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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4.

전쟁의 먹구름

[중앙일보] 입력 2006.10.19

금강산행 기차에 무장 군인 가득 - "김 선생, 사흘 내 북한 떠나세요"

1973년 군사 훈련을 받고 있는 학생들을 격려하는 취주악대 소녀들.
남북한은 1991년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나란히 회원국이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진통이 있었다. 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통일외교정책'을 발표했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같은 날 김일성은 기다렸다는 듯 '조국통일 오대 강령'을 발표했다. '고려연방공화국 단일 국호에 의한 유엔가입'을 주장했다. 남한은 분리 가입, 북한은 동반 가입을 주장한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해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남북한 분리 가입 안건에 대한 찬반 투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북한은 분리 가입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민족이 영원히 갈라지고 분단이 고착화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는 이런 문제로 남북 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북한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통일'을 입에 달고 있었다. 공장 근로자도, 들판의 농부도, 유치원생조차도 통일을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그들은 곧 통일이 된다고 확신했다.

"'곧'이 언제냐, 10년이면 되느냐?"고 물어봤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못 한다"고 했다. "그러면 5년?" "그것도 길다. 1년 안에 된다"고 말했다. "1년 안에 된다면 전쟁이라도 하자는 말이냐?"고 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전쟁이 아니라 남쪽에서 고통 받는 부모.형제를 해방시키러 내려가는 것"이라고 했다.

기차를 타고 금강산으로 가면서 가슴 철렁한 장면을 봤다. 한국전쟁 때 본 모습이었다.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객차에 가득하고, 화물차에는 위장망으로 가린 대포와 탱크가 칸마다 실려 있었다. 그런 기차가 한 둘이 아니었다. 모두 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박오태 조평통 부장은 "작전 중"이라고 간단히 말했지만 작전과 실전은 분위기가 다르다. 내 직감엔 전쟁 준비를 위한 이동이 분명했다.

금강산에서의 마지막 날 밤, 박오태가 말했다.

"김 선생, 사흘 안으로 떠나셔야겠습니다." 어느 정도 취재는 됐지만 못 본 곳이 많았다. 특히 백두산은 꼭 가보고 싶었다. "아직 취재할 것이 많습니다. 사흘은 너무 짧아요." 평소 온화하던 박오태가 정색을 했다.

"김 선생, 사흘 안에 떠나지 않으면 영원히 못 떠날 수도 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남쪽으로 향하던 군인들, 몇 달 안에 통일이 된다는 이야기가 머리를 스쳤다. 더 묻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나의 북한 취재는 28일 만에 끝났다.

북한은 그때 전쟁 준비를 끝내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 같다. 군사력이 남한보다 우월했고,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패한 뒤 막 철수해 넋이 빠진 상태였다. 남한은 '10월 유신'으로 혼란스러웠던 반면 북한은 안정적 체제 아래 통일에의 열망으로 들끓고 있었다. 게다가 북한이 극력 반대하는 남북한 유엔 분리 가입이 논의되고 있었다. 나중에 드러났지만 북한은 휴전선 밑에 땅굴도 파고 있었다.

그해 11월 유엔 총회는 남북한 문제 논의를 일단 연기했다. 그뒤 흐지부지 됐지만 만약 분리 가입안이 통과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북한이 밀고내려왔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남한과 미국이 발등의 불을 끄느라 정신없던 73년, 한반도에는 전쟁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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