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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29.

호텔 '연금'

[중앙일보]입력 2006.10.12

'오지 말라'는 북측 전보 무시하고, 1973년 9월 모스크바공항에 내려
 
1973년 가을의 모스크바 붉은 광장과 바실리 성당. 필자가 일주일간의 호텔 ‘연금’에서 풀려난 날 촬영했다. 

1973년 9월 중순, 텅 빈 모스크바공항 대합실에 혼자 서 있었다. 같이 내린 승객들은 모두 빠져나갔다. 막 해가 진 창 밖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미국을 떠날 때 북한 측에 9월 중순 모스크바에 도착하겠다고 연락했고, 파리를 떠날 땐 며칠 몇 시에 공항에 내릴 것이라고 다시 알렸었다. 하지만 내가 출발한 것을 안 북측은 "시기적으로 안 좋으니 여행을 중단하라"고 연락했었다. 난 그 연락을 못 들은 척하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이다.

창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파리를 떠날 때부터 불안했는데 막상 공항에 혼자 남게 되자 후회감이 밀려왔다. '내가 너무 무모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닌가. 이런 꼴로 회사에 돌아가게 되면 내 체면은 뭐가 되지'. 경유비자라서 혼자서는 공항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내 주위에는 취재 때마다 가지고 다니는 10여 개의 크고 작은 알루미늄 가방이 놓여있었다. 카메라와 렌즈, 필름과 옷가지가 가득 든 것들이었다. 30분쯤 그렇게 서 있었다. 시간이 멈춘듯 했다. 그때, 멀리 있는 기둥들 사이로 서성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동양인들이었다. 한동안 나를 살펴보더니 서서히 다가왔다. 한 사람이 말했다.

"혹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오신 김 선생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조선대사관에서 나왔습니다. 오지 말라는 전보를 받지 못했습니까?" "유럽 취재 다니느라 못 받았습니다."

일단 안도했다. 국제 미아는 면했기 때문이다. "숙소는 정했습니까?" "아뇨." 그는 한참 망설이다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로시아호텔로 나를 데려갔다. 호텔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컸다. 객실이 무려 3200개였다.

방을 나가며 그가 말했다. "푹 주무시고 내일 떠나십시오. 평양에서는 선생을 보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를 붙들고 사정했다.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그냥 갑니까? 편지를 써줄테니 평양에 전해만 주세요." 그는 마지못해 다음날 와서 밤새 쓴 편지를 가져갔다. 언제 연락이 올지 몰라 외출도 못하고 밤낮을 기다렸다. 그런 감옥이 없었다. 창문을 열면 붉은 광장과 예쁜 바실리성당이 보였다.

사흘 만에 나타난 그는 "가망성이 없으니 빨리 돌아가라"고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한 번 더 편지를 쓰겠다고 했다. 내가 딱해 보였는지 그는 "마지막으로 전해 주겠다"고 했다. 다시 밤새 편지를 썼다. 불안하고 짜증스러운 나흘이 또 흘렀다.

호텔방에 갇혀 지낸 지 일주일째 되던 날, 마침내 대사관 간부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나를 옆방으로 안내했다. 그 곳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그들은 내가 호텔에 도착할 때부터 옆방에서 대책반을 가동한 게 분명했다. 책임자가 말했다.

"아무리 가라고 해도 안 가시니 평양에서도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구경이나 하자고 합니다. 평양에 이틀간 머물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속으로 환호했다. 이틀이 될지, 두 달이 될지는 가봐야 아는 일이었다. 그들은 내 행색을 살피며 수군거리더니 이발을 하라고 했다. 나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장발을 하고 있었다. 머리야 다시 기르면 된다. 다음날 모스크바 시내에 나가 북한 사람들처럼 머리를 짧게 깎았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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