟糠之妻不下堂”出自《後漢書》,意思是不要拋棄共同患難過的妻子。
《後漢書》是一部記載東漢歷史的紀傳體史書,與《史記》、《漢書》、《三國志》合稱“四史”。
書中分十紀、八十列傳和八志(司馬彪續作),記載了從王莽起至漢獻帝的195年歷史。
여기 영문 번역이 있다.
The wife one married when one was poor should not be discarded in one's affluence.
한글 번역:
“조강지처불하당”이란 말은 후한서에서 나왔고, 함께 환란을 지난 처를 버리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 글은 동한사, 사기, 한서 그리고 삼국지 등 네 곳의 역사책에 있다.
釋義: 글 뜻
不要拋棄共同患難過的妻子。환란을 함께 겪은 아내를 리면 안된다는 뜻.
糟糠(조강),用以充飢的酒糟糠皮等粗劣的食物;지게미와 쌀겨라는 뜻
堂(당),正房。指情誼深,不能有負於結發妻子。여러채중 주장이 되는 몸체.
下堂(하당):指從家中攆走。指驅逐,趕走。(집에서) 내쫓다.
宋公(송공):指宋弘,公,尊稱。宋弘,字仲子,光武帝時為大司空。송홍을 가리키며, 광무제 때 대사공을 하였다.
主曰(주왈):湖陽公主說 호양공주는 광무제의 누님으로 방금 과부가 되었다.
帝(제),漢光武皇帝劉秀。한 광무황제 유수
글의 뜻을 살펴보자.
原文
時帝姊湖陽公主新寡,帝與共論朝臣,微觀其意。主曰:"宋公威容德器,群臣莫及。"
帝曰:"方且圖之。"後弘被引見,帝令主坐屏風後,因謂弘曰:"諺言貴易交,富易妻,人情乎?"
弘曰:"臣聞貧賤之知不可忘,糟糠之妻不下堂。"帝顧謂主曰:"事不諧矣。“
이때 황제의 누님은 방금 과부가 되어 황제는 조신과 함께 토론하며 그 뜻을 자세히 보았다.
공주는 말하기를, “송공의 위엄과 덕기는 군신이 따라갈 수 없습니다.”
황제가 말하기를, “내가 곧 도모해 보겠오.” 후에 홍이 황제의 부름을 받아 뵙게 되었는데,
황제는 공주를 병풍뒤에 있으라고 명하고, 홍에게 말하기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이) 귀하게 되면 사굄도 바꾸고,
부하게 되면 아내도 바꾼다고 하니 이게 인정이 아니요?”
이에 홍이 가로되,
“신이 듣기로, 빈천할 때 사굄은 잊으면 안되고, 환란을 함께한 아내는 집에서 쫓을 수 없습니다.”
황제는 공주를 보고, “일은 되지 않았소.”하였다.
아래 글에 좀 더 자세히 설명이 나왔으니, 그 내용은 똑 같다.
——《後漢書·宋弘傳》
譯文
當時漢光武帝的姐姐湖陽公主剛剛守寡,光武帝和她一起評論朝中大臣,暗中觀察她的心意。
公主說:“宋弘的威儀容貌、品德器亮,朝中之臣沒有誰比得上(他)。”
光武帝說:“我正想在他身上考慮這事。”後來宋弘被引見,光武帝讓公主坐在屏風後面,對宋弘說:
“俗話說,地位高了就要更換朋友,錢財多了就要另娶妻子,這是人之常情嗎?”
宋弘說:“臣聽說的是貧賤時的朋友不可忘記,在一起受過苦難的妻子不能把她休棄。”
皇帝回頭對公主說:“這事情辦不成了。”
贫贱之交不可忘,糟糠之妻不下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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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은 이렇게 친구 간에 부부간에 의리와 정을 참으로 진실하게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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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5 05:55
2018.09.05 06:10
그래요?
당시 부모님이 정해 준 아내야말로 조강지처이었는데,
말이 안 통한다고 신여성과 교제 내지 결혼을 하였군요.
그럼 시부모를 일심으로 모시던 조강지처는 소위 소박을 받았어요.
나쁜 놈들, 저희가 얼마나 많은 신학문을 받았기에 근본을 버리는가?
우리 아버지는 미국교육을 받으셨고, 어머니는 한문만 배우다가 시집을 오셨는데,
두 분 사이에 말이 막히고, 소통이 안된다는 걸 못 보았습니다.
그 당시 한국 남자들의 간교한 행태였지요.
2018.09.05 10:00
교육 수준이 높은 신여성들은 고향에 본마누라가 없는 같은 또래의 교육받은 남자를
찿기 어려워서 올드미스가 되는 사람들이 많 았다고 합니다.
2018.09.05 18:58
그 당시 신여성은 특수계급이었겠군요.
보수적인 아버지는 딸을 신교육 받으라고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이 신여성이 여성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지요. 그런데 그들은 사명이 있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열악한 상태에 있었던 여성 일반을 계몽시키고 교육시켜서
여성 인권을 찾도록 할 위치에 있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신교육 받았던 남성과 교류하고 교제하는 것은 자유겠지만, 그러자고 신여성이 된 건 아니란 말입니다.
그들은 사회와 후세에 남길 역사적인 사명감을 갖고 그 방향으로 매진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1899년 생이신데, 소녀시절에 국한문으로 된 많은 책자가 나와서 신교육을 받고 싶었기에
일본 동경에 가서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 당시 그런 제도가 없어서 소녀의 꿈을 이루지 못하셨지요.
어머니는 항상 얘기 하시기를, 톨스토이의 부활, 해왕성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야기) 그리고
안남 망국사(월남)을 읽고 너무나 감명이 깊었다고 하셨지요.
2018.09.17 20:07
2018.09.17 20:10
슬프다, 조강지처여. 인간이 되어서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우정은 일생동안 무슨 일이 생겨도 변치 않겠소.
조선의 여인들은 남편이 죽어서 한번 과부가 되면 재가 할수 가 없었 습니다. 1894년
동학군은 호남지방 각 고을에 집강소를 만들 고 개혁을 실시 했고 한양에서는 일본과
개화파 들이 개혁을 추진 했 습니다. 그 중 중요한 아젠다가 과부 재가 허용 이었 습니다.
400년 동안 묶은 적폐의 청산이었습니다.
개혁 이후 물밀듯이 몰려 오는 근대 사상은 남자들이 서울, 일본등으로 공부 하러 가기 위해서
아내 곁을 떠나게 했 습니다. 어렸을 때 자기 보다 어린 남편 얼굴도 못 보고 시집에 들어온
아내는 시집에 남아 집안일 농사 등을 지으며 멀리 떠난 남편이 돌아 올 날만을 기다렸 습니다.
때로는 혼자 아이들 까지 길러야 했 습니다.
그러나 근대문화에 푹 빠진 남편은 말이 통 하는 신 여성과 교제 하게 되었고 본 부인은 구식이어
서 더불어 어울릴 수 없는 사람으로 치부 해 버렸 습니다. 20세기말 21세기 초의 조선 남자들
뿐만 아니라 중국 남자들이 본 부인과 교육 수준이 높은 새 부인을 가지는 일이 비일비재 했 습니다.
아직도 완전한 남녀평등을 이루 기는 갈길이 멀지만 지금의 여성의 지위는 굉장히 많이 향상 되었
다고 생각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