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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32.

"같이 혁명합시다"

[중앙일보]입력 2006.10.17

사흘간 북한 역사·사상 가르친 뒤, "김 선생은 혁명정신이 있는 사람" 
 
북한 시범 집단농장의 휴식시간. 김일성은 이곳을 62차례나 찾았다고 한다.

취재는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언제 북한을 떠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 허락된 이틀은 벌써 넘겼지만 내가 요구한대로 두 달간 머물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주제별로 취재를 했다. 교육 현장을 둘러보고, 다음에는 산업계를 훑어본다는 식이었다. 그렇게 해야 언제 떠나더라도 최소한 '북한 교육'이나 '북한 산업현황' 같은 제목으로 기사를 작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사회과학부 소속 인사가 숙소로 찾아왔다. 공화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과 사상을 알아야 한다며 강의를 들으라고 했다. 가급적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순순히 응했다. 강사는 일제시대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장황하게 찬양하고, 자본주의는 빈부의 격차로 인해 인간이 대접받지 못하는 제도라고 강조했다. 교육은 사흘간이나 계속됐다.

마지막 날, 교육을 끝낸 강사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김 선생은 혁명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와 같이 혁명 과업을 완수합시다."

깜짝 놀랐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구나'.

사실 북한에는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오침이나 학생들을 환영행사에 동원하는 것이 그랬다. 특히 김일성 광고를 외국 귀빈에게 보여준다는 이야기에는 민족적 수치심을 느꼈다.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난 한민족이었다. 눈치 보지 않고 거침없이 내 생각을 말했다.

북한 사람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내가 지적한 것들이 다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그들은 그런 나를 혁명 동지로 포섭하려 한 것이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떨리는 마음을 감추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것도 좋겠지요. 하지만 난 이미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강사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사가 다시 물었다. "긴 여행을 하자면 돈이 많이 들 텐데 회사에서 어떻게 해 줍니까?" 돈으로 회유를 시도한다는 걸 직감했다. 쐐기를 박아야 했다. "회사에서 월급을 충분히 주고 출장비도 무제한 지원합니다. 돈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비로소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입바른 소리는 가급적 자제했다. 오해를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북한에 있는 동안 회사로 엽서를 몇 차례 보냈다. 별 내용이 없는 듯했지만 짧은 글 안에는 회사와 정해둔 암호가 숨어 있었다. 첫 글자가 S.A.F.E로 시작되는 단어들이 문장 속에 있으면 '안전하다(SAFE)'는 뜻이었다. 그런 방법으로 '취재는 원활하다(GOING WELL)'는 소식도 전했다. 혁명 동참 권유를 어렵게 뿌리친 뒤 'SAFE' 신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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