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첫 취재 사진이 실린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지면. |
회사는 취재를 위해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막을 취재하기 위해 벤츠 자동차에 특수 차량을 주문했고, 항공 촬영이 필요하면 세계 어디서나 비행기를 빌렸다. 임대가 불가능하면 임시로 구입하기도 했다.
장비도 최신 제품을 사용했다. 구할 수 없는 장비는 사내 제작팀이 직접 만들어 제공했다. 그들은 특수 카메라나 렌즈도 만들어 냈다. 007영화에서 제임스 본드가 특수 장비를 사용하듯 '내셔널 지오그래픽' 기자들은 세상에 하나뿐인 장비로 자신만의 사진을 촬영했다.
회사는 독자의 신뢰를 생명처럼 여겼다. 완성된 기사는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해 철저한 검증을 거쳤다. 조사부 직원이 취재원을 다시 만나 확인하고, 사진은 조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전문가로부터 자문을 받았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성경 다음으로 믿을 만하다"는 평가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취재 활동을 무한정 지원하고 기사의 내용을 철저히 검증하는 것은 모두 독자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입사했는데, 나한테는 도무지 일이 주어지지 않았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러려니 했는데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흘러도 일을 맡기지 않는 것이었다. 사진부장한테 이야기했더니 기다리라고만 했다. 지루하고 불안했다. 일다운 일을 해보지도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돌아가는 걸 관찰했더니 '기획회의(Planning Council)'라는 것이 있었다. 기획위원들은 기사와 사진의 취재.편집.탐사기획 등 주요 파트의 베테랑이었으며 세상 돌아가는 걸 손금 보듯 하는 사람들이었다. 기획회의는 기사 소재를 선정하고 할당하는 기구였고 기자가 취재를 하려면 그곳에서 기획안이 통과돼야 했다. 회의실에는 한쪽 벽면을 완전히 덮는 대형 세계지도가 있었는데 진행 중인 주요 취재의 내용.담당자.진행과정 등이 표시되어 있었다.
기획회의에 기획안을 제출하기 위해 소재를 찾기에 몰두했다. 먼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경향을 파악하기 위해 1888년 창간 이후 출판된 잡지를 모두 탐독했다. 다 보고나니 걱정이 앞섰다. 엄청난 사진과 기사들이 지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과연 내가 이런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용기를 내 기획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겁고 거창한 주제를 다뤘다. 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신참인 나는 부담 없고 간단한 기획안을 내야 했다. 그래야 회사에서 일을 맡길 것이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 쿠즈타운의 '아미시 피플(Amish People)' 축제는 그런 기준에 맞는 기획안이었다. 그들은 독일 이민자 종교집단으로 자신들만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살았다. 기획안은 통과되었고 의욕적으로 취재를 마쳤다. 사진은 '시적이고 정감 어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데뷔작으로 나는 6개월 만에 신참의 미칠듯한 지루함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