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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21.


도박장 청소부 <상>


[중앙일보]
입력 2006.10.01


일자리 찾아 라스베이거스 행, 하루만에 소지품 다 도둑맞아

텍사스 주립대학에서의 일년은 그렇게 지나갔다. 궁핍과 불안의 나날이었다. 레스터의 권유로 저널리즘 공부를 시작했지만 미국의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보수적인 언론사에 외국인들이 발붙이기는 거의 힘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는 한국인이었다. 당시 미국인에게 한국은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는, 세계 최저 수준의 나라였다. 공부를 하면서도 끝없이 회의가 들 수밖에 없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될 무렵 문제가 발생했다. 장학금 수여 재심사에서 탈락한 것이다. 장학금을 계속 받으려면 모든 과목이 A학점을 유지해야 하는데 성적이 모자랐다. 아직 영어 실력이 불완전했고, 저널리즘은 생소한 학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학교는 마치고 봐야 했다. 그러자면 돈이 필요했다. 다른 학생들도 방학이 되자 모두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최저 일당은 10달러 정도였다. 그런데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가 들렸다. 도박장에서 딜러를 하면 20달러의 일당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작정 버스를 타고 미국 최대의 도박도시 라스베이거스로 갔다.

네바다 사막에 들어선 환락도시 라스베이거스는 이미 틀이 잡혀 있었다. 나 같은 신출내기가 일자리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룻밤 머물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네바다와 캘리포니아 경계에 있는 타오(Tahoe) 호숫가에 새로운 도박 타운이 들어서고 있다고 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타오 호수는 경관이 빼어났다. 아름다운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 곳에 도박장을 갖춘 대형 리조트 호텔들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 사물함에 가방을 넣어두고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준비 없이 서둘렀는지 곧 알게됐다. 처음으로 들른 도박장에서 딜러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면허를 내 놓으라고 했다. 면허라니….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알고 보니 도박장 딜러는 6개월간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과해야 면허를 딸 수 있는 일이었고, 도박장에서 일당 20달러를 받을 수 있는 일은 딜러뿐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천리나 떨어진 네바다주까지 무작정 달려간 것이다.

낙심천만이었지만 일단 타오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로 하고 허름한 숙소를 구한 다음날 아침에 정류장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날벼락 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물함이 밤사이 모두 털려버린 것이었다. 바닥에 어지러이 널린 물건들 속에서 텅 빈 가방을 찾아냈다. 옷가지와 책들, 그리고 책갈피에 꽂아 둔 25달러가 사라져버렸다. 그 돈은 전 재산이었다. 나는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당황스럽고, 어이없고, 화가 났다. 다리가 떨리고 식은땀이 났다. 겨우 숙소로 돌아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삐걱거렸고 시트는 더러웠다. '내가 왜 이런 지경에 처했을까.' 세상 물정 모르고, 어리석고, 운도 없었다. 스스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차비조차 없으니 타오 호수에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앉은 채로 꼬박 밤을 새우며 어떻게 위기를 헤쳐 나갈 것인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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