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7 02:43
사진가 김희중, 마지막 사진전은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기사입력2019.03.13. 최종수정2019.03.14.
[서소문사진관] 동양인 최초 내셔널지오그랙픽 편집장 지낸 에드워드 김 별세
사진가 고 김희중 상명대 교수의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사진가 김희중(1940~2019) 전 상명대 석좌교수가 10일 별세했다. 향년 79세. 김 교수의 빈소는 경기도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고인의 뜻에 따라 부고는 내지 않고 친지와 지인들에게만 알렸다.
사진가 고 김희중 상명대 교수의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고인의 빈소는 사진가로서의 삶을 돌아볼 수 있도록 꾸몄다. Good Bye My Life라는 제목으로 편집한 사진들은 고인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들로부터 취재 활동, 대표작까지 두루 포함한다.
사진가 고 김희중 상명대 교수의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빈소 내부는 고인의 성장 과정부터 취재 활동을 하는 모습까지 흑백사진을 전시했다.
사진가 고 김희중 상명대 교수의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중고교시절부터 대학 시절까지.
사진가 고 김희중 상명대 교수의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젊은 시절.
사진가 고 김희중 상명대 교수의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카메라를 들고 온 세상을 누비던 시절의 모습.
사진가 고 김희중 상명대 교수의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수많은 취재현장에서 고인이 목에 걸었던 비표들.
김희중김희중은 중고교시절부터 '사진 천재'로 소문이 났다. 고교 시절인 50년대 영등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안양까지 가서 신작로를 걸으며 만난 할아버지들을 촬영했다. 고장 나서 길가에 서 있던 트럭에 올라가 기다렸다가 할아버지들이 다가왔을 때 셔터를 눌렀다.
사진가 고 김희중 상명대 교수의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01190313김희중의 이력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미국의 세계적인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일한 것이다. 1980년 10월 그는 기획위원 겸 편집팀장(Senior Editor)이 됐다. 임원급이다. 기획 회의는 제작 방향을 정하고 기획안의 승인과 진행을 총괄하는 곳으로 회사에서는 '별들의 모임'이라고 불린다. 김희중은 그중에서도 권한이 가장 광범위한 편집팀장이 되었다. 표지사진은 1974년 가을 고인이 남태평양에서 촬영한 것이다.
김희중김희중은 1973년 북한을 취재했다. 서방 기자로는 최초였다. 그가 직접 쓴 글과 사진은 1974년 8월호에 실렸고, 김희중은 '미국 해외기자단(Overseas Press Club) 최우수 취재상을 받았다. 퓰리처상에 버금가는 권위 있는 상이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100년 역사에서 사진으로는 수차례 그 상을 받았지만, 기사로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김희중김희중의 북한 취재 사진. 1973년 군사훈련을 받는 학생들을 위문하는 취주악대 소녀들.
김희중김희중은 국내 기업인 삼성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며 삼성 사보를 제작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브라질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촬영한 삼성 마이마이 광고사진. 삼성의 기업 이미지를 생각하면 파격적인 사진이었지만 이건희 회장은 "좋은 사진"이라고 말하며 직접 채택했다. 이 사진은 1990년 가을 삼성 사보 가운데 대형 센터 폴더로 게재됐다.
사진가 고 김희중 상명대 교수의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빈소의 고 김희중 교수. 본인이 직접 고른 영정사진이다.
편히 쉬세요. 최정동 기자 (사진과 글)
"Good bye My Life!"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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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7 02:52
2019.07.07 07:20
아--돌아 가셨네요--같은 campus 장례식장에서 이런 ---- -못 가보았네요.
1957-1958 년 중학교 1 -2 학년 가을인가 , 가을 교내 체육대회가 끝난 후, 화신 백화점 5층인지
6 층인지 에서 사진 전시회를 한다고 하는 소문이 났다.
고 1년인가 2년차 선배 중에 사진을 기가 막히게 잘 찍는 당시 선배의 개인전이라고 하였다.
전시장에 들어서는데 ,첫번째 작품이 close up 된 나의 얼글과 까까머리 한반 친구들이 환호 하며
응원 하는 모습의 close up 사진이었다.
당시 별명이 "똥구루마" 라는 선배 응원단장 이 리드하는 337 박수며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분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60년 대 말인가 70 년대초, 그는 당시 남한과 철의 장막속 북한을 천신만고 끝에 입국,
남북을 비교하는 사진을 National Geographic 특집으로 게재한적이 있었다.
그중의 한 사진이 K 고교 수업사진이었는데 몇년전에 그사진에 나왔던 학생들의 현재 모습을
어느 신문 기사에서본적이 있었다. 그 사진 에는 지금 미국에 있는 공대 출신 후배도 있고,
의대 출신 후배도 있었다.
한 20 여년전 이분의 사진 회고전이 서울에서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나는 물론 미국에 있었음으로, 조카에게 전화로 전시를 꼭 가보고 작품을 하나 구입하도록 하였다.
물론 내 얼굴이 나온 사진이 남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유감 스럽게도---
도록에서 맘에 들었던 것이 위의 사진 " 잔치집 가는 길??--1958 년 수원 , 과 " 봉은사 가는길" 이었는데,
"봉은사 가는 길"을 구입, 지금 미국 집 벽에 걸어 놓았다. 이 평화롭고 한적하던 시골 강가의 밭들이
지금 KOEX 건물 또 제일 비싼 아파트 "아이파크"자리이다.
격세지감--
한시대가 또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2019.07.07 08:25
"똥구루마"는 본인의 classmate (55)입니다. 그의 이름은 "전원길"이지요.
무슨 이유로인지 몰라도 우리 의과대학시절에 한번 만난후 조금후에 일찍 서거했지요.
세월이 많이 갔지만, 허나 아직도 그를 기억하시니...
윗 그림은 김희중 동문도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꼈던 사진입니다.
지금은 찾을수 없지만, 그가 이 사진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어요.
(윗글의 신작로를 걸어기는 할아버지들 사진과 함께, KG website에 본인이 올렸던).
여기에서 다시보니 감격스럽군요.
2019.07.07 12:15
Saddened to hear he passed away!
I recall when I met him first at Nam-Guan, south building across Bon-Guan,
the main building at Kyunggi HS compound soon after KG moved back to Wha-Dong.
My high school buddy, Han YuDong organized SAJIN-BAN, photo group as an extracurricular activity
after the school hours and he occasionally invited a professional photographer to give a class,
where I met him first. I remember he was a bit smaller than average and followed Han YuDong around
and took an overnight excursion to the countryside to take photos with him.
Soon, we heard he is such a genius photographer and had a private exhibition as well.
I also remember he was the only one who had such valuable camera, Rolleicord, double lens reflex,
among the many young kids to become envy but sure did he deserve to have it
to become a worldly famous photographer after all.
With condolence,
BB Lee of '63 Class
김희중 고교 동문은 원래 본인보다 한해 먼저 입학했지만 도중에 일년묵는 관계로 본인과
같은 class로 졸업했읍니다. 그는 원래 조용한 내성적 성격이어서 본인과는 친한사이는 아니였지만
나는 언제나 그를 기억하고 있었지요.
특히 그의 Nartional Geographic에서의 활약으로 본인이 그의 일생전기 (미국과 한국을 포함하는)를
연속으로 한참동안 고교 website에 연속기재한적도 있었지요.
아마 이것이 나로서 마지막 기재가 될것같습니다.
무슨병으로 서거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죽기전에 자기의 장례식 준비와 그의 마지막 unique message를
예외적으로 우리에게 남기는 시간, 용기, 그리고 그의 창조적 지혜를 아낌없이 쓸수있었던 것 같군요.
우리 모두 죽기전에 그러할 시간이 있다면 그의 example을 따르는것이 어떨가 합니다.
그의 마지막 "안녕 인사" (위의 마지막 사진)가 여러가지 이유들로 나의 가슴을 찡하게합니다.
깊은 뜻이 있는 그의 한마디를 본인이나 우리 모두 명심해야할 것으로 생각하지요.
과연 천재성인 그의 인생과, 거기에 따르는 외로움의 극복, 떠나는 마당의 마지막 준비에
다시 감명을 느끼며 나는 고인의 명복을 삼가 비는 바입니다.
과연 그가... (as he said)
한번 뿐인 인생을 후회없이 살았고, 아낌없는 행복을 누렸을가?
Why is he wishing us such life?
Having known his later life in Korea fairly well,
I wish that his fatherland (Korea and its people) gave him as much a happy life
as his professional life in America.
Anyway, my sincere respect goes to him for the courage of going back home to finish his life.
Might he have been better off in America? I can not erase that question in my mind.
He's gone and done for now but we are the next to leave.
Please see what you would you do at your own exit do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