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준재 선생님, 감사합니다.
순한 양이 되려고 양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세상 잠깐 있는 동안 하루를 한눈 팔지 않고 깨어있으려 합니다. 마음뿐인 것이 되더라도.
밖으로 배앝기보다는 속으로 삼키고
남을 헐띁지말고 장점을 칭찬해주며
딛고 일어서고 싶을 때 옆사람 일어서게 엎드려 내 등을 내어주고
자신이 행복하려면 남을 받들고
세상에 이름 알리고 싶을 때 홀로 묵상하고
들리는 신음소리 외면 말고 작은 선행 부지런히
우리는 홀로 세상에 있지 않는 것
가정, 사회, 국가, 인류
땅에 태어난 보람, 조금씩 베푸는 것
베품은 얼어붙은 마음을 뜨겁게
훈훈한 마음 옆사람 따뜻하게 하고
온 누리 서로 배려하며 순한 양이 되고자
저희 여의도동 본당, 합창단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e0npKlXQPUw
乙未年 Jan. 16, 2015 眞亭 金 聖 心
My Thoughts for the 'Year of Sheep' 2015;
http://jinjuhighschool.com/free_board/46620
2015.01.15 10:57
2015.01.15 11:31
방준재 선생님께서 올리신 글로 주렁주렁 감자 딸려나오듯 옛 이야기도 나오고 이 웹은 좋은 곳입니다.
예날에는 치유될 수 있어도 아쉽게 모두들 세상을 뜨셨습니다.
저의 형제자매, 9남매중 셋은 유아시절 모두 갔는데, Diphtheria, Typhoid, Dysentery 로 생명을 구하지 못했지요.
어머니가 두고두고 울고 계셔서 저는 오빠 동생 생각보다 어머니 우는 모양이 더 싫었습니다.
저희 경기여고( 당시는 경기고녀 라고 --) 출신 선배님 성함을 알아도 될까요. 저는 51년도 졸업 39기입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감회보다는 정말 날들이 빨리 지나는구나 하는 생각뿐입니다.
그러나 해마다 그 해당되는 동물들을 생각하며 삶을 생각하게 됩니다.
정관호 선생님, 옛 일을 회상하시는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건강하시고 즐겁게 지내십시오.
2015.01.15 18:40
Agnes KSS, sunbaenim.
It's been pleasure to see you on our site, always.
And now I see you have many talents - even drawing!
Peace on Earth - for all of us, all of earthlings on this planet.
http://omidsafi.religionnews.com/files/2013/12/peace-on-earth.jpg
2015.01.15 19:51
방준재 선생님,
감사합니다.
바로 이런 어린아이가 평화의 상징입니다.
2015.01.15 21:49
2015.01.15 22:29
정관호 선생님,
귀한 사진과 함께 옛 어른의 얘기 잘 들었습니다.
노마란 이름이 귀엽게 들립니다.
鄭寶重 선배님, 저희 고등학교 28기 명단에 계십니다. (한문함자가 맞으시는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1921년생의 셋째 언니가 있었습니다. 정확한 교명은 모르겠는데 동경의 약학전문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시에 대학들을 xx전문이라 불렀지요.
우리나라도 보성전문 (고려대 전신), 연희전문 (연세대학 전신) 등.
흑백사진을 보면 옛 추억에 잠깁니다.
어머님, 누님들깨서 연세가 저희 집과 비슷하여 말씀하시면 저도 다 고인이 되신 그 식구들이 생각납니다.
커다란 교자상 크기의 한국의 소반 두개를 나란히 하고 일가 대가족이 밥을 함께 먹은 일 등 떠오르지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2015.01.16 01:21
2015.01.16 01:56
저희 언니는 첫번 댓글에 올린 대로 동경의 약전을 들어가자 얼마 안 있다가 방학에 한국에 나온 것을
아버지가 나이가 10년 차이가 있는 변호사에게 시집을 보냈습니다. 그후 얼마있다가 평양에 가서 살았는데
형부는 사상범으로 몰려 소련에가서 강제노동 한다 소리를 들었는데 아직도 확실한 소식을 모릅니다.
조카딸 하나 있었는데 언니는 세상 떴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남북이 갈린 슬픔들이 우리나라에는 비극입니다.
저의 둘째 언니도 己未年 3월19일생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독립선언서 두 통(하나는 파리 강화조약에 보내는 것, 하나는 윌슨 미국대통령에게 보내는 것)을 가지고 만주에 가서 김 OO의 집에 전달하고 돌아오다 신의주 기차역에서 체포되어 감옥살이 18개월을 하셨다는 겁니다.
어머니에게 못 돌아오고 죽을지 모르겠다고 이별하고 가셨다던데 감옥살이라도 살아계셔서 세살 아이와 간난쟁이를 데리고 매일 서대문형무소에 아침저녁 사식을 넣었다고 합니다. 지금 그 형무소 자리가 역사박물관이 되어 당시 사상범이 들어갔던 일본 다다미 한장쯤 되는 크기의 공간감방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 지인이 그해에 3월 19일에 출생한 둘째 언니를 충성충짜, 忠을 나누어 中心이라고 이름이 되어 그때부터 나온 딸들이 모두 心이란 글짜가 붙었습니다. 저는 일생 心자가 이름에 들어가 있는 것이 싫었습니다.
두분이 계룡산 자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에 묵묵히 묻혀계십니다.
두 언니 얘기를 글로 쓰니 길게 늘어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정관호선생님!
2015.01.16 02:58
2015.01.16 05:10
2015.01.18 06:40
2015.01.28 08:13
No. | Subject | Date | Author | Last Update | Views |
---|---|---|---|---|---|
Notice | How to write your comments onto a webpage [2] | 2016.07.06 | 운영자 | 2016.11.20 | 18193 |
Notice | How to Upload Pictures in webpages | 2016.07.06 | 운영자 | 2018.10.19 | 32345 |
Notice | How to use Rich Text Editor [3] | 2016.06.28 | 운영자 | 2018.10.19 | 5922 |
Notice | How to Write a Webpage | 2016.06.28 | 운영자 | 2020.12.23 | 43838 |
300 | 이티오피아 선교사 [6] | 2015.01.25 | 노영일*68 | 2015.01.25 | 1605 |
299 | [김희중 Essay] 이북 취재 - "같이 혁명합시다" | 2015.01.21 | 운영자 | 2015.01.21 | 972 |
298 | [김희중 Essay] 이북 취재 - 푸에블로 호 | 2015.01.21 | 운영자 | 2015.01.21 | 974 |
297 | [김희중 Essay] 이북 취재 - 전쟁의 먹구름 [3] | 2015.01.21 | 운영자 | 2015.01.21 | 1236 |
296 | Our small reunion [2] | 2015.01.18 | 정관호*63 | 2015.01.18 | 1892 |
295 | [김희중 Essay] 이북 취재 - 호텔 '연금' | 2015.01.16 | 운영자 | 2015.01.16 | 940 |
294 | [김희중 Essay] 이북 취재 - '수령님'의 나라 [1] | 2015.01.16 | 운영자 | 2015.01.16 | 990 |
293 | [김희중 Essay] 이북 취재 - 뒤로 가는 트랙터 | 2015.01.16 | 운영자 | 2015.01.16 | 881 |
» | 어린 양 2015 [12] | 2015.01.15 | 김성심*57 | 2015.01.15 | 1371 |
291 | 어머니 [4] | 2015.01.12 | 김성심*57 | 2015.01.12 | 1170 |
290 | 중학교 때 [11] | 2015.01.02 | 김성심*57 | 2015.01.02 | 1606 |
289 | [김희중 Essay] 첫 취재 | 2014.12.31 | 운영자 | 2014.12.31 | 1013 |
288 | [re] [김희중 Essay] 사진편집인상 [3] | 2014.12.31 | 운영자 | 2014.12.31 | 1018 |
287 | [김희중 Essay] 대학원 진학 | 2014.12.25 | 운영자 | 2014.12.25 | 1178 |
286 | [김희중 Essay] 포토저널리즘 | 2014.12.25 | 운영자 | 2014.12.25 | 1228 |
285 | [김희중 Essay] 내셔널 지오그래픽 [1] | 2014.12.25 | 운영자 | 2014.12.25 | 1175 |
284 | [김희중 Essay] 텍사스 카우보이 [1] | 2014.12.18 | 운영자 | 2014.12.18 | 1227 |
283 | [김희중 Essay] 도박장 청소부 <상> | 2014.12.18 | 운영자 | 2014.12.18 | 1014 |
282 | [김희중 Essay] 도박장 청소부 <하> [2] | 2014.12.18 | 운영자 | 2014.12.18 | 1113 |
281 | [김희중 Essay] 뉴욕의 노숙자 [2] | 2014.12.06 | 운영자 | 2014.12.06 | 1201 |
참 아름다운 어린 양입니다.
그리고 글은 이와 똑같이 아름다운 생각이십니다.
이렇게 좋은 선배님이 오래오래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란 말이 어폐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70후반기에 진입한지 얼마 되었습니다.
선배님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경기고녀를 나오셨다구요?
제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은 연로하셨고, 누님이 다섯이었고, 위로 두 누님은 이미 시집가셔서 저의 조카를 기르고 있는 중이었지요.
한분은 진명-이화 보육과, 한분은 숙명-동경여의전, 한분은 경기고녀-여의전, 막내 순이누나는 숙명-요절, 그리고 한분 누님은
소학교 1, 2학년 때 학교가 끝나면 집에서 숙제-공부를 하지않고 식모아이와 싸움만 한다고 아버지께서 재 학교보내지 말고
빨리 시잡보내라고 하셔서, 멀쩡한 누나를 일찍 시집을 보내셨지요. 저는 워낙 늦게 낳아서 가족사진에 끼지도 못하였습니다.
넷째 노마누나가 재원이었고, 운동(Skating선수였다지요)도 잘하고 음악도 잘했는데, 부친께서 그런 건 안되고 의사나 선생이나
되라고 하셔서 혜화여의전에 갔다가 졸업 6개월을 앞두고 장질부사로 사망하였지요. 이런 일이 생각나서 누님들의 일화를 썼습니다.
선배님 항상 보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